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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8) 예수 그리스도,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 (요한복음1:14--1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78634 추천수:2 218.147.218.173
2025-07-20 15:37:26

하나님의 은혜(8) 예수 그리스도,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

요한복음1:14--18

 

얼마 전, 학창 시절에 같이 공부했던 선교사님을 40년 만에 만났습니다. 선교사님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교사님이 제게 "그동안 목회하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입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일로서는 교회를 건축했을 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 것은 교인에게 아무런 이유도 듣지 못하고 '이혼'당할 때라고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교인과 이혼'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며 마음에 품고 신앙 안에서 잘되기를 바라며 함께했던 교인이 아무 말 없이 떠날 때, 목회자는 이혼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개척교회를 하면서 매년 수없이 그런 '이혼'을 당하며 목회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유명세가 있어 이름만 내걸어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와 목회하는 목사님은 조금 다르겠지만, 유명세도 없이 평범한 목회자로서 한 사람 한 사람 전도하며 양육하는 목사는 그동안 기도하며 정성을 다해 사랑으로 돌보았던 교인이 말없이 떠나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는 은퇴한 후 남은 것은 대인 기피증뿐이라고 말하는 분도 보았습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마음 아픈 순간 중 하나는, 오랫동안 함께 신앙생활 하던 귀한 지체가 말없이 교회를 떠날 때입니다. 어제까지 함께 웃고 울며 주님을 찬양하던 그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습니다. 자료를 보니, 작년에 교회를 다니다가 떠난 사람이 약 30만 명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루에 822명 정도가 떠나는 셈입니다. 젊은 층은 더 심각합니다. 20대는 45%, 30대는 35%, 10대는 30~40%가 교회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도 교인들의 교회 이탈 현상은 심각했고, 사도 요한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요한1, 2, 3) 자체에 그 아픈 흔적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요한일서 219절에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통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탈 현상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66절에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라고, 예수님의 설교가 너무 어렵다며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직접 목격했고, 예수님의 어머니를 부탁받을 정도로 그분의 사랑을 받았던 요한으로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교인 이탈은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매우 현실적이고 심각한 위기였습니다.

 

왜 당시 교인들이 교회 공동체를 떠났을까요? 저마다 이유가 있겠지만, 요약하면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유대교 회당으로의 복귀(안전을 위한 타협)였습니다.

당시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 대다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교는 정체성을 강화하며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회당에서 축출(출교)했습니다. 회당에서의 축출은 종교 활동 금지를 넘어, 사회적, 경제적, 가족적 관계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사회적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엄청난 압박을 견디지 못한 일부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부인하고 다시 유대교 회당의 안전한 울타리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둘째, 로마 제국의 박해로 인한 배교(생존을 위한 포기)였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주와 신'으로 숭배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예수만이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는 목숨을 건 선택이었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하며, 심지어 처형당하는 끔찍한 박해 앞에서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공개적으로 예수를 부인하고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셋째, 이단 사상(영지주의)으로의 이탈(신학적 분열)이었습니다.

교회 내부에서는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부정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가현설(Docetism) 같은 이단 사상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더 깊고 비밀스러운 영적 지식'을 가르친다며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은 '십자가를 진 고난의 메시아'보다 더 세련되고 지적으로 들렸을 수 있습니다. 이 유혹에 넘어간 일부 교인들은 기존의 공동체를 '수준 낮은 신앙'으로 여기며, 이단 교사들을 따라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여 떠나갔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에 가장 큰 내부적 상처를 남긴 이탈이었습니다.

 

그들 모두의 마음속에는 아마 지워지지 않는 세 가지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찾지 못했기에, 결국 믿음의 자리를 떠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첫째,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인가?"

둘째, 유일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왜 오직 예수님이어야만 하는가?"

셋째, 현재성과 능력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 성도님 중에도 혹시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맴돈 적은 없으십니까? 기나긴 고난의 터널 속에서, 차갑고 냉소적인 세상의 목소리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때로 초라하게 느껴진 적은 없으십니까?

 

오늘, 사도 요한은 이 모든 질문을 끌어안고 흔들리는 성도들을 향해 피 끓는 심정으로 외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질문에 대한 유일하고도 완전한 대답, 바로 은혜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든 의심을 잠재우고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시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로 오신 예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첫 번째 질문, "예수님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하여 요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언으로 답합니다. 14절 상반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보여주셨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있나?'라는 질문에 대하여 성육신은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는' 은혜의 진리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선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장엄한 선포로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로고스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 단어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말씀’(히브리어: 다바르)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바로 그 능력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뜻을 드러내는 율법, 곧 토라를 의미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로고스는 우주를 관통하는 신적인 이성이며, 만물을 질서 있게 붙들고 있는 근본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여기서 인류 역사상 가장 대담하고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고 지탱하는 그 신적인 능력과 이성, 로고스가 추상적인 개념이나 힘이 아니라, 한 인간, 나사렛 예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Incarnation)하여, 곧 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에서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으로,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뜻입니다. 피와 살을 가진, 배고프고 피곤하며 상처 나면 피 흘리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1:18)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위험의 한복판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었습니다. 요한의 선포는 이제 그 성막이 더 이상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텐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성전의 휘장 뒤에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불안, 우리의 번아웃 한가운데로 이사 오셔서 친히 장막을 치셨다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이제 은혜는 저 하늘에 떠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이 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유령처럼 보이기만 한 존재(가현설)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와 똑같이 느끼고 고통받으신 '완전한 인간'임을 확증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God-Man)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것은 은혜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절에서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믿음 자체도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라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베드로가 마태복음 1616-17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 고백을 했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근대 이후 데카르트, 칸트 등을 중심으로 한 합리주의 철학은 이해가 믿음보다 우선이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냈습니다. "전능한 신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나?", "두 본성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한다고? 모순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인간 이성의 범주 안에서만 진리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이 된 은혜의 원리를 품고 있는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 이해에 이른다는 원리를 따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성에 갇히지 않으시지만, 이성과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하십니다.

 

과학주의 세계관은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현대인은 실증 가능한 것만 진짜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실험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받아들이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진술은 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미경 아래가 아니라 계시 속에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간의 삶 속에 보이게 하신 실체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왜 못 믿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 믿어야 하는가?”를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인간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그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참된 인간이면서도 죄 없으신 분이 아니고서야, 누가 인류를 대표하여 속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인간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실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인간의 근원적이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와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완전한 인간, 완전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에게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한때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단순한 위대한 스승이라면, 그분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만으로도 미친 사람이거나 사기꾼이다. 예수님은 미치광이나 악인이 아니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주(Lord), 곧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평생 예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답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2. 왜 오직 예수님이어야만 합니까?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의 유일한 통로이시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도, 다신교에도, 영지주의에도 구원의 길이 있는데 왜 유독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의 길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현대인들 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다 같은 곳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이를 종교 다원주의라고 합니다. "산의 정상은 하나인데, 올라가는 길이 다를 뿐이다"라고 합니다. 오늘날 문화는 상대주의와 포용을 미덕으로 여기기에, "오직 예수"라는 말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주장이며 반지성주의라고 합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예수는 훌륭한 도덕 교사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희생의 모범이지, 구세주라는 개념은 너무 신화적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로는 존중하지만, 신적 존재로는 부정합니다. 주관주의자들은 "종교는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라고 합니다. “내가 불교를 믿든, 명상을 하든, 선한 삶을 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진심이다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과 진정성의 문제로 축소시킵니다. 감성주의자들은 "지옥과 심판이라는 개념은 너무 비인간적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왜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가?"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죄에 대한 심판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인간적 기준의 사랑만으로 축소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왜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지 못합니까? 인간의 교만과 자율성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스스로 구원받고 싶어 합니다.” 자기 의, 자기 구원의 방식이 오히려 예수님의 필요를 부정합니다. 십자가의 메시지가 어리석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8절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 곧 자신을 부정하고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 진리는 자기 의에 빠진 사람에게는 미련하고 거부감이 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여기서 예수님은 '여러 길 중 하나(one of many)'가 아니라, '유일한 길(the only way)'입니다.

 

유일성에 대한 질문, 왜 오직 예수님이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오늘 성경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17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은 모세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를 대조합니다.

 

굶주리고, 피곤해하시고, 눈물 흘리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 예수님 안에서, 모세조차 감히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 '은혜와 진리'가 가득한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은혜(카리스)'는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바로 이 은혜의 드라마였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귀신 들린 자를 자유케 하시고, 자신을 배반한 자를 용서하신 그 모든 발걸음이 바로 눈에 보이는 은혜였습니다. '진리(알레테이아)'는 하나님의 참되심, 그분의 신실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을 눈물로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심을,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온 산을 헤매는 목자이심을 그분의 삶과 죽음으로 증언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 즉 무한한 사랑(은혜)과 흔들리지 않는 신실하심(진리)을 보고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넘어선, 더 완전하고 근원적인 차원의 계시임을 보여줍니다. 모세는 율법의 전달자였지만, 예수는 '은혜와 진리' 그 자체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유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는, 새로운 길로서의 은혜로 오셨습니다. 단순히 은혜를 '전달'하신 분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 그 자체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완벽하게 이루시고(5:17), 그 의로움을 믿는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종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자유하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나타내셨느니라"(18)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유일성을 확증하는 쐐기와 같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본 적 없는 하나님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설명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아버지 품속에 계셨던' 예수님 한 분뿐이라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이며, 진리이며, 은혜의 '통로'입니다.

 

초대 교회나 오늘날에나 세상 가치관과의 본질적 갈등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황제 숭배, 다신교, 계급주의 등 로마의 가치관에 '아니요'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예수만이 주님이시라는 고백은 로마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습니다.

현대 교회는 물질주의, 성공주의, 극단적 개인주의, 성적 자기결정권 등 현대 사회의 핵심 가치관과 복음의 가치(섬김, 희생, 거룩, 공동체)가 여전히 충돌합니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야 하는 영적 싸움은 동일합니다.

 

이단 사상의 위협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와 가현설이 공동체를 흔들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핵심적인 도전이었습니다.

현대 교회는 이단의 양상이 더욱 교묘하고 다양해졌습니다. 번영신학, 신사도운동, 각종 사이비 종교뿐만 아니라,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유일성을 해체하는 자유주의 신학 등 내부로부터의 신학적 도전도 거셉니다. 인터넷은 이러한 사상이 퍼지는 속도를 가속화했습니다.

 

'소수자'로서의 정체성도 비슷합니다.

초대 교회는 사회의 주류였던 유대교와 로마 문화로부터 밀려난 명백한 소수자였습니다.

현대 교회는 특히 서구 사회와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주류였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비주류, 혹은 여러 가치 중 하나로 여겨지는 '문화적 소수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조롱받거나 편협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경험은 초대교인들의 고립감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PC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직장이나 공적 영역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혐오세력'으로 매도당하는 식의 어려움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라는 말씀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속 강조합니다.

요한일서 511-12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336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10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베드로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이것은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만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예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마음을 여시고 이끄셔야만 믿을 수 있습니다. , 믿음의 시작은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왜 오직 예수님이어야만 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이 '은혜와 진리'의 유일한 통로이시기 때문입니다"라는 답을 확실히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율법과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3.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수님은 마르지 않는 은혜의 공급원이십니다.

 

이제 가장 실제적인 마지막 질문입니다. "알겠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유일한 길이신 것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오늘 월세 걱정에 잠 못 이루고, 깨어진 관계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내일의 불확실함 앞에서 두려워 떠는 ''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박해받던 초대교인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절규일 것입니다. 이 절규를 향해 요한은 가장 가슴 벅찬 진리를 선포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 시대의 사람들은 유대교와 로마의 박해, 그리고 영지주의 이단들 앞에서 무수히 많은 회의적인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은 "예수는 거짓 메시아다"라고 비난했습니다. 그것이 대세였습니다. 그들은 "내가 정말 메시아를 믿고 있는가? 예수를 믿는 것이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날 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회당에서 출교당해(9:22) 가족과 사회로부터 단절된 채 사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회의를 가졌을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어긴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신성모독한 자로 몰아갔습니다. 율법과 성전 중심의 유대교에 익숙했던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사회적 불이익과 영적 회의를 겪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예수님은 그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며(5:17), 율법이 가리키던 은혜와 진리의 실체이십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전달되었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님 안에서 육화되었습니다. 모세는 중재자였고, 하나님의 뜻을 말로 전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직접 오신 분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인격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진리를 가르친 선생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진리이신 분(14:6)이십니다. 이 진리 안에서 율법의 노예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율법은 교통경찰과 같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신호 위반을 했다, 좌회전 금지를 어겼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119 구조대원은 누가 뭘 잘못했든 상관없이 구급차에 태워 병원으로 옮깁니다. 병원에 가면 MRI를 통해 진단하는데, 이것은 율법과 같습니다. 그것을 보고 의사가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시며, 진짜 성전이시며, 참 포도나무요, 생명의 떡이심을 강조합니다.

 

초대 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박해 앞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나아지는 게 없다는 현실에 절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왜 고난과 죽음뿐인가? 예수를 믿는 게 내 생존과 평안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오늘날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세상에는 이토록 끔찍한 고통과 부조리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특히 자신이나 가족이 겪는 고통 앞에서 '구세주'의 존재는 공허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요한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14절 전반부를 다시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장막을 치시매)..." 예수님은 지금도 함께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초월하여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통해 너희의 고통스러운 삶 한가운데 함께 계신다고 말해줍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현재성입니다. 해답은 그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를 공급하시는 '근원'이시라는 것입니다.

 

<긴 침묵>이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마지막 대심판의 날, 수많은 사람이 심판을 기다립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은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유대인 여자는 나치의 집단 수용소에서 지옥 같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느냐고 묻습니다. 어느 흑인 남자는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매 맞고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느냐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은 고통과 아픔, 배고픔과 전쟁, 질병이 없는 저 높은 천국에 홀로 계시니 자신들의 고통을 모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어려움, 고통, 절망, 죽음을 당하지 않으시니 얼마나 편안하고 좋겠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 대표, 흑인 대표, 관절염 환자 대표, 암 환자 대표, 기형아 대표, 심지어 히로시마 원자폭탄 후유증 환자 대표를 선출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할 자격을 가지시려면, 하나님도 우리가 겪은 고통을 한번 맛보셔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되, 고난받는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자. 왕족이나 귀족의 집안이 아니라, 시골의,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에서 사생아처럼 태어나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처럼 고생하며 땀 흘려 노동을 해 보아야만 한다. 친한 친구들에게 배신당하는 아픔도 겪어보아야만 한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관을 만나 억울한 판결을 받아보며, 우리처럼 매 맞고 고문의 고통도 겪어 보아야만 한다. 죽음의 외로움과 두려움도 맛보아야만 할 것이다.”

불만으로 입이 튀어나온 사람들은 하나님도 자신들처럼 고통과 아픔, 배고픔과 환난, 절망을 맛보아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긴 침묵 속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겪으셨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엘리 비젤은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던 시대를 통과한 사람으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그가 강제수용소에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수용되어 있던 수용소에 발전소가 폭파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유대인 세 사람이 잡혀 교수대에 목이 매달렸습니다. 두 어른은 금방 죽었지만, 가벼운 한 소년은 대롱대롱 매달린 채 30분 이상 몸부림쳤다고 합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수용자 중 한 사람이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이때 비젤 박사는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바로 여기에 있지.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에 매달려 몸부림치고 있지.’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의 대가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왜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까? 요한복음 203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 그분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실 뿐 아니라 어떤 분이십니까?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예수님은 단지 우리와 함께 계시기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하나님의 은혜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삶, 교훈, 고난, 십자가와 죽음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정체입니다. ‘그의 충만함’(플레로마)은 결코 마르지 않는 충만함입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퍼내어도 결코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습니다. 인간의 에너지는 유한합니다. 우리의 의지력도 바닥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진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충만함은 무한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고갈되는 내적 자원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마르지 않는 외부의 에너지원, 곧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연결된 존재로 부름받았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카린 안티 카리토스)에서 전치사 안티’(ἀντὶ)‘~위에라는 뜻도 있지만, 신약성경에서 더 흔하게는 ‘~대신에’, ‘~를 교환하여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 ‘은혜를 대체하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 언약의 은혜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옛 언약의 은혜를 대체하고 완성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같은 종류의 은혜가 양적으로 더해진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다른, 더 온전하고 완전한 은혜가 왔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받았던 불완전한 은혜를 대치하는 완전한 은혜입니다. 구약의 은혜가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구원을 주는 은혜라면, 신약의 은혜는 내세적이고 영적인 구원을 주는 은혜입니다. 구약의 은혜가 육신의 위험으로부터 구원하는 은혜라면, 신약의 은혜는 죄로부터의 구원(죄 사함)을 주는 은혜입니다. 구약의 은혜가 선민 이스라엘 민족, 즉 율법을 행하는 유대인을 위한 은혜라면, 신약의 은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를 위한 은혜입니다. 구약의 은혜가 그림자 같고 현상적인 은혜라면, 신약의 은혜는 본질적이고 영원한 은혜입니다.

 

둘째, ‘끊임없이 밀려오는 은혜입니다. 마치 해변의 파도처럼, 오늘의 도전을 감당하기 위해 주어진 한 파도의 은혜가 그 역할을 다하고 나면, 내일의 필요를 위한 또 다른 파도의 은혜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밀려온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불안앞에서 내일의 문제, 다음 달의 과제, 10년 후의 미래를 오늘의 에너지로 미리 해결하려다 지쳐 쓰러집니다. 그러나 은혜 위에 은혜의 원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미래를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오늘의 필요를 위한 오늘의 은혜를 주실 것이며, 내일의 필요를 위한 내일의 은혜를 예비해 두셨다.” 이것은 우리를 시간과 미래에 대한 통제 강박에서 해방시키는 진리입니다. 은혜는 우리가 평생 아껴 써야 하는 한정된 예금이 아니라, 매일 아침 새롭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공급입니다. 예수님의 '충만함'으로부터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를 계속해서 공급받습니다. 이는 핍박을 견딜 힘, 유혹을 이길 능력, 절망 속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힘 등,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실제적인 능력의 근원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마르지 않는 은혜의 공급원이십니다라는 분명한 답을 가지고 평생을 은혜로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통 밖에 계신 분이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 함께 계시는 '보이는 은혜'이시며, 오늘의 필요를 채우시고도 남는 '충만한 은혜'의 공급원이십니다.

은혜의 이름, 예수를 붙드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앙생활은 때로 우리를 근본적인 질문 앞으로 데려갑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왜 오직 예수님인가? 예수님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인가?"

오늘 요한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의 단어, '은혜'**이며, 그 은혜에는 이름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장막을 치신 '보이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키는 '자유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어떤 필요와 고난도 덮고 남을 만큼, 매일 새롭게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충만한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눈에 보이는 은혜, 손에 만져지는 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더 이상 내 힘으로 버티려 애쓰지 마십시오. 더 이상 나의 자격과 조건을 따지지 마십시오. 더 이상 어제의 실패와 내일의 염려에 갇혀 있지 마십시오.

오늘, 그저 두 손을 내미십시오. 그리고 마르지 않는 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 위에 은혜'를 받으십시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선포하십시오. "내게는 은혜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오늘 예배의 자리를 떠나 성도님의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 성도님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문제 앞에서 이 진리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 삶에 장막을 치셨고, 나는 그분의 충만함에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다!" 이 믿음의 고백이 우리 성도님의 남은 한 주와 평생의 능력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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