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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결핍(3) 결핍의 유익(고린도후서12:7-1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7409 추천수:1 218.147.218.173
2025-09-21 14:02:59

인생의 결핍(3) 결핍의 유익

고린도후서12:7-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생의 결핍이라는 주제로 세 번째 시간,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조금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바로 결핍의 유익입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채워라, 더 가져라, 완벽해져라.” 서점에 가면 성공하는 법’, ‘부자 되는 법’, ‘상처 없이 사는 법과 같은 책들이 넘쳐납니다. SNS를 열면, 모든 사람이 완벽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필터로 보정된 사진, 성공을 전시하는 글, 행복을 연기하는 영상들 속에서 우리는 나 자신의 결핍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이처럼 세상은 결핍을 실패의 증거,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결핍을 감추고, 없는 척하며, 그것을 채우기 위해 평생을 발버둥 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결핍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며, 때로는 그 결핍을 통해 가장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오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역을 감당했던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 우리가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결핍속에 숨겨진 놀라운 영적 유익 세 가지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고백 중 하나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우리 인생의 모든 결핍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1. 결핍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결핍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교만으로부터 지키시고 겸손의 자리에 머물게 하십니다.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 즉 천국에 이끌려 올라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을 보았습니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 이런 경험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영적 교만에 빠져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천국을 보고 온 사람이야!”

 

얼마 전 통일교 한학자 총재가 정치자금법 위반 및 뇌물 공여 혐의로 특검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내가 왜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샤넬백이 뭔지도 모른다라는 말로 진술하며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 대부분을 부인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상당 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여 수사팀에게 나는 독생녀라고 설파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직계 혈통의 딸이라는 것입니다. 통일교 측은 이를 참어머님께서 검사들에게 하늘 부모님의 섭리를 설명하신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교만입니다. 사법 시스템과 사회적 규범을 초월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는 "나는 당신들이 적용하는 세속적인 법의 잣대로 평가받을 존재가 아니다"라는 선언과 같습니다. '독생녀' 주장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의 권위를 넘어, ()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혹은 신의 유일한 대리인으로 규정하는 '자기 신격화'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신적인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법이나 제도로 자신을 심판하는 것 자체를 불경하고 무의미한 행위로 여기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극단적인 자기애(나르시시즘)와 과대망상(Grandiose Delusions)의 특징을 보인 것입니다. 교만은 자신은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믿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또한 교만은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현실(: 범죄 혐의로 조사를 받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위대함을 확인하는 무대로 재해석하려는 현실 왜곡에 빠지게 합니다. 교만은 자신을 수사하는 검사들의 입장이나 사법 절차의 엄중함에 공감하기보다는, 그들을 자신의 교리를 설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공감 능력의 결여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교만을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고 대적하시는 죄로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단순히 잘난 척하는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교만의 본질은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데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것이고, 사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자기중심성(自己中心性)', 즉 마땅히 하나님이 계셔야 할 인생의 왕좌에 '나 자신'을 올려놓는 자기 우상화입니다. 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 없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내 지혜, 내 능력, 내 경험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독립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1413-14절은 교만의 원형인 사탄(루시퍼)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가장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이처럼 교만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도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3:5)라는 뱀의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교만하게 되면 자기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며, 타인을 멸시하고 정죄합니다. 배우려 하지 않고 완고해지는데, 이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항상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을 당연한 권리로 알기에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잠언 1618절 말씀처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가 되어 패망하고 넘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중심을 아셨습니다. 이 엄청난 영적 은혜가 오히려 그를 교만하게 만들어 넘어뜨릴 수 있는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가시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극심한 안질, 간질, 혹은 끊임없는 대적자들의 핍박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시의 정체가 아니라, 그 목적입니다. 바울은 그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바울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그가 영적 교만이라는 가장 무서운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결핍이라는 안전장치를 그의 삶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취약성의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약점과 결핍을 감추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더 불안하고 고립되지만, 자신의 취약함을 용기 있게 인정하고 드러낼 때 타인과 깊이 연결되고 진정한 힘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작은 흠결도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주의라는 갑옷, 상처받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냉소주의라는 갑옷,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전지전능함의 갑옷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의 가시는 그의 영적 취약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장치였습니다. 이 가시가 없었다면 그는 자신의 강함에 도취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시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가장 깊이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살인자가 된 것과 말더듬이라는(4:10) 인생의 결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했습니다. 야곱의 위골된 엉덩이뼈는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도망치거나 속일 수 없게 된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께 매달리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고, 그의 교만은 꺾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족장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가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치명적인 실패와 배신의 기억(26:75)이었습니다. 이 뼈아픈 실패는 그의 모든 교만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가시'를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깨달은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의 힘이 아닌 오직 주님의 사랑과 용서에 의지하여 초대교회를 이끄는 겸손한 리더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가시(결핍)는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아 살인이라는 끔찍한 죄의 결과와 그로 인한 고통(51)이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으로 죄를 깨달은 후, 그의 삶은 자식의 죽음, 아들의 반역 등 씻을 수 없는 고통이라는 '가시'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이 죄의 대가를 평생 짊어지며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깨어진 마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결핍과 고통이 그를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자, 가장 겸손한 참회자로 만들었습니다. 링컨은 평생 '멜랑콜리'라 불리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수많은 정치적 실패를 겪었습니다. 무엇보다 남북전쟁이라는 참혹한 비극 속에서 수십만 명의 죽음을 목도하며 인간의 한계와 무력감을 절감했습니다. 이 거대한 고통과 결핍 속에서 그는 젊은 시절의 이신론적 신앙을 넘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겸손한 신앙인으로 변화했습니다. 천재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파스칼은 인류 최고의 지성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았습니다. 그의 허약한 육체의 결핍은 그를 이성을 뛰어넘는 위대한 신앙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철학자의 신이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들을 괴롭히던 육체의 결핍이, 그들의 교만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만든 겸손의 밧줄이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삶에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지긋지긋하게 나를 괴롭히는 가시가 있습니까? 어쩌면 그 결핍이야말로, 내가 가진 작은 성공과 은사로 인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떠날까 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붙들어 매시는 겸손의 밧줄일 수 있습니다. 결핍의 첫 번째 유익은, 그것이 우리를 가장 위험한 적인 교만으로부터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2. 결핍은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통로가 됩니다.

둘째로, 우리의 결핍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깊이 경험하게 되는 통로가 됩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바울의 반응은 우리와 똑같습니다. 그는 이 고통스러운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그것도 세 번씩이나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라는 것은 그의 기도가 얼마나 절박하고 진실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9절 상반절입니다. 큰 소리로 결핍의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고 읽겠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대답은 바울이 기대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알았다, 그 가시를 뽑아주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아니다. 그 가시는 그대로 둘 것이다. 하지만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절박한 질병의 결핍, 경제의 결핍, 관계의 결핍, 영적 결핍에 처해있는데 이런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면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얼마전 세바시, 세상을 변화시키는 15이라는 강연에서 그믐 대표의 강의를 들어 보았습니다. 모임을 가졌는데 갑자기 아파 병원에 갔는데 교모세포종이라는 악정 뇌종양 판정을 받았답니다. 이 병의 평균 수명은 12-14개월이라고 합니다. 그는 질문합니다. “만약 내년 여름까지만 살 수 있다는 선고를 받으셨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이 병은 이미 쏴버린 화살이라고 합니다. “버킷리스트에 담겨져 있는 멋진 여행지들을 여행하실 건가요? 아니면 공기 좋은 산속 요양소에 가서 남은 시간을 편안하게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간 너무나 바빠서 보지 못했던 명작 영화 100편을 보실 건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너무 슬픔에 빠져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면서 남은 시간을 보내실 건가요?”라고 질문합니다. 그도 당연히 평균 수명은 살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바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병실에서 소리내어 읽었답니다. 유대인들이 수용소에 있으면서 의미를 읽어 버리고 체념하면 2,3일 내에 죽었답니다. 빅터 프랭클은 인생의 의미를 찾은 방법을 몰입, 사랑과 경험, 시련에 대하는 태도 이 세가지르 말했는데 40배의 속도로 사는 남아 있는 시간을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택하고 암과 책의 오디세이라는 유큐브와 팟빵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에는 우리의 고통을 줄이는 강력한 도구인 급진적 수용(Radical Acceptanc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아픔과 괴로움은 다른데, 아픔(Pain)은 삶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병에 걸리는 것, 시험에 떨어지는 것, 실직하는 것 등은 모두 고통스러운 '아픔'입니다. 반면 괴로움(Suffering)은 피할 수 없는 '아픔'에 우리가 추가하는 정신적 반응, 즉 현실을 부정하고 저항하면서 발생하는 2차적인 고통입니다. 공식으로 말하면 괴로움(Suffering) = 아픔(Pain) × 저항(Resistance)”입니다.

 

여기서 '급진적 수용'은 바로 저항을 멈추는 행위입니다. 이는 용납이나 찬성이 아닙니다.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 현실이 옳다거나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포기체념도 아닙니다. "에이, 다 틀렸어. 아무것도 안 할래"와 같은 무기력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직시해야만 비로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할 힘이 생깁니다. 급진적 수용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현실과 싸우는 것을 '선택적으로' 멈추는 매우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정신적 선택이며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 비를 맞기 싫어 하늘에 대고 소리칠 필요는 없습니다. “비가 와서는 안 돼!”라고 저항하는 행위가 바로 괴로움입니다. 이 저항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비를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급진적 수용이란, 이 싸움을 멈추고 ", 지금 비가 오고 있구나"라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인정을 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에게 "비를 맞으며 걸어갈까? 우산을 사러 갈까? 카페에 들어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까? 아니면 약속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갈까?"와 같은 선택지가 생깁니다. 현실을 수용하기 전까지는 '하늘과 싸우는' 단 한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지만, 수용하는 순간 에너지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쓸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가 열리는 것입니다. 저항을 멈추면, 아픔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리를 파괴하는 '괴로움'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저항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 현실 속에서 새로운 의미와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성 질환을 진단받았다고 합시다. 저항하면 "왜 하필 나야? 이건 불공평해. 내 인생은 끝났어."라고 하며 끝없는 분노, 우울, 절망에 빠져 치료나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할 에너지를 모두 소진합니다. 그러나 급진적 수용을 하면 "내게 이 병이 생겼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지금 나의 현실이다. 나는 이 병을 가진 채로 살아가야 한다."라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러면 이 현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어떤 치료를 받고, 생활 습관을 어떻게 바꾸고, 어떤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실수를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항하면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만약 그때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하며 끊임없는 후회와 자책의 늪에 빠져 현재를 살아가지 못합니다. 급진적 수용을 하면 "나는 과거에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 그 사실은 이제 바꿀 수 없다. 그로 인해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라고 이 사실을 100% 인정할 때, "이 뼈아픈 경험을 통해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미래지향적인 사고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급진적 수용의 핵심은 역설에 있습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현실 속에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꿀 자유와 힘을 얻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자신의 가시를 향한 영적인 급진적 수용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가시를 없애는 데 집착하지 않고, 가시가 있는 채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관통하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문제 해결보다 더 좋은 것,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가 있습니다. 일본의 전통 공예 기법 중에 킨츠기(金継)’라는 것이 있습니다. 깨진 도자기를 버리지 않고, 그 깨진 조각들을 옻으로 다시 붙인 뒤 그 틈을 금가루로 메워서 장식하는 예술입니다. 킨츠기의 철학은 상처와 깨어짐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 흔적을 통해 더 아름답고 독특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깨진 틈은 더 이상 수치스러운 흠이 아니라, 금으로 빛나는 역사가 됩니다.

 

우리의 결핍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깨진 도자기와 같습니다. 질병으로, 가난으로, 실패로 깨졌습니다. 우리는 이 깨진 틈을 감추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깨진 틈새 사이로 은혜라는 금가루를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과 상처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되게 하십니다. 결핍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충분한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할 때 우리는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결핍의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두 손 들고 주님을 찾게 되고, 그때 세상이 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우리 영혼의 깨진 틈을 채우고도 넘쳐흐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결핍이 있습니까? 그 결핍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채우는 축복의 통로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3. 결핍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무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결핍은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나는 무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대답을 들은 바울의 반응을 보십시오. 9절 하반절과 10절을 같이 읽겠습니까?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 성도님은 심각한 결핍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는 자신의 약점, 즉 결핍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다가, 이제는 도리어 그것을 기뻐하고’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태도의 전환이 가능했을까요? 그는 나의 약함이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무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는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끔찍한 고통이나 역경을 겪은 후에 단순히 이전 상태로 회복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이전보다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사건을 겪은 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통을 느끼며 일상생활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 상태로, 목표는 '사건 이전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회복)'입니다.

그러나 외상 후 성장(PTG)은 끔찍한 사건을 겪고 난 후, 그 고통스러운 경험을 자기 삶의 일부로 통합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 사건 이전보다 오히려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현상입니다. 목표는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되는 것(성장)'이며, 상처가 완전히 사라져야만 성장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공존하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 성장은 5가지 부분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째, 삶에 대한 감사 증가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보거나 모든 것을 잃을 뻔한 경험은 삶의 우선순위를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아침 햇살, 가족과의 식사, 친구와의 대화 같은 평범한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어, 살아있음 그 자체에 대한 깊은 감사를 경험합니다.

둘째, 타인과의 관계 심화입니다. 큰 위기를 겪으면 피상적인 관계들은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곁을 지켜준 사람들과의 관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진실해집니다. 또한,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여, 더 따뜻하고 이타적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셋째, 내면의 힘 발견입니다. "내가 그런 끔찍한 일도 견뎌냈는데, 앞으로 못할 게 뭐가 있겠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극한의 고통을 이겨낸 경험은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강인함과 회복력을 깨닫게 해주어, 어떤 역경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넷째,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입니다. 트라우마는 기존에 계획했던 인생의 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폐허 속에서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새로운 삶의 목적이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암을 이겨낸 사람이 암 환자를 돕는 활동가가 되거나, 큰 사고를 겪은 사람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위한 재활 전문가가 되는 경우입니다.

다섯째, 영적, 실존적 성장입니다. "나는 왜 사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삶에 대한 철학이 깊어지거나, 종교적인 믿음이 더욱 성숙해지는 등 영적인 차원에서의 큰 성장을 경험합니다.

 

바울의 고백은 외상 후 영적 성장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시라는 고통을 통해 자기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면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 강인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는 평생 고칠 수 없는 질병이라는 결핍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복음화시키는 1세기 지도자로 크게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으며 그의 말과 행위를 통해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목격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을 보십시오. 사랑받던 아들이었으나 형들에게 배신당해 노예로 팔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년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세계는 신뢰와 사랑에서 배신과 절망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심각한 외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하고 절망하며 인생을 포기하거나 자살한 것이 아니라, 성장했습니다. 요셉은 이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연단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끔찍한 사건들을 단순한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더 큰 섭리를 깨닫는 영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훗날 자신을 팔았던 형들을 만났을 때, 그는 복수심이 아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50:20)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트라우마 속에서 새로운 삶의 목적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관계(용서와 화해)를 회복하는 외상 후 성장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그 역시 심각한 외상을 당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하루아침에 모든 자녀와 재산을 잃고, 끔찍한 질병까지 얻었습니다. 그가 믿었던 '선한 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세계관이 완전히 박살 났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떠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상 후 성장이 일어났습니다.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처절하게 항변하고 질문을 던지는 '인지적 씨름'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는 쉬운 위로를 거부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고통과 마주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기존의 지식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42:5)라는 그의 고백은, 트라우마를 통해 피상적인 신앙이 깊고 실존적인 신앙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조니 에릭슨 타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7세 때 다이빙 사고로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되는 끔찍한 사고를 겪어, 한순간에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사지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사고 초기,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과 분노, 신앙적 회의에 시달리며 자살까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고통스러운 '인지적 씨름'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고난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장애라는 트라우마를 새로운 삶의 목적으로 승화시켜, 1979년 장애인 선교 단체인 '조니와 친구들(Joni and Friends)'을 설립하여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복음과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녀의 고통은 수많은 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C.S. 루이스는 늦은 나이에 만나 깊이 사랑했던 아내 조이 데이비드먼을 암으로 잃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였지만, 아내의 죽음 앞에서 그의 모든 신학적 지식과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신앙적 의심을 전혀 미화하지 않고,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책에 정직하게 기록했습니다. 이 처절한 '씨름'의 과정을 통해, 그는 고통에 대한 쉬운 답을 찾는 대신,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신뢰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의 더욱 깊고 정직한 관계로 나아갔습니다. 그의 경험은 '믿음이 좋은 사람'도 고통 앞에서 처절하게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주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직한 애도와 성숙한 신앙의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평생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던 막내아들 매튜가 27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부모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목회자였던 그는 아들의 죽음 이후, 자신의 명성과 성공이 아들의 고통을 막아주지 못했다는 깊은 무력감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고통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트라우마를 계기로 그와 아내 케이는 기독교계 내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깨고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는 새로운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가장 큰 고통이, 수많은 정신질환 환우와 그 가족들을 위로하고 교회가 그들을 품도록 이끄는 강력한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팔다리 없이 태어난 닉 부이치치를 보십시오. 그에게 결핍은 추상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의 삶 전체를 규정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는 수없이 절망했고, 하나님을 원망했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거대한 결핍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그에게 팔다리가 있었다면, 그는 그저 평범한 설교자 중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팔다리가 없기 때문에, 그가 단상에 올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라고 외칠 때, 그 메시지는 세상 그 어떤 웅변가보다 더 강력한 능력과 진정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의 가장 큰 결핍이,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무대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과 결핍은, 마치 텅 빈 무대와 같습니다. 그 무대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조명이 비칠 때, 사람들은 무대가 아닌 빛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화려한 언변이나 놀라운 영적 체험이 아니라, 자신의 지독한 결핍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에게 남아 있는 삶의 길이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지독한 결핍이 있습니까? 남아 있는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영광의 무대가 되게 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괴롭히는 결핍은 무엇입니까? 재물의 결핍, 건강의 결핍, 관계의 결핍, 재능의 결핍입니까?

세상은 그 결핍을 감추고 없애라고 말하지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주십니다.

그 결핍이 바로 우리 성도님들을 교만에서 지키는 겸손의 밧줄입니다.

그 결핍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채우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 결핍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영광의 무대입니다.

이제 더 이상 여러분의 결핍을 원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결핍을 주님께로 가지고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가 약하기에 주님이 필요합니다. 저의 이 부족함 속에 주님의 은혜로 채워 주십시오. 저의 이 연약함을 통해 주님의 강하심을 드러내 주십시오.”

우리가 약한 그때, 주님은 가장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결핍 속에서 온전하게 일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능력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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