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6) 은혜를 누리는 최선의 선택, 감사
누가복음17:16-19
오늘은 반년 동안 지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맥추감사절입니다. 이렇게 절기를 만들어 지키는 이유는, 사람들이 쉽게 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은혜를 누리는 최선의 선택은 감사입니다. 지난 반년을 돌아볼 때 감사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까? 불평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까? 로버트 에먼스(Robert Emmons) 교수가 발표한 ‘감사 일기 실험’에 의하면, 의도적으로 감사 일기를 쓰지 않은 그룹에서는 감사 내용이 10~15% 정도였고 불평과 불만의 내용이 35~40%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부정성 편향에 대한 심리학 연구에서도 사람은 긍정적 사건보다 부정적 사건을 2.5배에서 3배 더 강하게 기억한다고 합니다. 사회심리 실험(Algoe)에서도 실험 참가자들이 1주일 동안 상호작용한 내용을 녹음·분석한 결과, 감사를 표현한 비율이 대화의 15% 내외였고, 불평, 비판, 부정적 언급이 대화의 35~40%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연구들을 종합하면, 일상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감사의 비율은 약 10~15%, 불평·불만·부정적 언급은 약 35~40%이며, 나머지(50%가량)는 중립적·기계적인 표현을 한다고 합니다. 감사와 불평의 비율은 1:3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감사 훈련을 하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불평 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하고 살면 인생이 행복해지지만, 불평하고 살면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신명기 10장 13절을 통해 하나님은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감사절을 지키게 한 것도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은 잘 감사하지 못할까요?
심리학자들은 그 첫 번째 이유가 부정성 편향(Negativity Bias) 때문이라고 합니다. 뇌 과학적으로 인간은 생존을 위해 부정적인 사건에 더 민감하도록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위험, 손실, 불행을 더 크게 느끼고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비교와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상대적 박탈감이 커질수록 주어진 것에 감사하기보다 결핍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권리 의식(Entitlement)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것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어 받은 호의나 은혜를 인정하지 못하고 감사의 마음을 막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감사하지 못하는 근원적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을 창조주요 공급자요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으니 받은 것을 은혜로 보지 못하고 감사할 이유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만한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자기 중독, 자아 중독, 나르시시즘 때문입니다.
감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 이후 자기 의, 자기 공로, 자기 자랑으로 가득 차 있어 “이건 내가 이룬 것이지”라는 교만에 빠집니다. 교만은 감사의 가장 큰 적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9)라고 말하는 것처럼, 오직 관심은 ‘나, 내 곳간, 내 물건, 내 영혼’에만 있습니다. 그러면 감사의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마치 공기처럼, 햇살처럼 값없이 주시는 그 은혜를 우리는 어떻게 누리고 있습니까? 혹시 당연하게 여기며 무감각하게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진정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완성하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전인격적인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먼저, 과거를 통해 은혜를 누리는 최선의 선택은 우리의 어떤 과거일지라도 그것을 감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성도님들이 잘 아시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 가운데 있었던 일입니다 (11절). 사마리아라는 지역은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상종하지 않던 사마리아인들이 사는, 소외되고 버림받은 땅의 상징과도 같은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땅입니다. 바로 그곳에 예수님이 일부러 가셨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십니다.
나병, 즉 한센병은 당시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 불릴 만큼 끔찍한 질병이었습니다.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감각이 사라져 자신의 몸이 타들어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레위기 13장 45-46절은 나병환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과 격리되어야 했고,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했으며, 사람들에게 부정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다름없는, 깊은 절망과 소외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처절한 고통의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은 찾아오신 예수님을 보고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멀찍이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칩니다.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처럼 똑같이 취급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부르짖음은 단순히 병을 고쳐달라는 간구를 넘어, 자신들의 찢긴 인생 전체를 향한 처절한 절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십니다. 아직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치유된 것을 자신들이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에게 과거는 지우고 싶은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부정과 수치, 소외와 절망의 흔적만이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가 있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향해 부르짖을 수 있었으며, 마침내 치유라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을 그저 지나가는 한 랍비로 여기고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가장 큰 고통이었던 나병이, 그들을 가장 큰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특히 16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으로부터 개처럼 취급받고 나병으로 오물처럼 취급받으며 살았던 사마리아인만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합니다. 동일하게 예수님을 통해 고침의 은혜를 받았는데, 유독 한 사람만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선택받았고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데도 감사 불감증에 걸려 감사하지 못하는데, 개 취급당하고 오물 취급당한 삶을 산 사마리아인만 은혜를 받고 감사로 반응한 것입니다. 아마 그의 마음에는 이런 고백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오랫동안 병들어 고통받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를 주셨구나!”
우리의 과거에도 실패, 상처,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고통의 시간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어지는 통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고통 때문에 기도하게 되었고”, “그 상처 때문에 주님을 붙잡게 되었고”, “그 눈물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감사로 해석할 때, 그 과거는 더 이상 우리를 묶는 쇠사슬이 아니라 은혜의 증거가 됩니다. 감사는 과거를 새롭게 바라보는 해석의 능력입니다.
감사는 찾는 것만큼 보입니다. 지난 과거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지난 과거가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디딤돌이 될 수도 있고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보약이 될 수도 있고 사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 6장 10절에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예수님을 보십시오.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남자 장정만 5,000명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때 한 소년이 가지고 온 도시락,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축사하셨습니다. 감사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사랑했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때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1)라고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일어난 과거를 감사로 해석하고 감사를 선택하면 관계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떤 과거든 감사로 선택하면 인생의 낙담이 물러가고, 슬픔이 잠들고, 미움이 죽고, 질병이 고쳐지고, 가난이 힘을 못 쓰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43세에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감사를 선택했답니다. “내 육안을 어둡게 하심으로 주님만을 뵐 수 있는 심안을 열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며 시력을 잃은 대신 영의 눈으로 글을 썼답니다. 그는 결국 보이지 않는 눈으로 ‘실낙원’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해석과 그것에 대한 나의 대처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과거를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사가 나올 수도 있고 불평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띵크(Think)’와 ‘땡크(Thank)’라는 말은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생각의 문제, 관점의 문제입니다. 감사는 선택이며 해석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일지라도 불평과 원망으로 해석하면 불평과 원망의 과거가 되는 것이고, 감사로 해석하면 감사의 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는 어떻습니까? 혹시 떠올리기 싫은 상처나 실패, 후회로 가득 차 있습니까? 그러나 감사라는 렌즈로 우리의 과거를 다시 해석해 보십시오. 그 아픔이 있었기에 우리는 더욱 겸손해졌고, 그 실패가 있었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할 수 있었으며, 그 눈물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된 것은 아닙니까? 과거의 상처를 불평과 원망의 재료로 삼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때, 그 상처는 더 이상 우리를 얽매는 족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영광스러운 ‘흔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누리는 첫 번째 최선의 선택입니다. 어떤 과거일지라도 그것을 감사로 해석하는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어떤 과거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품은 축복의 그릇이 될 것입니다.
현재를 통해 은혜를 누리는 최선의 선택은,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그것을 감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 모두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아홉 명은 그저 기뻐하며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빨리 제사장에게 깨끗함을 확인받고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앞섰을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과 흥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었던 그는 달랐습니다.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반응합니다.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에는 관심이 있지만 ‘누구에게’ 감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조건적이고 상대적입니다. 무엇이 주어지면 감사하고 주어지지 않으면 불평합니다. 그래서 어떤 조건이 주어져도 죽을 때까지 무엇인가를 채우려다 원하는 것을 움켜잡지 못하고, 참 만족을 모르며 살다 죽습니다. ‘무엇에’ 감사하느냐는 질문보다 ‘누구에게’ 감사하느냐는 질문이 더 본질적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감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감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매일 살면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은혜의 표현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서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감사의 감정은 ‘모든 선하고 온전한 선물은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올바른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잘못된 생각이 감사를 막습니다.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는 즉각 자신의 몸의 변화를 보면서 예수님께 찾아와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생각만 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 행동과 말로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마음속의 감사는 소중한 씨앗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향기를 퍼뜨리려면, ‘말’과 ‘행동’이라는 햇빛과 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예의를 차리는 것을 넘어, 나와 상대방,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공동체에까지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하고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그는 당시 세상의 관습에 따라 제사장의 판결을 받아 완전히 사회로 복귀하기도 전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어려움, 가정의 갈등, 건강의 문제, 자녀 문제, 중독 문제 등 각종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살아 있음에, 주님이 함께하심에, 숨 쉴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언제든 모든 일에 감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서는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감사는 현실의 삶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 진정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회복되기 전인데도 현재 주어진 은혜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것입니다. 그의 목적지는 더 이상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최우선순위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께 돌아가 감사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현재를 감사로 살아가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불평은 현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반면 감사는 현재를 긍정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의 감사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는 소극적인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한, 역동적이고 표현적인 감사였습니다. 여기서 ‘감사하니’로 번역된 헬라어 ‘유카리스톤(εὐχαριστῶν)’은 ‘좋다, 은혜’를 뜻하는 ‘유(εὖ)’와 ‘은혜, 기쁨’을 뜻하는 ‘카리스(χάρις)’의 합성어입니다. 즉, 감사는 받은 은혜에 대한 자연스럽고 기쁨에 찬 반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격스러워서 즉시, 그리고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안타깝게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절). 그들은 은혜를 받았지만, 감사를 표현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치유라는 ‘선물’은 받았지만, 선물을 주신 ‘분’은 잊어버렸습니다. 육신의 질병은 나았지만, 감사를 잃어버린 영적인 질병은 여전히 그들 안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은혜 속에서 살아갑니다. 건강하게 숨 쉬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며,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며 감사를 잊고 살아갑니까? 마치 스마트폰의 빠른 속도에 익숙해져 조금만 느려져도 불평하는 현대인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감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항상 상황이 어떠하든지 감사를 표현하는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로 선택할 때 우리는 비로소 현재의 상황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의 표현은 은혜를 완성시키는 화룡점정(畫龍點睛)과 같습니다. 오늘 하루, 의식적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소리 내어 고백해 보십시오. 항상,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체질화된 감사, 인격화된 감사, 성품화된 감사, 습관화된 감사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 감사를 표현할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 큰 감격으로 채워지고, 현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복된 자리가 될 것입니다. 감사는 조건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의지적 선택입니다. “항상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은혜를 누리는 최선의 선택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감사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몰랐습니다. 자신을 짐승처럼 취급하며 따돌렸던 사회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제자를 성추행했다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교수들을 보십시오. 유명 연예인이 마약을 했다고 밝혀졌다가 생을 마감한 유명인을 보십시오. 유명 정치인으로 살다가 뇌물을 받았다고 언론에 나와 결국 생을 마감한 정치인을 보십시오. 비록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가족과 사람들에게 미래에 받을 비난 앞에서 결국 인생을 포기하고 맙니다. 비록 이 사람이 치료는 되었다고 해도 앞으로 살아갈 미래는 기대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차별과 멸시가 끝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의 선포도 받기 전에 예수님께 돌아가면 주변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이지만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여기서 ‘구원하였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세소켄(σέσωκέν)’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이 나았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다른 아홉 명도 육체의 치유, 즉 ‘깨끗함(카다리오스)’을 받았습니다 (14절). 그러나 예수님은 감사하러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육체의 치유를 넘어선 전인적인 구원, 영적인 구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의 감사는 단회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감사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표현이었고, 그 믿음은 그의 미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단지 나병에서 치유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감사를 통해 그는 현재의 은혜를 확증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더 큰 은혜, 즉 구원이라는 궁극적인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몸을 보임으로써 공동체로의 ‘회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미래는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로 돌아온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통해 전혀 새로운 미래, ‘구원’이라는 차원이 다른 미래를 선물 받았습니다.
우리도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수도 있고, 건강이 더 나빠질 수도 있고, 자녀나 가정의 문제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조차 감사로 선택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은혜의 길을 여실 줄 믿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도 감사하면 추락이 아니라 비상하는 역사가 펼쳐집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믿고 하루에 세 번씩 감사하자, 그를 죽이려던 자들은 추락했지만 다니엘은 비상했습니다. 정권과 시대는 바뀌어도 다니엘의 삶은 비상했습니다. 감사하면 미래가 추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비상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가 알려주는 감사의 놀라운 과학적 유익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정신 건강을 단련하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정신을 더욱 건강하고 회복력 있게 만드는 천연 항우울제와 같습니다.
행복감 및 삶의 만족도 증진: 긍정 심리학의 대가인 로버트 에먼스와 마이클 매컬러의 연구에 따르면, 꾸준히 감사 일기를 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삶에 대한 만족도와 낙관주의, 행복감이 훨씬 높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감사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결핍보다는 풍요로움에 집중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 불안, 우울감 감소: 감사를 실천할 때 우리 뇌에서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분비가 감소합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연구에 따르면, 감사하는 마음은 부정적인 생각의 고리를 끊고 현재에 집중하게 하여 불안을 완화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또한, 뇌의 전전두피질 활성화를 도와 감정 조절 능력을 향상시키고 우울감을 줄여줍니다.
회복탄력성 강화: 감사는 역경을 이겨내는 힘, 즉 회복탄력성을 길러줍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점을 찾는 훈련은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재해석 능력을 키워 스트레스 상황에 더 잘 대처하고 좌절로부터 빠르게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둘째, 뇌와 몸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감사는 뇌의 구조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고, 우리 몸의 여러 시스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뇌 구조의 긍정적 변화를 일으키고, 행복 호르몬인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분비를 촉진하며, 면역 체계를 강화하고 염증을 감소시킨다고 합니다.
심혈관 건강이 개선되고 수면의 질이 향상된다고 합니다.
셋째, 관계를 돈독히 하는 접착제 역할을 합니다. 감사는 ‘나’를 넘어 ‘우리’의 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친사회적 행동이 증가하고, 인간관계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계 형성을 촉진한다고 합니다.
감사하게 사는 사람이 더 건강하게 장수하고, 더 행복한 관계를 가지고 살며, 더 부유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감사 지수를 높이는 것이 인간의 행복 지수를 높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감사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은 의도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죄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우둔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롬 1:21-22). 감사하지 않으면 자신이 손해입니다. 감사한 만큼 삶은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아무리 불확실한 미래가 다가온다고 해도 감사함으로 미래를 기대하며, 불확실함 앞에 불평과 원망보다는 감사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17세 때 다이빙 사고로 목 아래 전신마비가 된 조니 에릭슨 타다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절망, 자살 충동, 하나님을 향한 분노, 심한 우울증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미래를 원망 대신 감사로 선택하기로 결정합니다. 조니는 더 이상 자신의 휠체어를 저주의 상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검은 포장지에 싸인 축복”이라 부르며, 이 고난이 자신을 구원자 예수의 품으로 더 깊이 이끌어주는 그림자 같은 동반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붓을 입으로 물고 그림을 그립니다. 남아있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간증합니다. 수십 년간 전 세계 장애인 선교운동을 이끌며 “나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내가 걷지 못하기에, 하나님이 나를 더욱 높이 들어 사용하신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고통을 감사의 간증으로 바꿉니다. 1979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국제 장애인 사역 단체 ‘조니와 친구들(Joni and Friends)’을 설립했습니다. 수십 권의 책을 집필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녀의 자서전 『조니』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고, 2005년 조니는 미국 국무부 장애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전 세계를 누비는 그녀의 강연은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었습니다. 1982년 조니와 결혼한 남편은 32년간 몸담았던 교직을 은퇴하고 아내의 사역에 온전히 동행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헌신은 조니의 사역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두 사람은 함께 고난의 길을 희망의 길로 바꾸어 나갔습니다. 이중 폐렴이라는 또 다른 위기 속에서도 그녀의 감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치유는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고백하며,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 모든 이에게 감사를 전했습니다. 2010년, 유방암 진단이라는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을 때도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투병의 경험을 녹여내 『조니 에릭슨의 희망 노트』를 집필하며, 고통 속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법을 다시 한번 세상에 증명해 보였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고통 속에서도 나를 건지셨고, 현재의 상황 속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 또한 가장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 일로 말미암아 미래가 비참하게 될 것 같지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라는 말씀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과거와 현재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의 고백이며, 이 신뢰는 미래를 향한 담대한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시편 23편 6절에서 다윗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살았지만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삶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감사가, 미래에도 동일하게 함께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종종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러나 감사로 미래를 바라보기로 선택할 때, 우리는 두려움 대신 기대를 품게 됩니다.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농부처럼 (마 13:44), 이미 구원이라는 가장 큰 보화를 받은 우리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베푸실 놀라운 은혜들을 감사함으로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감사하기로 선택하십시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앞에서도, 보이지 않는 미래 앞에서도, 먼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는 말씀처럼, 감사로 미래를 열어갈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고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누리는 최선의 선택은 바로 ‘감사’임을 확인했습니다. 아홉 명은 은혜를 경험했지만 감사를 잃어버림으로써 더 큰 축복을 놓쳤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한 사람,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이방인 사마리아인은 감사를 통해 육체의 치유를 넘어 영혼의 구원이라는 영원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누리는 최선의 선택은 감사입니다. 과거를 감사로 해석하고, 현재를 감사로 살아가며, 미래를 감사로 선택하는 것이 은혜를 누리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과거는 감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현재는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며, 미래는 감사의 태도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어떤 과거일지라도 감사로 해석하고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감사로 표현하는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미래에 어떤 불확실성 앞에 있다 해도 미래를 감사로 기대하는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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