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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결핍(1) 영적 결핍(마가복음10:17-2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621 추천수:2 218.147.218.173
2025-09-07 14:05:41

인생의 결핍(1) 영적 결핍

마가복음10:17-22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결핍을 느낍니다. 시간의 결핍, 돈의 결핍, 사랑의 결핍, 그리고 오늘 우리가 주목할 영적 결핍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안고 살아갑니다.

하버드대의 센딜 멀레이너선 교수와 프린스턴대의 엘다 샤퍼 교수는 그들의 책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서 이 결핍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옭아매는지 설명합니다. 결핍은 우리 정신을 사로잡아 가장 급한 문제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터널링(Tunneling)' 현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터널 안에 갇힌 것처럼 다른 중요한 것들은 보지 못하고 오직 눈앞의 문제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터널 시야는 결국 우리의 정신적 용량, '대역폭'을 감소시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우리를 최악의 선택으로 이끄는 '결핍의 덫(The Scarcity Trap)'에 갇히게 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인데, 대역폭이란 데이터가 지나가는 통로의 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역폭이 작다는 것은 길이 좁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길이 좁으면 차들이 조금밖에 지나지 못하고 길이 넓으면 차들이 동시에 많이 지나게 됩니다. 집에서 인터넷 속도를 100Mbps, 500Mbps, 1Gbps 이런 식으로 말하지요. 이것이 바로 대역폭입니다. 한 번에 데이터를 얼마나 많이 보낼 수 있는가를 나타내는 통로의 넓이입니다.

 

실연을 당해 결핍이 생기고 실연만 생각하게 되는 터널링 현상에 사로잡히면, 주변에 자신에게 잘해 주는 마음에 드는 상대가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실연당한 사람만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스토킹하다가 잘못되면 상대를 살해해 버려 인생을 망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결핍에 몰입하다가 결핍이 더 심해지는 것을 결핍의 덫이라고 합니다. 돈이 부족하면 돈 생각만 하느라 더 나은 기회를 보지 못하고, 결국 더 가난해집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늘 급한 일만 하다가 중요한 일을 못 하고, 그래서 시간이 더 부족해집니다. 관계 결핍으로 인한 외로움 때문에 아무 관계나 붙잡다가 오히려 더 상처받고 외로워집니다. 부족함을 채우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 방식 때문에 더 결핍이 심해지는 것이 바로 결핍의 덫입니다. 마치 수렁에 빠져나오기 위해 허우적거리지만 결국 더 깊이 수렁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결핍의 악순환이라고 합니다.

빚에 쪼들리는 사람을 예로 들어볼까요? 갑작스러운 지출로 돈이 부족해진 (1. 결핍 상태) 김 집사님은 '이 돈을 어떻게 메울까?'라는 생각에만 갇힙니다(2. 결핍이 정신을 사로잡음 - 터널링과 대역폭 감소). 결국 장기적인 계획 대신 당장 쉬워 보이는 고금리 대출에 손을 대는 (3. 비효율적인 행동 및 의사결정 - 잘못된 결정--빌리기, 느슨함 부족, 여러 일을 동시에 잡으려다 집중력이 분산되고, 오히려 성과도 줄고 스트레스가 커지는 저글링 상태, 압박감 때문에 머리와 몸이 제 기능을 못하는 초킹 현상)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 결과, 다음 달에는 더 큰 이자 부담으로 (4. 결핍이 심화 및 영속화), 결국 빚으로 빚을 막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영적 결핍의 악순환은 더욱 무섭습니다. 중년이 되어 삶의 의미를 잃고 마음이 공허해진 (1. 영적 결핍 상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때 누군가 다가와 무조건적인 사랑과 명쾌한 해답을 주며 위로합니다. 그 순간, 그의 시야는 그에게만 고정됩니다(2. 터널링과 대역폭 감소). 그런데 그를 위로한 사람이 사이비 이단입니다. 가족과 친구들의 진심 어린 조언은 들리지 않고, 감정적 위안에만 의존해 자신의 삶을 통째로 이단에 맡기는 (3. 잘못된 결정)을 내립니다. 그 결과, 관계와 재산, 시간을 모두 빼앗기고 영혼마저 파산하는,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4. 궁극의 영적 결핍)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구원의 손길이라 믿었던 것이 영혼을 옥죄는 감옥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 청년 역시 모든 것을 가졌지만 '영생'에 대한 해결되지 않는 결핍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입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청년은 분명히 유대인이었고,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10:20).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자도 되었고 적당한 권력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영적으로 공허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적표처럼 생각했습니다. 십계명 시험에 100점을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한구석에는 영적 결핍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진짜 충분할까? 혹시 F 학점 맞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한 친구가 되지 못하고 외로움과 허전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겉으로는 다 가진 것 같아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죽음 이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현대 교인으로 말하면, 교회에 다니고 예배 생활도, 봉사 생활도, 헌금 생활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죽으면 천국에 갈까? 진짜 천국이 있기나 할까? 죽으면 모든 것이 산화되어 버리고 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천국이 있다면 내가 이 정도 한다고 천국에 갈 수 있을까?'라는,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한 영적 결핍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갈라디아서 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했는데, 교회는 다니는데 여전히 자신이 인생의 왕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자기중독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이 천국을 전하며 수많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결국 이 결핍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자들이, 철학자들이, 심리학자들이, 과학자들이, 종교인들이 이 질문을 던지지만 영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지독한 영적 결핍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영적 결핍이 아니라 영적 풍요를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세 가지 길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1. 영적 결핍의 악순환을 끊고 영적 풍요를 누리려면, 예수님께 '겸손히 나아와' 결핍을 인정해야 합니다.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책에서는 결핍에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점도 있다고 합니다. 결핍의 이로운 효과를 집중 배당금(Focus Dividend)이라고 말합니다. 결핍의 이로운 효과 첫째는 집중력 증대 및 효율성 향상입니다. 시간의 결핍, 즉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 온 힘을 다해 글을 씁니다. 물질의 결핍, 즉 치약이 다 떨어지면 최대한 아껴 씁니다. 둘째는 의사결정의 명료화와 구체화입니다. 결핍은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합니다. 셋째는 전문성 함양입니다. 결핍은 특정 분야에서 사람을 전문가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첩의 아들이라 아버지의 사랑에 결핍이 있었고, 스티브 잡스도 입양아라는 결핍이 있었으나 그 결핍이 그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많은 사람이 결핍 때문에 위대한 결과물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영적 결핍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결핍이 있었기 때문에 부유하고, 젊고, 권력 있는 이 청년이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만약 영적 결핍이 없었다면 그는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젊고, 부자고, 적당한 권력이 있고, 도덕적으로 본이 되는 삶을 산다면 예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영적 결핍 의식을 갖는 것도 아무나 갖지 않습니다. 영적 결핍 의식은 사는 데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느 때 영적 결핍을 느끼게 됩니까?

첫째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었을 때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내가 왜 사는지모르겠을 때입니다. , 성공, 공부, 가정 등은 얻었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근본적 이유를 채워주지 못할 때, 영혼은 공허함을 느낍니다. 전도서의 고백처럼 헛되고 헛되다는 느낌이 바로 영적 결핍입니다.

둘째는 죄와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입니다. 잘못한 일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죄책감이 무겁게 짓누를 때입니다. 용서받지 못했다는 불안이 있을 때, 사람은 깊은 영적 결핍을 경험합니다. 시편 32편에서 다윗이 죄를 숨겼을 때 종일 신음하며 뼈가 쇠하였다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셋째는 위기와 한계 상황을 만났을 때입니다. 죽음, 질병, 관계 단절 같은 극한의 상황을 맞이하면, 사람이 가진 능력이나 재물은 무력해집니다. 그때 영혼 깊은 곳에서 내가 붙잡을 더 큰 존재가 필요하다는 갈망이 생깁니다. 자신이나 주변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며 유한한 인생의 한계를 깨달을 때, 영원한 가치와 사후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아무리 사람들 속에 있어도 진짜 나를 이해해주는 이가 없다는 외로움 속에서, 인간은 영적 결핍을 느낍니다.

 

이때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결핍에서 영적 풍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오지 않고 이단의 교주에게 나아가면 영적 결핍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럴듯한 인문학자나 철학자나 종교인에게 나아가도 영적 결핍을 근본적으로 끊을 수 없습니다.

 

영적 결핍의 악순환을 끊는 첫걸음은 나의 상태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해결자이신 예수님께 겸손히 나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 청년은 한 가지는 정말 잘했습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달려와 꿇어앉아에 방점을 찍으시길 바랍니다. 절박함과 겸손함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는 자신의 결핍을 알았습니다. 그는 돈, 명예, 젊음, 그리고 스스로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할 만한 도덕적 성취까지 가졌지만, 그것들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체면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바로 영적 결핍을 해결하는 출발점입니다.

 

영적 결핍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리려면, 영적 결핍으로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 지성인이라고 불리던 이어령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어령 교수는 젊은 시절, 철저한 이성주의자이자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지성과 논리로 분석하고 이해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딸 이민아 목사의 삶을 통해 지성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는 딸이 갑상선암과 망막 박리로 실명 위기에 처했을 때,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빠집니다. 딸의 고통 앞에서 그의 빛나는 지성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훗날 이 심정을 '4분의 1의 슬픔'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딸의 고통을 보면서 내 슬픔은 기껏해야 4분의 1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지. 부모 자식 간에도 그 고통을 온전히 함께할 수 없는데, 어떻게 내가 타인의 고통을 다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나. 인간은 서로의 슬픔조차 온전히 나눌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야."

 

이 깨달음은 그가 평생 쌓아 올린 지성의 성벽에 처음으로 금이 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지식과 사랑이 얼마나 유한한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그 너머의 영역, 즉 영성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영적 결핍은 지성만으로 살아가려 할 때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존재론적 공허함입니다. 그는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끌어안은 것입니다. , ''의 세계에서 '믿음'의 세계로, '분석'의 세계에서 '사랑'의 세계로, '홀로'의 세계에서 '함께'의 세계로 나아감으로써 비로소 인생의 근원적인 결핍을 채우고 참된 평안을 얻게 된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의 지성은 무릎 꿇었습니다. 그의 영적 여정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딸 이민아 목사의 굳건한 신앙이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아빠, 나를 위해 기도하지 말고, 내 눈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세요. 그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세요"라고 말하는 딸의 모습 앞에서 그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자신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딸의 평안과 믿음 앞에서 그는 처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2007, 그의 나이 74세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회심을 '지성의 항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평생 "나는 안다"고 외치던 삶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리로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결핍을 채우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아직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 후의 불안으로 영적 결핍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면, 예수님께 겸손하게 나와 무릎을 꿇으시기를 바랍니다.

 

2. 영적 결핍의 악순환을 탈출하여 영적 풍요를 누리려면,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믿어야 합니다.

 

겸손히 나아왔다면, 이제 해결책을 제시하는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정답으로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영적 결핍의 치유를 위한 처방전을 내리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오해하면 예수님은 선하지 않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의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수정해 주시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선생님 정도에서 머무신 분이 아니십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 일을 행해야 하고, 선한 일이라면 선한 선생이신 예수께 묻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청년은 예수님을 랍비 정도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즉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예수님은 '네가 나를 인간으로 보았다면 인간은 그 누구도 선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선한 이는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유추하면, 예수님은 바로 선한 선생님 정도가 아니라 한 분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4대 성인, 본받아야 할 분, 위대한 도덕 교사, 위대한 리더 정도로 받아들이면 그곳에는 영생의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을 구원할 구세주이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73절에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9)."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5:24)."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누구로 받아들이느냐는 인생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2-3).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며" (6:38),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며" (8:58),

창세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화롭게 계셨다" (17:5).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영생의 길은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4:12).

 

요즘 언론에서 보도되는 통일교 문선명이라는 이름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신천지 이만희라는 이름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일광조계종 건진 법사의 이름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인간적 행위를 통해서도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선한 일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청년에게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속여 빼앗음, 부모 공경, 이런 계명을 지켰느냐고 물어보십니다. '네가 알기로 선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면, 이런 계명을 잘 지켜 선한 사람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이 청년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자신만만하게 말합니다. 그는 일반 유대인의 과정을 좇아 6세부터 율법을 공부하고, 또 준수했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모든 인간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인간은 형식과 겉모습밖에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은 내부 동기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위선과 허위, 형식주의가 통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0:21)."

 

예수님의 처방은 단순히 재물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의 왕좌에 앉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했던 '재물'이라는 우상을 제거하라는 영적 수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그 처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부유함이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큰 안정감을 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결핍을 끌어안은 채 슬피 돌아갔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선한 행위로는 영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인데, 정말 선하다면 네 이웃을 사랑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너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기는 것과 같은데, 그는 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행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210절에서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10"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 의로, 자기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에베소서 2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무엇을 행하는 데(to do)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데(to be) 있다는 사실을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행위로 영생을 받으려고 몸부림치다가 영적 결핍의 늪에 빠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평생 영적 풍요를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영적 결핍의 덫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예수님의 진단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삶에서 "이것을 내려놓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자존심입니까? 숨겨진 쾌락입니까? 아니면 돈과 성공에 대한 집착입니까? 그것을 내려놓을 때 더 큰 것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아니라, 그것을 주님께 드릴 때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영적 결핍에서 해방되고 영적 풍요를 누리는 길은 우리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구원주라는 사실을 100% 믿는 믿음으로 영적 결핍에서 해방되어 영적 풍요를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3. 영적 결핍의 악순환에서 완전히 탈출하여 영적 풍요를 누리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채워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결핍의 악순환을 끊는 것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우리의 영혼을 채워나가는 과정입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단순히 "가서 팔아라"에서 멈추지 않으시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삶은 진공 상태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내 삶의 우상을 비워낸 그 자리에 예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세상의 또 다른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는 다시 결핍의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이 말을 들은 젊은 관원은 어떻게 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습니다.

 

그가 주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재물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자신의 삶에 풍요를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것만큼은 놓지 못하겠다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풍요를 마지막까지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재물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6:24)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대등한 입장에 놓고 말씀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맘몬을 섬길 것인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를 결정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단하지 못하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따르면 영생을 얻는 하나님 나라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그 한 가지를 주님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 마음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재물이 그 청년의 마음을 지배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려면 우리 모두가 재물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따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다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동방의 부자 욥에게 모든 재물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에게 너의 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요구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는 이삭을 요구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애굽의 권세를 내어놓도록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내려놓았습니다. 마태는 세관의 책상을 버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세상 자랑할 만한 것을 배설물로 내려놓았습니다. 이 한 가지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따르는 데,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진정 메시아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보다 더 우선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보다 더 가까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어떤 것도 주님과 바꿀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평생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생 예수님을 따랐던 '대각성운동'을 이끈 위대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가 있습니다. 23세의 젊은 나이에 당시 북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 중 하나였던 노샘프턴 교회의 담임 목사를 했습니다. 그는 매일 13시간 이상을 서재에서 보내며 설교를 준비하고 신학을 연구했으며, 수많은 성도들을 상담하고 심방했습니다. 그는 부흥을 변호하고 이단적 가르침에 맞서 싸워야 했고, 이 과정에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영적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성찬 참여 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하려 했을 때, 성도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23년간 섬기던 교회에서 쫓겨나는 엄청난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성도를 따를 것인가, 주님을 따를 것인가 앞에서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을 따를 것인가, ()을 따를 것인가 앞에서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에드워즈는 평생 허약한 체질과 각종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흉막염으로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후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만성적인 통증, 소화 불량,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렸습니다. 몸이 약해 설교나 집필을 중단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육체적 고통은 종종 정신적, 영적 침체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성과 부패함에 대한 깊은 인식 때문에 괴로워했으며,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이 강렬했던 만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깊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랐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영적 위기를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신학을 심화시키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끊임없는 영적 압박, 육체의 질고, 내면의 어두움과 싸워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 만유의 주로 믿었다면, 예수님을 평생 따르는 삶을 살아갈 때 영적 결핍에서 놓임받고 영적 풍요를 평생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물질은 많고 적음에 풍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면 어떤 경우에도 영적 풍요로 말미암아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평생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던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4:11-13)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성도님들의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부자 청년과는 달리 자신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9-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믿습니까? 역설적 진리입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요한삼서 1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세 가지 영역을 언급합니다. 영혼이 잘됨, 범사에 잘됨, 강건함입니다. 이 순서 자체가 우선순위를 드러냅니다. 먼저 영혼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어야 하고, 그 위에서 삶의 전반적인 영역(경제, 관계, 일상)이 형통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육체적 건강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진다는 뜻입니다.

 

결핍을 채우는 우선순위를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결핍을 경험합니다. 돈의 결핍, 관계의 결핍, 건강의 결핍 등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모든 결핍보다 먼저 영적 결핍이 채워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영혼의 결핍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채울 때 내적 평안과 의미가 생깁니다. 그 영혼의 충만이 삶 전체(범사)에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육체의 건강과 회복에도 나타납니다. 현대인은 보통 반대로 생각합니다. 먼저 건강을 챙기고, 경제적 형통을 추구하고, 마지막에 시간이 남으면 영적인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순서는 늘 공허함과 불안을 남깁니다. 건강과 돈이 있어도, 영혼이 비어 있으면 삶은 여전히 불만족스럽습니다. 결핍을 채우는 데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영혼의 결핍을 먼저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른 결핍은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 마태복음 633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영적 결핍의 악순환을 끊고 영적 풍요를 누리려면, 예수님께 '겸손히 나아와' 결핍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영적 결핍의 악순환을 탈출하여 영적 풍요를 누리려면,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영적 결핍의 악순환에서 완전히 탈출하여 영적 풍요를 누리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채워나가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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