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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3) 약한 질그릇에 담기는 하나님의 은혜(고후12: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1058 추천수:4 218.147.218.173
2025-06-15 13:20:22

하나님의 은혜(3) 약한 질그릇에 담기는 하나님의 은혜
고린도후서12:9

2025년 6월 15일 주일예배 열린교회 유튜브 설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키가 조금 작게 태어난 아들이 나이가 들도록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머니에게 “엄마, 왜 나 같은 아들을 낳았어?”라고 항의했답니다. 그러자 엄마가 “나도 너 같은 아들이라면 낳고 싶지 않았다”라고 응수했답니다. 요즈음 결혼을 앞둔 젊은 남성들은 외모에 많이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어제 인터넷 신문을 보니 20대, 30대의 연애관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남자는 1순위로 여성의 성격을 보고, 여자는 1순위로 남성의 외모를 본다는 것입니다. 엔라이즈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애·결혼 가치관' 설문조사 결과, 남성의 73.1%는 '성격'을, 여성의 70.6%는 '외적 호감도'를 선택했답니다. 결혼을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남녀 모두 '경제적 부담'을 꼽았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신체적, 경제적, 성격적, 정신적, 가정환경적 등 다양한 약점이 있습니다. 독일의 의학자 랑게-아이히바움(Lange-Eichbaum)이라는 사람이 서양 천재 78명을 조사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 83%가 육체적, 정신적, 혹은 가족 관계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천재라고 하지만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잔 다르크, 미켈란젤로, 루터, 파스칼, 뉴턴, 루소, 괴테, 하이네, 바그너, 비스마르크, 릴케 등 모두 약점이 있었습니다. 시인 바이런은 기형아였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간질병 환자였고, 베토벤은 청각 장애인이었으며, 나폴레옹과 덩샤오핑은 키가 작았습니다. 토스카니니는 시력이 매우 나빴고, 모차르트는 병약했으며, 루스벨트는 소아마비 환자였습니다.

문제는 약점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그 약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약함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 약함이 보석이 될 수도 있고 오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약함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약함이 보약이 될 수도 있고,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약점을 처리하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약점을 숨기거나 부인하는 방법입니다. 회피하고 은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추거나 부정합니다.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려 합니다. SNS, 대인 관계, 직장에서 강한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실수를 했지만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남 탓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면에서는 불안, 자기 비판, 우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둘째, 약점을 과도하게 의식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 비하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약점에 집착하거나 확대 해석하여 “나는 안 돼”, “나는 쓸모없어”라는 생각에 빠집니다. 자기 연민 또는 피해자 의식에 갇히게 됩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한 번의 실패를 인생 전체의 실패처럼 여기고 타인의 평가나 시선에 지나치게 예민해집니다. 이는 자기 효능감 상실, 도전 회피, 우울감, 대인 관계 위축 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셋째, 약점을 수용하고 성장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약점을 성숙의 도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약점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약점 안에서 의미와 가능성을 찾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부분은 약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보완할 수 있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오히려 약한 것을 자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약점 자체를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약함(약점)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약함을 감추지 말고 ‘진실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약점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약점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9절에 “내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자랑한다”는 말은 과시가 아니라 기꺼이 드러내고 받아들인다는 의지를 포함합니다. 여러 가지 약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 “육체의 가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성경에 분명히 나오지 않지만, 많은 학자는 신체적 질병, 즉 안질(눈병)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갈라디아서 4장 15절, 6장 11절에서 바울이 “큰 글씨”로 쓴 것과 눈에 관한 언급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갈 4:15)라고 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와 같은 수치의 항목들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숨기지 않고 인정하고 그대로 드러냅니다. 마가 문제로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준 바나바와 다투었던 이야기도 숨기지 않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자기 안의 죄와 선한 뜻 사이의 갈등도 숨기지 않고 다 드러냅니다. 자신이 스데반을 죽이는 데 가담한 것,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한 것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가 그것들을 드러낸 이유는 하나입니다. 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즉,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할 때, 그 빈 공간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한다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약함을 “극복해야 할 장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초대하는 문”으로 인식했습니다. 약함은 숨길 것이 아니라, 은혜가 임하는 지점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약점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는 첫걸음은 자신의 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려 하거나, 완벽한 모습만을 보이려 애씁니다. 사회는 우리에게 강함과 능력을 요구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이 받은 엄청난 계시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가시'가 있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습니다. 그는 그 가시가 자신을 겸손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자아 의존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의 힘으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눈을 뜨게 됩니다. 마치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이 스스로 강하다고 착각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함을 알 때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 겸손한 마음의 시작입니다.

<약한 나를 인정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의학박사인 가와무라 노리유키가 지은 책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말하기를, 약점을 인정하는 사람이 건강하고 스트레스를 적게 받으며 ‘나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한 척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취약성의 힘>에서 “진정한 인간관계는 내가 완벽해 보일 때가 아니라, 내 약함을 나눌 때 시작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약함을 감추는 사람은 수치심과 고립감에 시달리고, 약함을 용기 있게 드러내는 사람은 더 강한 정서적 회복력과 관계의 만족감을 가진다고 합니다. 즉, 자기 수용의 첫 단계는 자기 부정이 아니라 자기 인식입니다. 바울은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서, 약함을 은혜의 장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약함을 감추려고 합니까?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신념을 가진 성공 중심 사회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성과주의 교육과 기업 문화 때문에 실패나 실수를 인정하면 기회에서 밀려난다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경은 우리에게 “약함 = 낙오”라는 인식을 주입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한 고백을 하기보다, 겉모습을 포장하고 감정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습니까? 진짜 감정이 숨겨지니 관계는 얕아지고, 누군가와 공감하지 못하니 외로움은 깊어지며, 결국 하나님 앞에서도 정직하지 못한 기도와 신앙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은 “나는 무능하오니, 주님이 필요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나는 괜찮습니다”라는 자립의 신앙에서 벗어나 “나는 너무 부족합니다”라는 의존의 신앙을 뛰어넘어 “내가 약할 그 때에 주께서 강하십니다”라는 은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이 ‘세 번째 믿음’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약함을 감추는 것은 나를 지키는 것 같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막는 벽이 됩니다. 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순간, 그 자리가 회복의 시작점이 되며 하나님과 사람 모두와 진정한 연결이 시작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 앞에서 완벽해 보이려 애쓰고 있습니까? 성도님의 인생의 ‘가시’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은혜 앞으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약함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약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살인한 모세도 받아주고, 간음한 다윗도 안아주고, 다섯 번 결혼에 실패한 여인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저주하고 도망간 베드로도 찾아가 용기를 주십니다. 그 연약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평생 약점이 따라다녀 낙인찍힌 인생이 될 수도 있지만, 연약함이 '그리고(and)'가 아니라 '그러나(but)'로 이어지는 감동의 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연약함이 은혜를 담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약한 나를 인정해야 합니다. 약한 것을 인정하면 약한 것이 수치가 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는 자랑거리가 됩니다.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라고 말씀합니다. 양팔이 없고 왼쪽 다리 하나뿐인 세계적인 가스펠 가수 레나 마리아는 "난 팔과 손이 없어서 반지나 장갑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세계 장애인 수영 선수권 대회에서 4개의 금메달을 땄고, 대학 졸업 후에는 가스펠 가수로 전 세계를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인 오프라 윈프리는 미혼모였으며, 뚱뚱했고, 흑인이며, 성폭행을 당했고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라고 말합니다. 머리와 몸통, 그리고 발가락 두 개뿐인 닉 부이치치는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 세계를 다니며 행복을 전하는 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직도 기적을 믿어요. 하나님은 제게 위대한 사명을 주셨어요. 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약점을 숨기려고 위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점이 있으면 그 약점에 짓눌려 포로가 되지 말고,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그 약점을 던지시기 바랍니다. 계곡이 깊으면 메아리도 커지는 법입니다.


 

2. 약함의 자리를 ‘기도와 임재의 장소’로 삼아야 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약함 속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 사도도 자신의 '가시'가 떠나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은혜의 통로는 말씀, 성례, 기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홀로 감당하려 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었고, 그분의 응답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울의 약함을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약함을 가지고 살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온전하여진다(헬라어, 텔레이우타이)’는 말은 ‘완성되다, 이룩되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우리의 약함, 그 무너진 자리에서 완성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약함은 육체적 질병, 무력함, 의지력 결핍 등 다양한 연약함을 포함합니다. 복수형으로 표현된 것은 바울의 고난과 약함이 다양하고 반복적이며 실제적이었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완전함이 아니라, 깨어진 자리에서 드러나고 완성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왜 하나님은 바울에게 건강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자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평생 살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선천적 약함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약함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가시처럼 계속 삶에 침투하여 인생을 괴롭힙니다. 건강하던 몸이 병들게 됩니다. 잘나가던 사업이 기울어집니다. 잘되던 자녀에게 위기가 다가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왜 그렇게 하실 수 있느냐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러나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자 더욱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히스기야는 병들어 죽게 되자 하나님께 통곡하며 매달립니다. 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간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통해 당신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 없다고 느끼지만, 약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강한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머물게 한다’는 것은 ‘장막을 치다’, ‘임재하다’, ‘거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하나님이 잠시 들렀다 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성막(스케네) 위에 머물렀을 때 사용된 개념과 같습니다(출 40:34). 즉, 약함이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자리, 은혜의 '홈 베이스'가 된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통해, 자신의 약함 속에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이 머문다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선포합니다. 인간의 약함이 하나님의 거룩한 공간으로 재정의되는 순간, 신앙은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실존적 전환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약함을 통해 강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십니다. 모세가 강력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쓰임 받은 것은 광야 처가살이 40년으로 가장 약해졌을 때입니다. 기드온은 자신을 “가장 약한 자”라 했지만 하나님은 “큰 용사”라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평생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사역했습니다. 우리는 자꾸 '완벽한 그릇'이 되어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금이 간 질그릇에 은혜를 부으시고, 그 틈으로 은혜가 흘러가게 하십니다. 그릇이 깨질 때, 사람들은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현대인은 "내가 주도하는 삶"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도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고흐를 귀를 자른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고 한때 선교사로도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 심각한 정신 질환이 찾아왔고, 그는 좌절감, 자살 충동, 사회로부터의 고립 속에서 살았습니다. 원치 않은 약함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요양병원에 입원하며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데,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은 그의 가장 약한 시기, 바로 그 요양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고통은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끈다.” 그의 약함은 실패가 아니라 예술과 신앙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그 붓질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그림에는 열한 개의 별이 나옵니다. 이는 창세기 37장에서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요셉은 열한 명의 형제들에게 팔려 갔으나, 훗날 그 열한 형제는 총리가 된 요셉에게 와서 절을 합니다. 아마 고흐는 열한 별을 통해 이겨내야 할 역경을, 그리고 밝은 초승달을 통해 그 역경을 이겨낸 후의 희망을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정신병원 쇠창살 밖의 아름다운 별 풍경이 아니라, 요셉의 열한 별과 같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면 반드시 행복한 보상이라는 미래가 찾아올 것이라는 자신의 신앙을 그렸는지도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 그런 약점과 고난, 역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약함에 임하면 초승달 빛 아래 있는 별들처럼 결국 반짝이고 빛날 것입니다.

그렇게 강력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에게 어느 날 약함이 찾아왔습니다. 살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고 그에게 사랑의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배신이라는 약점이 있었지만 그 약함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니, 더 이상 약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세운 반석’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약함을 실패라고 보지만, 하나님은 약함을 진짜 사람다움의 시작으로 보십니다.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인간은 죽음, 고통, 죄, 실패 같은 한계상황에 부딪힐 때 비로소 진정한 자아와 초월자(하나님)를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요 4장)은 다섯 번 결혼에 실패했지만, 그 우물가에서 영원한 생수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실패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메시아’라는 단어조차 입에 담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자의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의 자리입니다. 루터는 “우리는 우리의 강함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연약함 안에서 오직 은혜로만 나아간다”라고 했습니다. 칼뱅은 “인간은 무능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제야 하나님의 능력이 열린다”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강한 자, 성공한 자, 탁월한 자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상한 심령, 부서진 자, 깨어진 질그릇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보이십니다. 약함은 도피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되는 장소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약함을 숨기려 하거나, 빠르게 극복하려 하거나, 도망치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약함의 한가운데로 나아가 앉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은혜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고통 속에서 “하나님, 어디 계세요?”라고 묻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분은 네가 약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 바로 그 자리에 계신다.”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사람들은 약점이 있으면 판단하고 거리를 둡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면,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나님은 약함이 많은 인생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약함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은혜의 장치입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누군가는 “처음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직장을 잃고 나서야 “진짜 내 인생의 목적이 뭘까?” 질문하고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약함은 하나님께로 이끄는 초대장입니다. 어떤 CEO가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건강하고 성공했을 땐 예수님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무너지고 나서야 그분이 나를 안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이끈 위대한 신앙인이지만, 평생 극심한 우울감, 죄책감, 영적 고뇌(Anfechtung)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나는 매일 사탄과 씨름하였고, 어떤 날은 하나님의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고통이 나를 무릎 꿇게 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만들었다”라고 했습니다. 루터의 약함은 그를 하나님의 보호막 안으로 몰아넣은 울타리였습니다. 그 연약함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붙드는 통로였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약함의 자리를 ‘기도와 임재의 장소’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3. 약함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세우는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약점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게 하려면 약함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뻐하고 간증해야 합니다. 9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후, 자신의 약한 것들을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자랑'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약함 자체가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분명합니다. 9절 하반절에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절 하반절에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약점은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내는 플랫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단순히 참아내거나 견디는 수준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믿음의 태도로 전환합니다. 그는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재’하는 자리로 보고, 그 능력 안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강해지는 순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준(강함, 성공, 인정)을 뒤엎는 십자가 신학의 핵심 고백이며, ‘은혜의 역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함은 더 이상 수치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거룩한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크게 기뻐함”은 감정이 아니라 신앙의 선언이며, “자랑한다”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만 영광을 돌리는 자기 비움이며 간증입니다.

우리의 약점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간증해야 합니다. 우리가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변화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그들 또한 소망을 얻고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우리의 질그릇 같은 약함이 하나님의 보화를 담는 그릇이 되어 빛을 발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통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곧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는 고통으로 승화시킵니다. 현대인은 고통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지?” 그러나 약함은 누군가의 상처를 이해하게 만들고, 공감과 위로의 말이 되어 누군가를 일으킵니다. 고통의 길을 걸어 본 신자는 그 자체로 위로의 통로가 됩니다. 약함을 사명으로 해석할 때, 그것은 타인을 살리는 은혜의 도구가 됩니다.

헬렌 켈러는 시력도 청력도 잃어버린 중복 장애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장애인 최초로 대학 학위를 받고 인권 운동가로서 어둠 속에서 인생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선물했습니다. 모세는 입이 둔한 자였지만 민족을 해방시키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가장 작은 자였지만 민족을 구한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이었지만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백성을 살렸습니다. 이사야는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였지만 하나님의 거룩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린아이와 같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포로였지만 강대국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고아였지만 죽을 수밖에 없었던 동족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에게 은혜를 부어 주셔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베토벤은 교향곡 <영웅>, <운명>, <합창> 등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불우했습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아들의 재능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겼던 폭력적인 가장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0대 후반부터는 음악가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청각 상실이라는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극심한 절망 속에서 유서를 쓰기도 했지만, 신앙의 배경 속에서 자란 그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 운명의 항해사는 오직 주님이십니다. 주여! 내 인생을 위협하는 잔인한 풍랑들을 잠재워 주십시오"라고 일기에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고난을 헤쳐나갔고, 자신의 악보에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았다"라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하나님께는 “그럼 내가 하마”라는 초대장이 됩니다.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웃으며 걸어가는 성도를 보면 사람들은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만드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때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이끌고 있습니다."


은혜는 나의 약함 속에서 더욱 빛납니다. 현대인은 강해야 산다고 배웁니다. 하지만 복음은 말합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의 은혜가 너를 붙들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하늘의 보배,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약할수록, 더 자주 깨어질수록, 그 안에 담긴 은혜는 더 넓게 흘러갑니다.

성도 여러분, 약함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도록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약함 속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 약함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뻐하고 간증하시길 바랍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약할 때 비로소 강해지는 역설적인 은혜를 경험하고,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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