동행(2)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24:13-17
1940년대 미국 기독교계에는 두 명의 젊은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우리가 잘 아는 빌리 그래함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보다 더 논리적이고 지적으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찰스 템플턴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실제로 함께 청년 복음 전도 집회를 인도했고,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가슴을 울리고, 찰스 템플턴은 머리를 깨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길은 갈라졌습니다. 리 스트로벨의 저서 <특종 믿음 사건>라는 책에 의하면 어느 날 템플턴은 <라이프(LIFE)> 잡지에서 북아프리카의 극심한 가뭄 속에서 죽은 아기를 안고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의 사진을 보았답니다. ‘이 여자에게 필요한 건 단지 비뿐이었는데, 사랑과 보살핌이 있는 창조주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를 가졌다고 합니다. ‘겨우 비만 내리면 되는데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수년간 쌓인 질문과 회의 속에서 그는 점점 복음을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검증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되었고, 지옥을 만든 사랑의 하나님은 더 이상 정직하게 믿을 수 없다며 목회 사역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성적 질문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성경의 기록은 역사적으로 사실인가?"와 같이 머리로 이해하려는 이론적인 질문입니다. 둘째는 실존적 질문입니다. 나의 '삶과 존재'를 걸고 던지는 질문입니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과 의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나에게 이런 암이 생겼는가?" "전능하신 분이 왜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기를 보고만 계시는가? (템플턴의 질문)"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졌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즉, 실존적 질문은 신의 존재 여부를 넘어 "그 신이 과연 믿을 만한 분인가? 내 고통에 관심이 있는 분인가?"를 묻는 영혼의 울부짖음입니다.
템플턴은 실존적 질문을 통해 내 '이성'을 '하나님'보다 높은 재판석에 두었습니다. 인간의 짧은 지혜로 하나님을 심판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템플턴은 "고통이 있으니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품게되는 실존적 질문을 십자가 아래로 가져가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는 이 고통의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 십자가를 보니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고난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십자가로 해석하지 못했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절망의 길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바로 곁에서 동행하시는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고 그럴 수 있습니다. 언제나 어떤 일이 일어나든 어디서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예수님은 절망의 길에서도 먼저 다가오시는 동행자이십니다(15-17).
본문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이 말씀은 예수님과의 동행이 어디서부터 먼저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 나오는 제자 한 사람은 글로바이고 다른 사람은 성경이 이름이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13절에 보십시오. 그날입니다. 여기서 그날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당일이자, 안식 후 첫날입니다. 구속사적으로 이 날은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지고 '새 창조'가 시작된 우주적인 승리의 날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떠나던 날입니다. 22절을 보세요.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고 이제 끝났다고 절망하고 약 11~12km 정도의 거리인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려가면서 무엇을 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체포, 재판, 십자가 처형, 그리고 빈 무덤에 대한 소문을 말합니다. 문법적으로는 미완료 형으로 계속해서 반복했다는 말입니다. 정보는 많이 알고 있었지만 왜 일어났는지 구속사적 의미를 모르니까 과거에 갇혀 과거만 되새김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때 예수님이 그러지 않으셨더라면..."이라며 과거의 실패를 되새김질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내리막길을 가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내 삶에 일어난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십자가로 해석할 실력이 없으면, 그저 일어난 일에 함몰되어 슬픔의 대화만 반복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원치 않게 일어난 사건의 노예가 되어 절망하고 주님 곁을 떠나 버립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서로 ‘이야기하고 문의’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일반적인 대화를 뜻합니다. 문의는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메시아가 죽어야 했는가?"라는 난해한 문제를 풀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답이 없는 지옥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의심하고, 논쟁하고, 회의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은 그 현장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동행했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보폭을 맞추어 함께 걸었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여 영광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이 번개처럼 나타나 한순간에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순간 이동시키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동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서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께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등지고 떠나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도망의 길', '하향길' ‘실패의 길’ ‘회의와 좌절의 길’ 위에 주님이 먼저 찾아와 동행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주권적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먼저 찾아가고, 사울을 먼저 찾아가시고, 간음한 여인을 먼저 찾아가시며, 38년 된 병자를, 아무도 상종하지 않는 소외된 세리를 먼저 찾아가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믿습니까? 우리가 회개하고 깨끗해진 뒤에 주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 되고, 죄의 본성대로 살고 있을 그때에 주님은 이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을 때 베풀어진 '확증된 사랑'입니다. 이것이 '선행적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도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절망의 보폭에 맞추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몸을 입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비틀거리며 걷는 제자들의 느린 보폭에 맞춰 곁에 서셨습니다.
우리가 "요즘 은혜가 없다", "기도가 안 된다"라고 말하며 영적 침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을 등지고 걷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 옆에서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계십니다.
왜 그들은 떠났습니까? (실망의 세 가지 원인)
제자들이 예루살렘(소망의 자리)을 떠난 내면의 이유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신앙을 떠나는 이유와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첫째, 잘못된 메시아관(정치적 기대)입니다.
21절에서 제자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원한 속량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영웅'으로만 기대했지, 내 죄를 해결할 '구원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현대인들이 기복주의적 기대를 가지고 교회에 왔다가,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없다"며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고난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십자가의 걸림돌).
그들에게 십자가는 '실패'였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는 율법적 사고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난 없는 영광'만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 그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를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 역시 엠마오로 향하는 도망자가 됩니다.
셋째, 영적 무지와 인본주의적 태도입니다.
16절은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미 여인들로부터 빈 무덤 소식을 들었음에도(22-23절), 그들은 자기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기에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내가 노력해서 얻는 시력이 아니라, 주님이 열어주셔야만 가능한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해되어 믿는 것은 믿음이기 보다는 이성적 수납입니다. 이는 나의 지성이 재판관이 되어 증거를 검토한 뒤 "음, 말이 되는군" 하고 도장을 찍는 과정입니다. 이해가 되어야 믿는 것은 내 머리를 신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 머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노력'이 아니라 '시력'입니다
성경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을 '영적 맹인'으로 묘사합니다. 맹인이 아무리 눈을 뜨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빛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누군가 눈을 뜨게 해주어야만 비로소 빛이 보입니다. 엠마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기적도 보았습니다(지식은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가려져 있었습니다.
16절에서 그들의 눈이 "가려졌다"는 표현은 수동태입니다. 즉, 누군가 열어주기 전에는 인간의 힘으로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31절에서 그들의 눈이 "밝아져" 비로소 주님을 알아본 것도 주님의 주권적인 개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어떻게 하십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라고 질문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상처와 슬픔을 밖으로 쏟아내게 하시는 치유의 질문입니다.
찰스 템플턴이 아프리카 아이의 사진을 보며 절망했을 때, 주님은 그 질문을 금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을 쏟아낼 주님 곁으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내게 돌아와야 답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심과 회의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어두운 대화 속에 슬그머니 끼어드셔서 우리의 슬픈 빛(17절)을 대면하게 하십니다.
신앙의 회복은 나의 뜨거운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가 가장 무기력하게 주님을 떠나가고 있는 그 길 위에서, 이미 나와 보폭을 맞추고 계신 주님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들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를 붙드셨습니다. 우리의 엠마오 하향길은 주님을 만나는 새로운 '성소'가 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예수님께 문을 열러 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말씀으로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해석해 주시는 동행자이십니다(25-27).
제자들의 가장 큰 비극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Fact)이 아니라, 그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Meaning)을 읽어내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을 위한 '구원'이라는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시는 대신, '성경 말씀'을 펼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주님은 팩트(Fact)를 넘어 의미(Meaning)를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18-24)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길을 걸으며 "이루어진 일"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실패'였고 '끝'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작스러운 질병, 경제적 파산, 관계의 단절이라는 사건 앞에서 우리는 "이제 다 끝났다"고 결론 내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대화에 개입하셔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해석 체계를 교정하십니다. 여기서 '미련하다'는 말은 지능이 낮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 시력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기 삶을 해석할 줄 모르는 영적 무지를 말합니다.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는 말은 불신앙의 뿌리는 '머리'가 아닌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적 믿음은 뇌세포의 활동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정치적 왕)의 모습만 사랑했기에, 고난받는 메시아의 모습은 마음에서 밀어내 버렸습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는 이유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믿고 싶은 신관(내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저항 때문입니다. "더디 믿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영적인 게으름이며 저항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겪는 고난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고난을 복음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우리의 '관점'이 문제라고 지적하십니다.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은 선택적 신앙에 대한 경고입니다. 제자들은 성경을 편식했습니다. 다윗의 영광이나 승리의 예언은 좋아했지만,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이나 시편 22편의 '버림받은 자'의 예언은 무시했습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는 네 인생의 좋은 날만 나를 주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성경이 말하는 고난의 골짜기에서도 나를 신뢰하느냐?' 십자가라는 퍼즐 조각이 맞춰지지 않으면, 우리 인생이라는 그림은 결코 완성되지 않습니다.
둘째, 주님은 고난의 '필연성'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구속사적 해석)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6절)
제자들은 '고난'과 '영광'을 반대말로 생각했습니다. 고난이 오면 영광은 사라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은 영광으로 가는 '문'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반드시 있어야 했던 '필연'임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유대인의 음모나 로마의 재판 때문에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창세 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구원 시나리오 안에서 반드시 일어났어야만 했던 필연적 사건입니다. "이런 고난"은 구체적이고 대리적인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막연한 고통이 아니라 "이런(these things)" 고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목격했던 배신, 채찍질, 수치,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처절한 죽음을 정면으로 가리킵니다. 이 고난은 그리스도 본인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대리적 고난입니다. 주님은 이 고난을 통과함으로써만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실 수 있었습니다. 영광은 고난의 결과가 아니라,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인생에 고난이 오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나?'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고난이 있어야 영광이 있다!' 십자가는 영광으로 가는 길에 잠시 멈춘 정거장이 아니라,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열어야만 하는 문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지금 겪는 '이런 고난'은 우리 성도님을 망가뜨리는 실패가 아니라, 주님이 예비하신 '자기의 영광'으로 여러분을 인도하는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듯, 우리도 고난을 통해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셋째, 모든 성경의 주인공이 '그리스도'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 전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줄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자기에 관한 것"이라는 말은 모든 율법, 모든 제사, 모든 역사적 사건, 모든 선지자의 예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라는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할 때 예비 된 수양이 바로 나다. 광야에서 갈증에 허덕일 때 터져 나온 반석의 생수가 바로 나다. 성막의 모든 제사와 붉은 피가 가리키는 참된 유월절 어린 양이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희생 제물의 피, 광야의 놋뱀, 만나가 모두 그리스도를 상징함을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고난받는 종(사 53장), 우리를 위해 태어날 한 아기(사 9장)가 바로 주님 자신임을 밝히셨을 것입니다.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는 헬라어 '디에르메뉴센'은 '해석하다(interpret)'라는 뜻의 해석학(hermeneutics)의 어원이 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바르게 해석됩니다. 왜 예수님은 기적이 아닌 말씀으로 보여주실까요? 기적을 보고 믿는 믿음은 기적이 사라지면 흔들리지만, 말씀에 근거한 믿음은 어떤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성경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도덕책으로 읽었지만, 예수님은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에 대한 복음의 책으로 읽어주셨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내 열심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대신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팀 켈러는 말했습니다. "복음은 우리 삶의 이야기를 다시 쓰게 한다." 세상은 우리가 실패하면 "너는 가치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템플턴처럼 고통을 보면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은 말씀의 등불을 켜서 우리 삶의 어두운 페이지를 다시 읽어주십니다.
"얘야, 네가 지금 걷고 있는 그 어두운 골짜기는 버려진 길이 아니라, 내가 십자가에서 이미 승리한 길이다. 내가 너와 함께 그 길을 걷고 있단다."
이 말씀의 해석을 받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32절). 냉소와 절망으로 가득 찼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임하면 사건은 변하지 않아도 '사건의 의미'가 변합니다. 그리고 의미가 변하면 사람은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고 계십니까? 나에게 복을 주는 구절만 골라 읽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성경 전체가 '나(예수)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에서 '대신 죽은 수양'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요셉의 고난과 승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발견하십시오. 성경의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그곳에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 인생이라는 수수께끼도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팩트(Fact)에 함몰되지 마십시오. 말씀의 통찰로 그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은혜(Grace)를 해석하십시오.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은 오늘도 성경을 펼쳐 우리 인생의 눈물을 소망의 노래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의 고난을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로 해석하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멀어진 증거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 오신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부활은 끝의 증거가 아니라 새 시작의 근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눈물도 “의미 없는 벌”이 아니라, 주님 손 안에서 영광으로 이어질 길이 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예배와 공동체 안에서 ‘평강’과 ‘확증’을 주시는 동행자이십니다(30-35).
제자들은 길 위에서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완전히 밝아져 부활하신 주님을 확신하게 된 결정적인 자리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한 ‘식탁의 자리’, 즉 오늘날의 ‘예배와 공동체’의 자리였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더 가려하시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실 때가 있습니다. 말씀은 들었는데 여전히 삶은 막막하고, 주님은 내 기도를 뒤로하고 멀어지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29절을 보십시오. 강권하여 붙잡습니다. '강권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비아산토'는 '강제로 강요하다', '강한 압력을 가하다'라는 매우 역동적인 단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의상의 권유가 아닙니다. 27절에서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제자들의 마음은 이미 뜨거워졌습니다(32절). 그 뜨거움이 "이분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거룩한 욕심과 필사적인 매달림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음의 뜨거움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 제 곁에 머물러 주십시오! 주님 없이는 저는 한 걸음도 더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님, 날이 저물어갑니다. 제 인생의 밤이 깊어갑니다. 주님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으니 제 마음에 머물러 주옵소서!'라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와 동행하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주십니까?
첫째, 우리 인생에 손님이 주인이 되시는 ‘예배의 신비’를 체험하게 합니다.(식탁에서의 계시)
30절을 보십시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이 어느덧 식탁의 주인(Host)이 되셨습니다. 이 모습은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가지사(took) → 축사하시고(blessed) → 떼어(broke) → 주시니(gave)”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대접받으러 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먹이러 오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가지신 분입니다. 축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낌 없이 나누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주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인생의 주도권을 잡으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눈이 밝아져 눈이 어두워졌을 동행하던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그들이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내가 도달하는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십자가의 고난이 실패가 아니라 영광의 길이었음을 '이론'이 아닌 '체험'으로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떡을 떼시는 예수님을 보며 그들은 비로소 참된 메시아를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앞에서는 사라지셨지만, 이제 그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거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왜 눈이 밝아지자마자 사라지셨을까요? 이제는 눈에 보이는 기적에 매달리지 말고, 내 안에 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지금 여러분의 눈에 주님이 보이지 않아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눈을 열어 주님을 알아본 사람에게 '부재'는 더 이상 절망이 아닙니다.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주님의 '영원한 동행'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 인생 식탁에 주인으로 앉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꾸려가려 애쓰지 마십시오. 자신의 보잘것없는 떡을 주님 손에 들려드리십시오. 주님이 그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 때, 여러분의 눈이 밝아질 것입니다. 나를 위해 부서지신 그 손을 보는 순간, 여러분의 결핍은 채워지고 절망은 소망으로 바뀔 것입니다.
둘째, ‘타오르는 마음’을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살게 만들어 주십니다. (개인과 공동체)
제자들은 주님이 사라지신 후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우리 성도님의 신앙이 차갑게 식어 있습니까? 인생의 겨울을 지나고 계십니까? 다시 뜨거워지는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 주시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발견하십시오. 내 인생의 고난이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드라마의 일부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 성도님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불'이 우리 성도님의 절망을 태우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달려가게 하는 소망의 빛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개인적인 체험'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감정은 곧 식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33절). 그때는 바로 그 시각입니다. 그들은 밤이 깊었음에도(29) 불구하고 즉시 공동체(열한 제자와 그들과 함께한 자들)에게 달려갑니다. 방향의 전환(회개)과 사명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도망치고 싶었던 그 문제의 현장을, 우리가 반드시 돌아가 증언해야 할 사명의 현장으로 바꾼 것입니다. 엠마오 길은 두 명이 걸었지만, 그 종착지는 '함께 모여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내가 만난 주님이 진짜인지, 내 감정의 투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공동체 안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 모인 자들도 말하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34절). 개인의 뜨거운 체험은 공동체의 객관적인 고백 안에서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확증'이 됩니다. 홀로 믿는 신앙은 위험합니다. 엠마오의 길은 둘이 걸었고, 그 끝은 예루살렘 공동체였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도망쳤던 그 자리, 내가 외면했던 그 사명의 자리로 '즉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안식이 아니라 숙제라고 생각하며 번아웃 되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존경하던 목회자나 중직자의 윤리적 타락,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며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다녀도 나아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기보다는 주님께 집중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1-2)라고 말씀합니다. 믿습니까?
밤이 깊었다고 핑계 대지 마십시오. 상황이 어렵다고 주저앉아 있지 마십시오. 사람과 제도의 부패함을 보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의 심장에 불을 지피셨다면, 지금 일어나 여러분의 예루살렘으로 달려가십시오. 그곳이 주님과 동행하며 복음으로 변화시킬 사명의 자리입니다. 그곳에 여러분의 간증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있고, 그곳에서 여러분의 슬픔은 위대한 승리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은 부활하셔서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간증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이런 간증을 할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엠마오 제자들이 느꼈던 불안, 상실감, 그리고 '혹시 환상을 본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은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비로소 평강으로 바뀝니다.
이는 마태복음 18: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의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멀리 계신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내밀하고 두려운 현장 한복판에 불쑥 나타나실 수 있는 살아있는 실재입니다. 이 평화는 단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신 '화평의 복음' 그 자체입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누릴 수 있는 우주적 평안입니다.
찰스 템플턴이 그토록 갈구했으나 이성적 회의 때문에 누리지 못했던 그 평안의 원천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 노년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습니다. 리 스트로벨은 그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도덕적 천재였고, 그의 윤리관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제가 살면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본질적으로 현명한 분이셨습니다. 그의 헌신은 완전했고, 세상에 큰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분에 대해 위대함의 한 형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분을 정말 존경해요!” “그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인간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 제가 아는 모든 좋은 것, 모든 올바른 것, 모든 순수한 것은 예수님에게서 배웠어요. 예수님을 보세요. 그분은 사람들을 꾸짖으셨고, 분노하셨어요. 그분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였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돌보셨어요. 역사상 그 어떤 인간보다도 가장 높은 도덕적 기준과 가장 적은 위선, 가장 큰 자비심을 가지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물론 훌륭한 사람들은 많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이시죠.” 저는… 그가… 그리워요! ”
그 말과 함께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고 합니다. 그의 어깨가 들썩이며 흐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고 눈물을 닦았답니다.
오늘 엠마오라는 절망의 길을 걷던 두 제자처럼 슬픈 빛을 띠고 사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주님과 동행을 거부하며 죽음의 길로 달려가고 계시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깊은 실존적 회의속에서 주님을 떠나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도 찾아 오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와 보폭을 맞추시면서 고난을, 실패를, 회의를, 의심을 말씀으로 해석해 주시는 주님과 동행하시길 바랍니다. 고난이 실패가 아니라 영광의 서막이 되고,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독약이 아니라 보약이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 공동체의 자리를 떠나고 떠날 계획을 세우고 떠나고 있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께 나와 예배와 공동체에서 누리는 죄와 죽음을 초월한 평안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가는 티켓을 따는 종교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내 곁에서 나의 슬픔을 해석해 주시고, 떡을 떼어주시는 부활의 주님과 함께 걷는 '동행'의 종교입니다. 인생길이 지금 혹시 엠마오를 향하는 내리막길처럼 느껴지십니까? 실망과 회의가 눈을 가리고 있습니까? 곁에 계신 주님께 말을 거십시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선포되는 말씀 앞에 마음을 내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 성도님의 눈을 여시고, 우리 성도님의 가슴을 다시 뛰게 하실 것입니다. 그 뜨거운 가슴으로, 이제는 도망치던 예루살렘을 향해 소망의 발걸음을 내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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