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4) 은혜를 헛되지 않게 사는 삶
고린도전서15:10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 되는 것을 가장 큰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부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900년대 초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중 한 명은 헤티 그린이었다고 합니다. '월스트리트의 마녀'라 불렸던 전설적인 투자자입니다. 그녀는 아버지와 고모로부터 당시 약 600만 달러(현재 가치로 수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이 돈으로 남북전쟁 이후의 혼란기와 주기적인 금융위기 속에서, 천재적인 투자 감각으로 철도, 부동산, 정부 채권 등에 투자하여 재산을 기하급수적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헤티 그린이 1916년에 남긴 유산 1억~2억 달러는 현재 가치로 환산 시 약 30억~61억 달러이며, 이를 한화로 계산하면 약 4조 2천억 원에서 8조 4천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입니다. 당시 뉴욕시 전체를 구제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으려 난방도 안 되는 값싼 하숙집을 전전했고, 비누 값을 아끼려 옷을 빨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그녀의 아들 '네드'에게 일어났습니다. 아들이 다리를 심하게 다쳤을 때, 그녀는 병원비가 아까워 아들을 무료 자선병원에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신분이 드러나자 진료를 거부당했고, 그사이 치료 시기를 놓친 아들은 결국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81세에 사망했는데, 마지막 순간에도 하녀와 우유값 몇 푼을 가지고 싸우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와 고모가 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1,700억 원을 물려주었는데, 그렇게 살다 죽으라고 물려주었을까요? 은혜란 대가 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녀는 은혜를 헛되게 하는 삶을 산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는 헤티 그린의 재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생명 값으로 주어진 구원이라는 은혜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온 우주보다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은혜를 헛되지 않게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한 번 주어진 인생, 이 땅에 잠깐 사는 동안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헛되지 않게 사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읽은 말씀을 통해 “은혜를 헛되지 않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 세 가지 교훈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은혜를 헛되지 않게 사는 삶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의 '과거'를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사건이고 재현될 수 없으며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보다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현재와 미래의 삶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필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속에서 일어났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해석합니까? 오늘 본문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고전 15:9)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습니다.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축소하거나 확대하거나 왜곡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장 작은 자(엘라키스토스)'라는 최상급 표현을 쓰며, 자신이 사도라는 칭호를 받기에 전혀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호티 에디옥사)". 여기서 '박해했다'는 말은 단순히 반대했다는 뜻이 아니라, '사냥꾼이 짐승을 쫓듯 맹렬히 추격하고 파괴했다'는 의미입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믿는 남녀를 옥에 넘기던 자신의 끔찍한 과거를 그는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과거의 상처와 실패에 발목 잡혀 살아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정의한다는 것이죠. 실패의 이야기를 반복하면 '나는 실패자'가 되고, 상처의 이야기를 곱씹으면 '나는 불행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이 끔찍한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은혜의 렌즈'로 재해석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어떤 렌즈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은혜의 렌즈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의 렌즈로 과거를 해석하면 자기 잘났다고 교만하지 않고, 자기 못났다고 열등감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남 탓하며 불평과 원망으로 살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사도라 불릴 만한 자격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 “자격이 없다”는 “충분하지 못한, 합당하지 않은”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일에까지 앞장섰던 자입니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극적으로 회심했고, 오히려 자신이 박해하던 그 복음의 증인으로 택함받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바울은 마땅히 죄로 인한 심판을 받아 멸망해야 할 자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벌하지 않으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은혜를 아는 사람은 과거를 은혜의 렌즈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되지 않는 자에게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 아무 조건 없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인 우리를 거저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죄인에 불과하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요 1:12),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가 연약할 때마다 붙드시고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끝없는 은혜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부어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들은 과거의 잘남을 보고 교만하거나 우월감으로 살지 않고, 과거의 못남을 보며 열등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우울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불평과 원망 대신 감사가 가득하고,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오늘 우리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바울처럼 고백할 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있는가? 나는 나의 모든 과거의 삶을 은혜로 해석하고 있는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알고 감사하고 있는가?”
그에게 과거는 더 이상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가 아니라, 그런 자신조차 용서하시고 사도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증명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외상 후 성장'처럼, 가장 고통스러운 트라우마가 오히려 가장 큰 성장의 발판이 된 것입니다.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한 존 뉴턴은 바로 은혜의 렌즈로 과거를 해석하며 은혜를 헛되지 않게 산 사람입니다. 그는 악명 높은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흑인들을 짐승처럼 사고팔며 부를 축적했던,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 그의 과거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과거에 대한 '해석'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끔찍했던 과거를 정직하게 마주하며 "나 같은 죄인(wretch)"이라고 고백했기에, 자신을 구원하신 은혜가 "놀랍다(Amazing)"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과거는 더 이상 수치의 낙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설교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서는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수치스러운 과거가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은혜의 렌즈로 해석하며 그것 때문에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 훨씬 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님의 과거는 어떻습니까? 후회와 상처, 실패의 기억이 여전히 성도님을 붙들고 있습니까? 은혜는 그 과거를 없애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 과거를 통해 하나님의 더 큰 그림을 보게 하는 '렌즈'가 되어 줍니다. 성도님의 가장 큰 아픔이 하나님의 가장 큰 위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고, 성도님의 가장 큰 실패가 하나님의 가장 큰 능력을 증거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렌즈로 과거를 재해석하는 삶입니다. 모세도 살인이라는 과거가 있었습니다. 다윗도 간음이라는 과거가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우울증이라는 과거가 있었습니다. 삼손에게는 반복되는 유혹 앞에 넘어짐이라는 과거가 있었습니다. 요셉도 인신매매당함이라는 과거가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지만, 그 의미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자신의 과거를 해석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창 50:20). 고난을 ‘상처’로만 보면 인생이 멈추고 후퇴하며 상처의 노예가 되지만, 고난을 ‘섭리’로 보면 은혜로 해석하게 되고 새로운 사명이 시작됩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름받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헛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은 좋은 과거든 나쁜 과거든 모든 과거를 은혜로 해석하며 일어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를 헛되게 사는 사람들은 과거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뭔가 잘 되면 모든 것은 자신의 능력, 자신의 힘, 자신의 공로 때문에 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내가 잘나서 출세했고, 내가 힘이 있어 부자가 되었고, 내가 똑똑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잘못되면 아버지가 학원에 보내주지 않아서, 어머니가 일찍 깨워주지 않아서 시험을 잘 못 봤다고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헛되지 않게 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과거를 다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에 귀인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버나드 와이너(Bernard Weiner)는 사람들이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동기, 감정, 태도, 행동이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은혜를 헛되게 하는 사람은 성공은 내 능력, 실패는 남 탓을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의 배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게 하는 사람은 실패는 운이 없어서, 성공은 내가 원래 잘나서라고 해석하지만,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는 사람은 과거 실패도 은혜의 훈련으로 해석하며 의미화합니다. 사람은 과거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가는데, 자기중심의 서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중심의 서사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서사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나는 늘 실패했어. 부모도 날 도와주지 않았고, 나는 재능도 없었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미 중심의 서사를 하는 사람들은 같은 사건들을 겪고도 “힘든 일이 많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더 강해졌고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어. 물론 내가 노력했지만, 하나님이 건강을 주셨고 가족이 도와줬고, 기회도 은혜였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렌즈로 과거를 바라보는 은혜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과거의 모든 것을 은혜의 렌즈로 해석하시길 바랍니다.
은혜를 헛되지 않게 사는 사람들이 과거를 은혜의 렌즈로 재해석했다면, 이제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0절은 은혜를 받은 자의 현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바울은 먼저 "내가 나 된 것(에이미 호 에이미)"은 오직 은혜라고 선포합니다. '현재의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우 케네)", 즉 '텅 비거나 내용 없지 않아서' 자신이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페리쏘테론 에코피아사)"고 말합니다. '수고했다'는 말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했다'는 뜻입니다. 지금 수고하는 삶이 은혜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삶의 동기가 은혜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가 지금의 삶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그 말 그대로 자신의 일생을 복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습니다. 그는 1차부터 3차에 이르는 수차례의 전도여행 동안 밤낮없이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끊임없는 박해와 방해를 받았고, 수없이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고백한 고난의 목록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야말로 누구보다도 더 많이 수고하며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극한의 수고를 했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0절 하반절). 바울은 자신의 노력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에 돌립니다. 그는 결코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은 일을 했으니 인정받을 만하다”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왜 나만 이런 생고생을 하느냐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하여 이 모든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선한 열매는 “하나님의 은혜 + 우리의 충성된 노력”의 열매입니다. 은혜에 감격한 사람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내가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은혜는 우리를 나태하게 만드는 면죄부가 아니라, 우리를 거룩한 열심으로 이끄는 '동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심리학의 '자기결정성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 따르면, 인간의 동기에는 외부의 보상이나 처벌 때문에 움직이는 '외적 동기'와, 행위 자체가 주는 기쁨과 의미 때문에 움직이는 '내적 동기'가 있습니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은 '벌 받을까 봐', '복 받을까 봐' 억지로 하는 '외적 동기'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헌신은 다릅니다. 그것은 나 같은 죄인을 살려 주신 그 사랑에 너무나 감격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터져 나오는 '내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를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주님께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같은 죄인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그의 집에 찾아와 주신 그 차별 없는 은혜에 감격하여 스스로 이렇게 외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이것이 바로 은혜에 감격하여 현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합당한 반응'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현재 신앙생활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주일 성수, 헌금 생활, 봉사 생활, 전도 생활, 섬김 생활을 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우리 성도님의 삶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직장 생활, 가정 생활, 사회생활, 문화생활 등 매일 살아가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과 편리함, 쾌락이 삶의 동기가 됩니다. 아담 이후 타락한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은혜를 깨닫고 모든 것이 은혜인 것을 믿으면 신앙생활의 동기가 달라지고, 인생의 동기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동기가 되어 살아갑니다. 내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헌신하고 헌금하고 순교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내 이익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익이 없어도, 편안함이 없어도, 쾌락이 없어도 사명이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사명이면 순교의 길까지 걸어가는 것입니다. 헌신은 더 이상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으로 드리는 사랑의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에 합당한 현재를 살아내는 삶입니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신앙인, 장기려 박사님은 평생 은혜를 동기 삼아 사신 분입니다. 최고의 실력을 갖춘 외과 의사였던 그는 얼마든지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서, 평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한국 최초로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가난한 환자들을 도왔고, 자신의 집 한 칸 없이 병원 옥탑방에서 살며 가진 모든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은혜의 삶이었습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편리함, 자신의 쾌락의 종이 아닙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으면 그 어디든 그 무엇이든 주저 없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익이나 편리함, 쾌락이 동기가 되어 사는 삶은 쉽게 지치고 상실감에 빠져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동기가 되어 사는 삶은 바울처럼 마지막 순교의 자리에 나아가기까지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은 우리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가르치면서, 이어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선언합니다. 즉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받지는 않았지만, 선행을 하도록 구원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에 쓰인 “헛되이”는 '케노스'라는 단어인데, “아무 내용도 결과도 없이 빈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는데도 우리의 삶에 그 은혜의 열매나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디도서 2장 11–14절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경건한 삶을 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구속받은 우리는 “모든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딛 2:14). 은혜가 헛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았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삶의 변화와 수고가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 있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혹시 우리는 값없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게으르고 나태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열심을 다해 헌신하기는커녕, 오히려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편하게 쉬어도 된다고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혜받은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반응은 헌신과 충성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자기 생명까지 모두 내어 주셨는데, 그 은혜를 입은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과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은혜에 합당한 삶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맡겨 주신 달란트를 게을러서 묻어둔 종을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마 25:26–30). 반대로 받은 달란트를 부지런히 장사하여 주인에게 이윤을 남긴 종들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마 25:2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구원, 재능, 물질, 기회 등)를 우리가 놀리거나 숨겨두지 말고 선용하여 열매를 남겨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9절에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능력을 힘입어 힘껏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은혜가 동기가 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가 동기가 되어 섬김과 사랑의 수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갈 6:9-10). 은혜가 동기가 되어 복음 전파의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마 28:19-20). 은혜가 동기가 되어 영적 성장과 섬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엡 4:11-12). 이러한 우리의 수고가 때로는 희생과 헌신을 요구할지라도, 절대로 헛되지 않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수고와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기억하시고 영원한 상급과 열매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더욱 힘써 주를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삶을 삽시다. 그럴 때 바울처럼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게 되었다”는 고백을 우리도 기쁨으로 드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현재를 합당하게 살아냈다면, 그 삶은 반드시 '미래'를 향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11절은 그 열매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고전 15:11)
바울의 '더 많은 수고'가 맺은 열매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즉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바울 한 사람에게 임한 은혜가 현재의 수고를 통해, 다른 사람의 영혼 구원과 교회의 설립이라는 미래의 열매로 이어진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인간의 발달 단계를 나누어 7단계인 중년기의 가장 중요한 과업을 '생산성 대 침체'라고 했습니다. 생산성은 ‘새로운 생명, 가치, 문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뜻합니다. 침체는 '고여 있는 물'처럼, 자기중심적이고 닫힌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에 갇혀 의미 없는 반복을 하고, 권태, 무력감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나이만 먹고 성숙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은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침체'의 단계를 넘어, 다음 세대를 양육하고 사회에 기여하며 무언가를 남기는 '생산성'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에릭슨에 따르면, 이 시기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삶의 의미, 연결감, 성숙한 자아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실패하면 공허, 우울, 자기연민에 빠지고, 결국 노년기의 ‘절망’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다음 세대를 향한 거룩한 생산성의 삶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은혜는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으로 시작되지만, 결코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흘러넘쳐 다른 이들을 살리고 세우는 '생명의 통로'가 되게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내가 죽은 후에도 남는 것”을 생각합니다.
내가 드린 작은 헌신으로 교회학교 아이 한 명의 마음에 믿음이 심기는 것, 나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절망에 빠진 이웃에게 희망을 주는 것, 나의 성실한 삶의 태도가 직장 동료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은혜를 헛되지 않게 사는 자만이 맺을 수 있는 영원하고 복된 미래의 열매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헛되지 않게 사는 삶의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되고, 더 많은 사람이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은혜는 한 사람, 한 교회에 머무르지 않고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임한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 열심으로 복음을 전한 결과,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가 세워지는 열매를 보았습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의 등불이 밝혀졌고, 고린도를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울 개인 한 사람이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았을 때 그 은혜의 파장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영혼까지 미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케냐 선교사로 간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바링고는 케냐 북서부 해발 1900m에 위치한 산악 지역으로, 5인 가족의 한 달 소득이 평균 4만 원 정도인 극빈 지역이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하루 한 끼를 먹는 것이 일상이었고, 대부분 일자리가 없어 도시로 떠나거나 작은 밭을 가꾸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곳에 엘리아스가 살았습니다. 엘리아스는 한국 선교사로부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원대한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교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저는 한국으로 대학에 가고 싶어요. 아이티(IT)를 공부해서 우리나라가 한국처럼 IT 강국이 되고, 우리나라가 한국처럼 잘사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선교사님은 그를 양육하여 선교사의 추천으로 강남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장학생으로 19세에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케냐 성인 남자 노동자가 한 달에 버는 돈이 8만 원이었던 상황에서, 1년에 1천만 원이 필요한 한국 유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아스는 한국에서 학업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봉사활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강남대학교 컴퓨터학과를 졸업한 후, 엘리아스는 LG전자 해외사업부에 공채로 입사했습니다. 취업 후에도 그는 청소년과 다문화 여성들을 돕는 일에 꾸준히 참여하며 봉사 정신을 이어갔습니다. 엘리아스는 LG전자에서 1년간 연수를 받은 후 케냐 현지 지부 담당자로 선정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케냐 현지 선교사가 될 것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2012년 8월 7일부터 10일까지, 귀국을 2주 앞둔 엘리아스는 경남 통영 두미도에서 마지막 농촌봉사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이는 5년 동안 자신에게 베푼 한국인들에게 받은 사랑을 봉사로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바다에 들어갔는데, 그만 심장마비로 익사하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유골을 가지고 케냐에 갔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아이를 잘 돌보지 못했다며, 엘리아스가 살아있을 때의 영상을 보여주며 '죄송하다, 여러분이 죽으라면 나도 함께 순교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환한 미소로 돌아왔어야 할 아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지만, 엘리아스의 부모는 원망과 슬픔보다 목사님이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 주어 고맙다고 하며 엘리아스의 꿈이 열매를 맺어 케냐에서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 후 '엘리아스 IT센터'가 설립되었습니다. 2014년 1월 3일 열린 준공식에는 우후루 케냐타 케냐 대통령도 참석했습니다. 1,300대의 컴퓨터를 각 학교에 보급했으며, 매년 3차례에 걸쳐 바링고 지역에서 모여드는 300여 명의 교사와 청년들에게 1주일간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며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4,000그루의 커피나무를 심어 농장을 운영하여 농가 소득이 10배로 올랐고, 5톤용 물탱크 102개를 각 학교, 교회, 마을회관에 공급했다고 합니다. 엘리아스의 삶과 죽음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는 실화가 되었습니다. 바링고 도지사는 "한국 교회의 도움과 '제 고향 마을을 작은 한국으로 만들고 싶다'던 엘리아스 씨의 정신을 케냐인들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려면, 그 은혜를 남들과 나누며 복음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혼자만 간직하고 만족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은혜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나나 그들이나”라고 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역자들을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누가 복음을 전했든지 상관없이 결국 믿는 사람들은 주께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지 않게 사는 사람은 공로 의식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지, 누가 더 높으냐가 아닙니다.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는 삶은 나를 통해서든 남을 통해서든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삶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그분의 도구로 쓰임받음을 감사할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영혼을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그 은혜의 전달을 위해 우리의 입과 손과 발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는 삶의 마지막 요소는 복음을 전파함으로 열매 맺는 삶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최종적인 은혜의 삶의 목표이며 도착점입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그 소문이 퍼져나갔고(막 2:12),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받았을 때 “와서 내가 만난 이를 보라!”며 동네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요 4:39).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증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이렇게 변화시켜 주셨다”는 간증 자체가 살아 있는 복음 전파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보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은혜를 혼자 묻어두지 마시고 이제는 용기 있게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 우리는 결과를 책임질 수 없지만, 우리가 전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실 줄 믿고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나만 위해 쓰는 이기심은 은혜를 낭비하는 것이지만, 그 은혜를 가지고 남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은혜를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시간과 물질과 달란트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묻어두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다른 이를 용서하지 않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게을렀던 점은 없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완전하게 나타내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고, 그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이제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를 자녀 삼은 데서 끝나지 않고, 우리를 통해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은혜의 빚진 자입니다. 받은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과거의 모든 삶을 은혜의 렌즈로 해석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현재를 은혜에 합당한 삶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미래에 은혜의 열매를 맺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은혜를 나 혼자만 누리지 말고 주변에 전하고 나누어서 더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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