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질문(2)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5:6
동물원의 코끼리는 가느다란 쇠사슬 하나에 묶여 있습니다. 힘이 센 코끼리가 왜 도망가지 못할까요? 어릴 때부터 굵은 쇠사슬에 묶여 자라면서, 수없이 도망치려 애쓰다가 결국 '나는 절대로 이 쇠사슬을 끊을 수 없다'는 무력감을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학습된 무기력증이라고 합니다. 다 자라서 쇠사슬을 끊을 힘이 충분히 생겼음에도, 과거의 실패 경험이 만들어낸 마음의 사슬에 갇혀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5장에서 이 코끼리와 같이, 3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절망’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 있던 한 남자를 만납니다. 그가 누워있던 곳은 베데스다 연못가,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곳입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은 희망의 장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단 한 사람의 기적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경쟁하고 좌절하는, 처절한 절망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경쟁 사회는 겉으로는 ‘자기계발’과 ‘성취’를 강조하지만,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절망의 구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처럼, 겉보기엔 ‘기회’가 열려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단 한 명만이 선택받는 구조 속에서 대부분은 상처와 피로를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들어가야 산다”는 무한 경쟁의 구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는 “빠른 자가 살아남는다”는 공식이 지배합니다. 입시에서는 상위 1%만이 명문대의 문을 통과하고, 취업 시장에서는 수천 대 일의 경쟁률 속에서 단 한 명이 합격합니다. 직장에서도 한정된 승진 자리, 인센티브, 평가 점수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반복됩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들이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야’ 했던 것처럼, 오늘의 인간은 끊임없이 ‘먼저’, ‘더 많이’, ‘더 빨리’를 외칩니다. 그러나 그 경쟁의 끝에는 진정한 치유나 평안이 아닌 피로와 소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가치가 숫자로 환원되는 성과 중심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학생은 성적으로, 직장인은 실적으로, 심지어 인간관계마저 팔로워 수와 좋아요로 평가받습니다. 이런 환경은 우리를 끊임없는 비교와 열등감으로 몰아넣습니다. 남보다 뒤처질까 두려워 쉼 없이 달리지만, 결국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는 ‘성과의 중독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의 세상은 ‘자비의 집’ 같지만 실제로는 절망의 집인 베데스다형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기회, 성장,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비의 집’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사람의 성공을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구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합격은 다른 이의 탈락 위에 세워지고, 누군가의 승진은 또 다른 이의 좌절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베데스다의 역설입니다. 앞으로는 더 심각해 질 것입니다. 지금은 인공지능 시대라고 합니다. 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영웅이 지배하는 사회로, 그리고 인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기계가 지배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공지는 시대는 극소수의 인공 지능 전문가와 소수의 인공 진능 잘 활용하는 각분야의 전문가와 다수의 육체 노동자로 직업이 분화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메타가 인재를 영입하는데 2800억원을 제시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기술자 봉건 주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극소수가 부를 차지하는 구조로 세상은 점점 변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경쟁에서 밀려난 자, 포기한 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에게 다가오셨습니다. 38년 된 병자입니다. 1세기 로마 제국 당시에 인간의 평균 수명은 25-35세로 알려져 있습니다. 높은 영유아 사망률 때문입니다. 절반 가까이가 10살되기 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만약 한 아이가 위험한 유년기를 무사히 넘겼다면 평균적으로 40대 후반에서 50대까지 살았고 60-70대까지 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38년은 참으로 긴 시간입니다. 그의 인생 전부가 병상 위에서 흘러가 버린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은 ‘변화 없는 기다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다가가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이상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놀라운 건, 예수님은 그의 병 상태나 원인을 묻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으십니까? 병원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낫고 싶으세요?”라고 묻는 의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당연한 질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질문은 결코 불필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육체의 상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의 중심, 그의 ‘의지’를 향한 주님의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치유할 능력”이 아니라 “치유받을 의지”에 있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주님의 음성 앞에 우리의 의지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상태’보다 ‘의지’를 보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이 오래된 것을 ‘아시고’(γνοὺς) 다가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 우리의 상처, 우리의 실패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과거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바로 지금, 우리의 ‘의지’를 보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에서 '낫고자 하느냐'는 헬라어로 ‘θέλεις(텔레이스)’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바람(want)이 아닙니다. ‘결단이 담긴 의지(will)’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에게 "막연히 나았으면 좋겠니?"라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끝내기로 결정했느냐? 너는 변화를 향해 움직일 의지가 있느냐?" 라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를 위해 의지는 중요합니다. ‘지식’이 방향을 알려주고, ‘감정’이 동기를 주지만, 실제 삶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의지(will)입니다. 지성은 생각하게 하고, 감정은 느끼게 하지만, 의지는 살게 합니다. 의지는 “하고자 하는 마음”, 즉 결정하고 실행하는 능력입니다. 지식은 머리의 문제이고, 감정은 마음의 문제라면, 의지는 ‘결정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통찰이 있어도, 의지가 없으면 변화는 없습니다. 의지는 믿음을 실행으로 옮기는 다리입니다. 의지는 삶의 품질을 결정합니다. 지식은 도구일 뿐, 의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세워지지 않습니다. 의지는 단지 ‘시작하는 힘’이 아니라, 지속하게 하는 힘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결합될 때 능력이 됩니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말했습니다. “의지는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그 의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신앙인에게 의지는 삶을 변화시키는 ‘신앙의 엔진’입니다. 의지가 없는 믿음은 공허한 이상이고, 의지가 있는 믿음은 현실을 바꿉니다.
우리는 종종 상황을 바꾸길 원하지만, 자신은 바뀌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냥 이렇게 살래요.” “이제는 너무 늦었어요.” 이런 말 속에는 포기한 마음의 습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의 고착을 깨뜨리십니다. “지금이라도 네가 낫고자 하느냐?” 상태 중심의 사고를 의지 중심의 사고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의지 마비를 깨우는 심리적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이었었습니다. 오랜 실패나 좌절을 반복 경험한 사람이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시도조차 하지 않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기적의 가능성보다는 자신의 무력함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건강, 관계, 신앙, 감정의 영역에서 수많은 ‘베데스다의 연못’을 만들어 놓고 살아갑니다. “수없이 해 보았는데” “상황이 나아지면…” “누가 나를 도와주면…”을 반복하면서, 변화를 미루는 심리적 연못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 연못가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지금 네 의지는 온전함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하느냐?” 예수님은 우리의 병보다 의지를 먼저 고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보다 ‘의지’를 먼저 보십니다. 익숙한 불행에 안주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5절 보십시오. 38년 된 병자라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누워있다는 것입니다. 병이 오래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것입니다.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젊을 때 병을 얻었다면, 이제는 노년이 되었을 시간입니다. 그의 삶은 병상 위에서 시작해서 병상 위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도 간절히 낫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물이 동할 때마다 어떻게든 먼저 들어가 보려고 발버둥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다른 건강한 사람들이 먼저 뛰어 들어갔고, 힘없는 그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 이틀, 일 년, 십 년…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간절함은 점차 체념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희망은 절망이 되고, 열정은 무기력으로 변해갔습니다.
사람은 고통 속에서도 오래 머물다 보면, 그 고통에 익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불행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익숙한 불행’의 덫입니다. 의지가 병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변화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이 지긋지긋한 죄의 습관을 끊게 해주세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세요.”, “이 상처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익숙한 죄와 상처 속에 머무르기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는 변화를 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그 사람을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더 큰 용기와 에너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음란물에 빠져 사는 것은 영혼을 파괴하지만, 그것이 주는 순간적인 위안과 쾌락을 포기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열등감과 피해의식 속에 사는 것은 괴롭지만, 그것을 ‘내 탓이 아니야, 세상 탓이야’라고 변명하며 책임지지 않는 삶의 방패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영적 베데스다’에 누워, ‘언젠가 기적이 일어나겠지’, ‘누군가 나를 도와주겠지’라며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그 익숙한 절망과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네가 정말로 낫고자 하느냐?”
의지는 단지 마음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으신 생명의 불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뜻을 이루고자하는 의지를 통해 일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소원(θέλω)’을 심으시고, 그것을 실행하게 하십니다.
2. 우리의 변화를 가로막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변명’이라는 감옥입니다.
우리의 변화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이 날카로운 질문에 병자는 "네, 주님!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낫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긴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는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말하는 대신, 낫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긴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의 대답을 분석해 보면 세 가지 ‘남 탓’이 들어있습니다.
첫째, “사람이 없어서”라는 관계 탓입니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 탓으로 돌립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탓합니다. "나를 연못에 넣어 줄 어머니가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 탓으로 돌립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상처를 줘서...", "배우자가 날 이해 못 해서...", "교회 성도들이 날 힘들게 해서..." 우리는 늘 내 문제의 원인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서 찾습니다. 사실 감사를 모르는 것입니다. 원망할 것만 찾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준 은혜가 너무나 많은데 그것은 보지 못하고 불리한 것만 보며 탓하는 것입니다. ‘나를 도와줄 가족도, 친구도 없습니다. 나는 버림받았습니다.’라는 피해의식입니다. 타인을 탓하는 피해자 사고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외부 환경이나 타인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나를 이렇게 만든 건 ○○ 때문이다”라는 사고에 머뭅니다. 이것은 잠시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지만, 결국 변화의 주도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심리적 함정이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먹었느냐?” 물으셨을 때, 그는 “주께서 내게 주신 여자가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답합니다(창 3:12).
그의 말 속에도 “내가 잘못했습니다”는 없고, 오직 “그 여자가… 그리고 주님이 그 여자를 주셨으니…”라는 이중의 남 탓만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일으킨 원인을 외부로 돌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피해자 사고’입니다. 승진에서 탈락하자 “상사가 나를 싫어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잘못되면 부모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기회를 못 받아서 그래요”라는 말 뒤에는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심리적 면허증이 숨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면허증’을 찢어버리시며 묻습니다. “네가 정말로 낫고자 하느냐? 남이 아니라 너는 어떠하냐?”
둘째, "내가 가는 동안에"라는 환경 탓입니다.
자신의 연약한 조건과 환경을 탓합니다. ‘나는 힘이 없고 느립니다. 내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라는 무력감입니다. 그는 자신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를 환경의 제약 탓으로 돌립니다. “나는 힘이 없습니다. 너무 늦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유리합니다.” 38년이면 그냥 구루고 굴러 맨 앞까지 와서 대기했다가 물이 동하면 떨어지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학습된 무기력’의 전형적 표현입니다. 마틴 셀리그먼은 개가 반복해서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나중에는 문이 열려 있어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실험으로 이를 입증했습니다. 사람도 비슷합니다. 오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 “나는 안 돼”라는 자기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덫에 걸립니다. 없는 것 보며 원망하고 탓하지 말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없어진 것 보며 원망 불평하며 포기하지 말고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쓰임받아야 합니다.
기드온도 이같은 변명했습니다. 사사기 6장에서 하나님이 “큰 용사여, 너는 가서 이스라엘을 구하라”고 하셨을 때, 기드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집은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입니다”(삿 6:15).
“부모가 가난해서 나는 어떨 수 없다. 나는 원래 내성적이라 전도를 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보호 전략입니다. 실패했을 때 상처받지 않기 위해 미리 “내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셋째,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서"라는 세상 탓입니다.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힘 있고 운 좋은 사람들이 다 가져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세상을 원망합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입니다.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진 경쟁자들, 세상을 탓합니다.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힘있는 자들이 모든 것을 독차지합니다.’라는 세상에 대한 원망입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실패를 “세상이 불공평해서”라고 정당화합니다.
“힘 있는 사람, 연줄 있는 사람, 운 좋은 사람만 성공한다.”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 박탈감과 사회적 비교에서 오는 심리 현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리언 페스팅거(Festinger)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타인과 비교해 자존감을 유지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비교의 초점이 ‘성장’이 아니라 ‘불만’일 때, 그 마음은 빠르게 냉소와 피해의식으로 타락합니다. 가인은 아벨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자 하나님께 분노했습니다(창 4:5). 사울은 다윗이 백성의 찬양을 받자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로다”에 분노했습니다(삼상 18:7-8). 두 사람 모두 비교의식이 죄의 문을 열었습니다. 가인은 “아벨 때문”이라 탓했고, 사울은 “백성들이 다윗만 추켜세운다”며 세상 탓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 시기와 열등감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38년된 병자의 말 어디에도 자신의 의지나 책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가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제가 게을렀습니다…” 라는 고백이 없습니다. 오직 환경과 타인에 대한 원망뿐입니다. 38년이라는 시간은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도 병들게 하여 ‘남 탓’이라는 바이러스에 깊이 감염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왜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말씀을 들었는데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시스템이 문제입니다.”, “목사님 설교가 은혜가 안됩니다.”, “구역 식구들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라고 변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말씀을 들었는데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까? “어릴 적 부모님께 받은 상처 때문입니다.”, “배우자가 나를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이 세상 때문입니다.”
물론 환경의 영향, 타인의 잘못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환경이나 과거를 묻고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너의 의지’는 어떠하냐고 묻고 계십니다. “네가 그 모든 환경과 조건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낫기를 원하느냐?”
언제까지 남 탓만 하고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과거에 발목 잡혀 주저앉아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환경 탓만 하고 있겠습니까? 진정한 치유와 변화는 내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을 멈추고, 내 의지를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내어놓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 다른 사람 탓이 아닙니다. 제 문제입니다. 제 의지가 약합니다. 제가 예배드릴 의지가 없습니다. 제가 건강해질 의지가 없습니다. 제가 천국에 갈 의지가 없습니다. 제가 행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습니다. 제가 용서할 의지가 없습니다. 제가 진정한 부자로 살 의지가 없습니다. 제가 변화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고백이 터져 나올 때, 비로소 주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나빠서요.” “가정이 그래서요.” “교회가, 시대가 그래서요.” 그러나 진짜 문제는 ‘내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 물어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의지는 어떠하냐?” “상처와 환경, 세상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전히 일어나고자 하느냐?” 진정한 치유는 변명을 멈추고 ‘내 책임’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주님, 이건 다른 사람의 탓이 아니라 제 문제입니다. 저의 마음이 게을렀습니다. 저를 일으켜 주십시오.”
이 고백이야말로, 38년 된 무기력에서 일어나게 하는 첫 기적의 불씨입니다.
3. 우리의 의지가 반응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변명을 듣고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의 잠자는 의지를 깨우는 강력한 명령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8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세 가지 단계적인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단순한 치유 명령이 아니라, 심리적·영적 회복의 3단계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놀라운 구조입니다. 이 세 구절은 오늘날 심리학적으로 보면 ‘변화의 단계(Stages of Change)’, 또는 ‘회복 탄력성(Resilience)’의 과정과 일치합니다.
첫째, “일어나라!”(에게이레) 입니다.
이것은 과거와의 단절, '영적 기상' 명령입니다. 절망과 자기 연민의 자리에 더 이상 누워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분이 나아지면 일어날게요"가 아니라, "일어날 때 새 힘을 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로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수동성의 파괴를 말합니다. 의지의 각성을 말합니다. "변명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말씀은 단순한 동작 명령이 아니라, 심리적 각성(awakening)입니다. 38년 동안 그는 움직이지 않는 ‘수동성’에 길들어 있었습니다. 학습된 무기력으로 인해 오랜 실패와 좌절을 겪어 “나는 해도 소용없어”라는 무력감 속에 ‘심리적 마비’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어나라”는 바로 그 무기력의 회로를 끊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라는 명령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일으키면 되지 뭐 일어나라고 말씀하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예수님은 38년 동안 누워 있던 그 절망의 자리, 무기력의 자리, 자기 연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영적으로 먼저 일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말고, 변화를 향한 의지를 믿음으로 발동시키라는 강력한 촉구입니다.
혈루증 여인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낫겠다” (막 5:28)라는 믿음의 의지를 갔습니다. 여인의 내적 결단(의지)이 예수님의 능력과 연결됩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막 2:5) 즉 ‘보시고’ 역사하십니다. 의지의 반응이 은혜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능력이 제한됩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마 13:58)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전능이 제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신이 은혜의 수용을 막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 관계 속에서는 일반적으로 강제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문을 두드리시되 “문을 열면 들어가겠다” 하십니다.(계 3:20)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의지적 문을 통해 들어옵니다.
“일어나라”는 감정 이전에 의지의 결단이 먼저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장면입니다. 이 의지의 결단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행동이 감정을 이끈다”라는 말입니다. 심리치료에서 우울증 치료의 핵심 중 하나는 기분이 좋아져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움직여야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작은 행동 하나(산책, 전화, 정리)가 정서 회복의 시동 스위치가 됩니다. 예수님의 “일어나라”는 바로 ‘행동이 감정을 깨운다’는 원리의 영적 명령이었습니다. 예순님이 일어나라고 하시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행동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의지의 선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네 자리를 들고!”(아론 톤 크라밧톤 수) 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과거의 재해석, 즉 '상처를 증거로 바꾸라'는 명령입니다. 그가 누워있던 ‘자리’는 38년의 실패와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나를 고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승리의 기념품'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픈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상처가 별이 되는 기적입니다. 심리학적 용어로 말하면 과거의 재해석입니다. 그 자리는 38년의 실패와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증언의 도구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즉, 과거의 고통을 부정하거나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리고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겪었지만,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이다”(창 50:20).
그의 “감옥”은 그의 실패의 자리였지만, 훗날 하나님의 섭리를 증언하는 자리로 바뀝니다.
“자리를 들고” 간다는 것은 상처를 증거로 바꾸는 회복의 기술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라고 부릅니다. 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일수록, 그것을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할 때 더 강한 내적 회복력과 감사의 태도를 갖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상처를 덮지 말고, 들고 나와 하나님이 고치신 증거로 삼아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재해석하여 증거로의 전환하고 "실패를 증언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셋째, “걸어가라!”(페리파테이)입니다.
이것은 미래를 향한 전진, '새로운 삶으로의 행진' 명령입니다. 더 이상 과거의 병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증인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디딜 때, 주님께서 우리의 갈 길을 여십니다. 새 정체성을 가지고 미래를 향한 전진하며 "이제 증거자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치신 후에 그냥 그 자리에 머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건강과 새로운 삶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이제 단순한 병자가 아니라, 증거자(Testifier)로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명령이 38년 된 병자에게는 불가능하게 들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한 번도 스스로 일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자신의 불가능한 현실을 본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일어나려고 의지를 발동시키는 그 순간, 38년 동안 굳어 있던 그의 근육과 신경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순종을 통해, 기적은 완성되었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우리의 간절한 ‘원함’에서 시작되어,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결단’으로 완성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네 상처의 자리를 들고, 다시는 그곳에 눕지 않겠다고 결단하라! 그리고 이제 나를 따라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
그때 이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9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말씀이 우리 성도님들의 반응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 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주의해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유대인 율법으로는 그의 행위는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의지했던 유대인의 규례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믿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어떤 경우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바로 의지의 결단을 하고 행동화할 수 있습니다.
‘곧’(유데오스)는 ‘ 즉시’ ‘지체 없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즉시 반응하는 믿음의 행위가 즉각적인 변화의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우리의 반응 위에 역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바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의지는 약하여 바로 반응하지 않으면 쉽게 살아집니다. 은혜의 초청에는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시간 속에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의지는 휘발성이 있어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Baumeister)의 연구에 따르면, 결단 후 24시간이 지나면 행동으로 옮길 확률이 40% 이상 감소한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도 “주여, 나를 오라 하소서”라며 즉각 믿음으로 걸음을 내디뎠을 때 바람 위를 걸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일어날 때도, “나오라”는 말씀에 즉각 순종할 때 생명이 역사했습니다. 사울(바울)도 다메섹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즉각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행 9:6)라고 반응하고 따랐습니다. 마태도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라고 하실 때 즉가 그가 일어나 따랐습니다.(마 9:9)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의 문을 통하여 들어오십니다. 닫힌 마음에는 능력도 머물지 못합니다.
주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신 뒤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반응을 기다리십니다. 의지가 반응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일어설 용기를 낼 때, 주님은 들게 할 힘을 주시며, 우리가 걸어갈 믿음을 가질 때, 예수님은 미래의 길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결국 어떻게 합니까?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자신을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중독된 습관을 끊기보다, "이게 나니까"라며 합리화합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보다, "그 사람이 먼저 변해야지"라며 미룹니다.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기보다, "이제 나이도 있고…"라며 타협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치유의 첫걸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간절한 원함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은 강제로 고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원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마 7:7) 변화는 '의지의 결단'으로 시작됩니다.
주님의 질문 앞에 서십시오.
예수님은 오늘도 베데스다 연못가 같은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십니다. 오랜 시간 움츠러든 상처, 습관, 죄, 절망의 자리에 묻습니다. "너, 정말 낫고자 하느냐?"
그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믿음의 새 출발점입니다. 38년 된 병자도, 그 한마디 순종으로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아무리 길어도, '오늘'이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베데스다는 어디입니까?
혹시 우리 성도님의 삶에 38년 된 병자와 같이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아 이제는 체념해버린 문제는 없으십니까?
끊어내려고 수없이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이제는 포기해버린 죄의 습관은 없으십니까?
너무 깊어 아무도 만져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상처는 없으십니까?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단정해버린 깨어진 관계는 없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오늘 주님은 당신이 그 익숙한 절망의 자리, '영적 베데스다'에 더 이상 머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성도님을 묶고 있던 과거의 실패와 상처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일어나십시오. 변명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네 자리를 들라!" 다시는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굳은 결단으로 성도님의 낡은 정체성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실패를 증언으로 바꾸십시오.
"걸어가라!" 주님이 주시는 새 힘과 능력으로, 믿음의 새로운 삶을 힘차게 시작하십시오. 이제 증거자로 나아가십시오.
의지를 주님께 드리십시오
우리 성도님이 진정으로 낫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성도님의 의지를 주님께 드리십시오. "주님, 제가 원합니다! 이 죄에서, 이 상처에서, 이 무기력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주님의 질문에 답하십시오. 오늘 이 시간,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우리의 상태가 아니라 의지를 향합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변명이 아니라 믿음의 반응을 기다립니다.
38년 된 병자도 "곧"(εὐθέως) 일어났습니다. 지체 없이, 즉각적으로,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우리의 베데스다는 어디입니까?
오늘, 지금, 이 순간, 주님의 "일어나라"는 음성에 "예, 주님!"으로 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남 탓과 환경 탓을 하며 변명하는 것을 멈추고,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이 시간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베데스다, 그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치유와 회복을 명하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고 믿음으로 걸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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