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7) 이해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임하시는 은혜
누가복음7:11-17
지난주 신문에 한 10대 테니스 유망주 소녀가 어머니와 함께 길을 가던 중, 건물 옥상에서 추락한 다른 10대와 부딪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던 어머니마저 다음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온두라스에서 신혼여행 중이던 20대 여성이 해변에서 벼락을 맞고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미국 텍사스에서는 홍수로 29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을 우리는 수시로 만납니다. “왜 세상이 이런 거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관하시는 거야?” “왜 악한 사람은 건강하고 잘 사는데, 착하고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들이 병들고, 실직하고, 망하고 고통당하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2kg밖에 안 되는 우리의 머리로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나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의 두 배 주기는 현재 73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주 총량의 4.9%만 설명할 수 있는 물질이라고 합니다. 현대 과학은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이 우주 전체의 고작 4.9%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나머지 95%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라는, 존재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합니다. 경험의 한계(경험론), 인식 구조의 한계(관념론) 때문에 인간의 지식이란 우리가 가진 감각 기관, 인식의 틀, 그리고 과학적 도구의 한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하고, 측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지식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데 그것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신명기 29:29)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알 수 없음’과 ‘어쩔 수 없음’이라는 한계 상황 속에서 살아갑니다. 20세기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 피할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인 불안을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죽음과 운명의 불안’입니다. 사고나 질병처럼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과 그 끝에 있는 죽음 앞에서 느끼는 공포입니다. 틸리히는 이를 육체적 생명, 즉 우리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데서 오는 불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둘째, ‘공허와 무의미의 불안’입니다. ‘어차피 다 죽는데,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게 무슨 소용인가?’ 삶의 목적을 잃어버렸을 때 찾아오는 텅 빈 마음입니다. 틸리히는 이를 우리의 정신적 생명, 즉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데서 오는 불안이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죄책감과 정죄의 불안’입니다. ‘내가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 내 잘못이야.’ 과거의 실수와 연약함에 발목 잡혀 스스로를 벌하는 고통입니다. 틸리히는 이것이 우리의 도덕적 생명, 즉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데서 오는 불안이라고 보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올 때, 우리는 이 세 가지 불안의 폭풍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리고 ‘왜?’라는 질문만 던지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자리, 실존적 불안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모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고통 현장 한복판에 ‘누구’가 오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인 성 과부는 이 세 가지 불안의 폭풍 한가운데 서 있는 한 사람의 완벽한 스냅사진과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가장 깊은 불안을 꿰뚫고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가 과연 어떤 것인지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어떤 은혜입니까?
첫째, 주님은 죽음과 운명의 불안에서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일으켜 주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나인 성의 과부에게 ‘죽음과 운명의 불안’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눈앞, 어깨에 멘 아들의 관이 바로 죽음의 실체였습니다. 이미 남편을 잃었던 그녀에게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은 잔인한 운명의 확인 사살과도 같았습니다. 그녀는 가문의 단절, 사회적 소외, 경제적 파탄, 정서적 고립을 동시에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문의 대는 끊겼고,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 정서적 위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소멸되었습니다. 그녀의 미래는 관 속에 담겨 무덤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심리학의 ‘공포 관리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는 순간 마비(shutdown)되거나 무력감(helplessness)에 빠진다고 합니다. 과부는 지금 그 공포에 완전히 압도당해 있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운명의 불안(틸리히)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죽음의 행렬을 향해, 정반대편에서 생명의 행렬이 다가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걸어오십니다. 주님은 죽음의 공포에 질린 그녀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기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헬라어 ‘에스플랑크니스데’는 단순히 안타까워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상대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처절한 공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행동하십니다. 14절,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주님은 죽음의 행렬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그 행렬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죽음의 상징인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음을 향해, 운명을 향해, 자신의 권위로 직접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간구가 아닌 선포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죽음에게 내리는 파기 선고입니다. 슬픔과 절망과 눈물과 통곡 소리 나는 안타까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어 기쁨과 환희와 감격의 행렬로 바꾸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지옥으로 가는 행렬을 천국 행렬로,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사건을 통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죽음과 운명의 불안에서 완전히 해방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과학은 죽음을 지연시킬 뿐, 제거하지 못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모두 ‘죽음을 향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슬픔과 통곡의 장례 행렬을 기쁨과 감격의 생명의 행렬로 바꾸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주님의 "일어나라!"는 음성 앞에 죽음은 힘을 잃습니다. 썩어가던 나사로가 그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걸어 나왔고, 죽었던 야이로의 딸이 그 음성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가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자 썩어 냄새 나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하고 외치시면 죽은 소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D. L. 무디 목사님은 임종 직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 신문에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이 나거든 믿지 마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으로 이사 가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이것이 믿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어떤 죽음이든 당사자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운명의 불안 앞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일으키시는 주님의 손을 붙들고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죽음 앞에서 불안의 노예가 되지 말고 고린도전서 15장 55절의 말씀을 외치시기 바랍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를 옭아매는 죽음과 운명의 불안 앞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은혜를 붙드시기를 축원합니다. 장례식장에서, 절망적인 병실에서, 무덤 앞에서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원합니다.
둘째, 주님은 공허와 무의미의 불안에서 우리를 살아갈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나인 성의 과부에게 아들은 단순한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녀 삶의 ‘의미’ 그 자체였습니다. 남편을 잃고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 험한 세상을 살아갈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삶의 의미가 관 속에 누워 있습니다. 그녀는 살아 있지만 영혼은 죽은, ‘정신적 사망’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12절은 죽은 청년이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고 강조합니다. 이 여인의 삶을 지탱했던 세 개의 기둥, 즉 경제, 정체성, 미래가 한꺼번에 무너진 것입니다. 그녀는 소망 없는 절망, 즉 ‘공허와 무의미의 불안’이라는 가장 깊은 심연의 끝자락에 서 있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이제 텅 빈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함께 울어주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영혼에 찾아온 거대한 공허와 무의미를 채워 줄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깊은 공허 속으로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의미 회복 프로세스’를 시작하십니다.
첫째, 그녀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존재를 긍정하셨습니다(13절). 모두가 죽은 아들과 비극적 ‘상황’을 볼 때,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 과부의 존재 자체를 보셨습니다. 이 시선 하나만으로도 회복은 시작됩니다.
둘째, 관에 손을 대시며 그녀의 고통에 깊이 관여하셨습니다(14절). 예수님은 멀리서 위로의 말만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지점, 죽음과 절망의 상징인 ‘관’에 직접 손을 대셨습니다. 고통의 현장에 함께 있어주는 구체적인 사랑의 접촉이 사람을 일으킵니다.
셋째, 관계를 회복하고 역할을 복원하셨습니다(15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기적의 정점은 아들을 살리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어머니에게 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잃어버렸던 ‘어머니’라는 역할, 삶의 목적을 즉각적으로 되돌려 주셨습니다.
넷째, 공동체를 통해 의미를 재해석하게 하셨습니다(16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공동체는 이 일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 위대한 역사”로 재해석하고 선포합니다. 개인의 고통이 공동체의 희망 이야기로 전환된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예수님은 나인 성의 과부에게 단순히 아들을 돌려주신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살아갈 이유, 즉 ‘의미 그 자체’를 선물하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최첨단 심리학은 예수님의 이 방법이 얼마나 과학적인지를 증명합니다. 하버드 의대의 연구에 따르면, 삶의 목적의식이 높은 사람은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탄력성이 월등히 높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소명(부르심)을 위해 지음받았다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명백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나의 존재 이유를 발견할 때, 공허함은 '충만함'으로 채워집니다.
우리의 소명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나에게 주어진 재능과 환경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이 바로 나의 소명입니다.
혹시 삶의 목적을 잃고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삶의 의미를 분명하게 주시는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와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텅 빈 마음에 하늘의 소명을 심어주시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원하십니다. 이 회복의 은혜 안에서 삶의 참된 의미와 소망을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셋째, 주님은 죄책감과 정죄의 불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으로 일으켜 주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죄책감과 정죄의 불안’이란 자신의 실수와 허물, 그리고 죄로 인해 스스로를 정죄하거나 타인과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나인 성의 과부가 겪는 고통은 ‘숨겨진 죄의 결과’나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지기 쉬웠습니다. “남편 잡아먹더니, 자식까지 잡아먹는구나.”라는 악의적인 손가락질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과부 자신도 “다 내 탓이야…”라는 끝없는 자기 정죄의 감옥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비극은 하나님의 심판처럼 보였고, 그녀의 삶은 정죄의 낙인이 찍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그 정죄와 수치의 현장으로 예수님이 걸어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네 단계를 통해 그녀를 영광의 자리로 옮기십니다.
첫째, 존재를 수용하십니다(13절). 주님은 그녀를 보시며 ‘저주받은 여인’이 아닌, 긍휼의 대상으로 품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나 실패라는 꼬리표 이전에, 상처 입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시고 품어 주십니다.
둘째, 부정을 흡수하십니다(14절). 주님은 율법적으로 부정해질 위험을 감수하고 부정한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것은 과부가 짊어진 모든 죽음의 부정함과 수치, 죄책감을 당신의 거룩함 안으로 모두 흡수하시겠다는 강력한 상징적 행동이며, 십자가 사건의 생생한 예고편입니다.
셋째, 무죄를 선언하십니다(14-15절).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외치신 순간, 그것은 과부의 삶에 내려진 ‘저주’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하나님이 너를 돌보셨다!”는 무죄 선언을 공포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이 이 진리를 완성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넷째, 공동체에서 명예를 회복시키십니다(16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그녀를 비난하던 사람들의 입술이,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의 입술로 바뀝니다. 개인의 수치가 공동체의 영광으로 역전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죄책감과 정죄의 불안에서 완전히 해방된 참 자유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책과 수치를 흡수하시고, 우리를 향해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지불하신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이 진리 안에서 우리는 죄책감의 사슬을 끊고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 완전한 은혜의 복음 앞에서 더 이상 자기 정죄의 목소리에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의 약속처럼, 우리의 모든 죄책과 수치를 십자가에 맡기고,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인생의 어느 길목에선가 각자의 ‘나인 성’을 지납니다. 나인이란 '귀여운,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우리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세상 같지만 죽음의 불안, 공허의 불안, 정죄의 불안이 예고 없이 우리를 덮칩니다. 우리는 여전히 고통 앞에서 “왜?”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 ‘왜?’에 대해 명쾌한 분석 보고서를 주지 않으실 때가 많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바로 아들의 관 옆에서 함께 울어 주시며, 죽음의 행렬을 멈추시고, 우리를 일으켜 하나님의 품으로 돌려주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부활을, 이해할 수 없는 공허 앞에서 소명을, 이해할 수 없는 죄책 앞에서 영광을 주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뿐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불안을 친히 겪으시고, 그 모든 불안을 십자가와 부활로 이기셨습니다. 이제 그 은혜의 주님께서 우리의 불안을 넘어, 은혜의 부활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모든 불안을 이기고 마침내 주님의 생명과 소망과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인생으로 일어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 주님의 은혜는 불안을 넘어 생명과 소망과 영광으로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이 은혜를 붙들고 승리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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