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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주시기 위해 아기로 탄생하신 예수님(이사야9: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90246 추천수:4 218.147.218.173
2024-12-08 16:26:10

평화를 주시기 위해 아기로 탄생하신 예수님

이사야9:6

 

성탄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어릴 때 시골 교회에 다녔는데 12월 달이 되면 한 달 내내 성탄절 준비를 하였습니다. 교회 유리창에 매주 순차적으로 성탄 그림을 붙이고, 성탄절에 공연할 성극을 준비하고, 찬양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 때가 되면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다 교회에 모여 장작 난로를 태우며 예배를 드리고 성탄 축하 발표를 하였습니다. 성탄 축하 발표가 끝나면 중고등부 학생들은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밤을 새워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서 놀이도 하고 성탄절 새벽 기도회에 참여했습니다. 새벽 기도회가 끝나면 크리스마스의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새벽송을 부르기 위해 조를 나누고 눈길을 걸으며 마을을 돌며 교인 집 대문 앞에 가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큰 소리로 찬양을 하면 집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이 과자를 미리 준비했다가 선물로 주시면 마대에 넣어 가지고 교회에 와 성탄절 날 그 과자를 먹으며 교회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성탄절은 누구의 생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구원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1. 우리의 구원주로 탄생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 탄생 700여년 전에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분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아기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예언해주신 말씀입니다. 기원전 300년이 우리나라로 치면 고조선입니다. 얼마나 오랜 전 예언 입니까? 예수님의 탄생은 삼국시대 초기입니다. 700년 전의 예언이 700년 후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대해서 구약에는 350여 가지의 예언이 있습니다. 동정녀에게 나실 것,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다 지파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 등 아주 구체적으로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6절을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1) 메시아, 인류의 구원주 예수님은 아기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에서 아이로 탄생한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미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창세기 315절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예언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사야 714절에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구체적으로 예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마태복음 1:22-23에서 이사야 7:14의 예언이 마리아를 통한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셨으니(임마누엘을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 딸이 아니라 한 아들로 주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낳다'해산하다의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언한 것이며주다라는 말은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분을 보내신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 신성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8:58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16-17에서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물의 시작 전에 존재하셨습니다.

 

3) 그의 어깨에 정사를 메었습니다. ‘정사’(미스라)어깨에 맨 열쇠로 엘리아김의 '어깨에 다윗 집의 열쇠가 놓여져 있다’(22:22)는 의미와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을 다스릴 통치권을 말합니다. 죄와 죽음의 노예에 놓여 있는 인간에게 해방과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한 통치권을 가지고 오신 메시아입니다. 이는 한 왕국의 고통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탁월한 모든 업무를 홀로 맡아 수행하는 왕적 권위를 나타냅니다. 즉 메시아께서 세상의 다른 군왕들과는 달리 스스로 모든 짐을 담당하시고 탁월하고 성실하게 통치하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의 탄생에 대하여 누가복음 132-33절에서는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1:32-33)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4) 그 아이의 이름은 기묘가,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태어날 아기의 5중적 표현입니다.

(1) 기묘자(패래)'구별하다', '뛰어나게 만들다'라는 뜻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적을 통하여 크고 놀라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1:9, 12:6). 인간의 경험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 왕께서는 다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존재와 사역 면에서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놀라운 능력과 방법으로 사람들을 절망에서 구속해 주실 것입니다(139:14, 15:31).

(2) 모사는 위대한 모사로 메시아께서 모략과 재능의 신을 받으신 분으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구속 사역을 감당하실 분이심을 표현한 것입니다(11:2). 놀라운 지혜와 자질을 가지고 인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지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메시아 예수는 우리의 위대한 '보혜사'이십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돕고 상담해 주고 지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3)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라는 말은 앞으로 태어날 아기가 신성과 인성을 공유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 줍니다.

(4)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구분이 없는 동일 존재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성부라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자애로우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태어날 한 아기를 영원한 아버지로 표현한 것으로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창조하셨고 구속하실 영원한 아버지이심을 밝혀 주는 말씀입니다.

(5) 마지막으로 평강의 왕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르샬롬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평강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함(삼상1:17)과 평안한 상태(29:6)를 나타냅니다. 5절에서 전쟁터의 군인들의 군화와 피 묻은 군복을 불살라버린다는 말씀처럼 메시아는 세상에서 분쟁을 잠재우고, 관계를 회복시키며, 평강의 세상을 만들 것입니다. 그가 통치하는 세상은 평강의 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11:6-9, 2:4, 5:5). 즉 모든 전쟁이 사라진 상태이며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평안한 상태를 주실 분이심을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천사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2:14)"라고 선포하였습니다.

 

2.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떤 평화를 우리에게 주십니까?

1) 죄인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아기로 탄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바로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해서이니다. 요한1410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와목 제물로 아기로 육신을 입고 오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된 관계를 허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셨습니다.

로마서 4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화목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참된 평화를 경험하게 합니다. 로마서 51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20절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온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원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를 선물로 주신 화목의 중보자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영원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인간관계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아기로 탄생하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평화의 왕이 오셔서 압제자의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를 꺾고 해방을 주는 평화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는 공평과 정의가 있는 평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올바른 것고 공평은 누구에게도 편벽과 편애가 없이 다 골고루 바르게 대하는 것입니다. 정의가 없으면 평화가 없습니다.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거기에 불평과 갈등이 생기고 평화가 깨어집니다. 공평이 없어도 평화가 없습니다. 설령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한다고 해도 한 사람에게는 내로남불하면 금방 대립과 다툼이 생깁니다. 그런데 아기로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평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99-10절에서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라고 했습니다. 그 약속대로 누가복음 2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4-16절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적대감을 허물고 평화를 주었습니다. 골로새서 120절에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모든 관계에서 화평을 이루셨음을 강조합니다.

 

3) 예수님은 내적 평화를 주시기 위해 아기로 탄생하였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두 마음이 있어 스스로 싸우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 삶에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18-19절에서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래서 로마서 724-25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27). 이는 외부 상황과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이 안정과 안식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적 평화는 불안, 두려움, 분노와 같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오늘 이사야 97절에서는 영원한 평화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내적 평안을 주십니까?

요한복음 14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내적인 평화, 곧 영혼의 안식을 약속하셨습니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을 통하여 우리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평화를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요한복음 14:27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통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를 우리는 받은 것입니다.

 

3. 그러면 이미 주신 이 평화를 우리가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는데 우리는 평화를 누리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1) 하나님과 관계의 평화는 평화의 왕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정상적 관계를 가지고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는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산속에 들어가 수도를 한다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평화를 누리는 것은 예수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제 고통하는 자들에게 흑암이 없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주님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8:32)"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8:3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요한복음 146절에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 길이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에수님을 믿어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바뀐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과 평화를 지속적으로 누리려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이사야 263-4절에서는 무엇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까?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26:3-4). 주님을 영원히 의뢰하는 자에게 평화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33절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이런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평화를 가장 잘 묘사한 그림을 선정하여 시상하는 공모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화가는 절묘한 아름다움과 고요함을 갖춘 풍경을 그렸답니다. 그 공모전에서 상을 받는 그림은 바위 하나가 바다 한가운데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거친 폭풍우가 그 위에 휘몰아치고 주변으로는 큰 파도가 소용돌이 치고 있는데 바위 꼭대기의 조그마한 틈새에 비둘기 한 마리가 조용히 등지를 틀고 앉아 새끼들을 부드러운 날개로 덮어서 엄청난 폭풍 가운데서도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키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714절에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라고 했는데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기로 탄생하여 우리와 함께 하셨고 부활 승천하여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병든자, 희망이 없는자, 위로를 원하는 자, 고독한 자, 절망한 자, 실패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 이 평화는 주님 안에 있을 때 주어지는 평안입니다.

 

2) 사람과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평화의 사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사용한 평화라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팍스(pax)와 샬롬(shalom)입니다. 팍스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는 평화였는데 법, 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는 이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넓은 땅을 정복했고 지배했지만 로마는 하루도 피를 흘리지 않는 날이 없었고 결국 그 힘과 물질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 힘과 권력이 핵무기가 평화를 누리도록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지금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우리 나라도 여야의 치열한 권력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평화롭겠습니까? 불안과 두려움으로 나날을 보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이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사람과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막힘 담을 무너뜨렸습니다. 이미 십자가를 통해 무너뜨림 담을 계속 쌓으려고 하면 사람과의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평화를 누리면서 가는 곳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화평의 사신으로 살면 화평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도록부르심을 받았습니다(4:13).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2:14-18)해 주었습니다.

인간과 화평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용서와 화해 이해를 통해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불평등과 차별을 해결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공정한 제도를 만드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화해자가 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볼품없고 야비하고 잔인하다. 그리고 짧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 보았습니다. 지난 역사를 보면 그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Will) 박사와 아리엘 듀란트(Ariel Durant) 박사에 의하면 지난 3421년 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은 기간은 불과 286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지구촌 역사에는 91.6%가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예일대 역사학 교수 도널드 케이건은 <전쟁과 인간>에서 "인간이 전쟁을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동기는 경쟁자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 이익 추구, 명예 추구"라고 합니다. 영국에서 발행한 <평화 속에 전쟁>이란 보고에 의하면 2차 세계대전 후만 해도 100개국에서 130건의 군사 분규가 있었고 3500만명이 전쟁으로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100, 20세기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서 약 9억이라고 하는 인구가 살상되었다고 합니다.

요즈음 정치인들을 보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마치 국지전이라도 버릴 것같은 분위기입니다. 일부 좌우의 이념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를 때려 부수자고 전쟁을 부추기는 경향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와 당시 부패한 정치 권력자들을 무력으로 감옥에 가두고 죽임으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24시간 이내에 서울 수도권 시민과 국군, 주한 미군을 포함한 사상자가 230여 만명 정도 될 것이고, 잿더미로 변한 나라는 하루만에 후진국으로 전락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5천년의 역사상 지금처럼 풍요롭고 70여년 동안 전쟁없이 평화롭게 산 때는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고조선이 BC 300년 연나라 진개의 침범을 받을 때부터 6.25까지 291 번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26:52)한다"고 합니다. 평화를 잃으면 평안도 없고 평안이 없으면 행복도 없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불리한 평화도 가장 정당한 전쟁보다 낫다."고 했으며 콜리지는 "평화는 세상의 모든 축복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완정될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로 이사야 24절에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에 대하여 이사야 116~8절에서는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라고 비유적으로 말씀했습니다. 그 나라에는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평강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35:1,2). 이 나라는 아브라함 이하 모든 족장들이 멀리서 보며 기다렸던 나라이며 모세와 사무엘과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들이 기다렸던 나라이고 오랜 세월 성전에서 시므온과 여선지 안나가 기도하며 기다렸던 나라이고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던 그 나라입니다. 요한복음 2019절에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하셨던 인사가 샬롬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살면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평화의 사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 식구들 간에, 교회 식구들 간에, 이웃들 간에, 직장 동료들 간에, 친구들 간에 평화를 만드는 평화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 사이의 모든 장벽을 허물고 화목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화평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3) 자신과 내적 평화를 누리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마음의 두려움과 불안을 이길 평강이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의 혼란과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상황에 좌우되지 않으며,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17C에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져 있는데, 그 구멍은 세상의 쾌락이나 물질욕으로 채울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불만족과 실망으로 끝납니다. 그 구멍 뚫린 빈자리에 하나님을 모실 때에만 채울 수 있고,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이루어 놓은 평화를 받아 들여 누려야 합니다. 어제 신학대학원 교수 생활을 30년 넘게 하신 목사님의 은퇴식에 참여하였습니다. 예배가 다 끝나고 식사를 같이 하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장례식때 와달라는 것입니다. 췌장암 4기여서 6개월 산다고 했는데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36개월을 사셨다고 합니다. 이제를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평안하게 말씀하시고 죽음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평안했습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평안은 인간이 어떤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평안이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에서 가진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이 평안은 예수님의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통로를 통해 성령이 부어주시는 평안입니다. 복음 찬양 따스한 성령님 마음으로 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만족함을 느끼네에 같은 평안입니다.

 

어떤 젊은 청년이 평생 이루고 싶은 것을 생각하여 목록을 작성하였답니다. 건강, 사랑, 명예, , 아름다움, 그리고 힘과 같은 목록을 기록하여 스승에게 가지고 갔답니다. 스승은 훌륭하고 일리 있는 계획이네. 그러나 자네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 그것이 없을 때 자네가 소유하게 될 이런 것들은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될 걸세.” 그러자 청년은 물었답니다. “스승님 ! 무엇을 빠뜨렸습니까?” 스승은 말했습니다. “평화가 없으면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다네

평화는 개인의 행복, 사회의 번영, 세계의 안정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인간과 세계의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힘과 비전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과 세상에 축복을 가져다주는 길입니다. 평화는 개인의 삶에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과 평화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와 평안을 줍니다. 대인 관계의 평화는 타인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으며, 갈등을 줄이고 화목을 줍니다. 사회적 평화는 공동체와 사회 발전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평화는 분쟁을 해결하고 화합을 이루는 첫걸음입니다. 사회적 안정은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발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공정한 분배와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어 냅니다. 사람과의 평화는 다양성을 존중하며,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헤 줍니다. 평화는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필수적입니다. 평화는 전쟁과 폭력은 인명 손실, 난민 문제, 경제적 붕괴 등을 예방하는 해결책입니다. 평화는 국가 간 협력과 상호 이해를 촉진하며 이를 통해 기후 변화, 빈곤, 질병 같은 글로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내적 평화는 불안, 두려움, 분노와 같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주며 건강하고 행복을 삶을 살게 만들어 줍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평화의 사도로 평화를 전하며 평강의 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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