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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앞에 나오면(8) 세리장 삭개오(눅19:1-1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312 추천수:1 112.168.96.218
2018-07-15 10:34:06

 

예수 앞에 나오면(8) 세리장 삭개오

눅19:1-10

 

두 주간 동안 파키스탄과 태국 선교지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파키스탄에 만만만 생명운동을 통하여 월드라이프 학교를 세웠는데 도착하자마자 경찰서에 신고하고 오후에 학교를 방문하여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200여명의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모여 환영해 주고 찬양을 부르고 성경을 암송하고 연극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곳 학교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선물을 주었습니다. 저녁시간을 이용해서 학부모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하고 선물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새로 지을 학교 부지에 가서 기초석을 놓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참 예수님 앞에 나오기가 힘듭니다. 파키스탄 인구는 2억명으로 전 세계 6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인도네시아에 이어 2번째로 무슬림이 많은 나라입니다. 파키스탄 인구의 97%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든 공문서에 종교 기입을 의무화해 공무원이나 군인, 판사 등의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이슬람 신앙 선서를 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런 직업을 갖기 위해 거짓으로 종교를 기입하면 반역이나 헌법 위반 혐의로 처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몇몇 이슬람 근본주의·극단주의 단체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납치, 폭행, 살해, 강제 개종 등을 하는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손이 잘린 청년을 선교사님이 우리 교회에 대리고 와서 의족을 만드는데 조금 도와 준 적이 있습니다. 미국 국무부 산하 기관인 종교자유위원회에서는 파키스탄은 지구촌 최악의 종교 탄압 국가 중의 하나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중동언론연구소(MEMRI)는 ‘파키스탄은 정규 교과서를 통해 이슬람식 가치관을 끊임없이 반복 교육 시키고 있으며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지하드를 권장하고 있으며 비무슬림인 학생들에 대한 테러 공격을 정당화 시키는 가치관을 주입 시키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태국은 소승불교의 나라입니다. 인구의 95%정도가 불교인이고 학교에서도 불교에 대하여 배우고 남자는 일생에 최소한 3개월 간 한번 승적을 보유하는 것이 사회적 관행으로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사원과 가정, 사무실, 상점까지도 불상을 모셔놓을 정도로 불교가 국교화 되어 있고 국왕과 불상과 승려가 신성한 존재로서 경의와 숭앙을 받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들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빈곤, 불공평, 차별적 환경을 감수해야 만합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이나 부자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쉽지 않은 나라들입니다. 우리는 작은 헌금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어릴 때부터 그들을 교육을 시켜 예수님을 영접하여 각분야의 기독교 지도자로 소수이지만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이나 태국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기 쉽지 않은 것처럼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치열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지금 말하면 세무서장이 된 것입니다. 적당한 권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 사회에서 그는 남보다 열심히 노력을 해서 어느 정도 당시 사회에서 살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교가 주류인 사회입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하면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1. 오늘날 예수님께 나오려면 무엇을 극복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것이 있겠지만 삭개오를 통해 볼 때 세 가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시대는 변했어도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첫째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신분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에 대하여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삭게오는 세리장의 신분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조금만 신분이 높으면 사람은 교만해져 예수님께 나오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조금만 가진 것이 있으면 교만해지는데 그는 부자였지만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요즈음 갑질하는 사람들이 신문지상에 오르는데 돈 조금 있으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도 몰라봅니다. 조금 가지면 얼마나 교만해집니까? 조금 권력있으면 얼마나 교만해집니까? 조금 배우면 얼마나 교만해 집니까? 우리나라만 해도 일 년에 2만 6천권 이상 책이 나온다고 합니다. 일평생 읽어도 세계에서 나오는 책 하루 분량도 못 읽고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조금 알면 세상 모든 것 알고 있는 것처럼 이성우월주의자가 되어 하나님이 없다고 교만을 떠는 것이 인간입니다. 조금 주어진 권력이, 미모가, 건강이, 지식이, 부가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 요소가 되면 안 됩니다.

 

둘째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무엇이 방해를 합니까?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우호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만나는데 방해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려면 핍박하는 사람, 예수 믿지만 위선적인 사람들이 방해 요소입니다. 특히 교주를 절대시하는 이단들이 예수 믿는데 방해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사람의 방해물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갑니다. 세리장으로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다 내려놓지 못하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제일 구원받기 힘든 사람 중에 하나는 체면 차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사람이 방해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다니는 누구 때문에 예수님께 나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사람이 예수님 만나는데 방해되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사탄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가장 탁월한 도구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최 우선시하게 하는 휴머니즘일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진정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열등감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는 키가 작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갑니다. 무엇하기 위해서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보고자 하되” 문법적으로 미완료형으로 계속해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애를 썼다는 말입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동분 서주하는 삭개오의 적극적인 모습을 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였습니다. 자신의 결함이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물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도 돈이 있어야해, 배워야 해, 교회에 다니는 여성들을 보니 다 예쁜데 좀 예뻐야 해. 똑똑해야 해.” 등을 말하면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 같은 놈은 예수를 만날 자격이 없어!" 라고 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열등한 요소가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말츠라는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면 95%의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약점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자인 크래머 박사는 사람의 사고 방식을 "자산에 바탕을 둔 사고(Asset엣세트, 자산-based thinking, ABT)"와 "결핍에 바탕을 둔 사고"로 나누어 설명을 합니다. 그는 그의 책 [긍정으로 리드하라]에서 성공하는 리더들은 무엇을 보고, 말하고, 행동할 때 늘 자산에 바탕을 둔 사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내가 실패하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주변 사람의 도움이 없어서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리더들은 그와 반대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서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 어떤 장점이 있는지,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 들여다본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등감을 극복해야 합니다. 학력 때문에 괴로워하던 링컨이 예수님을 만나니까 대통령이 됩니다. 소아마비의 약점을 가졌던 루즈벨트가 예수님을 만나니까 실력을 갖추어 대통령이 됩니다. 가난이라는 약점을 가진 록펠러가 예수님을 만나니까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 만나는데 나쁜 직업, 신체적인 조건, 가정적인 불행이 장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점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예수님이 부르시면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보기위해 돌무화과 나무에 오를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삭개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보고 "삭개오야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삭개오를 찾아갔고 그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으며 그의 마음을 정확히 읽었습니다. 예수님이 초대 받지 않았는데도 먼저 손님으로 그 집을 방문하겠다고 한 유일한 경우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실 삭개오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삭개오를 만나기 위해 여리고에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게오를 찾아간 분명한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믿습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러 오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삭개오를 만나기 위해 여리고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간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에게 돌을 던지고, 무시하고, 적대시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잃어버린" 자라는 헬라원어의 뜻은 "완전히 파괴하다", "죽다", "멸망하다", "손상시키다"입니다. 삭개오가 겉은 잘 포장되어 멀쩡한데 실제는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겉은 멀쩡한 것같지만 내부에 들어가면 남모르는 아픔과 질병과 상처가 있습니다. 삭개오가 바로 양떼를 떠남으로 '잃어버린' 양과 같은 사람입니다. 삭게오는 그대로 놓아두면 인생의 종착역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입니다. 그는 권력도 있고 돈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죄인으로 유대사회에서 왕따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뭇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수군거립니다. 삭게오라는 이름의 뜻은 '순전하다, 정의롭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모가 그를 낳고 순전하고 정의롭게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뜻대로 그렇게 살지 못하고 민족의 배신자, 부정 축제자가 되어 자기 동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돈은 있고, 권력은 쥐었지만 백성들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유대 동족들은 세리들을 매국노와 같이 멸시하고 상종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창기처럼 죄인 중에 죄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뭇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리고로 가셔서 의도적으로 삭개오에게 다가가 삭개오를 보고 "삭개오야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결코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하거나 의롭지 못합니다. 요한복음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로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졌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오늘도 진정한 행복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시22:10)"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가운데 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출 3:7)"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우리의 사정, 우리의 형편, 우리의 아픔, 우리의 슬픔, 우리의 상처 모르고 외면할 것같지만 우리 주님의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고통 다 보고 계십니다. 아무도 들어주실 것 같지 않던 우리의 부르짖음 다 듣고 계십니다. 아무도 알지 못할 것같은 우리의 사정 다 아십니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비난거리만 있으면 소문내고, 비판하고, 수군거리고, 정죄하고 따돌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허물과 약점을 다 아시면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다 해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들어내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예수님은 죄의식 속에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손가라가질 받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범죄한 후 아담을 찾아간 분은 하나님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먼저 아브람을 찾아가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게 하셨습니다.(창 12:1). 하나님이 먼저 성전에 있는 어린 사무엘을 찾아 가 "사무엘아, 사무엘아!"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삼상 3:1-9). 바울도 베드로도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백성을 떼를 지어 집단적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룹별로, 연령별로, 성별(性別)로, 지역별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창 12:1). 하나님은 사무엘을 실로에 있는 성전에서 개인적으로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시며 세 번이나 연속해서 같은 내용으로 불렀습니다(삼상 3:1-9). 하나님은 이사야를, 예레미야를, 에스겔 각각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다나엘을 미리 아시고 불렀습니다(요 1:47-48). 베드로와 요한의 형제를 고기잡이하는 어장에서 불렀습니다(눅 5:10-11). 마태를 세관의 공직에서 불렀습니다(마 9:9). 사울을 박해의 도상에서 불렀습니다(행 9:1-9). 예수님은 삭게오에게 속히 내려오라는 부르심입니다.

지체하거나 머뭇거리거나 주저할 수가 없는 화급한 결과만을 요구하는 단호한 명령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행동의 기회를 촉구하는 명령입니다.

이 때 삭개오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① 급히 내려 왔다고 하였습니다. ② 즐거워하면서 내려 왔다고 했습니다. ③ 그리고 예수 영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의 여자적(如字的) 의미는 물리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말입니다. 좀 더 의미를 확대해석하면 주님의 부름을 받는 자는 내려 와야 합니다. 삭개오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으로 만들어 놓은 그 자리에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높고 높은 영광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겸손의 걸음을 걸어 지금 여리고까지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든, 사람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이른바 높은 자리, 성공의 자리, 명예와 권력의 자리, 부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문이라고 하는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은 문벌(학문)이라고 하는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른바 경제라고 하는 큰 부의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헛된 종교의 나무 위에나, 어떤 무서운 이데올로기의 나무 위에나, 아니면 정치라고 하는 나무 위에나, 교육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나, 문화와 예술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다 그 나무를 과시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 부름 받은 사람은 먼저 그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역사와 전통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 있는 자가 있습니다. 결코 그 자리에서는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서 내려 와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교만과 인본주의적인 사람의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 인간의 공로, 인간의 업적, 인간의 열심, 인간의 명예에 걸터앉아서는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만신창이가 된 가정에서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오로지 삭개오에게 베푸신 주님 자신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9:9). 이 말은 ① 그가 구원의 언약 안에 예정되었던 사람이란 뜻입니다. ② 또한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기업의 후손이란 뜻입니다. ③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를 믿어야 될 사람이란 뜻입니다. ④ 그 일 때문에 예수께서 세상 중 여리고에까지 오셨고 ⑤ 삭개오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눅 19:9). 삭개오 개인의 구원이요, 그로 말미암은 가족의 구원이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00아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삭개오처럼 지체지 말고 속히 내려 와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3.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변했는지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합니다.

“주여 보십시옵소서”라고 예수님은 인생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주님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모시는 삶으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최고의 우선순위를 예수님께 두는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땅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선교에 같이간 목사님께서 목회하면서 어려운 점을 이야기 했습니다. 성도님들이 다른 교회로 떠나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흐르는 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습니다. 흐르면서 일을 합니다. 돌과 부딪치면서 아름다운 개울물 소리도 만들고, 돌을 나르기도 하고 가는 곳마다 나무에게 물을 주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세상 가지고 있는 것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집착했던 집도, 돈도 다 떠나는 것입니다. 사랑했던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떠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 다 떠납니다. 없어지고 떠난다고 그것 너무 아쉬워하고 아파할 것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실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신앙사건이란 인간이 바로 우리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님과 만나는 체험입니다.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한 삶을 실제적으로 고백하는 체험입니다. 다 죄인이라고 욕하고 모두가 떠난다 할지라도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한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예수님이 주라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고백하면 삭개오처럼 예수님 만나 기뻐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 한분만으로 진정 행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 버립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된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삶 변화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행복을 환경이나 조건에서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돈을 많이 모으면 높은 지위를 누리면 깊은 지식을 얻으면 육신의 향락을 통해서 행복을 찾으려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시는 행복한듯 느껴질지는 모르나 우리 환경이 변하면 그 행복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을 누리는 선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선물을 주신 분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초가 삼간도 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초가 삼간도 나는 만족하네 값진 재물도 내겐 없지만 내게 주어진 하늘나라에 가면 내게 황금과 은만 있네 내게는 하늘 저 위에 집 있네 햇빛 비치고 찬란한 그곳 그 날이 오면 다시 방황치 않고 순 황금길을 거닐겠네 나 가난해도 외롭지 않네 천국길 가니 실망없다네 나 은혜로서 면류관 쓰며 거문고 타는 천국가네 내게는 하늘 저 위에 집 있네 햇빛 비치고 찬란한 그곳 그날이 오면 다시 방황치 않고 순 황금길을 거닐겠네 그날이 오면 다시 방황치 않고 순 황금길을 거닐겠네 내게는 하늘 저 위에 집 있네 햇빛 비치고 찬란한 그곳 그날이 오면 다시 방황치 않고 순 황금길을 거닐겠네”

 

둘째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합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 것을 안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진정 회개합니다.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도적질한 것을 고백하면 그 원주인에게 불법적으로 취한 그액수에 1/5을 보상(민5:7)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도적질한 것이 탄로 나고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 취하는 행동입니다.(출22:1,4)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면서도 4배로 갚겠다는 삭개오의 행동은 율법에 개의치 않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를 철저히 뉘우치는 행동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삶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삶을 말합니다. 의의 경쟁을 하면 인생은 행복해 질 것 같지만 불행해집니다. 신앙생활이란 죄인임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삭개오의 변화체험은 가치구조의 전환으로 나타납니다. 8절 보세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재물을 끌어 모으는 일에만 관심을 갖던 그가 이제는 재물을 나누어 주는 일을 위해 스스로 결단한 변화입니다.

나 중심에서 타자 중심의 삶으로 방향이 전환됩니다.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일로 방향이 전환됩니다. 이 세상 지향적이 아니라 내세 지향적인 삶으로 방향이 전환됩니다. 이룸의 가치에서 됨의 가치로, 가짐의 가치에서 나눔의 가치로, 그리고 지배의 가치에서 섬김의 가치로 인생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는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을 만들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남을 생각합니다. 전에는 자기만 알던 사람이 이웃을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체험한 신앙인은 가치관이 변합니다. 가장 현격한 변화가 이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억울한 사람, 소외된 사람, 불의한 제도로 압박받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우리 인간의 필요(needs)를 절대적 필요와 상대적 필요, 두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절대적 필요란 주위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상관없이 느끼는 필요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몹시 배가 고팠을 때 우리가 찾게되는 음식에 대한 욕구는 생명유지를 위해 나온 것이지 남보다 나아짐으로써 기쁨을 느끼기 위한 욕구가 아닙니다. 대개 생계유지에 필수적인 것들이 절대적 필요에 해당합니다. 반면 상대적 필요란 충족 순간에 주위 사람보다 낫다는 기쁨, 또는 남과 다르다는 기쁨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나온 필요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충족되면 행복감이 더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사람들은 지나치게 상대적 필요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 교인이 내 교회로 수평 이동해서 내 교회 부흥되었다고 너무 자랑하고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에서는 간 교인들이 다 떠났다고 슬퍼하며 가슴 아파 하며 울고 있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너무 나만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고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엔가 주식으로 집을 날리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예수님의 시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최고의 부자로 이름을 날렸다는 록펠러를 보십시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의 한 때문에 미국 석유 90%를 차지하고도 만족하지 못하여 노동자를 심하게 착취하고 끝없이 욕심을 채우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등으로 의사는 죽음을 준비할 것을 선언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진정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체험을 한 것입니다.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일어나 기도하는 중에 더 파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석유 부자가 되었고 질병에서 치유 받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라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예수님 만나 완전히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그는 백만평이 넘는 12개 대학을 건립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대학 중에 시카코 대학은 지금까지 노벨상 52명을 배출한 명문대학입니다. 그가 일평생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어느 곳에도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돈은 내 돈이 아니요.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돈이기 때문에 대학 교회 어디에도 내가 돈을 내어 지은 대학이나 교회라고 쓰지 말라고 당부하였답니다. 그는 나중에는 십일조만 관리하는 직원 40명을 별도로 두었다고 합니다. 기자는 하도 이상하여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업가들은 돈을 빌려서라도 투자해도 안 되는 데 선생님은 십분의 일을 헌금하고도 어떻게 잘 됩니까? 그 때 그는 말하기를 그들은 겨우 보는 것이 3-4년 밖에 보지 못하지만 자신은 30-40년을 내다보고 투자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는 3천 개의 도서관을 설립했고 8천대의 오르간을 기증했습니다.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그는 "상속은 자식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망치게 하는 것이다. 저 세상으로 돈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세계적인 인재를 기르는 하버드 대학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만나 가치관이 바뀐 하버드 목사가 1639년 자신의 책 400여권과 작은 유산을 기증함으로 출발하여 지금은 얼마나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뮐러(George Muller)는 16살 되던 해에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었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술과 여자, 노름 등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차례 무서운 질병을 앓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뮐러가 20살 되던 해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놀랍게도 그의 삶에는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예배와 기도와 헌신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전 재산 13만 5천 달러의 돈을 불쌍한 고아들을 돕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애슐리에서 고아원을 세워 2천명이 넘는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하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42개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던 그는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백 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라는 시편 68:5의 말씀을 통해서 66년 동안 고아들을 양육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정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채 2천 명이 넘는 고아들에게 하루 세 끼를 제공했습니다. 그는 생애를 통해서 5만 번 이상 기도의 응답을 받았으며, 그 일을 통해서 15만의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세리장 삭개오처럼 변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정직하게 주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합니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으로 변해야 합니다. 언젠가 가야할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현세 중심에서 내세 중심으로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이룸의 가치에서 됨의 가치로, 가짐의 가치에서 나눔의 가치로, 그리고 지배의 가치에서 섬김의 가치로 인생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8.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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