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9) 은혜에 감격한 자의 합당한 반응 3가지
2025년 7월 기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은 무엇일까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살바토르 문디>입니다. 라틴어로 "세상의 구세주"라는 뜻으로 경매 낙찰가가 2017년 4억 5,030만 달러였습니다. 우리 돈으로 약 6,300억 원 이상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가치 있는 그림은 모나리자라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인 그림으로, 그 가치는 단순히 화폐 단위로 환산하기 어렵습니다. 경매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값이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보험가로 볼 때 약 8억 7,000만 달러(한화 약 1조 2,03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부는 모나리자가 루브르 박물관에 미치는 막대한 관광 수입 등 경제적 파급 효과를 고려하여 그 가치를 최대 4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고 합니다. 이는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는 등, 그림 한 점이 창출하는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모나리자가 유명해졌을까요?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교수인 캐스 선스타인이 <페이머스: 왜 그들만 유명할까?>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소개합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유명해지는 데 행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합니다. 초기에는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습니다. 1503년에서 1519년 사이에 그려진 〈모나리자〉는 제작 후 몇십 년간 관심을 끌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답니다. 1911년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가 도둑맞은 사건이 명성을 얻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답니다. 이 책은 다양한 사례와 이론적 배경을 분석하며 성공과 인기, 명성이 단순히 개인의 타고난 재능이나 노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운', '사회적 영향', '시대정신'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외부 요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비즈니스 서적이나 성공론이 성공한 인물/기업의 공통점을 찾아 성공의 이유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성공한 사람들의 특정 특성이 성공의 원인이라기보다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 나오는 여러 예 중에 세계적인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예를 들자면 무하마드 알리가 자전거를 도둑맞지 않았다면 권투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12살에 빨간색 자전거를 도둑맞았답니다. 도둑을 "때려눕히고" 싶다고 신고한 경찰관 조 마틴은 공교롭게도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답니다. 마틴은 알리에게 권투를 배워보라고 제안했고, 이것이 그의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답니다. 만약 자전거가 도둑맞지 않았거나, 저자는 알리가 다른 경찰관에게 신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며 행운과 우연의 중요성을 부각합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는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교수인 저자는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고 유명해지는 데 "비결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엄청난 성공의 이유를 오로지 개인의 내적 자질에서 찾는 실수를 지적하고 이 책에서 행운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을 행운이라고 하지 않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은혜이고, 어쩌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믿은 것도 은혜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인데 사도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가난하고 수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간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독신으로 살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정직하게 생각하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매주 묵상하고 있는 데 우리가 이렇게 오늘도 생명으로 살고 있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주의 기초 상수들(예: 중력 상수, 전자 질량, 강한 핵력, 우주의 팽창 속도 등)은 극도로 정밀하게 조율되어 있어야만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값들 중 하나만 조금만 달라도 우주는 생명 불가능한 죽은 공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중력이 지금보다 1조분의 1만 강했어도 별은 존재할 수 없고, 약했어도 별은 불타지 않습니다. 지구는 딱 적절한 거리(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골디락스 존”)에서 태양을 돌고 있습니다. 적절한 대기 조성 (산소 약 21%)과 기압, 물의 순환, 자전 속도, 자기장, 중력 등 모두 극도로 정밀하게 조율되어 있습니다. 이 중 하나라도 조금만 바뀌어도 인간은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연이나 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정교하며, 의도된 설계자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결과임을 시편 기자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하늘과 달과 별을 내가 보오니…” (시 8:3)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약 30억 개의 염기쌍으로 구성된 유전 지도를 갖고 있습니다. 무작위적으로 이런 코드가 생겨날 확률은 사실상 ‘0’에 가깝습니다. 과학자 프랜시스 콜린스(유전학자, 휴먼 게놈 프로젝트 이끈 사람)는 이를 “신의 언어”라 표현했습니다. 심장은 하루 10만 번 뛰고, 폐는 매일 2만 번 이상 숨을 쉬며, 뇌는 1초에 수백만 건의 전기 신호를 처리합니다. 우리가 아무 의식없이 살아가는 것같지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지속적이 은혜의 흐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와 은혜의 선물입니다. 생명은 통계적으로 “존재 불가능”한 확률을 뚫고 존재합니다(Probability Paradox). 하나의 생명체(단백질 하나조차)가 우연히 생겨날 확률은 10의 수십 제곱분의 1입니다. 인간이 출생할 확률은, 1인당 약 4 x 10⁻²⁰⁰⁰⁰⁰의 확률, 즉 사실상 0에 가까습니다. 인간은 그저 생긴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생명 유지와 회복 능력이 은혜입니다. 우리 몸은 손상되면 자동으로 복구합니다 (상처 회복, 면역 반응, 세포 재생 등) 잠을 자고, 호흡을 하고, 피가 순환하며, 몸은 끊임없이 자신을 회복합니다. 의사들은 이를 “자율적 생명 유지 시스템”이라고 부릅니다. 회복과 유지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4)”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은혜의 찬양을 부를 때 가슴이 뭉클합니다.
“나를 지으신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의 합당한 반응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은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복음의 은혜를 차곡차곡 설명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12장에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어로 전환하며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은혜를 말한 후, 그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을 요청합니다. 그 중 가장 기본이 되는 3가지만 소개하려고 하는데 각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은혜에 감격한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 각자에게 주어진 답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1. 은혜에 감격한 자의 합당한 반응은 ‘시간’을 드리는 예배로 나타납니다 (1절)
1절을 큰 목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자비하심을 받은 자들, 은혜에 감격한 자들이 은혜에 감격한 자의 합당한 반응 첫 번째가 예배라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σῶμα, 소마)은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 곧 시간, 에너지, 의지, 습관 등 ‘나라는 존재 전체’를 말합니다. 바울은 구약의 죽은 제물이 아닌, 살아 있는 제물로 우리 자신을 드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첫 번째 중요한 반응은 예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로 반응하지 않으면 은혜 받은 것이 아니고 은혜를 아직 깨닫지 못한 삶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23–24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되 영과 진리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예배하는 존재로 지었습니다. 가인의 실패는 예배의 실패였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구원하신 이유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임을 밝히셨습니다. 출애굽기 7:16을 보면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라”(=예배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 예배에 실패합니다. 그래서 앗수르에게 망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우리를 왜 구원하였습니까? 에베소서 1:12에서 “우리는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천국에 가서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계시록 5:9–10에서 “주께서 피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고 그들은 주를 예배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구원은 단지 지옥 면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이제 삶으로 예배하는 자, 예배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주신 것도 바로 근본적으로는 예배를 위한 것입니다. 모든 시간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 날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생명이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 중의 은혜는 생명입니다. 육신적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사는 것도 큰 은혜이며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영적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에 감격한 자의 합당한 반응은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생명은 곧 시간입니다. 이 땅의 육신적 생명도 시간이고 영적인 생명도 영원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 시간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주일 성수하는 것도 바로 예배를 위해서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은 신앙의 출발점입니다(창 1:1, 시 139:13-16). 내 생명과 내 시간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구별된 시간을 드리는 '주일 성수'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주일 예배는 일주일의 시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음을 인정하고, 시간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한 주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나머지 시간도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일주일 168시간입니다. 그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 중 한 시간도 하나님께 드리기를 싫어한다며 어떻게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 크신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마땅한 첫 번째 반응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예배의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일주일 주일 예배도 드리지 못하는 성도님은 계시지 않습니까? 주일 예배로 다 되었다고 마감하고 사시는 성도님을 안계십니까? 수요예배, 새벽예배, 매일 성경 읽기와 기도 등을 하며 열심히 예배 생활하는 성도님이 일주일 약 7시간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일주일 168시간의 약 4.2%입니다. 시간의 십일조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것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일 예배는 삶 전체를 예배로 살겠다는 서약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격하는 사람은 168시간 전체를 하나님께 반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삶의 순간 순간 하나님이 없이 홀로 살지 말고 의식의 흐름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면서 반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영국 왕실 자문 병원에서 잘 나가던 의사로 살던 마틴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통한 삶 전체의 방향 전환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안 사람은 그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살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천국에서의 예배는 시간의 제한 없이 전 존재가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삶입니다. 즉, "시간"이라는 개념보다 “존재 자체가 예배가 되는 상태”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4:8절에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시간적 제한 없이, 끊임없는 경배를 드리는 천상의 예배를 보여줍니다. '밤낮 쉬지 않고'란 표현은 24시간 내내 예배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원 속에서 멈춤 없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아는 물리적 시간(크로노스)이 존재하지 않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베드로후서 3:8절에서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으니…”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22:5절에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천국에는 인간의 시계로 측정하는 낮과 밤의 개념이 사라진다는 의미이며, ‘언제 예배드리는가’가 아니라 ‘예배 자체가 삶이 되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곳에서는 우리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에 반응하는 예배가 됩니다.(계7:9-10)
남은 시간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예배를 손해로, 예배를 부담으로, 예배를 지루함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이 진리를 믿습니까? 예배는 마음이 회복되고 기쁨이 회복되는 자리입니다. 세상의 고단함과 번민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기쁨이 마음을 채웁니다. 시편 73:17, 26절에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내 마음과 육체는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라고 했는데 예배는 현실의 혼란과 불평이 치유되는 자리, 질병이 치유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다시 ‘반석’으로 붙잡고, 내면의 분노와 질투를 내려놓게 됩니다. 로마서 12:2절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했는데 예배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리, 즉 삶의 나침반이 주어지는 자리입니다. 혼란한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0: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예배는 지친 심령에 새 힘이 공급되는 영적 재충전의 시간입니다. 주님의 영광 앞에 머무는 자는 세상을 이길 능력과 담대함을 얻습니다. 히브리서 4: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배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삶의 시간표를 하나님께 드려진 시간, 즉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드리는 예배 중심으로 살다가 마지막 영원히 예배하는 천국으로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2. 은혜에 감격한 자의 합당한 반응은 ‘재능’을 드리는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3-6절)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바울은 사도로서 권면할 자격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는 "과대하게 생각하지 말라",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분량"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정도, 은사, 역할을 뜻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 자체라기보다, 공동체 안에서 맡겨진 직분과 은사에 따른 신앙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자기 역할과 위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하나님 중심의 평가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지만 다양한 기능적 역할과 사역이 있습니다. 6절에 보십시오.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를 사용할 때는 "믿음의 분수"로 하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범위 안에서 성령의 조명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조심스럽고 신실하게 말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충실한 예언’이 되어야 하며, 주관적 확신이 기준이 되어선 안 됩니다. 7-8절에 각자 은사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말합니다. 6절 전반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게 다양한 은사(카리스마타)를 주셨습니다. 이 은사는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책임이며 소명입니다. 은사’는 ‘은혜’(카리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즉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재능은 나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분량대로', 즉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리에서 교회를 세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재능은 내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할 수도, 다른 사람의 재능을 부러워하며 열등감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반응은 섬기는데 있습니다. 왕도 제사장도 선지라도 주어지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지 모르고 자기 것인 양 알고 남용하고 오용합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이 지옥같이 변하고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롬 11:36)라는 말씀처럼 재능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며 자신의 형상(창 1:26-27)대로 지으시고, 각 사람에게 고유한 재능과 소명을 주셨는데 이 재능은 단지 생존이나 자아실현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남으로(창 3장) 재능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가인은 제사와 농사 재능을 질투로 사용했고(창 4:3-8), 바벨탑 사람들은 기술과 협력을 하나님 이름이 아닌 자기 이름을 내는 데 사용했습니다(창 11:4), 솔로몬은 지혜와 부를 쾌락과 자기 영광에 소모하며 무너졌습니다(왕상 11장). 이처럼 타락한 인간은 재능을 자기 중심적 목표, 권력 추구, 쾌락 충족, 자기 우상화에 오용합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말씀, 치유, 권위, 기적)을 자기 영광이 아닌 타인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줌으로, 재능의 최고 목적은 ‘자기 부인과 이웃 사랑’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은혜에 감격한 자의 재능 사용은 “은혜대로 받은 은사”를 믿음의 분수대로, 그리고 성실하고 기쁘게 사용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의 섬김을 체험한 자들이 그 은혜에 감격하여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섬김으로 반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타락으로 오용된 재능이,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제자리로 돌아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한 자는 섬김을 특권으로 여깁니다.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내가 이 귀한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가?” 재능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며, 타락으로 오용되었지만, 예수님의 구속과 섬김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의 자세로 재능을 사용할 때, 우리는 은혜에 감격한 자의 합당한 반응을 삶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직업적 기술, 성격적 장점, 예술적 감각 모두가 교회를 섬기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재능으로 섬기는 것을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마다 주일 학교에는 부모와 자식이 함께 섬기는 선생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젊은이들이 섬기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익과 편리와 기쁨이 있는 곳만 추구합니다. 심지어는 작은 교회 목사님 아들도 사람 많은 교회로 떠납니다. 얼마전 선교사님을 만났는데 친구 목사님 아들이 다른 교회에 나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제가 한 5년 전에 미국에 있는 어느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는데 담임 목사님 아들과 시무 장로님 아들이 다른 교회 나간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섬김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섬김은 은혜에 감격하는 자의 사명입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독일 루터교 전통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기독교인 가정의 8대째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의 결혼과 20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아내 사이네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두 번째 아내인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여 13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10명 이상이 유아기나 어린 시절에 사망했습니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다고 해도, 바흐는 자녀를 잃는 깊은 슬픔과 애통을 반복해서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첫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사망했을 때, 그는 출장 중이었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돌아와 그녀의 무덤 앞에 홀로 앉아 통곡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수난 음악, 특히 《요한 수난곡》과 《마태 수난곡》에서 느껴지는 깊은 감정 표현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음악가로서의 생계 유지의 어려웠습니다. 바흐는 생애 대부분을 교회와 시의 고용인으로 살았습니다. 정기 급여 외에 예배 시 헌금의 일부를 수입으로 받았는데, 이 또한 날씨나 교인 수에 따라 불안정했습니다. 시 당국과의 마찰, 행정 업무 과중 등으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의 자리를 지켰고, 끝까지 섬김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내 안나 막달레나와 함께 매일 저녁 가정예배와 음악 연습을 하며 자녀들을 신앙과 음악으로 양육했습니다. 그의 아들 카를 필립 엠마누엘 바흐(C.P.E. Bach)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C. Bach)는 훗날 고전주의 음악을 이끈 대표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음악은 그에게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음악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 말은 그에게 음악이 단지 미적 작업이나 예술 행위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반응이며 삶 전체를 드리는 예배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작곡 전에 먼저 기도하였습니다.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음악감독)로 일하면서, 매주 예배에 맞춰 새로운 칸타타를 작곡하고 연주해야 하는 엄청난 스케줄 속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루에 1시간 이상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고정적으로 확보했습니다.
그는 작곡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전해집니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Jesu, juva.”) 실제로 그의 악보 서두에 종종 J.J.(Jesu Juva, 예수여 도우소서)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이는 단지 습관이 아니라, 작곡조차 하나님께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작곡이 끝난 후에는 항상 악보 마지막에 다음의 서명을 남겼습니다. S.D.G. –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것은 바흐의 재능과 작품이 인간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드리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는 400편 이상의 교회 음악 작품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예배용 칸타타, 수난곡, 미사, 오르간 코랄 등 대부분의 작품은 철저히 성경 본문과 교리적 주제를 담고 있으며, 작곡과 연주 모두가 예배를 위한 헌신적 표현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마태 수난곡(Matthew Passion)》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도록 돕는 신앙 고백서와 같은 작품입니다. 바흐는 말했습니다. “나는 음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음악을 쓰셨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통로로 여겼고, 자신이 받은 재능을 오직 예배와 섬김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12장 3–8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라’는 교훈의 실천적인 모범입니다.
바흐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받지만, 그는 평생 자신을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았습니다. 은혜에 감격한 자는 자신의 재능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익과 편리와 쾌락만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재능은 어디에 드려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내에서 예배팀, 교육부, 행정, 봉사, 환영, 상담 등 수많은 섬김의 영역이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자원 봉사의 수많은 영역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말의 능력, 손의 기술, 감성, 리더십… 그것은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도구입니다.
은혜에 감격한 자는 이 은사를 쌓아두지 않고 사용합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이웃의 구원을 위해, 보다 낳은 행복한 사회를 위해 섬김의 도구가 되시길 바랍니다.
3. 은혜에 감격한 자의 합당한 반응은 ‘물질’을 드리는 나눔으로 나타납니다 (8절 하반절)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로마서 12장의 마지막 은사 목록에는 ‘구제’와 ‘긍휼’이 포함됩니다. 즉 물질과 마음의 나눔은 은혜에 감격한 자의 구체적인 삶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1절)에는 당연히 우리가 소유한 물질도 포함됩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하라는 말씀을 통해 물질을 나누는 삶이 은혜에 대한 중요한 반응임을 가르칩니다. 물질 나눔의 대표적인 것이 성경에 나오는 십일조 제도입니다. 십일조는 단순히 수입의 10분의 1을 내는 율법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는 다윗의 고백처럼, 내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십일조는 나머지 10분의 9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사용하겠다는 청지기로서의 다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니까 이미 폐해졌고 신약시대에는 십일조가 필요 없다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드렸습니다(창14:20).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자발적으로 드렸습니다. 믿음과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입니다. 창세기 28:22절에 야곱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은혜의 약속에 대한 헌신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라고 합니다(레위기 27:30). “땅의 소산,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말라기 3:10절에서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나 보라”라고 말씀합니다. 은혜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에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이 말씀을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릴 정도로 철저히 했습니다. 레위기 27:30의 율법을 지나치게 확장한 것으로, 형식적 경건을 자랑하기 위한 과시적 행위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공의와 사랑, 신실함을 도외시한 채, 외적인 의식만을 지키는 그들의 태도를 책망하십니다. 즉, 율법의 무게 중심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이것” 즉 정의·긍휼·믿음도 “저것” 즉 십일조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는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십일조도 행하되, 더 중요한 본질도 함께 지켜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식적으로 자기의를 드러내기 위해 하지 말고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십일조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21절에서는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물질 역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드러내는 구별된 믿음의 표현입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인생 말년에 다윗은 “주의 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것이 모두 주의 것이로소이다…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대상 29:11–14)라고 고백했습니다. 칼빈은 “십일조는 구약의 의무로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돌려드리는 거룩한 훈련이다.”라고 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적 형식의 강제가 아니라, 은혜에 감격한 자가 드리는 자발적 헌신의 기본 단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인색함으로 하지 말고, 억지로 하지 말라.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모든 재물이 은혜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구속받은 자의 기본적 청지기 훈련입니다. 단순한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의 일부입니다. 십일조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내 인생과 재정의 주인이신가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은 우리 마음의 주인을 드러내는 영적 리트머스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주인으로 믿는 사람은 마게도냐 교인들처럼 "극한 가난" 속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 8:2-3)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헌신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먼저 자신들을 주님께 드렸기(고후 8:5)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깊이 체험한 자는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기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돈을 어디에 쓰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을 다스리는 청지기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R.G. 르투르노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기독 실업가이자 중장비 기계 개발자였습니다. 그는 불도저, 스크레이퍼, 크레인 등 현대 건설·광산 장비의 기초를 만든 선구자로, 그의 이름을 딴 르투르노 기계 회사(LeTourneau Inc.)는 당시 세계 중장비 시장의 약 70%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기술자나 사업가가 아니라, 은혜에 감격한 믿음의 청지기였습니다. 르투르노는 16세에 정규 교육을 그만두고 자동차 수리공으로 일하며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는 손재주가 뛰어났고, 기계에 대한 감각이 탁월했습니다. 스스로를 ‘기계 마니아’라 불렀던 그는 자신만의 사업을 해보고자 20대 초반에 전기 회사와 용접 기계 관련 사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사업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자금 관리와 계약 운영 경험이 부족해 곧 심각한 적자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투자를 받았던 금액도 손실로 사라졌고, 결국 첫 사업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때 그는 크리스천으로서 회심한 상태였지만, 삶과 신앙을 분리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주일은 교회에 나가고, 평일은 자신의 사업을 위한 시간으로 여겼습니다. 첫 실패 이후에도 르투르노는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토목 건설 장비를 직접 제작해서 현장에 투입하는 사업을 시작합니다. 당시 그는 도로 정비, 배수로 공사, 토지 개간 등에 특화된 기계를 직접 설계해 현장에 투입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수주한 도로 공사 프로젝트가 폭우와 토양 붕괴로 인해 현장에서 중단되고, 추가 공사비는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기계를 구매하기 위해 빚까지 진 상황이었기에 그는 완전히 파산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이렇게 고백했다고 전해집니다. “주님, 제 사업이 아니라 주님의 사업입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이 이끌어주십시오.” 이 기도는 그의 인생과 사업을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정체성으로 사업을 다시 시작하자, 그의 기술력과 아이디어는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전기 구동식 스크레이퍼(흙을 퍼서 옮기는 대형 장비)를 개발합니다. 정부와 군에서 대규모 토목 장비가 필요하던 시기에 그의 기계들이 미국 육군, 해군, 남미 개발 지역 등지에 대량 납품되기 시작합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수십 개국에 장비를 수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합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 사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회계사요, 현장 관리자일 뿐입니다.” 르투르노는 회고록에서 자신의 실패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내 실패를 통해 나를 부르셨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하게 하셨다.” 그는 실패를 통해 배운 세 가지 교훈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나님과 삶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 주일만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도 하나님께 속해 있다. 돈은 목표가 아니라 도구다. – 물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청지기적 수단이다. 사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 내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시는 것이다.”
르투르노는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를 정직하게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수입은 계속 늘어나는데, 왜 제 삶은 더 자유롭고 풍요롭지 않을까요?”
그때 그는 깨달았습니다. ‘십일조는 시작일 뿐, 은혜에 대한 응답은 더 깊은 헌신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역십일조 시스템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수익의 10%로 생활하고, 나머지 90%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회계사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돈은 그분의 목적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돈을 필요로 하시지 않지만, 내 마음이 어디 있는지는 보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결단 이후, 그는 중장비 기술 개발, 선교, 구제, 기독교 학교 설립, 선교사 후원 등 수많은 곳에 아낌없이 헌신했습니다. 헌금은 은혜를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는 사업의 성공을 통해 하나님께 헌금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고백하며 '역십일조'라는 파격적인 헌신을 시작했습니다. 요즈음 목사님들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젊은이들이 헌금을 하지 않는다고 걱정을 합니다. 부요하든 가난하든 경제 생활에 참 만족을 누리는 제 1의 지침은 헌금하는 것인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 체험이 약화될 때 헌금은 의무나 부담이 됩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으니까 헌금이 종교적 의무, 세금, 부담스러운 요구, 이해할 수 없는 관습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은혜의 감격이 없어지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맡겼다는 청지기 자부심이 없어지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헌금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는 낡은 종교 행위로 손해나 빼앗기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물론 학자금 대출, 취업난, 부동산 가격 폭등, 자녀교육 등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헌금을 할 재정적, 심리적 여유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일부 교회의 불투명한 재정 사용이나 비상식적인 모습들은 젊은이들에게 헌금에 대한 회의감을 심어줄 수도 있습니다. 르투르노처럼 실패와 좌절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은혜를 발견했을 때, 헌금은 더 이상 의무나 부담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찬양이자 사랑의 반응이 될 것입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 기상,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일정이 아무리 바빠도 점심시간 전후로 30분 이상 조용한 기도 시간 확보했답니다. 중요한 결정, 계약, 신제품 개발 전에 항상 단독 기도와 금식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사무실 한편에 ‘기도의 방’을 만들어 두고, 직원 누구나 기도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 놀라운 결단은 단순한 종교적 헌신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삽이 내 것보다 훨씬 큽니다.” 이 고백은 기적의 공식이 아닙니다. 은혜의 체험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드릴수록, 하나님은 더욱 풍성하게 갚으신다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물질은 자신이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드리는 것이라는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물질을 내가 사용할 때와 하나님이 사용할 때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그가 드리 헌금은 선교사를 후원하여 복음 전도와 구제 사역에 투자되었습니다. 1946년에는 르투르노 대학(LeTourneau University)을 설립하여 젊은이들에게 기독교 신앙 위에 선 기술 교육을 제공하여 수많은 기독교 인재를 양성해 냈습니다. 그는 “기업은 복음을 위한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비전을 갖고 살아갔으며, 그의 사업은 세상의 이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십일조 생활을 통해 매달 정직하게 물질의 주인을 고백할 때, 우리는 돈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물질을 통해, 누군가의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며, 세상에 빛을 비추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감격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방식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구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여 교회를 섬기며, 우리의 물질을 나누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억지로 하는 의무가 아니라, 은혜 받은 사람의 감격적인 반응입니다. 이번 한 주, 여러분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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