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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질문(4)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태복음16:1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1170 추천수:1 218.147.218.173
2025-11-02 14:45:06

예수님의 질문(4)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16:15

 

예수님의 질문(4)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15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경상도 할머니 셋이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한 할머니가 "어이, 예수가 죽었단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할머니가 물었습니다. "와 죽었다 카드노?"

"못에 찔려 죽었다 안카나"

"어이구, 머리 풀어헤치고 다닐 때 알아봤다."

이때 아무 말 않던 할머니가 물었답니다. "어이, 예수가 누고?"

"몰라, 우리 며늘아가 아부지 아부지 캐쌌는거이 보이 사돈 어른인갑지 뭐!"

"그래, 문상은 갔드나?"

"아니 안 갔다."

"왜 안 갔노?"

"갈라 캤더니 사흘 만에 살아나따 카드라."

 

이 유머가 그저 우습기만 하십니까? 어쩌면 마지막 할머니의 질문, "예수가 누고?"라는 이 질문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같이 예배드리는 성도님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지난 2천 년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던져졌고,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15)

 

"김 목사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장로, 정 권사, 박 집사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의 운명을 가르는 '인생의 핵심 질문'입니다.

 

1. 질문의 배경: 가이사랴 빌립보 (여론의 현장)

 

오늘 이 중대한 질문이 어디에서 던져졌습니까? 13절을 보면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이곳은 그냥 평범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곳은 영적으로 가장 어둡고 혼란스러운, 3가지 의미를 가진 장소였습니다.

 

첫째, 황제 숭배의 중심지 (정치적 우상)였습니다.

이름부터 '가이사랴(Caesarea)'입니다. 로마 황제(Caesar)를 위한 도시라는 뜻입니다. 헤롯의 아들 '빌립(Philip)'이 황제를 위해 헌정한 도시입니다. 이곳에는 '()이 된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한 거대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Lord)'이자 '구원자(Savior)'로 불렸습니다. , 이곳은 '예수님'이 아닌 '황제'가 주인이요 구원자라고 선포되는, 세상 권력의 심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자 '구원자'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 즉 물질주의입니다. 돈이 우리의 '(Lord)'가 되어 우리의 시간과 열정, 심지어 양심까지도 요구합니다. '황제'가 아닌 '자본'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버린 세상, '성공'이라는 거대한 신전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는 이곳이 바로 21세기의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둘째, 이방 신전의 중심지 (종교적 우상)였습니다.

이곳은 거대한 암벽 지대였는데, 그 암벽에는 수많은 이방 신의 조각상과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의 목신(牧神) '(Pan)'을 숭배하는 중심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온갖 음란하고 광란적인 제의를 벌였습니다. '육체의 만족'이 종교가 된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어떻습니까? '즐거움''자기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쾌락주의(Hedonism)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인터넷, SNS, 미디어는 쉴 새 없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더 강한 쾌락을 약속합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너의 욕망에 충실해"라는 메시지가 ''의 피리 소리처럼 울려 퍼집니다. 즉각적인 만족을 위해 중독에 빠져드는 모습은 현대판 '판 신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셋째, '지옥의 문' (영적 절망)이라고 불린 곳이었습니다.

그 암벽 밑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이 있었고, 그곳에서부터 물이 뿜어져 나와 요단강의 발원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동굴을 지하 세계, '하데스(Hades)의 문' 또는 '지옥의 문(Gates of Hell)'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지만, 현대인의 내면은 극심한 정신적 공허함과 허무주의(Nihilism)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 만연한 우울증과 불안장애,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현대판 '지옥의 문'입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죽음의 절망과 허무함이 흐르는 동굴과 같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은 첫 번째 질문을 던지십니다.

돈이 구원이라는 물질주의(황제 숭배) 속에서, 쾌락이 행복이라는 향락 문화(판 신전) 속에서, 죽음과 허무함이 가득한 절망(지옥의 문) 속에서,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3)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4)

 

2. 세상의 대답: "훌륭한 선지자" (사회적 합의)

 

이 대답들은 틀린 대답입니까? 아닙니다. 전부 '최고의 찬사'입니다. '세례 요한'은 불의에 맞선 정의의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린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민족을 위해 울었던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평가', '여론(Public Opinion)'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당신에게 예수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 훌륭한 분이죠. 4대 성인 중 한 분 아닙니까?"

"사랑을 실천한 위대한 스승이죠."

 

이것은 '사회적 합의(Social Consensus)'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증거(Social Proof)'의 원리와 같습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그 정도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험하지 않고, 비난받지 않으며, 적당히 존경을 표하는 가장 '안전한' 대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안전한' 대답, '최고의 찬사'에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3. 예수님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신앙의 결단)

 

예수님은 여론을 확인하신 후, 제자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시며 두 번째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5)

 

헬라어 원문을 보면 '너희는(히메이스 데)'이라는 대명사가 문장 맨 앞에 나와 매우 강하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구별되는 '바로 너희는!'"이라는 강력한 촉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뭐라고 하든, 나와 함께 먹고 자고 내 기적을 보고 내 가르침을 들은 '너희만큼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은 '정보(Information)'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관계(Relation)'를 묻는 것입니다.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냐?"

예수님은 제자들이 더 이상 세상의 여론 뒤에 숨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제 너희의 입으로, 너희의 실존을 걸고 대답하라!"'결단의 촉구'입니다.

 

세상은 예수를 '관찰자'로서 '과거의 인물(엘리야, 예레미야)'에 빗대어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증인'으로서 '실존적 결단'을 내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4. 베드로의 고백: 구원과 생명의 선포

 

이 고백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에는 두 가지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주는 그리스도시요" (구속사의 '성취')

이것은 예수님의 '사명(Mission)'에 대한 선포입니다.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입니다.

인류는 아담의 타락 직후부터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3:15)을 기다렸습니다. 이후 다윗 왕가를 통해 오실 '영원한 왕'을 기다렸습니다. 로마의 압제 하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정치적 메시아'를 피가 끓도록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수천 년간 우리가 기다려온 그 '그리스도', 뱀의 머리를 부술 그 '여자의 후손', 영원한 왕국을 가져올 그 '다윗의 자손'... 바로 예수님 당신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모든 기다림이 끝났다는 구속사의 절정입니다.

 

둘째,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구속사의 '계시')

만약 "주는 그리스도시요"에서 끝났다면, 여전히 '인간 왕'의 범주에 머물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선포합니다.

 

구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말 못 하고 보지 못하는 모든 '죽은 우상'과 구별되는 야훼 하나님의 유일성을 선포하는 가장 강력한 고백이었습니다. (왕상 18:21, 115)

 

그런데 지금 그들이 어디에 서 있습니까?

''으로 불렸지만 이미 '죽은' 로마 황제의 신전 앞입니다.

생명 없는 돌을 깎아 만든 '죽은' 우상, '(Pan)' 신전 앞입니다.

모든 생명을 삼키는 '죽음'의 상징, '지옥의 문' 앞입니다.

 

바로 그 "죽음의 신들"이 지배하는 한복판에서, 베드로는 영적인 핵폭탄을 터뜨립니다.

"저 거대한 신전의 황제는 죽었습니다! 저 돌로 만든 판(Pan)은 원래 생명이 없습니다! 저 지옥의 문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이 모든 죽은 것들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유일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훌륭한 분'이라는 찬사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칭찬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고백은 베드로가 똑똑해서 얻어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직접 시몬의 마음에 조명해 주신 '계시'였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신앙을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약'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예수가 '좋은 스승'임은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나의 구원자'라는 사실은 이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오직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만 믿어지는 '신앙의 영역'입니다.

 

5. 고백의 결과: 반석과 교회 (신앙의 기초)

 

이 위대한 고백이 터져 나왔을 때,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너는 '베드로(Petros)'." ('작은 조약돌'이라는 뜻)

"내가 이 '반석(Petra)' 위에..." ('거대하고 움직이지 않는 암반'이라는 뜻)

 

예수님은 변덕스럽고(조금 뒤 '사탄' 소리를 듣는) '조약돌' 같은 베드로 '개인'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베드로가 고백한 이 위대한 '신앙 고백'이라는 '거대한 반석(페트라)'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디에 세워져 있습니까?

, 건강, 명예라는 모래 위에 세워져 있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여론 위에 세워져 있습니까?

 

예수님은 오직 이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공동체이자 개인의 삶)만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음부의 권세''지옥의 문(Gates of Hades)'입니다. 그들이 지금 서 있는 바로 그곳입니다!

예수님은 선포하십니다. "저 죽음의 권세, 저 어둠의 세력, 저 황제의 권력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이 고백 위에 세워진 내 교회를 절대로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6. 결론: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C.S. 루이스는 한때 무신론자였지만, 이 질문 앞에서 항복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두고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주님이시거나(Lord), 거짓말쟁이이거나(Liar), 미치광이(Lunatic)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론 내렸습니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나는 그분께 항복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아폴로 15호의 우주 비행사로 달을 걸었던 제임스 어윈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달나라 체험을 하기 전에는 주일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우주 비행을 마친 이후 달에서의 경험이 신앙적으로 큰 전환점이 되어 선교 기관을 만들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달 위를 걸었다고 대서특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2천년 전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지구 위를 걸으셨다는 것을 훨씬 더 큰 사건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역사 속 많은 과학자들도 같은 고백을 남겼습니다. 뉴턴은 성경에서 진리를 찾았고, 패러데이는 나의 희망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맥스웰은 죽기 전 나는 구속자를 믿는다고 고백했으며, 케플러는 별들을 연구하며 나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생각한다고 찬송했습니다. 인간게놈 프로젝트를 이끈 콜린스 역시 예수님은 내 주님이라 고백했습니다. 인류 지성의 정점에서도, 그들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과학은 우주를 설명했지만, 그들은 그 우주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질문은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던져집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혹시 우리에게 예수는,

내 성공을 도와주는 '인맥' 정도입니까?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심리 상담가' 정도입니까?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요술램프의 지니' 정도입니까?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일 뿐입니다.

 

오늘 주님은 성도님의 이름을 부르시며, 바로 성도님의 눈을 바라보시며 물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심지어 네가 교회에서 배운 지식 말고, '너는', '지금',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어떻게 정직하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B.C.A.D.가 갈릴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우리의 남은 인생의 기초, '반석'이 될 것입니다.

 

의심 많았던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베드로와 같은 위대한 고백이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요, 지금도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 고백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서, 세상의 그 어떤 '음부의 권세'도 이겨내며 승리하는 복된 한 주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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