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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다리(11)희망의 끈 끝까지 붙들기(왕하 4:17-2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098 추천수:1 112.168.96.218
2018-09-09 08:53:46

 

희망의 사다리(11)희망의 끈 끝까지 붙들기

왕하 4:17-23

 

저는 매주 마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가지 글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글을 쓸 때 그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 절망보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 글을 씁니다. 요즈음 우리 성도님들에게 보내는 열린편지도 주로 희망을 주기 위해 보내고 있습니다. 산문도 쓰지만 가능하면 매 주 시 한 편 씩 쓰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시 역시도 가능하면 쉽게 쓰면서도 다양한 자연현상을 통하여 희망을 주제로 쓰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도 제가 <안개>를 소재로 시를 썼습니다. 이번 주 주보 표지에 올려져 있는데 “안개는 물소리까지 지울 수 없습니다”라는 시입니다. <짙은/ 안개라도/ 물소리까지 지울 수 없고// 빛을/ 거절한 안개도/ 태양을 삼키진 못합니다.// 밤에/ 안개가 덮인들/ 어둠을 이기지 못하고// 안개가/ 아무리 쌓여도/ 비가 되지는 못합니다.// 차이로/ 슬픈 안개가/ 세상을 가리고 싶지만// 높은 산까지/ 덮기에는/ 힘에 겨워 오르지 못합니다.// 아침 안개/ 가득 차도/ 하루 가지 못하고// 못난 나무/ 안개 속에 숨고 싶어도// 오래 숨지 못합니다. //아무리/ 짙은 안개도/ 물소리까지 지울 수 없습니다./

인생은 때로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 보니 안개로 가득찰 때가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경제 문제로, 건강문제로, 자녀나 부모 형제 문제로 안개가 가득찰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 안개가 너무 짙어 한 치 앞을 볼 수 없고 사는 것이 힘겨울 때가 있고, 질병으로 호흡하는 것초차 힘들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소망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끝까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희망을 끈을 놓치 말아야 합니다. 안개는 하루를 덮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안개는 언젠가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 걷히는 날이 옵니다. 정호승 시인은 <희망은 아름답다>라는 시에서 희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은 별이 빛날 때만 창이다/ 희망은 희망을 가질 때만 희망이다/ 창은 길이 보이고 바람이 불 때만 아름답다/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 저도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희망은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때 희망이 될 수가 있습니다. 문병란 시인이 <희망가>에서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 맛 향기를 지닌다.”라고 말했듯이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은 있습니다. 인생 항로에서 아무리 높은 파도가 일고 폭풍우 몰아친다고 해도 희망의 등대를 바라보면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노를 저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열매의 속살은 돋아나는 것입니다. 석양에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날 눈부신 태양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워도 어디엔가 반짝이는 별이 있습니다. 아무리 먹구름이 덮여 있다고 해고 그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찬란한 창공이 있습니다. 조지 와츠의 ‘희망’이라는 그림을 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맨발의 여인은 눈과 귀가 천으로 가려져 있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물에 흠씬 젖어 지구 위에 앉아 현악기 리라(수금)를 들고 있습니다. 이 악기는 보통 7줄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 끊어지고 오직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사슬에 묶여 있는 남아 있는 한 줄로 무엇인가 들으면 계속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천국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 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한 줄기 남아 있는 희망의 끈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희망의 끈은 무엇이겠습니까? 절망적인 세상에 살면서 어떤 희망의 끈을 끝까지 붙들어야 하겠습니까?

 

1. 끝까지 붙들어야 할 희망의 끈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한 줄기 희망의 끈이 무엇이겠습니까? 철학자 칸트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네 가지 물음을 가지고 평생 씨름을 했다고 합니다. 그중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라는 물음이 있습니다. 칸트는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희망해도 되는가’라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그 말은 희망에는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살면서 희망의 끈을 붙들기는 붙드는데 헛된 희망에 목을 매며 희망고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라지 희망이 없다면 포기하고 깔끔하게 손을 뗄 텐데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붙들고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고문하며 고귀한 시간을 허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헛된 희망을 붙들면 결국은 해피 앤딩으로 끝나지 못하고 배드 앤딩으로 끝나버립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수넴 여인은 해피 앤딩으로 끝나는 희망을 붙들고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사악한 여인 이세벨이 판을 쳤던 암흑한 시대에 그녀가 끝까지 붙들었던 희망의 끈은 무엇이겠습니까? 경제적 부나, 건강이나 명예나 출세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여인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4장 8절을 보십시오. “귀한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명성이나 평판, 명예, 부, 권력 등에서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문맥적으로 볼 때 경제적으로 부요한 여인이었습니다. 남부러운 것이 없이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편도 있고 땅도 있고 집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마음 깊은 곳에는 그녀를 절망하게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많은 것이 다 사람을 절망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인기 연애인들이 절망하고 자살하는 것은 모든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기도 있고 돈도 있고 미모도 있지만 한 가지 것이 부족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도 있고 직장도 있고 남편도 있어 멀쩡한 것 같은데 한 가지 것이 부족한 것으로 내면 깊숙이 절망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 그녀를 절망에 이르게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 사회적 풍습은 결혼한 여인이 아이를 갖지 못하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임의 원인은 남자에게도 원인이 있는데 당시에는 여성에게만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 자식이 없는 여인들이 많은 사회적인 수치와 고통을 겪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아이를 갖지 못하면 여성만 탓하며 칠거지악에 포함시켜 쫓아내는 것을 정당화시켰습니다. 한나처럼 아이를 갖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았습니다. 더욱 절망하게 하는 것은 남편이 이미 늙어 버린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과 상실감이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희망을 포기해 버린 여인입니다. 얼마나 이 부분에 희망이 없는지는 1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그 여인을 불러 놓고 내년에 아이를 안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여인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라고 말합니다. 헛된 희망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희망 공문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저 입술의 말로 위로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부분에 희망을 접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무자식을 탓하며 절망하고 살았습니까? 불임 치료를 받으며 자식에 목숨 걸고 살지 않았습니다. 시험관 아이를 가지기 위해 몸부림치며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희망으로 삼고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이 없는 것 하나로 인생 절망적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희망적인 여인이었습니다. 수넴 여인이 끝까지 붙들고 산 희망의 끈은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엘리사 선지자가 자기 동네에 올 때마다 간권하여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자기 집을 개조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어 침대와 책상과 촛대를 마련해 두고 엘리사를 그곳에 머물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엘리사를 대접했을까요? 9절에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엘리사를 향해 보인 존경과 환대는 곧 하나님을 향한 존경과 환대였던 것입니다. 그 말을 하나님을 그만큼 섬겼기 때문에 그를 그렇게 대접한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어야 할 인생의 희망의 끈으로 삼고, 절망하지 않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 암흑한 시대에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산 것입니다. 자식을 낳는 것에 희망을 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산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그 여인이 살던 시대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물질에 희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자식에게 희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아이들도 대머리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시대에 보기 드문 귀한 여인이었습니다. 배교의 시대 때 신앙이 탁월한 여인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아이들도 자신을 대머리라고 조롱하는데 이 여인이 자기를 대접하고 자기 집 옥상에 자신의 방을 만들어 그곳을 들릴 때마다 섬겨주니까 얼마나 감동이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종 게하시를 통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봅니다.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대통령도 알고 청와대 고귀 관료도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소원을 말하면 그들을 통해 들어 줄터이니까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여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냥 백성 중에 거주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의역하자면 내 아들 없어도 함께 백성들과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희망을 걸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한 분을 희망의 끈으로 끝까지 붙들고 사는 여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엘리사가 말한 대로 그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복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 주신 희망이 헛된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희망 고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그녀에 대한 성경 기록이 끝이 나면 해피 앤딩으로 끝이나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 기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노년에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녀에게 아들은 희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나 깨나 아들 생각으로 세상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그 희망이었던 아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 아버지 농장에 따라갔다 갑자기 병이 들었습니다. 추수할 때이니까 밀을 추수할 때라면 아마 6월쯤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한 낮 온도는 30도를 오르내리기 때문에 일사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게 “내 머리야 내 머리야”하며 고통을 호소합니다. 집에 온 아픈 아들을 어머니는 무릎에 뉘어 놓고 백방으로 고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기도도 간절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희망이었던 그 아들이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어떻게 합니까? 여기에서 그 여인이 정말 하나님을 유일한 희망의 끈으로 끝까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죽은 아들을 엘리사가 머무는 방에 놓고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남편에게도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알려 보았자 늙은 남편은 충격과 슬픔에 빠질 것이고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죽음마저도 하나님께서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절망하고 포기하고 원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하시가 아이가 평안하냐고 물었더니 평안하다고 말합니다(26). 살롬하지 못한데 자신도 남편도 아이도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확실하게 하나님을 희망의 끈으로 끝까지 붙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려울 때든지, 두려울 때든지, 비극적인 상황이든지, 아니면 기쁠 때든지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희망의 끈으로 붙들고 살면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엘리사를 찾아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집에 같이만 가면 자신의 아들이 살아날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희망의 끈으로 끝까지 붙들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엘리사에게 희망을 걸고 있지만 엘리사라는 인간에게 희망을 거는 것일까요? 엘리사의 하나님께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만 죽은 아들을 살려 주실 수 있다고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엘리사가 아이의 몸에 엎드립니다. 그러자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고 살아났습니다(35).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론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적인 하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생명의 근원되신 분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지라도 마지막까지 꼭 붙들어야 할 희망의 끈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돈이 아닙니다. 자식이 아닙니다. 명예가 아닙니다. 권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희망의 끈은 하나님입니다. 세상에는 헛된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억압하는 힘을 의지하지 말고, 빼앗아서 무엇을 얻으려는 헛된 희망을 믿지 말며, 재물이 늘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아라(시편 62:10).” 재물이 진정한 희망의 종착역은 아닙니다. 신앙인의 진정한 희망의 끈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교만하거나 곧 없어질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희망을 두라고 가르치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넘치게 주셔서 누리게 하십니다(딤전6:17).” 믿습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히11:6)고 말씀하십니다.

소유나 성취가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대니엘 길버트 교수가 연구해 보았습니다. 미국 대학교수들은 교수 임용이 된 후 6년 후 정년보장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정년보장 심사를 앞둔 수십 명의 교수들의 행복 수준을 측정했답니다. 심사 직후에는 정년보장을 얻은 교수들의 행복 수준은 매우 높아졌고 실패한 교수들은 상당한 불행감과 실의에 빠졌답니다. 그러나 수개월 후 다시 행복 수준을 측정해보니까 본인이 지니고 있던 기본적 수준으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나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나 장군 승진이나. 직장에서 승진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게 되든 얻지 못하든 간에 사람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의 행복 수준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나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18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성인 남녀 수백 명을 20년 간 지속적으로 연구한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저마다 일정한 기본적인 행복 수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답니다. 배우자 사별, 이혼, 결혼, 아이 잉태 때 불행감과 행복감은 모두 일시적이라고 합니다. 길버트 교수의 결론은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이든 스포츠 경기의 승부 결과든 애인에게 차이든 어떤 일이든 간에 그것이 우리의 행복감에 미치는 영향력은 당장에는 상당히 실제적이고 강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작고 빠르게 지나가는 일이 되어 버린다고 합니다. 자신의 행복지수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행복의 자동온도 조절장치"라고 부릅니다. 원래 밝고 명랑한 사람은 이 기본 수준이 높고, 우울하고 침울한 사람은 기본 수준이 낮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기본 수준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평생 살면서 이 행복의 기본 수준을 높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변덕을 부리는 돈이 아니라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있을 때는 환영받지만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림받는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인정해 주시고 세워주시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다윗을 어떤 상태에서든지 행복하게 하는 자동온도 조절장치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시편 23편 1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오랜 세월 장인에게 쫓겨 다니며 죽음의 위기를 겪었던 다윗의 고백입니다. 아들이 배신하여 왕위에서 쫓겨났던 다윗의 고백입니다. 부하의 아내를 차지하고 부하를 죽여 자식이 죽고 죄로 말미암아 한때 심각한 수치를 겪었던 다윗의 고백입니다. 결혼한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가버렸던 다윗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부하에게 배신을 당했던 다윗의 고백입니다. 광화문에서 근무하다 원하지 않게 경상도로 발령이 나도 "여호와가 내 목자 아이가! 내사 마 답답할끼 없데이"하는 것입니다. 전세금이 없어 충청도로 이사가도 "여호와는 염생이 같은지를 키우시고 멕이시는 분이시니 지가 부족한 것이 없네유."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노후 생활 안전하지 못하여 고향 땅 전라도에 내려가고 " 아따! 여호와가 시방 나의 목자신디 나가 부족함이 있겄냐?"라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희망의 끈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이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몸을 편안하게 해 주시고 마음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승리케 해 주시고 잔을 넘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째서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네 희망을 하나님께 두어라. 나는 내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라(시편42:11-현대인의 성경)” 40년 동안 입법 사법 행정권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렸던 다윗도 시편 62편 1절에서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기라려라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세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영원한 희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희망이라고 말하며 모든 속박으로부터 인간 자유를 부르짖으며 동성애도 동성결혼도 합법화 해 달라고 하는데 인간이 희망이 아닙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끝까지 붙들기에는 너무나 변덕이 심하고 죄와 욕심, 모순투성이입니다. 하나님이 인류가, 우리 인간이,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희망입니다.

 

2. 끝까지 붙들어야 할 희망의 끈은 말씀 순종의 끈입니다.

수넴 여인이 끝까지 붙든 또 다른 희망의 끈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살다 아들을 낳고 아들이 죽었는데도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끈을 붙들고 아들을 살린 이 여인에게 또다시 절망적인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부요한 삶을 살았던 이 여인의 식구가 모두 굶어 죽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그 땅에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었습니다. 경제의 줄이이 끊어진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잘 나가던 직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부도가 난 것입니다. 잘 나가던 집안이 하루아침에 망하는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사람을 절망하게 하는 것 세 가지를 말하라고 하면 죽음과 질병과 가난입니다. 가난이 찾아온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절망하고 자살합니다. 질병보다 가난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자살합니다. 가난의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이 여인에게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재해로 인한 가난이 찾아온 것입니다. 몇 년 동안입니까? 8장 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자그마치 7년입니다.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아닙니다. 거기에 겹쳐 아람왕 벧하닷이 쳐들어 왔습니다. 전쟁이 일어나 사마리아 성을 에워쌉니다. 먹을 것이 없어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6장 2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 일이 생겼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인육식을 하는 짐승 같은 세상이 된 것입니다. 엘리사는 이런 상황에서 그 여인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블레셋으로 이민가라는 것입니다. 원수의 땅입니다. 희망이 없는 땅입니다. 아무런 생활 근거가 없는 땅입니다. 그곳에 가면 친구들에게 비난받을 땅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땅입니다. 말이 다른 땅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말에 대하여 이 여인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8장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말씀에 순종합니다. 말씀 순종이라는 한 가지 희망의 끈을 붙들고 그곳에 갑니다. 말씀 순종이 희망이라는 말씀 순종의 희망의 끈을 붙들고 온 가족이 7년 동안 블레셋 땅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말씀 순종이라는 희망의 끈을 약속한 기간까지 끝까지 붙들고 가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8장 3절을 보십시오.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씀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말씀 순종의 끈을 놓아 버립니다. 동네 사람들이 흉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잘 믿는다고 혼자 블레셋에 피신하더니 꼴 보기 좋다”라고 비아냥거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잘먹고 잘사는 멀쩡한 사람이 무슨 선지자의 말을 듣고 훌쩍 떠나더니 잘 되었네”라고 조롱의 말을 들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집과 토지를 찾으려고 할 때 “아니 7년 동안 언약의 땅을 버리고 원수의 나라 블레셋으로 가 소식이 없더니 이제와서 내 집과 내 밭을 내놓으라고 하니 말이 돼”라며 자신의 집과 땅을 차지한 사람이 자기 권리를 주장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여 갔는데 가뭄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저었는데 폭풍이 찾아온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 가는데도 인생의 각종 가뭄과 폭풍이 찾아옵니다. 바울이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했는데 질병이 치료되지 않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말씀대로 살았는데 질병에 걸려 선지자 이사야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씀에 순종하여 애굽을 떠났는데 홍해가 앞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에 순종하여 갔는데 감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순종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이를 갈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도 말씀 순종이 끝까지 붙들어야 할 희망이다는 사실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면 사는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한 사람을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와서 왕에게 자기 집과 전토를 찾기 위해 갑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람의 사람인 게하시가 왕 곁에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게하시가 이 여인에 대한 사연을 왕에게 소상하게 이야기합니다. 결국, 수넴 여인이 마지막까지 말씀 순종의 끈을 붙든 결과는 무엇입니까? 8장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인에게 속한 모든 것과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 밭의 소출을 다 돌려 받았습니다. 이것이 말씀 순종의 희망의 끈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예언자들이 하는 말을 듣지 말아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예레미야서 23:16 현대인의 성경)”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지라도 말씀 순종의 끈을 붙드는 것이 참된 희망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복을 잃었습니까? 말씀 순종의 끈을 놓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흉년이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왕상8:35-36; 렘3:2-3; 레26:14-20; 신28:23-2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라고 했습니다(신명기28장).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지 못했지만 아람 나라의 침범으로 얼마나 처참한 꼴을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잠시 순종하는 그녀와 가족을 그 저주의 땅에서 피신 시켜 보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순종하는 그녀에게 순종이 축복이라는 등식을 넘어 순종이 때로는 불통이 되지만 마지막에서 형통을 이룬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비신앙인으로 볼 때는 경제의 끈이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희망이겠지만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경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끈이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희망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경제적으로 부해지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명예를 얻고 출세하는 것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희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희망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끝까지 붙든다고 해도 목마름이 영원히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평생 마셔고 목마름의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 순종에 끈을 붙들고 살면 참된 만족과 평안이 있습니다.

노아시대 때 하나님이 홍수를 이 땅을 다 쓸어 버릴 절망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노아의 말을 듣고 돌아오라고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조롱하며 돌아 오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보다는 비웃고 농담으로 여깁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끝이 좋지 않습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 순종이 희망의 끈이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지막까지 말씀 순종에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지금 순간이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말씀 순종의 끈을 붙들고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면 우리 가정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씀 순종의 끈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사업할 때도, 취업할 때도, 결혼할 때도, 진학할 때도 말씀 순종의 끈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희망이다는 사실을 믿고 나가다 보면 때로는 고통과 고난과 불이익과 억울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말씀 순종이 희망이다는 사실을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평생 이 말씀 순종의 끈이 희망이다는 사실을 들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녀 교육도 말씀 순종 교육에 실패하면 좋은 날 보기가 힘듭니다. 감리교위 창시자 요한 웨슬리 어머니 수산나는 19명의 자녀를 출산하였습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아이들을 훌륭하게 양육하였습니다. 그녀는 순종 교육을 철저히 시켰답니다. 두 살 전에 순종을 가르치는 것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르친 결과 19명의 아이들 가운데 9명이 근대 교회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가 나와 영국을 변화시켰습니다. 찰스 웨슬레가 나와 6000곡 찬송가 지어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늦기 전에 어릴 때부터 철저히 순종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4세 이전의 아이의 대뇌는 백지 상태와 같아서 외부 정보를 그대로 흡수합니다. 4세 이전의 환경과 교육의 영향은 아이의 성격과 소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합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잠재력이 100이라면 그 이후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100의 수준의 사람이 되지만, 다섯 살이 되어서 교육을 시작하면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80%의 수준밖에는 안 되고, 10살이 될 때는 60%, 15세 때는 40%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순종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순종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입니다. 심장이 뇌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허파가 뇌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으면 호흡이 멈춥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진정한 복을 잃었습니다. 롯의 처는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명령을 불순종하고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창 9:26). 노아 홍수 때 순종치 않은 자들은 다 심판을 받았습니다(벧전3:20).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거꾸러진 것도 불순종 때문입니다(민14:26-39). 어떤 복잡하고 어려운 인생길도 말씀 순종의 희망의 끈을 붙들고 걸어가면 다 풀리고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순종의 희망의 끈을 평생 붙들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30: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희망의 끈은 하나님과 말씀 순종의 끈입니다. 이 두 가지를 붙들고 수넴여인처럼 어떤 상황이 다가와도 인생의 끝까지 희망차게 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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