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결핍(4) 결핍을 초월하는 삶
하박국3:17-19
9월 한 달 동안 우리는 ‘인생의 결핍’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어 왔습니다. 영적 결핍, 의미의 결핍, 그리고 결핍이 주는 유익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결핍을 넘어, 결핍을 초월하는 인생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혹시 '갓생'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이 단어는 '갓(God) + 인생'의 줄임말로, 완벽하고 성공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새벽 5시 기상, 운동, 건강한 식단, 자기계발, 부업까지...
그런데 아이러니합니다. '갓생'을 살려고 노력할수록 더 큰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완벽을 추구할수록 결핍감은 더 커지는 것입니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충격적인 자료가 있습니다. 2024년 대한민국에서 10대부터 40대까지 모든 연령층의 사망원인 1위가 무엇일까요? 질병도, 교통사고도 아닙니다. '자살'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40대에서 자살이 암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선 것은 1983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작년에 약 7,023명의 젊은이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루 평균 약 19.2명으로 하루 평균 37.7명 중 51%를 차지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총체적 결핍'의 적나라한 증거입니다.
10대는 '인정과 지지'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성적으로만 평가받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깊은 의구심을 품고 살아갑니다.
20대는 '기회와 안정'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N포 세대'라는 말이 상징하듯, 미래에 대한 희망 자체가 박탈당했다고 느낍니다.
30대는 '시간과 희망'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직장과 육아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경제적 부담에 짓눌려 살아갑니다.
40대는 '안전망과 재기의 기회'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한 번의 실패가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결핍은 50대 이후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없다” 시리즈 유머라는 것이 있습니다. 10대 철이 없고, 20대 답이 없고, 30대 집이 없고, 40대 돈이 없고, 50대 일이 없고, 60대 낙이 없고, 70대 이가 없고, 80대 배우자가 없고, 90대 시간이 없고, 100대 다 필요 없다는 유머입니다. 연령이 달라도 결핍의 이름만 바뀔 뿐 ‘사랑· 의미· 소속· 소망’에 대한 갈망은 같습니다. 노인 자살률이 전체 연령대 중 가장 높고, OECD 국가 중에서도 압도적인 1위입니다. 통계청의 '2024년 사망원인통계'(2025년 9월 발표)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자 수는 70대가 47.9명, 80세 이상이 71.0명입니다. 전체 평균에 비해 70대는 약 1.8배, 80세 이상은 약 2.7배나 높은 수치입니다. 대한민국의 높은 자살률은 각 세대가 처한 상황 속에서 빈곤, 질병, 고독, 인정, 기회, 희망, 관계, 안전망 등 삶을 지탱하는 필수적인 요소들이 부족한 '총체적 결핍'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사회적 지표입니다. 이 결핍이 개인의 인내력 한계를 넘어설 때, 안타까운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위험한 것은 '가짜 결핍(Fake Scarcity)'입니다. 생존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마치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사회적 조작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가 바로 이것입니다. 햄스터가 쳇바퀴에서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인 것처럼, 우리도 뭔가를 성취해도 잠시뿐, 곧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됩니다.
그 집을 사면, 그 직장에 들어가면, 그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잠시 후 또 다른 결핍이 고개를 듭니다. 세상의 방식으로는 이 끝없는 달리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생의 결핍으로부터 초월하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요?
여기서 "결핍을 초월한다"는 것은 부족한 것들이 모두 채워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족한 상황 그 자체에 더 이상 내 마음과 인생이 휘둘리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박국의 고백은 바로 그런 삶의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2,600년 전, 나라가 망하고 모든 것을 잃게 될 절체절명의 결핍 속에서도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각종 결핍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하박국처럼 결핍을 초월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1. 결핍을 초월하는 삶을 살려면 근원적으로 공급의 원천을 바꾸라(Source Shift)-공급의 원천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바꾸십시오.
하박국 시대는 국제 정세가 급변하는 대혼란기였습니다. 당시 국제 사회는 절대 강자였던 앗수르(Assyria)가 멸망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신흥 강대국 바벨론(Babylon)과 전통의 강호 애굽(Egypt)이 치열하게 다투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세계 패권국이 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 치열하게 다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남유다는 이 거대한 두 제국,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태로운 외교를 펼쳐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입니다. 국내적으로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만연했습니다. 완전히 영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사회적 불의가 판을 쳤습니다. 지도층과 부유층은 율법을 무시하고 폭력과 불의를 일삼았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착취가 극에 달했으며, 빈부차이는 심화되고, 뇌물이 오가고 공의가 땅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3장 16절을 보십시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공포의 대상 바벨론 앞에 서 있습니다. 경제의 결핍, 안보의 결핍, 정의와 공의의 결핍, 희망의 결핍, 생존의 결핍 등 총체적 결핍에 처한 것입니다.
이때 하박국은 어떤 노래를 합니까? 17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7절)
이것을 오늘 우리 시대의 언어로 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는 내가 믿었던 장기 투자, 나의 노후 연금이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는 열정을 쏟아부었던 프로젝트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 버렸다는 말입니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는 매달 월급을 주던 안정적인 직장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는 당장 다음 달 생활비가 막막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는 비상시에 쓰려던 예비 자금, 나의 마지막 보루마저 사라져 버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가 부족한 '결핍'의 상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동시에 사라진 ‘절대 결핍’, 즉 완전한 상실의 상태입니다. 내가 내일의 희망을 걸 수 있는 근거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되고, 사업은 파산했으며,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통장 잔고는 0원이 된 상태입니다. 희망의 근거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완전한 ‘제로’의 상태, 절대 결핍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이 마주한 현실이었고, 때로는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논리대로라면 이곳은 절망하고, 원망하고, 포기하며, 자살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절망의 한복판에서 결핍을 초월하는 삶을 선포합니다. 세상의 모든 논리와 상식을 뒤엎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선언을 합니다. 19절 전반절을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과 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크게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어떤 결핍이 있습니까? 질병의 결핍, 경제의 결핍, 관계의 결핍, 능력의 결핍, 영적 결핍, 정서의 결핍, 인정의 결핍...
그 결핍 앞에서 믿음으로 이렇게 외치시길 바랍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하박국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공급의 진짜 원천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힘의 원천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백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공급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공급자이신 하나님께로의 '원천 전환(Source Shift)'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장인 사울에게 쫓기고 쫓기다 블레셋으로 도망갑니다. 살기 위해 미친 척을 합니다. 시글락에서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가족들은 포로로 잡혀갔으며, 심지어 부하들마저 돌로 치려 할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 30:6). 다윗은 무너진 현실 속에서 영원한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연결했습니다. 이것이 결핍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비밀입니다.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것에서 힘을 얻습니다. 돈, 건강, 지위, 사람들의 인정 등으로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는 유한한 힘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하박국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나의 진짜 힘은 내 소유가 아니라, 나를 소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 즉 에너지의 공급원이 되어 주십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려 무기력에 빠진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동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1-2) 우리 성도님도 이 사실을 믿습니까?
노년기 경제적 결핍으로 끝났다고 단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청년기 직장이 없다고 희망 절벽이라고 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르밧 과부를 보십시오(열왕기상 17장). 극심한 가뭄으로 온 땅이 굶주릴 때, 그녀에게 남은 것은 '한 줌의 가루와 조금의 기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공급의 원천을 자신의 통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으로 바꾸어 선지자를 대접했을 때, "가뭄이 끝나는 날까지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통 속에서도 일하시는 우리의 공급자이십니다.
19세기 영국, 조지 뮬러 목사님은 오직 기도에만 의지하여 수천 명의 고아를 돌보았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사람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식량이 떨어진 어느 날 아침, 아이들 앞에 빈 식기를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빵집 주인이 간밤에 빵을 굽고 싶은 마음에 잠을 설쳤다며 빵을 가득 싣고 왔고, 곧이어 우유 배달 마차가 고장 나 우유를 처분해야 한다며 고아원에 모든 우유를 기증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지 뮬러는 평생을 통해 세상의 은행이 아닌 '하늘의 은행'이 자신의 공급 원천임을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 6장 33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의 시선을 결핍 그 자체가 아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로 옮길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담대함, 진짜 풍요를 얻게 됩니다. 물질이 태초에 스스로 존재하였고 물질이 참 행복과 만족을 주는 근원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우리 성도님들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약 1:17)는 말씀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좋은 것을 우리에게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물질은 끝없는 목마름을 줍니다. 공급의 원천을 물질에서 하나님으로 바꿈으로 평생 결핍을 초월한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공급의 원천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바꾸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심으로 우리의 가장 큰 결핍인 죄와 죽음을 해결하셨습니다.
2. 결핍을 초월하는 삶을 살려면 만족의 기준을 바꾸라 (Standard Shift)- 만족의 기준을 소유에서 그리스도로 바꾸십시오.
상식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슬퍼하고 절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18절에서 세상의 모든 논리를 뒤엎는,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그야말로 복음적 선언을 합니다. 18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8절)
이 노래가 우리 성도님들의 노래가 되시길 바랍니다. 결핍 속에서도 이 즐거움, 이 기쁨이 우리 성도님들께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박국은 결핍을 단순히 '견디겠다'고 말하지 않고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 모든 것을 잃은 잿더미 위에서 어떻게 이런 기쁨이 가능할까요? 이는 만족의 기준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17절과 18절을 연결하는 "비록 ~일지라도(Although)"와 "나는(Yet I will)"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보통 우리의 기쁨은 ‘소유’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돈이 있어서 기쁘다’, ‘건강이 있어서 감사하다’, ‘성공했기 때문에 즐겁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철저히 17절의 목록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가 사라지면 기쁨도 사라집니다. 외양간의 소가 없으면 즐거움도 증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통장 잔고가 0원이 되면 행복도 0이 됩니다.
하지만 하박국은 지금 의지적으로 자신의 기쁨의 주소를 옮기고 있습니다. 나의 기쁨은 더 이상 무화과나무나 포도 열매 같은 ‘상황(Circumstances)’에 있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존재(Person)’에 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자신의 감정을 상황에 내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지적으로 자신의 기쁨의 주소를 옮겼습니다. 내 행복의 주도권을 환경으로부터 되찾아오는 영적 선언입니다. 하박국의 즐거움은 '무엇(what)' 때문이 아니라 '누구(who)' 때문입니다. 그의 즐거움의 근거는 더 이상 풍성한 무화과나무나 외양간의 소가 아닙니다. 그의 즐거움의 유일한 근원은 '여호와(LORD)'라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여호와'는 언약에 신실하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의 이름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그냥 하나님이 아닌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은 바벨론의 침공이라는 심판과 '환난 날'이 기다리고 있지만, 하박국은 그 심판 너머에 있는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소유' 중심의 세상적 행복 가치관을 '존재' 중심의 신앙적 기쁨으로 전환하는 위대한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나의 감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변치 않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이 나의 기쁨을 결정한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논리적인 것입니다. 왜 논리적일까요? 변하는 것들에 기쁨의 뿌리를 내리면, 우리의 기쁨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기쁨의 뿌리를 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무너져도 나의 기쁨의 근원은 안전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절망의 순간에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기쁨의 근원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가장 지혜롭고 논리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하박국서 전체를 볼 때, 질문을 들으시는 하나님,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 반드시 의를 세우시는 공의의 하나님,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응답이 더딜지라도 마침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정신과 의사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은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상황(자극)과 우리의 감정(반응) 사이에는 ‘선택’이라는 공간이 존재합니다. 하박국은 모든 것을 잃은 절망적인 자극 앞에서, ‘절망’이라는 자동적인 반응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짧은 공간 안에서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겠다’는 위대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결핍을 초월하는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내 감정의 주도권을 상황에게서 빼앗아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무엇으로 만족하고 기뻐하십니까? 세례 요한은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로 몰려갔습니다. 제자들은 시기심에 불탔지만, 요한은 오히려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의 만족은 인기의 많고 적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 신랑 되신 예수님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 그는 충만히 기뻤습니다. 그의 만족의 기준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고백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립보서 4:12-13)입니다. 감옥에서도 결핍 가운데 원망하고 불평하며 자살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기록한 빌립보서를 보십시오. 사도 바울의 기쁨이 얼마나 충만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결핍과 환난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강력한 약속의 말씀은 요한복음 16장 22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이 겪게 될 슬픔과 상실감(결핍)을 아시고 직접 하신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요한복음 16:22)
이 말씀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행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과의 영원한 관계에 뿌리를 둔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 기쁨은 환경이나 사람, 심지어 죽음조차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39절은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하는데, 그 어떤 것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이 기쁨을 알고 이 기쁨을 선택하고 이 기쁨을 누렸기 때문에 빌립보서 4장 4절에 상황을 초월하는 기쁨을 명령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지금 어떤 결핍의 상황에 처해있습니까? 내 모든 것이 채워져서 생기는 만족감이 아니라, 모든 것이 부족한 결핍 속에서도 '나의 구원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인해 샘솟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강력한 만족과 행복을 누리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적인 만족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만족(자족)은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내면의 고백에서 비롯됩니다. 풍요 속에서도 교만하지 않고, 결핍 속에서도 비굴해지지 않는 것은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만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만족의 기준을 바꾸시길 축복합니다. 내 환경과 상관없이, 나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이 터져 나올 때, 우리는 결핍을 초월하여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만족의 기준을 소유에서 그리스도로 바꾸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분 안에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결핍을 초월하는 삶을 살려면 가치의 관점을 바꾸라 (Value Shift)-가치의 관점을 현재에서 영원으로 바꾸십시오.
성도 여러분, 비행기에서 도시를 바라본 경험이 있습니까? 지상에서 나를 답답하게 했던 거대한 빌딩들과 꽉 막힌 도로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작게 보입니다. 내 문제도 그와 같습니다. 문제 한가운데 갇혀 있으면 그것이 세상 전부처럼 보이지만, 높은 곳에 오르면 비로소 그 문제의 전체 그림과 빠져나갈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미래의 불확실성, 결핍의 한복판에 있던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바로 이 '관점의 전환'을 약속하십니다.
19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9)
이 말씀을 믿습니까?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땅 사는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평탄한 곳'이 아니라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의 문제를 치워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 문제를 넉넉히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사슴의 발', 즉 영적인 힘과 균형감각을 주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문제에 짓눌리는 시야가 아니라, 그 문제를 발아래 두고 내려다보는 '높은 곳'의 시야를 갖게 하십니다. 나를 주저앉히려던 결핍의 웅덩이가, 오히려 나를 더 높은 영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도약대가 되는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높은 곳'에서 보는 관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바로 가치의 관점을 '현재'에서 '영원'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내비게이션은 '지금 여기'에서 '목적지'까지 가장 빠른 길을 알려줍니다.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 즉 '현재'만을 목적지로 설정하면, 가는 길에 만나는 실직, 질병, 관계의 단절 같은 결핍은 그저 실패나 '길 없음'으로 표시될 뿐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더 큰 목적지가 담긴 지도를 보여주십니다. 그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이 땅의 고통스러운 결핍은 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여정 속에 있는 하나의 험한 산길이나 깊은 터널에 불과합니다.
장기 투자를 하는 현명한 투자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오늘 주가가 조금 떨어졌다고 해서 가진 주식을 전부 팔아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은 오늘의 손실이 아닌, 10년, 20년 뒤의 장기적인 가치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손실을 감수해야 더 큰 미래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는 이 땅에 번듯한 집 한 채 없이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수많은 결핍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결핍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눈은 이 땅의 부동산이 아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즉 영원한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 11:10). 영원한 가치에 소망을 두었기에, 이 땅의 일시적인 결핍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투자 비용'이었던 것입니다.
에콰도르의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짐 엘리엇 선교사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그는 이 땅의 짧은 삶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더 크게 보았습니다. 이 가치의 관점 전환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생명이라는 가장 큰 결핍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영광스러운 희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맹목적인 희생이 아닙니다. 무엇이 진짜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아는 가장 지혜롭고 논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결핍 가운데 평생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핍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린도후서 4:8-9)라고 고백합니다. 결핍이 그를 포로로 만들거나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보고 인생을 살아갔습니까? 결핍을 묵상하며 그 결핍의 문제를 억메여 평생 결핍의 노예로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고리도후서 4장 18절에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바울은 노년에 병들었습니다. 자식도 없습니다. 노후 자금도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 자유도 없습니다. 사랑했던 제자 중에서도 배신자가 생겼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그를 떠났습니다. 그 때 바울은 현실을 보며 그 결핍으로 고뇌하며 원망 불평하고 자살합니까?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에 참된 가치는 두고 산 바울은 유언처럼 남긴 디모데 후서 4장 17-18절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마지막까지 영원한 나라에 참된 가치를 두고 이렇게 모든 결핍을 초월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결핍을 초월하는 삶을 사시길 원하십니까?
가치의 관점을 현재에서 영원으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현재'에 가치를 두는 삶 (단타 투자)은 눈에 보이는 것들, 즉 돈, 소유, 사회적 지위, 건강, 명예가 성공의 척도입니다. 이 가치들은 일시적이고 불안정해서, 언제든 잃을 수 있습니다. '영원'에 가치를 두는 삶(장기 가치 투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사랑, 믿음, 소망, 거룩한 성품 등이 진정한 성공의 척도입니다. 이 가치들은 세상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언젠가 사라질 세상의 것들에 내 행복의 뿌리를 내리는 대신,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내 삶의 닻을 내려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현재의 결핍이라는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고 그 위를 넉넉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관점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땅의 삶의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삶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해 주었습니다. 땅의 보물(현재 가치)은 좀과 녹이 슬어 사라지지만, 하늘의 보물(영원 가치)은 영원히 안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현재 가치에만 올인했던 한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이 원리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는 많은 소출을 거두고 창고를 더 크게 지으며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평생 몸부림치는 삶도 언젠가 다 끝나는 날이 옵니다. 가치의 관점을 현재에서 영원으로 바꾸십시오. 그 때 우리는 결핍으로부터 초월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최악의 결핍을 통과하여 부활이라는 영원한 영광을 이루신 예수님처럼, 우리 또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 안에서 오늘의 결핍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결핍으로 인해 힘겨워하고 계십니까?
하박국의 노래는 2,600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한 도전을 줍니다.
결핍의 현실을 직시하되, 그 현실에 주저앉지 마십시오.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공급의 원천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바꾸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심으로 우리의 가장 큰 결핍인 죄와 죽음을 해결하셨습니다.
만족의 기준을 소유에서 그리스도로 바꾸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분 안에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치의 관점을 현재에서 영원으로 바꾸십시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보신 예수님처럼, 우리 또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 안에서 오늘의 결핍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이 나를 붙드심으로, 나는 어떤 결핍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주께서 나를 가장 높은 곳으로 인도하시리라!”
이 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결핍도 복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의 가장 큰 결핍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 안에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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