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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결핍(2) 의미의 결핍(전도서1:23; 12:13-14)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376 추천수:1 218.147.218.173
2025-09-14 13:10:22

인생의 결핍(2) 의미의 결핍

전도서1:23; 12:13-14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타계하기 한 달 전 24가지의 질문을 카톨릭 정의채 신부에게 던졌습니다. 정신부님은 이병철 회장의 형님인 이병각 씨의 임종을 도와 천주교에 귀의시켜 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나게 했답니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신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24개의 인생의 궁극적 질문들입니다. 이 질문들은 한 기업의 총수를 넘어, 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앞두고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찾고자 했던 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병철 회장을 이 대답을 듣지 못하고 타계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 질문을 가지고 책을 썼는데 이어령 교수도 인생 말년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책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썼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은 2017년 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신앙인으로 꾸준히 집필하시다 2022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어린 시절, 해 질 녘까지 놀던 아이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비유했습니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따뜻한 본향으로 돌아가는 회귀의 과정임을 의미합니다.

평생을 바다() 속에서 살아온 물고기가 바다 밖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바다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죽음은 삶이라는 바다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삶과 죽음은 손바닥과 손등과 같다",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강조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의미를 가지며, 죽음을 통해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통찰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죽음을 항상 기억하고 의식하며 사는 삶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이는 죽음을 통해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책 초두에 인생의 의미를 어릴적 이야기로 쉽게 풀어 쓰고 있습니다.

어릴 적 신나게 놀다가도 불안한 아이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물었습니다. “엄마, 죽지마.”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걱정 마, 너 두고 나 절대로 안 죽어엄마의 삶의 의미는 아들에게 있었습니다. “왜 사느냐는 존재 이유와 목적에 대한 근원적 질문으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질문입니다. 인간만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인간과 DNA 98% 같다는 가장 지능이 발달된 침팬지도 자기들끼리 모여 왜 사느냐라고 토론하지 않습니다. 이 답을 찾지 못하여 우울하게 되어 강에 뛰어 드는 침팬지는 없습니다. 인간만이 유일합니다. “삶의 의미는 그 질문에 대한 우리 각자의 대답니다. 삶에 의미가 있으면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게 합니다. "왜 사느냐?"라는 질문이 없다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도 시작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왜 사느냐?"라는 질문은 계속해서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심각한 의미의 결핍을 가지게 됩니다. '의미의 결핍'(meaning deficiency)이란 자신의 삶에 목적, 가치, 중요성이 없다고 느끼는 깊은 내적 상태를 말합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넘치지만 삶의 이유와 목적이 비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주창한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acuum)'와 같은 개념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풍요 속에서도 무너진다.”진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할 일이 없다'거나 '심심하다'는 차원을 넘어, "내가 왜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아무런 답도 찾지 못해 느끼는 깊은 공허감과 방향 상실감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망망대해에서 목적지나 나침반 없이 표류하는 배와 같습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무슨 삶의 의미가 필요하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의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여러 가지 불이익이 인생에 다가 옵니다.

의미의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정신 건강의 악화라는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삶의 목적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우울증, 불안, 무기력증을 유발하는 핵심 요인입니다. "어차피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삶의 모든 의욕을 앗아가고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합니다.

권태와 중독이 다가 옵니다. 실존적 공허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종종 피상적인 쾌락이나 자극적인 활동에 몰두합니다. 이는 알코올, 약물, 쇼핑, 게임 등 다양한 형태의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공허함을 잠시 잊게 해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삶을 더욱 황폐하게 만듭니다.

회복탄력성 저하됩니다. 삶의 의미나 목적이 있는 사람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의미가 결핍된 상태에서는 사소한 어려움에도 쉽게 좌절하고 무너져 내립니다.

무엇보다 자살 위험 증가됩니다. 가장 비극적인 결과는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고통이 살아가는 고통보다 더 크다고 느껴질 때,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노벨상도 받았고 부유한 가운데 전쟁, 사냥, 투우, 낚시 등 극한의 경험에 자신을 던지며 삶의 본질과 마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악화되고(여러 차례의 비행기 사고 후유증과 알코올 중독),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지자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61세의 나이에 엽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59세 나이로 우울증이 악화되어 강물에 몸을 던져 인생을 마감했고,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었던 미국의 유명한 록 밴드 커트 코베인도 27세에 권총으로 극단적 선택으로 삶을 끝냈으며, 유명 음악가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도 27세에 세상을 등졌습니다. 일본의 천재 작가 미시마 유키오도 45세에 활복 자살로 삶을 끝내 버렸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도 3000년 전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섭니다.

전도서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유익(이트론)'남는 것', '잉여(surplus)', '궁극적인 이득'. 일반적인 '이익'(profit)을 넘어, 모든 것을 계산하고 난 뒤에 최종적으로 손에 남는 '순이익' 또는 '결정적 이점'을 의미합니다. 마치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했을 때 마지막에 남는 흑자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이 소멸하고 사라진 뒤에도, 영원히 남아서 그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물질적, 감정적 만족을 넘어서는 궁극적이고 영속적인 가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수고(아말로)’고통스러운 노동', '지치게 하는 수고', '헛수고'로 이 단어에는 즐거움이나 보람보다는 고통, 슬픔, 불안, 좌절의 뉘앙스가 매우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저주를 받아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게 된 것과 같은 맥락의 단어입니다. “해 아래에서는 말 그대로 '태양 아래', 즉 지상의 세계, 현세를 의미합니다. 이 질문을 정리하면 "보편적 인간이 이 유한한 지상 세계에서 평생에 걸쳐 행하는 그 모든 고통스럽고 지치는 몸부림 끝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영원히 그의 것으로 남는 궁극적인 순이익(Yitron)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말입니다. 왜 사느냐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솔모몬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눈부신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와 연결되고,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물건이 집 앞까지 배달됩니다. SNS에는 성공과 행복을 과시하는 사진들이 넘쳐나고, 서점가에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를 외치는 자기계발서들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며,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토록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왜 우리 마음은 공허하고 불안할까요? 왜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번아웃과 우울감을 호소할까요? 젊은이들이 직장을 그만두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업무만 처리하며 마음은 이미 떠나버린 상태의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을 할까요? 남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달립니다.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직장, 더 높은 연봉, 더 넓은 아파트그렇게 목표를 향해 달려가 마침내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잠시의 기쁨과 함께 거대한 허무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경험할까요. 왜 중년의 성공한 사업가가 어느 날 문득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삶인가?"라며 깊은 허무감에 빠질까요? 세고딘은 그의 책 <의미의 시대>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의미'를 제시합니다. 20세기를 지배했던 산업주의 패러다임, 즉 노동자를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간주하고 통제와 효율성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했던 경영 방식이 이제는 완전히 수명을 다했다고 진단합니다. 바로 '의미의 결핍'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How to live)'에 대한 기술은 끊임없이 배우지만, 정작 '왜 살아야 하는가(Why to live)'라는 근본적인 질문에는 답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최신형 내비게이션을 장착하고 최고 속도로 질주하지만, 정작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는 운전자와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다 가져보았던 솔로몬의 처절한 고백을 따라가며, 이 지독한 '의미의 결핍'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 그 유일한 길을 발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솔로몬의 위대한 실험

오늘 솔로몬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전도서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히브리어로 '헛되다'는 말은 '헤벨'인데, 입김, 안개, 수증기라는 뜻입니다. 손에 잡으려고 하면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것, 실체가 없는 공허함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인류 최고의 지혜와 부와 권력을 누렸던 솔로몬이 내린 인생의 중간 결산이 바로 '헤벨',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헤벨이다. 모든 것이 연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혹시 솔로몬과 같은 공허함을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내 마음은 텅 빈 광야처럼 느껴지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걸어갔던 의미 찾기의 여정을 따라가며, 이 지독한 의미의 결핍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 그 해답을 발견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지식의 탐구: "많이 알면 행복할까?" (1:16-18)

솔로몬은 먼저 지식과 지혜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철학, 자연, 문학 등 모든 학문을 섭렵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더 많이 알면,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면, 내 삶의 의미도 찾을 수 있겠지.’ 그런데 결론은 무엇입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다시 지혜와 광채와 우매를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1:16-17)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웁니다. 더 좋은 대학, 더 높은 학점, 더 많은 자격증, 끊임없는 정보의 습득... 우리는 지식이 우리를 더 나은 삶,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 유튜브와 각종 플랫폼을 통해 지식을 탐닉하고, 전문가들의 강연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1:18) 라고 결론 내립니다.

오늘날의 과학과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모든 답이 있는 듯 보이지만, 지식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혼란과 불안이 늘어납니다. “?”라는 근본적 질문에는 과학도 철학도 답을 주지 못합니다.

철학은 인간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혜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 노력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나는 모른다라는 무지를 고백했습니다.

헬레니즘 철학에서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스토아는 이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쾌락은 공허로 끝났고, 스토아적 금욕은 인간의 한계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근대 철학에서 칸트는 도덕법칙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지만, 결국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의 도덕법칙이라는 추상적 사유에 머물렀습니다.

실존 철학에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고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허무와 절망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역시 인간 실존의 무게 속에서 불안부자유만 드러냈습니다.

, 철학은 의미를 찾으려 했지만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 질문 앞에서는 확실한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과학은 자연과 우주의 법칙을 탐구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우주의 기원에서 빅뱅 이론은 우주의 시작을 설명하지만, “왜 우주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합니다.

진화론에서 다윈은 생명의 기원을 설명했지만, 인간이 왜 도덕적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 왜 선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합니다.

뇌과학에서 오늘날 뇌 연구는 인간의 사고, 감정, 기억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정체성의 의미는 밝혀내지 못합니다.

과학은 어떻게”(how)에 대해서는 대답하지만, “”(why)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알면 알수록, 오히려 허무와 혼란이 커지는 아이러니에 빠집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자가 말한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다는 말씀과 맞닿아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세상의 부조리함이 더 잘 보이고, 나의 한계와 무능함만 더 크게 느껴집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지식은 무력하며, 오히려 더 큰 불안과 근심만 안겨줄 뿐입니다. 지식은 삶의 '도구'는 될 수 있지만, 삶의 '의미'가 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지식의 탑 꼭대기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의미가 아니라 더 깊은 공허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 AI, 빅데이터, 양자물리학 등으로 엄청난 지식을 누립니다. 그러나 그만큼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폭증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지식은 삶을 편리하게 만들지만, 삶의 의미를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깊은 통찰을 주지만, 영원의 답을 주지 못합니다. 과학은 세상의 원리를 설명하지만, 존재의 이유를 밝혀주지 못합니다. 결국 인간이 해 아래 지식과 지혜로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바람을 잡는 것으로 끝납니다.

 

둘째, 쾌락의 추구: "마음껏 즐기면 만족할까?" (2:1-3, 10-11)

지식에서 답을 찾지 못한 솔로몬은 두 번째 실험에 돌입합니다. 바로 쾌락의 추구입니다. 그는 이제 감각적인 즐거움, 즉 쾌락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최고의 포도주를 마시고, 수많은 여인들을 곁에 두고, 당대 최고의 희극인들을 불러 웃음을 탐닉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사업을 크게 합니다. 집을 짓습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음이 원하는대로 다 해 봅니다.

그러나 결론은 무엇입니까?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2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모든 즐거움을 다 누려보았지만 헛되고, 바람잡은 것같고 무익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욜로(YOLO), 플렉스(FLEX) 문화와 너무나 닮아있지 않습니까? 인생은 한 번 뿐이니 경험과 가치에 소비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나 귀중품을 뽐내며 사는 것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를 밤새워 정주행하고, SNS의 짧은 영상들을 무의미하게 넘기며 순간의 도파민을 좇습니다. "인생은 한 번뿐이니,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외치며 맛집을 찾아다니고, 해외여행을 떠나고, 명품을 소비합니다. 더 자극적이고 새로운 쾌락을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그 끝은 무엇입니까? 솔로몬의 고백과 유사합니다.

쾌락은 순간의 즐거움을 줄 수는 있지만, 결코 영원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 어떤 것에도 무감각해지는 '쾌락의 쳇바퀴'에 갇히게 됩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쾌락적응(Hedonic Adaptation)’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큰 행복을 주는 듯하지만, 금세 익숙해져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족은 사라지고 공허만 남습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강하게쾌락을 추구하지만 끝은 허무와 후회만 남습니다. 10분을 못 가 효과는 증발합니다. 수단은 넘치고 목적은 비어 있습니다. “쾌락-성취-공허의 순환고리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도파민 시스템은 기대(원팅)에 강하게 반응하고, 실제 즐김(라이킹)은 금방 둔화됩니다. 기대는 커지는데, 실감은 빨리 줄어들어 갈증만 키우는 구조가 됩니다. 파티가 끝나고 홀로 남았을 때 밀려오는 그 지독한 공허함, 그것이 바로 쾌락이 우리에게 주는 최종 답변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 버린 감각적인 즐거움은 잠시 공허함을 잊게 해줄 뿐, 결코 그 빈자리를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셋째, 노동과 성취: "성공하면 의미 있을까?" (2:18-23)

마지막으로 솔로몬은 일과 성취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거대한 궁전을 짓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수많은 남녀 노비들을 거느리며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업을 이룩합니다. 그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부와 명예를 쌓았습니다. ‘이 정도의 업적이라면 내 인생은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 이것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2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19절을 보십시오. 이것도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 중독(Workaholic)’에 빠진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 나의 성취를 통해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승진을 하고, 사업을 성공시키고,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내가 이룬 업적이 곧 내 인생의 의미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2:11, 18) 라고 탄식합니다. 내가 평생 피땀 흘려 이룬 이 모든 것을 결국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깊은 허무에 빠집니다. 권력·업적은 영속의 흔적을 남기려는 시도지만, 시간과 타인의 해석 앞에서 부서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서, 성공에서, 성취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이 프로젝트만 성공하면...", "사장만 되면...", "이만큼만 돈을 벌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성공의 계단을 오르지만 은퇴의 순간에 묻습니다. “내가 평생 이룬 것들이 결국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장에게만 좋은 일하고 내 청춘 끝나는 구나?” 은퇴한 후에 밀려오는 허탈감, 건강을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일의 무상함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일과 성공 역시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그 빛을 잃고 마는, 안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이 처절한 여정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결국 지혜도, 쾌락도, 성공도, 그 어떤 '해 아래에서' 즉 하나님 없는 세상 안에서는 솔로몬의 영혼을,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해 위의 것', 즉 하나님을 담도록 창조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인생은 공허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퍼즐 조각이 빠진 채로 인생의 그림을 맞추려고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다른 조각들을 열심히 맞춰봐야, 결정적인 한 조각이 없기에 그림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고, 우리는 영원히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 살도록 만드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 평안이 없나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마치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아무리 다른 좋은 것을 가져다주어도 결국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의미의 결핍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을 만날 때만 채워지는 영적인 갈증입니다.

 

2. ‘해 위에서발견하는 삶의 참된 인생의 의미, 그 분명한 길

그렇다면 이 지독한 의미의 결핍, 이 헛됨의 악순환을 끊고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이 지독한 의미의 결핍, 헤벨의 인생을 어떻게 끝낼 수 있습니까? 솔로몬은 인생의 황혼녘에 이르러, 그 모든 방황과 탐구 끝에 마침내 그 해답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전도서 1213-14절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세 가지 핵심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라" (Fear God)- 지식의 한계 vs. 하나님을 경외함 (인생의 기준점 전환)

이는 솔로몬의 첫 번째 실험(지식)에 대한 해답입니다. ''의 지성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던 시도는 번뇌만 더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인생의 기준점을 ''에게서 '창조주 하나님'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심을 인정할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라는 답을 얻게 되고,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라는 목적을 찾게 됩니다. 흩어져 있던 지식과 경험의 퍼즐 조각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결핍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통해 참된 의미를 찾아갔던 아버지 다윗과 달리 솔로몬은 모든 것이 주어진 풍요에서 시작하여 실제적으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솔로몬은 정략결혼을 통해 수많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고, 그들의 우상들을 예루살렘에 들여와 함께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열왕기상 11:9)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없는 해 아래서 지식으로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늘어날수록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의 한계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고, 이는 해결책이 아닌 더 큰 번뇌와 근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를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시도의 실패입니다. 내 지성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 했지만, 그 지성은 유한했기에 결국 더 큰 질문과 공허함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의미의 결핍 가운데 놓여 있는 현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 사회가 제공하던 '거대 서사(Grand Narrative)'의 붕괴에서 출발점입니다. 과거에는 종교, 국가, 이데올로기, 공동체 등이 개인에게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명확하게 제시했습니다. "신을 위해", "국가를 위해"와 같은 구호 아래 개인의 삶은 더 큰 이야기의 일부로서 의미를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절대적 가치 체계가 힘을 잃으면서, 개개인은 망망대해에 이정표 없이 떠 있는 듯한 실존적 불안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해 위의 의미 즉 경외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인생의 기준점을 ''에게서 '창조주 하나님'으로 옮기라는 명령입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의 중심이며, 내 존재의 시작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답하지 못했던 "(Why)?"라는 근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님에게서 찾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답으로, '왜 사는가?''창조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라는 목적으로 재정의됩니다. 지식의 탐구가 흩어진 퍼즐 조각을 모으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 퍼즐의 전체 그림(목적)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써 모든 지식과 경험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고 의미를 갖게 됩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C.S. 루이스는 이성과 지성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태양이 떠오른 것을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는다. 단지 태양을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태양을 통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라는 기준점이 생기자, 세상 만물이 비로소 의미 있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등 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이끈 세계적인 유전학자이자 전 미국 국립보건원 원장인 프랜시스 콜린스가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을 읽고 회심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명문대를 졸업한 과학도로서, 신앙은 지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이나 믿는 미신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실험과 증거로만 세상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의사로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돌보던 중, 그들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굳건한 신앙을 통해 평안을 얻는 모습에 큰 감동과 지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으며 과학과 신앙이 충돌하지 않음을 깨닫고, 자연의 경이로운 질서(DNA)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문을 발견하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의미 있는 삶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신앙이 과학적 탐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동기를 부여한다고 고백합니다. '바이오로고스 재단'을 설립하여 신앙과 과학의 조화를 알리는 데 힘쓰고 있으며,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생명의 신비를 밝히는 일이 곧 창조주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소명을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DNA는 신의 언어입니다. 게놈 지도를 완성한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적 성취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창조주를 향한 경배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둘째, "그의 명령들을 지키라" (Keep His Commandments) - 쾌락의 허무함 vs. 계명 준수 (인생의 방향성 설정)

이는 솔로몬의 두 번째 실험(쾌락)에 대한 해답입니다. 목적 없이 쾌락을 좇던 삶은 결국 허무의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해 아래 실험 즉 쾌락으로 솔로몬은 감각적 즐거움과 욕망의 충족에서 만족을 찾으려 했습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누렸지만, 쾌락은 일시적이었고 더 큰 자극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익숙해지자 남은 것은 권태와 허무뿐이었습니다. 이는 목적지 없이 본능과 감각만을 따라 방황하는 삶의 실패입니다. 이 길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죽자 이제는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다윗이 가르쳐준 하나님의 말씀 아니어도 세상을 잘 먹고 살고, 이웃 나라의 조공을 받으며 즐기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대 서사가 사라진 자리는 무한한 '자유'가 채웠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의미를 창조해야 하는 책임감은 개인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스스로 찾아내라"는 압박과 같아서, 많은 이들이 방향성을 잃고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옳게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 위의 의미 즉 계명을 따를 때 인생은 진정 의미있는 삶으로 변했습니다. '그의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쾌락이라는 나침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비게이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를 억압하는 규칙이 아니라, 우리를 가장 가치 있고 복된 삶으로 인도하는 방향키입니다. '나의 만족'을 좇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방향이 전환된 것입니다. 이기적인 쾌락을 추구하던 삶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타인을 섬기는 삶으로 바뀔 때, 우리는 일시적인 즐거움을 넘어선 지속적인 기쁨과 보람을 경험하게 됩니다. 목적 없이 표류하던 배가 항구(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계명은 우리의 삶에 분명한 방향과 질서를 부여하여 허무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억압하는 족쇄가 아니라, 가장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인생 내비게이션'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용 설명서'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가장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분', 즉 인생의 목적 그 자체입니다.

조니 캐시라는 미국의 전설적인 컨트리 음악 가수가 있습니다. 깊고 거친 목소리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엄청난 성공과 명성을 얻었지만, 그 이면에는 마약 중독, 외도, 술 등 방탕한 생활이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성공의 정점에서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잃고 삶을 포기하기 위해 들어간 동굴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중,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렬하게 느끼고 살아나가야 할 이유를 발견합니다. 이후 아내 준 카터의 헌신적인 사랑과 도움으로 재활에 성공하며 신앙을 회복합니다. 그의 삶은 의미 있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더 깊어졌습니다. 그는 교도소 순회공연을 통해 죄수들을 위로했고, 자신의 노래에 죄와 구원, 고통과 희망, 믿음에 대한 진솔한 고백을 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 상처를 통해 소외된 자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노래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면 바닥을 쳤을 때 믿음으로 얼마나 높이 튀어 오늘 수 있습니다.

 

셋째, "심판을 기억하라" (Remember the Final Judgment) - 성취의 무상함 vs. 최후의 심판 (인생의 영원성 부여)

이는 솔로몬의 세 번째 실험(성취)에 대한 해답입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업적이 무상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인생이 이 땅에서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영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행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로 평가받고 기억됩니다. 이 영원한 관점이 생길 때, 우리의 수고는 더 이상 헛된 몸부림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쌓는 의미 있는 행위가 됩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인생은 어떤 논리로 합리화해도 죽음의 공포와 인생의 허무 앞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의미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그가 가진 다른 모든 것들(지혜, , 쾌락)은 의미를 잃고 공허한 껍데기로 전락한 것입니다. 오늘날 거대 서사가 없어진 자리에 의미의 공백을 소비주의나 소셜 미디어에서의 인정과 같은 피상적인 것들로 채우려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물질적 소유나 타인의 '좋아요'에서 얻는 만족감은 일시적일 뿐, 근본적인 의미의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결핍감을 낳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솔로몬은 위대한 업적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영원한 명성을 남기려 했습니다. 거대한 건축물과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결국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평생 이룬 모든 것을 결국 타인에게 남겨주고 빈손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그의 모든 수고를 '헛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영원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의 실패입니다.

해 위의 의미 즉 심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라'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을 가지라는 선포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로 평가받고 기억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해 아래'의 관점에서는 모든 성취가 허무하지만, 영원한 심판과 상급이라는 '해 위'의 관점에서는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을 위한 준비 과정이 됩니다. 내가 쌓은 부와 명예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이로써 나의 수고는 더 이상 죽음 앞에서 사라질 헛된 몸부림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쌓는 의미 있는 행위로 변화됩니다. 한 번뿐인 연극으로 끝날 인생이,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순례의 여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 '헤벨'처럼 사라지는 허무한 것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날이 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영원한 관점을 갖게 됩니다. 이 영원에 대한 소망이야말로 '해 아래'의 모든 수고와 고난을 이겨내고,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가치 있게 만드는 최종적인 힘입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된 전도유망한 정치가였습니다. 사교계의 명사였지만, 정치적 소명이나 뚜렷한 삶의 목적은 없었습니다. 복음주의 목사인 존 뉴턴('어메이징 그레이스' 작사가)을 만나 깊은 영적 회심을 경험합니다. 그는 자신이 정치인이 된 삶의 목적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노예무역 폐지""사회 풍속 개혁"이라는 두 가지를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삼았습니다. 이후 20년간 수많은 조롱과 정치적 방해, 살해 위협 속에서도 끈질기게 노예무역의 비인간성을 고발했고, 마침내 1807년 영국에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의 삶은 신앙이 개인의 구원을 넘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솔로몬의 실험은 자기중심적, 감각적, 일시적인 관점에서는 결코 의미를 찾을 수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반면, 전도서가 내리는 최종 결론은 하나님 중심적, 목적 지향적, 영원한 관점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인생의 모든 질문이 해소되고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해 아래'의 실패는 '해 위'의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인 셈입니다.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죄인 된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유일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바로 '해 위에서' 이 땅으로 오신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14: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미를 잃고 방황하던 우리를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실 때, 우리는 비로소 '헤벨'의 저주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혹시 지금 삶의 의미를 잃고 공허함 속에 계십니까? '해 아래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헛된 수고를 멈추고, 시선을 들어 '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인생의 운전대를 창조주 하나님께 내어드리십시오.

 

이렇게 결단하며 나아갑시다.

첫째,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다.

둘째, 나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셋째, 영원한 심판과 상급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겠습니다.

이 결단 위에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의 남은 모든 날이 더 이상 헛된 바람을 잡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참된 의미와 기쁨을 누리는 복된 인생, 영원한 가치를 쌓아가는 풍성한 인생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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