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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질문(1) “무엇을 구하느냐 ”(요한복음1:35-3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47026 추천수:2 218.147.218.173
2025-10-05 12:32:20

예수님의 질문(1) “무엇을 구하느냐
요한복음1:38

 

내일이 우리의 고유 명절인 추석입니다. 추석이면 부모님이 살아계신 분들은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이는데 어느 장로님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대대로 예수님을 믿는 가정이라 모이면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마지막엔 꼭 교회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동생이 장로님에게 형님, 우리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시원치 않아요!”라고 말하니까 장로님이 교회는 설교만 있는 것이 아니잖냐. 기도, 찬양, 헌금, 봉사, 교제, 구제, 전도, 선교, 사랑, 헌신도 있잖아. 신앙생활한 지 오래되었고, 안수집사가 아직도 설교 평가하고 있냐?”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동생이 그래도 설교가 영~ 은혜가 안 돼요!”라고 불평을 했답니다. 그러자 형님 장로님이 예습을 해야 공부가 재미있듯이 설교가 귀에 안 들어오면 너도 성경 공부를 더 하거라!”라고 했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왜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등록하고 다닐 교회를 찾기 위해 이 교회 저 교회에 가 보았는데 교회에 가면 어르신은 예수님보다 정치와 건강에 관심이 많고, 중년은 예수님보다 부동산과 직장, 사업에 관심이 많고, 청년은 예수님보다 주식과 비트코인에 관심이 많고, 학생은 예수님보다 진학과 외모에 관심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무엇에 관심이 많습니까?

 

1. 모든 여정의 시작: 추천과 호기심 (35-36)

본문의 두 제자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종교적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메시아를 기다리던 구도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신실한 목회자나 영적 지도자 밑에서 훈련받던 사람들입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던 사람들입니다. 착하게 살려고 애쓰고, 종교적 규칙을 지키던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특정 목사님이나 교단, 혹은 교회 프로그램에만 의지하던 신자들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스승 세례 요한이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며 외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압축한 한 문장입니다. '어린 양'은 세 가지를 상징했습니다.

첫째,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킨 구원의 상징입니다.

둘째, 속죄제 어린 양입니다. 성전에서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대속의 상징입니다.

셋째, 이사야 53장의 어린 양입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침묵하며 고난받을 메시아입니다.

세례 요한은 지금 "저분이 바로 너희가 평생 기다려온 그 구원자, 너희 인생의 모든 짐을 지고 가실 그분이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두 제자는 이 한마디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세례 요한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자기 제자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낼 정도로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현대 소비자 심리학은 이것을 'Social Proof(사회적 증거)'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신뢰하는 사람의 추천에 움직입니다. 레스토랑을 선택할 때도, 제품을 구매할 때도, 심지어 신앙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의 첫걸음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존경하는 스승이나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나 교회 다니는데, 너도 한번 와볼래?"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끈질긴 기도하며 초청합니다. 그래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는데 마지막 돌아가시면서 꼭 교회에 나가 천국에서 만나자고 유언을 합니다.

삶이 변화된 동료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간증을 합니다.

위기의 순간, 질병과 경제적인 파산과 같은 절박한 순간 누군가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믿음의 사람에게 교회에 나가자고 권유를 받습니다.

 

이것은 훌륭한 시작입니다. 신앙은 진공 상태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진실한 추천, 살아있는 신앙의 증인이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추천은 시작일 뿐,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첫 질문: 욕망의 정체를 드러내다 (37-38절 상반절)

두 제자가 조용히 뒤를 따르자,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보시며 물으십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애 첫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질문합니까?

3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여러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의 첫 질문은 욕구와 갈망에 대한 질문입니다. 맹인 바디매오에게는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10:51)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6:15), “왜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8:26)와 같이 예수님의 존재, 우리의 정체성, 믿음의 근거를 점검하게 하는 질문을 합니다. 어느 때는 네가 이것을 믿느냐?”(11:26, 나사로 사건에서 마르다에게),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40)와 같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대에 세우는 질문을 합니다. 어느 때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5-17,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심)와 같은 행동과 순종을 촉구하는 질문을 합니다. 어느 때는 너희가 아직도 깨달음이 없느냐?”(8:17)와 같이 깨달음과 영적 통찰을 요구하는 질문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나를 따르라"도 아니고, "회개하라"도 아니고, "내가 메시아다"라는 선포도 아닙니다. 그저 "무엇을 구하느냐?"(What are you seeking?)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예배당에 나오신 우리 성도님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어보시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 질문은 세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질문입니다.

첫째, 필요(Need)가 아닌 추구(Seeking)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필요하냐?"(What do you need?)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필요(Need)는 당장의 결핍입니다. 배고프면 음식이 필요하고, 아프면 치료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기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추구(Seeking)는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방향성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식하든 안 하든, 우리 선택과 시간 투자를 결정하는 근본 동기입니다.

 

여기서 동사 구하다(즈테이테)는 단순히 찾다, 구하다이상의 뜻을 지닙니다. 신약성경에서 자주 쓰이며, ‘간절히 추구하다, 삶의 방향을 정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히 왜 따라오느냐?”가 아니라 너희 삶의 방향은 무엇이며, 너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라는 심오한 질문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묻지 않으시고,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원함은 순간적 욕구지만, ‘구함은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는 돈을 구합니다. 그러나 돈이 많아질수록 만족은 줄어듭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쾌락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 부릅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도 몇 년 후엔 이전과 비슷한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명예나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필요 충족이 아니라 의미와 목적을 구하는 것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니? 네 삶의 검색창에 입력된 그 키워드는 무엇이니?"

 

둘째, 자기인식으로 초대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가장 큰 문제가 자기기만(Self-deception)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제대로 모릅니다.

우리는 "성공"을 구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타인의 인정을 구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구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외로움을 피하려 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구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고통의 회피를 구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의 표면적 대답을 뚫고 들어갑니다. "너는 정말로 무엇을 구하느냐? 네 시간과 돈과 에너지가 투자되는 그곳, 그것이 네가 진짜 구하는 것 아니냐?"

 

셋째, 관계의 동기를 질문합니다.

더 날카로운 것은, 예수님이 "나를 왜 따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동기를 직시하게 합니다.

 

레벨 1은 이용자의 신앙입니다.

"예수님, 제 사업 좀 잘되게 해주세요." "제 아이 대학만 보내주세요." "이번 시험만 통과하게 해주세요." 예수님을 자동판매기처럼 여깁니다. 기도라는 동전을 넣으면 축복이라는 상품이 나와야 합니다.

레벨 2는 소비자의 신앙입니다.

"이 교회 프로그램 좋네. 목사님 설교 은혜롭네. 친교가 따뜻하네."

교회를 서비스 기관으로 봅니다. 만족스러우면 다니고, 불만족스러우면 옮깁니다. 신앙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가 관심사입니다.

레벨 3은 구도자의 신앙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누구신지 알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구합니다. 그분과의 관계 자체가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3단계로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1, 2단계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참 생명과 참 소망을 주시는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은 예수님의 공생애 첫 시작에서 이미 십자가를 향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끝에서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할 때, 단지 위로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분임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을까요?

젊은 세대의 검색 키워드는 "워라밸", "파이어족", "N잡러", "소확행" 등 자유와 의미를 구합니다.

중년 세대의 검색 키워드는 "노후준비", "건강검진", "자녀교육" 등 안정과 보장을 구합니다.

모든 세대 공통 검색 키워드는 "불안", "우울", "힐링", "위로" 평안과 치유를 구합니다.

예수님은 묻습니다: "그것들이 너를 채울 수 있겠느냐? 너는 그것을 얻고도 여전히 무언가를 검색하지 않겠느냐?"

입법, 사법, 행정 모든 권한을 가지고 40년 동안 살아본 전도서 저자는 고백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로마의 정치가 카이사르는 세계를 얻었지만 내 안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는다고 탄식했습니다.

 

3. 제자들의 역질문: 관계에 대한 갈망 (38절 하반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깊은 질문에 즉답하지 못합니다. 대신 그들은 되묻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라고 물어보았습니까? 38절 하반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랍비여(선생님), 어디 계시오니이까?" (Rabbi, where are you staying?)

이것은 단순히 주소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헬라어 '메노(μένω)''머무르다, 거주하다,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거하다는 요한복음의 핵심 단어 중 하나입니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15:4)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거한다는 것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영원한 연합을 뜻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보아, 이 장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삶의 회복을 예고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인류가 다시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함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계에 대한 초대장입니다. "선생님,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당신과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정보와 관계는 차이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착각은 정보 축적이 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검색하면 0.5초 만에 수많은 결과를 얻습니다. AI를 통해 검색하면 순식간에 예수님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학 서적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고, 교리를 암송합니다. 하지만 정보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건강'에 대한 정보는 많지만, 건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관계'에 대한 책을 읽지만, 외롭습니다. 우리는 '성공'의 방법을 알지만, 실패합니다.

 

왜일까요? 정보와 경험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연애를 예로 들어봅시다. 아무리 연애 기술서를 100권 읽어도, 실제로 누군가를 만나 시간을 보내고, 대화하고, 갈등을 겪고, 화해하는 경험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지혜로웠습니다. 그들은 강의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머물고 싶었습니다.

 

4. 예수님의 초대: "와서 보라" (39)

이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이들에게 말했습니까? 3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와서 보라." (Come and see.)

예수님의 대답은 놀랍도록 간결합니다. 경험으로의 초대입니다.

이것은 고대에도, 현대에도 가장 강력한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증명하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초대하셨습니다.

"와서 보라"는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직접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이력서를 읽어보라", "내 자격증을 확인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와서 나와 시간을 보내라. 직접 경험하면 알게 될 것이다."

맛집을 떠올려보십시오. 아무리 리뷰를 많이 읽어도, 직접 가서 먹어봐야 압니다. 아무리 사진이 멋있어도, 실제 맛은 경험해야 압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간증, 목사님의 설교, 신학책의 논리가 도움이 되지만, 결국 당신이 직접 예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물 길으러 왔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과거와 갈망을 꿰뚫어 보시고 생수 되신 예수님을 경험합니다. "와서 보라!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을 보라!"고 외치며 마을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하였습니다(4:29). 간증은 지식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옵니다. 도마(요한복음 20:2429)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며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심으로 도마는 즉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경험이 신앙의 확신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존 뉴턴을 보십시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가 7세에 돌아가시고 방황하다 노예 무역에 참여합니다. 그의 삶은 부패, 방탕, 욕설, 술과 도박 등에 물들어 있었으며 그는 스스로도 큰 죄인이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살다 귀국하던 중 폭풍에 휘말립니다. 배가 난파 위기에 처하자 절박하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후 그는 회심하였고 예수님을 믿고 목회자가 되어 노예 제도 폐지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둘째는 시간을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로 끝납니다.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39)

'함께 거하니'에서 거한다는 말은 헬라어 '메노(μένω)'머물렀다라는 말입니다. 시간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라고 써놓고 있습니다.

성경은 불필요한 정보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왜 시간까지 기록했을까요? 그날이 그들에게 있어 인생의 전환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시내산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머무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니엘은 총리급 공직자였지만 매일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현대 시간관리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당신이 시간을 쓰는 곳이 당신의 진짜 우선순위다."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는 여러 조사를 통해 <한국교회 트렌드 2026>이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그 책에 한국 교회 성도님들이 일주일에 얼마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가를 조사한 내용이 나옵니다. 일주일에 평균 76분 읽는다고 합니다. 하루 11분쯤 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은 1일 평균 27분 가진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어느 정도 성경을 읽고 기도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어요." "성경 읽을 시간이 없어요." "교회 봉사할 시간이 없어요." “전도할 시간 없어요.” “예배드릴 시간 없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넷플릭스 볼 시간, SNS 할 시간, 쇼핑할 시간은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날 하던 일을 멈추고, 예수님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인생을 바꿨습니다.

 

셋째는 삶으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로의 초대입니다.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것과 직접 뛰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구경하는 것과 예배에 참여하는 것, 설교를 듣는 것과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와서 내 삶을 보라.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지, 어떻게 기도하는지, 어떻게 섬기는지, 어떻게 죽음을 대하는지 보라. 그리고 나를 따라 살아보라.“

베드로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관찰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을 때, 직접 배를 몰고 나아가는 '참여자'가 됩니다.

그 결과, 그는 놀라운 고기잡이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 앞에 무릎 꿇으며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후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단순한 듣는 자가 아니라 삶 전체로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는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즉시 일어나 따릅니다. 그는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머문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 권력)를 내려놓고 참여하는 신앙의 여정에 들어섰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한 정보(율법적 지식)는 많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직접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삶을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아시시를 보십시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사치와 향락을 즐기던 인물입니다. 어느 날 교회 폐허 앞에서 기도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음성을 듣습니다: “내 집을 세우라.” 그는 그 부르심을 이론이나 논쟁이 아닌, 삶으로 응답합니다. 재산을 포기하고 철저히 가난한 삶을 살며 병자들과 함께하며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았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5. 만남의 결과: 전도자가 되다 (40-42)

본문은 그날의 결과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는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41)

'먼저'(πρτον)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안드레는 예수님과 단 하루를 보낸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형제를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전도로 이어집니다. 억지로가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넘칩니다.

좋은 식당을 발견하면 우리는 친구에게 알립니다. 좋은 영화를 보면 우리는 추천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진짜 만나면 나누고 싶어집니다. 안드레는 복잡한 신학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간증입니다.

안드레가 데려온 시몬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기둥이 됩니다. 오순절 설교로 3천 명이 회심합니다. 결국 교회 역사를 바꿉니다. 한 사람의 만남이 세상을 바꿉니다.

 

결론: 당신의 검색창에 무엇을 입력하시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물으십니다:

첫째, "너는 무엇을 구하느냐?"

정직하게 대답하십시오.

우리 성도님의 스마트폰 사용 기록을 보십시오. 우리 성도님의 신용카드 내역을 보십시오. 우리 성도님의 일주일 스케줄을 보십시오. 거기에 우리 성도님이 진짜 구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인정입니까? 쾌락입니까?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입니까? 그것이 우리 성도님을 진짜 만족과 행복으로 채워줍니까?

 

둘째, "너는 어디에 시간을 쓰느냐?"

이번 주, 예수님과 '머무는' 구체적인 시간을 언제, 어떻게 가지겠습니까? 제자들은 그날 예수님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번 주, 예수님과 '머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하루 15, 핸드폰 내려놓고 기도하십시오. 하루 한 장, 성경을 읽으십시오. 주일, 예배에 집중하십시오. 시간을 드리지 않고 관계가 깊어지지 않습니다. 지난 일주일간 성도님의 시간, , 생각이 가장 많이 투자된 곳은 어디입니까? 그것이 성도님이 진정으로 구하는 것입니까?

 

셋째, "너는 누구를 초대할 것이냐?"

안드레처럼, 당신도 누군가를 예수님께 초대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처럼, 성도님이 예수님께 초대하고 싶은 '시몬'은 누구입니까? 이번 주 그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겠습니까?

복잡한 신학 공부를 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와서 보라"고 초대하십시오. 친구에게 "우리 교회 한번 와볼래?" 가족에게 "같이 예배드리자." 동료에게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마지막 질문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서서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딸아, 아들아, 너는 무엇을 구하느냐?"

우리 성도님의 검색창에 무엇을 입력하시겠습니까?

세상의 수많은 키워드들 -성공, , 명예, 쾌락- 을 입력하고 엔터를 눌러도, 검색 결과는 늘 "만족스럽지 않음"으로 끝납니다. 이제는 단 하나의 이름을 입력할 때입니다. '예수'

그분은 답하십니다: "와서 보라."

 

기도:

주님, 우리 영혼의 검색창을 들여다보십시오.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구하며 분주히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우리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 한 분만을 구합니다. 정보가 아닌 관계를, 지식이 아닌 경험을, 구경이 아닌 동행을 원합니다.

주님, "와서 보라"는 초대에 응답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드립니다.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십시오. 우리와 함께 머물러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도 안드레처럼, 주님을 만난 기쁨을 나누는 사람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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