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질문(3)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마가복음4:40
재정적 위기, 자녀 문제, 직장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악화시키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바로 이 '두려움의 덫'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하다 광풍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35절을 보세요. 저녁에 "저편으로 건너가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광풍을 만난 것입니다. 이 배에 탄 제자들 중 다수는 누구입니까?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그들은 평생을 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 어부들입니다. 갈릴리 호수에 대하여 잘 안 사람들입니다. 저녁 시간대에 갈릴리 호수에서는 기온 차로 인한 돌풍이 자주 발생한 것을 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순종했습니다. 순종한 그들에게 평범한 폭풍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경험과 기술을 무력하게 만드는 큰 '광풍(a furious squall)' 다가왔습니다. 사방에서 몰아치고, 생명을 위협하는,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거대한 돌풍입니다. 그들은 어부였기 때문에 웬만한 바람과 파도는 그들에게 일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지금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에 무엇이 보였습니까? 38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배는 당장이라도 뒤집힐 듯하고, 물은 차올라 죽기 직전인데, 그들이 '선생님'이라 부르며 따르던 예수님은 배 끝에서 베개를 베고 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두려움의 덫에 갇힌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라기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가 내뱉는 원망과 비난입니다. "당신은 지금 잠이 옵니까? 우리가 죽어가는데 어쩜 저렇게 무관심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똑같지 않습니까? 암 진단을 받고, 사업이 부도나고, 자녀가 속을 썩이는 인생의 광풍을 만났을 때, 평안해 보이는 하나님을 향해 소리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제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주무시고 계십니까? 정말 저를 돌보지 않으시는 겁니까?" 두려움은 우리의 신앙고백을 순식간에 원망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십니다. 예수님은 당황한 제자들을 먼저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먼저 문제의 근원, 즉 광풍을 향해 명령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Quiet! Be still!)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편도체 납치에서 풀려나 멍하니 서 있는 제자들을 향해 질문하십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4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왜 무서워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무서워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너희의 두려움이 도를 넘었다. 너희의 두려움은 너희가 가진 믿음과 양립할 수 없다'는 질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지독한 두려움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광풍 속에서도 '믿음 없음'을 책망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 있음'을 칭찬받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두려움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함께 계신 예수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배에 '함께 타고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미쳐 날뛰는 파도만 보였고, 배에 가득 차오르는 물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편도체 납치'는 우리에게 극도의 '고립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는 뇌의 감정 중추인 편도체가 논리적 사고를 담당하는 전전두엽을 압도하면서, 즉각적인 공포 반응(투쟁, 도피, 얼어붙기)을 유발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때 인간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을 잃고, ‘나는 혼자다’, ‘이건 끝이다’라는 극단적인 결론으로 치닫는다는 것입니다. “두려움 → 고립감 인식 → 더 큰 두려움 → 절망” 이것이 두려움의 악순환입니다.
두려움은 고립감을 먹고 자랍니다. 편도체가 납치당하면 우리는 즉시 '나 혼자다'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어. 이 문제는 나 혼자 감당해야 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셨음에도, "우리가 죽게 되었다"며 완벽한 고립 상태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광풍을 만날 때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내 배에 주님이 함께 타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광풍 속에서 어떻게 주님의 임재를 인식합니까?
첫째, 의식적으로 선포하십시오.
믿음의 사람들은 그 폭풍 속에서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두려움의 파도가 여러분의 마음을 덮칠 때, 시선을 파도에서 돌려 배 안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을 원망하기 보다는 주님이 함께 하심을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 지금 이 배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 소리 내어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편도체의 경보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나 혼자'라는 거짓말에서 시작되고, 믿음은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진실을 선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혼자가 아니라는 인식,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입니다. 연결감(belongingness)은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견디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의 악순환을 끊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나는 혼자가 아니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즉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두려움으로 편도체 납치가 되는 순간입니다. 풀무불에 던져지기 직전에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다니엘 3:17-18)라고 선포합니다.
홍해 앞, 애굽 군대가 뒤쫓아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선포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애굽기 14:13-14)
둘째, 과거를 기억하십시오.
야곱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도망갔을 때 벧엘에서 깨어나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과거에 주님이 함께하셨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이 현재의 임재를 확신하게 합니다.
지난 광풍을 어떻게 통과했습니까? 주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지금도, 앞으로도 함께하십니다. 다윗은 목숨의 위협과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두려움을 넘은 이유를 명확히 밝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편 23:4)
골리앗 앞에 서 있는 다윗을 보십시오. 그 때 어떤 고백을 합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사무엘상 17:37)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과거에 하나님이 지켜주신 경험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내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의 강함을 보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합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너의 눈으로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신명기 7:18-19)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서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그 불 속에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깜짝 놀라 묻습니다.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단 3:25).
야곱이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믿음의 사람들은 폭풍 속에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두려움의 파도가 여러분의 마음을 덮칠 때, 시선을 파도에서 돌려 배 안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2. 두려움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신뢰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선생님이여!"
이것이 그들의 두 번째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위대한 스승, 훌륭한 랍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광풍을 멈출 수 없습니다. 훌륭한 랍비도 제자들과 함께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그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선생님' 수준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에 발생한 지극히 합리적인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까지'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셨을까요? "너희는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향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광풍을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창조주만이 자연을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애착 이론의 대가인 존 볼비는 인간은 불안할 때 '안전 기지'를 통해 심리적 안정을 찾는다고 말합니다. 어린아이가 넘어져 울다가도 엄마가 달려오면 울음을 멈춥니다. 자신을 지켜줄 절대적인 존재를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안전 기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선생님'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안전 기지는 '절대적 능력'을 가진 존재여야 합니다. 아이에게 엄마가 안전 기지인 이유는 엄마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아이가 믿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의 안전 기지가 되려면, 그분이 '바람과 바다도 순종시키는 창조주'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내 문제보다 작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암이라는 광풍 앞에서 예수님을 '위로자' 정도로만 생각하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생명의 주관자'로 믿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재정적 광풍 앞에서 예수님을 '조언자' 정도로만 생각하면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만물의 주인'으로 신뢰할 때, 우리는 바울처럼 자족의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을 '위로자' 정도로만 믿고 '문제 해결자'로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4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감정은 또 한 번 변합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들은 40절에서 광풍을 '무서워했습니다'(Terror).
그러나 41절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심히 두려워하게'(Awe) 되었습니다.
이것이 두려움을 이기는 핵심입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대체하는 것. 내 문제에 대한 공포보다, 그 문제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지를 깨닫고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만 보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분을 '창조주 하나님', 내 삶의 '안전 기지'로 신뢰할 때, 두려움은 경외심으로 바뀔 것입니다.
“누가 나와 함께 있는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강하고 선한 존재인가?”는 공포 반응을 완화하는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두려움의 순환 구조인 “상황의 위협 → 통제 불가 인식 → 감정의 폭주 → 고립감 및 무력감 → 극단적 공포”에서 그 고리를 끊으려면 더 크고, 신뢰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하여야 합니다. 그 대상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생각이 감정을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생님이다” 그러니 “해결할 수 없다”라고 하면 두려움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주시다” 그러니 “문제보다 크다”라고 사고하면 평안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다루려면, 상황이 아니라 해석의 틀을 바꾸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Who He is)가 본질적 해결책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두려움의 질이 바뀝니다.
예수님을 ‘선생님’ 나와 비슷한 인간으로 아직도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상황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조언자 나를 도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내 인생과 죽음까지 다스리시는 전능한 구세주이십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도덕적 교사로 좋은 영향력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과 권위를 지닌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믿습니까?
3. 두려움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예수님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었습니까? 35절, "저편으로 건너가자."
그 '저편'은 어디였습니까? 바로 다음 장인 마가복음 5장을 보면, 그곳은 '거라사인의 지방'입니다. 그곳에는 군대 귀신 들린 한 사람이 쇠사슬도 끊으며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이 배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이 배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선교선'이며 '전투함'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항공 모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광풍의 정체는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한 기상 이변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저편'으로 가려는 예수님의 사역을 가로막으려는 사탄의 필사적인 저항, 즉 영적 방해였습니다. 창세기 때부터 여인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짓밟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복의 근원, 인류의 구세주가 태어날 것을 에덴 동산에서부터 사탄을 방해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언약의 후손이 태어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애굽에서 유대인의 남자 아이를 다 죽이도록 했습니다. 이세벨은 다윗의 후손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유아살해를 감행했습니다.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영적인 눈으로는 궁극적으로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영적 그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살아남는 것'에만 몰두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편에 도착하는 것'이라는 목적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다면, 그 배는 반드시 저편에 도착합니다. 사탄이 아무리 광풍을 일으켜도 그 배를 침몰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나치 수용소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극한 상황을 이겨내는 힘은 '왜 사는지'를 아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거의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He who has a why can bear almost any how)."
제자들이 광풍 속에서 무너진 이유는 '왜 저편으로 가는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이 항해는 그저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이동'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이것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이었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광풍도 '장애물'이 아니라 '통과 지점'으로 봅니다.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출소 후 집필해야 할 책'이라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적은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까? 가정을 믿음으로 세우는 것, 직장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 교회를 섬기는 것. 그것이 우리 성도님의 '저편'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감당하려 할 때, 반드시 광풍이 붑니다. 재정적 어려움, 사람들의 반대, 건강의 문제가 닥칩니다.
이때 '편도체 납치'를 당하면 "아,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너무 힘들다.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후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릅니다.
이 광풍은 내가 '잘못된 길'을 가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기에 만나는 영적 저항입니다.
사명, 소명, 목표의식이 강할수록 고난 중에도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회복력이 생깁니다. 목표가 크고 명확할수록, 사람은 고통을 감수하고 도전을 지속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목표가 흐릿하거나 동기가 약할 때, 위기 앞에서는 쉽게 회피 반응이 나타납니다. 두려움을 이기려 하지 말고, 목표에 집중하면 두려움은 자연히 작아진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수많은 매질과 굶주림 속에서도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빌 3:14)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저편', 곧 사명이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항구로 돌아가라'고 속삭이지만, 믿음은 우리에게 '주님의 목적지를 향해 노를 저으라'고 명령합니다.
주님이 "가자"고 하신 배는 절대 침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크고 작은 광풍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연약한 편도체는 비상벨을 울리고 우리는 두려움의 덫에 갇힙니다. "하나님, 왜 저를 돌보지 않으십니까?"
오늘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 두려움의 악순환을 끊고 영적 풍요를 누리려면,
첫째, 내 배에 '함께 계신 예수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임재)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선포하고, 과거를 기억하십시오.
둘째, 예수님의 '정체성'을 신뢰해야 합니다. (신뢰)
그분은 '선생님'이 아니라,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내 삶의 '안전 기지'로 삼으십시오.
셋째, 예수님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명)
주님이 가자고 하신 배는 반드시 '저편'에 도착합니다. 광풍은 영적 저항일 뿐, 장애물이 아닙니다.
이번 주간, 두려움이 찾아오면 이렇게 하십시오.
1단계: 멈추십시오(Stop)
편도체가 납치당하려는 순간, 심호흡하며 "주님, 여기 계십니다"라고 선포하십시오.
2단계: 정체성을 확인하십시오(Remember)
"이 문제보다 크신 분이 나와 함께하신다" 고백하십시오.
3단계: 목적을 붙드십시오(Refocus)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둔 이유가 있다" 사명을 재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의 손에 있는 휴대폰 메모장에 지금 이 세 문장을 적어두십시오. 두려움이 올 때마다 꺼내 읽으십시오.
- "주님, 여기 계십니다" (임재)
- "이 문제보다 크신 분이 함께하십니다" (신뢰)
-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두셨습니다" (사명)
여러분의 삶에 지금 어떤 광풍이 불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시선이 파도에 고정되어 "죽겠다"고 소리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잠잠히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세상에 대한 '무서움(Terror)'이, 오늘 주님에 대한 '심히 두려워함(Awe)', 즉 '거룩한 경외심'으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광풍보다 크신 주님이 우리 배에 함께 계십니다. 그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주님이 명하신 '저편'에 넉넉히 도착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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