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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허망이 아닌 희망(막 5:21-34)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887 추천수:6 112.168.96.218
2017-12-31 15:19:48

 

연말, 허망이 아닌 희망

막 5:21-34

 

엄상익 변호사가 쓴 <허망한 인생>이라는 글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시 공부하면서 같이 공부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명문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오고 법과대학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고시에 합격하여 검사가 될 희망을 가졌지만 번번이 낙방을 했답니다. 자신은 고시에 합격하였지만 결국 그는 고시를 포기하고 전자부품 회사를 차려 80년대 경제성장의 물결을 타고 회사가 번창했답니다. 삼십대 중반에 성공한 기업가로서 수출상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자금 회전이 되지 않아 갑자가 부도가 났다고 합니다. 결국 필리핀에 도주하여 26년간 불법체류자로 살다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었답니다. 육십대 중반에 재판을 받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답니다. 면회 오는 가족도 친구도 없었답니다. 고시공부 시절 잠시 함께 한 인연으로 그를 무료 변호한 엄상익 변호사만 그가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끈이었답니다. 엄상익 변호사는 그에게 물었답니다. “이십대 시절 고시 공부할 때 자네의 꿈이 뭐였어?” “고시에 합격하고 검사를 하려고 했지...”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검사가 되려고 했는데 자신이 죄인이 재판을 받아 보니까 감정 없는 기계같은 검사와 판사를 보니까 “젊은 시절 가졌던 판검사의 꿈은 헛된 거였지.”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26년 동안 외국에서 도망자로 살 때의 꿈은 뭐였어?”라고 물어보자 “가족과 함께 쫓기지 않고 평화롭게 먹고 살고 싶었어.”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허망하게도 도망자로 26년가 살다 감옥에 가니까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꿈은 뭐야?”라고 물어 보자 “아무것도 없지 뭐, 그래서 그런지 자살을 할까 봐 교도관이 자꾸 불러 면담을 하자고 그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1. 허망한 것을 쫓으면 마지막은 허망할 뿐입니다.

2017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 한 해 무엇을 좇아 살았습니까? 죽으면 다 끝나버리고 잃어버리면 남는 것이 없는 허망한 것을 좇아 한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끝은 아무리 권력과 명예와 돈을 누리고 살지라도 허망할 뿐입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을 통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 큰 청새치를 잡지만 배가 그 고기를 끄는 것이 아니라 고기가 배를 끌어갑니다. 힘겹게 고기를 매달고 높은 가격에 팔릴 기대를 하고 항구로 돌아오지만 상어들이 다 먹어 버리고 뼈만 남습니다. 무엇인가 잡으려고 열심히 쫓아다니지만 인생의 마지막은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고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헤밍웨이는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세계적인 인기 여배우로 명성을 날렸던 마를린 몬노도 인생의 허무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였습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A Clean, Well-Lighted Place)에는 삶의 허무 가운데 사는 중년 사내의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허무에 계신 우리의 허무님, 당신의 이름으로 허무해지시고, 당신의 왕국이 허무하소서. 하늘에서 허무하셨던 것과 같이 땅에서도 허무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허무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허무한 것을 허무하게 한 것과 같이 우리의 허무를 허무하게 해주소서. 우리를 허무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허무에서 구하소서. 허무로 가득한 허무를 찬미하라, 허무가 그대와 함께하리니.” 어떤 삶을 살든 하나님 없는 인생은 그 끝이 허망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돈이 전부인 냥 돈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지만 하나님 없는 돈은 결국 허망하게 끝이 납니다. 하나님은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자가 되리라"(렘17:5)고 말씀합니다. 자고새는 남의 알을 품는 새라고 합니다. 20여 일 동안 알을 품는다고 합니다. 알을 품는 동안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은 먹지도 않고 정성을 다해 정성을 다하여 새끼를 까고 먹여 키우면 새끼들이 모두 도망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새끼들이 크면 자기 어미가 아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먹지도 못하고 수고하였는데 길러 놓고 보니 날아가 버리니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하나님 없는 권력, 하나님 없는 돈, 하나님 없는 명예, 하나님 없는 지식 자고새의 알처럼 허망한 것입니다. 때가 되면 다 날아가 버리는 것이고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닌 허망한 것들입니다. 요즈음 극성을 부리는 신천지 교인들은 기독교방송에서 보도되었듯이 어리석게도 과천에서 배도 멸망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믿으며 교주가 죽지 않은 것이라고 따라다닙니다. 그러다 그 교주가 죽으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솔로몬은 최고의 권력과 부와 쾌락을 누리며 걸신들린 사람처럼 욕망을 쫓아 살다가 인생의 종막에 하나님 없는 삶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허망함을 고백합니다. 그는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도서 1:14)”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엡4:17):라고 교훈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을 보십시오. 12년 동안 그 병을 고치려고 의사를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의사들에게 많은 괴로움만 받았습니다. 더 병만 심해졌습니다. 가진 것을 다 허비하여 가난뱅이기 되었습니다. 끝이 허망해졌다는 것입니다. 거짓되고 망령되었다는 말입니다. 어이없고 허무했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마지막이 이렇게 허망한 인생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2. 인생의 마지막까지 허망하지 않고 희망 있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34절을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허망하게 끝나 버릴 이 여인의 삶이 희망적인 삶으로 변화된 요인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네 공로도 아닙니다. 네 선행도, 네 열심도 아닙니다. 네 믿음입니다. 믿으면 허망적 인생에서 희망적 인생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손만 대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듣고 믿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27).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오늘 날 말로 하면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12년 동안 쫓아도 허망했는데 혈루 근원까지 말라 버렸습니다. 12년 간의 묵은 숙제가 풀린 것입니다. 2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인생의 죽음의 문제, 죄의 문제, 걱정 근심의 문제가 근원까지 해결되는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예수님은 그 여인을 어떻게 대해 주십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녀를 죄인이나 환자라고 부르지 않고 딸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죄인 취급하고 환자 취급하며 상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딸로 관계를 설정해 주십니다. 부정하다고 죄인 취급받고 죄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는데 완전히 그 죄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는 말은 "평화의 상태를 지니고 가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두려워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내면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근심걱정이 없어지고 평안해졌다는 것입니다. 몸이 질병에서 고침받고 건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인생의 끝은 결코 허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은혜 주시면 풀리지 않던 12년간의 질병도 고침받는 것입니다.

다시 엄상익 변호사가 쓴 <허망한 인생>이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엄변호사는 다시 “감옥에 들어온 이후 이 안에서 너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왔니?”라고 물었답니다. “그냥 성경을 읽으면서 보내왔지 뭐”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인생의 절벽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최악의 절망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 희망의 빛줄기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공책에 시편 23편을 천 번을 써서 자신에게 보내왔답니다. 허망한 것을 쫓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으로 변했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살면 어떤 삶을 살던 끝이 허망하지 않습니다. 감옥에 있어도 허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폭풍을 잔잔케하며 자연을 다스렸습니다.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인생의 구세주로 믿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허망한 인생으로 살지 않고 희망적인 인생으로 일어납니다.

전신마비 장애인이었지만 'KBS 장애인 앵커'가 된 임세은 씨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골프를 시작해 대학 1학년 때 티칭 프로 자격까지 땄답니다. 2007년 대학 4학년 겨울방학 때 세미프로 자격 획득을 앞두고 필리핀 전지훈련을 갔답니다. 그런데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 되었답니다. 꿈을 가지고 노력했지만 허망한 인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좌절하고 두려웠답니다. 하지만 교인들과 가족이 자신을 위해 정성껏 병간호하며 기도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답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믿은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화를 다스렸답니다. 빨리 낫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답니다. 그렇게 신앙으로 기도하면서 3년여 재활훈련을 받은 그는 기적적으로 팔의 근력이 상당부분 회복되었고 지금은 자가운전이 가능할 정도랍니다. 그리고 취업이 어렵다고 하는데 전신마비 장애인이었지만 'KBS 장애인 앵커'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결코 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 앞에 나와 허망이 아니라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지만 방송인 심준구 목사님이 그런 분입니다. 팔다리가 없는 낙 부이치치, 교통사고로 얼굴에 화상을 입은 이지선 씨,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양 등 허망한 인생으로 끝날 번 한 인생을 예수님 만나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우리의 삶은 어떤 것도 허망하게 끝나는 것이 없습니다.

대학을 어떤 대학에 들어갔느냐에 상관이 없습니다. 얼마나 지위를 누리고, 부유함을 누리느냐에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화장실 휴지통 한 번 비우는 것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지막 날 다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상급을 주시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교회 마당 한 번 쓰는 것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어제 어느 목사님이 전화가 와서 부교역자를 한 분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자기 교회에 부교역자를 모셨는데 분리수거를 한 번 시키니까 내가 불리 수거를 하러 교회에 왔냐고 그날 교회를 떠나 버렸답니다. 그리고 재정 집사에게 전화해서 사례금을 보내라고 하고 보내지 않으면 노동부에 신고하겠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까? 에베소서 4장 12절에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목사로 교사로 세운 이유는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 뜻대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허망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 성도님들이 정말로 열심히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섬겼습니다. 물질로, 시간으로 재능으로 각 분야에서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것 다 세월 지났다고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어떤 일을 하던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 보물 창고에 다 쌓인 것이고 좀이나 동록도 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상급으로 베풀어 주시는 것이고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0배 60배 100배 결실을 맺고 오병 이어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뛰어 넘어야 할 세 가지 장애물이 나옵니다.

1) 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려면 가장 먼저 뛰어 넘어야 할 장애물이 부정적인 생각의 장애물입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고침받으려고 해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생각이 아주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지만 “예수님께 가본다고 별 수 있겠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의사도 아닌 예수님 만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교회에 나간다고 별 수 있어, 새벽기도하고 심야기도하고 금식기도해도 대학에 떨어지던데 뭐 기도해. 송구영신 예배 드린다고 뭐 달라지는 것이 있어” 이런 식으로 허망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코타르 증후군(Cotard's syndrome)이란 정신질환이 있습니다. "부정 망상증"입니다. 걷는 시체 증후군(walking corpse syndrome)이라고 합니다. 지나친 죄책감과 심각한 망상, 만성우울증 등으로 끝없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이라고 하였습니다. 생각은 결코 단순한 추상적인 에너지가 아닙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말이 달라지고, 표정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하니까 결국 예수님을 인신매매하고 자신은 자살함으로 허망한 인생을 마감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트만은 부부관계가 만족스럽게 유지되려면 부정의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사건이 부정적인 사건보다 5배는 많아야 한다고 합니다. 쉬와르츠(Schwartz)와 같은 인지 이론가는 건강한 사람들은 긍정적 사고와 부정적 사고가 대체로 1.6:1의 비율로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마샬 로사다와 에밀리 히피는 고성과 팀과 중간 성과 팀, 저성과 팀의 긍정과 부정을 비율로 조사해 보니 고성과 팀은 5.8:1, 중간 팀은 1.8:1 저성과 팀은 1:20 비율로 나타났습니다. 생각의 속도는 세상 어떤 것보다 빠릅니다. 소리는 1초에 340M를 움직이고, 빛은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돕니다. 그러나 생각은 1초에도 광활한 우주를 수십 바퀴나 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나온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허망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2년 동안 불가능했다고 13년 째도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전문가를 만나 해결 못했다고 예수님도 해결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때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28절을 보십시오.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이러라"라고 말씀합니다. "함일러라"(엘레겐)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녀가 마음속으로 그 같은 사실을 되뇌고 또 되뇌였다는 말입니다.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국제천재클럽 회장을 지낸 빅터는 어린 시절 학업성적이 매우 나빴다고 합니다. 열다섯 살 때 그의 담임선생님은 이 상태론 학교를 졸업하기도 어려울 것 같으니 차라리 중퇴를 하고 장사나 배우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곧바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답니다. 자신이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한 그는 직장생활이나 장사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 내지 못했답니다. 그는 학교 중퇴 후 무려 17년 동안 저능아 취급을 받으며 여러 직장을 전전해야 했답니다. 그러나 서른두 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자신의 IQ가 161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책을 저술하고 밤새워 숱한 발명품도 만들어 사업가가 되고 결국 천재협회 회장까지 되었답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긍정 처세술을 말하거나 희망 고문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능력의 한계, 인식의 한계, 생명의 한계가 있습니다. 내 힘이 아닙니다. 나는 못하지만 나는 알지 못하지만 나는 죽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길 되신 예수님의 힘으로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진리 되신 예수님으로 우리는 인식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생명 되신 예수님으로 우리는 죽음에서도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한 번 실패했다고 낙심하고, 한 번 기업이 파산하였다고 한 번 결혼에 실패하였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윈스턴 처칠은 중학교 때 3년이나 진급을 못했습니다. 영어에 늘 낙제점을 받았습니다. 그는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실력이 없어 포병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어릴 적에는 "열등아"였습니다. 결국 초등학교를 3개월 다니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12살 때는 기차간에서 신문팔이도 했습니다. `전쟁와 평화'의 저자인 톨스토이는 대학에서 계속 낙제점수를 받았습니다.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산업혁명의 계기를 만든 J 와트도 "얼간이"로 낙인 찍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했습니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 근대 물리학을 개척한 영국의 대과학자 뉴턴도 초등 학교시절에는 "낙제생"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20세기 최대의 과학자로서 "상대성원리"로 물리학계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아인슈타인도 역시 초등학교 시절에는 성적이 반에서 최하위였고 선생님은 그를 "둔패기"로 취급했습니다. 나중에는 다른 아이들에게 방해가 된다해서 등교를 금지시켰을 정도였습니다. 이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끝냈다면 허망한 인생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사 에훗는 왼손잡이 였습니다. 히브리 본문엔 '오른 손은 불능자라는 말입니다. 드보라는 당시 물건 처럼 취급당하는 여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 장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야곱은 사기꾼이었습니다. 모세는 살인자였습니다.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은 바람둥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정적인 과거의 노예가 되어 허망하게 인생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모든 과거의 부정적인 생각의 장애물을 뚫고 희망찬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어쩔 수 없다 나는 끝났다”라고 허망한 생각을 하지 마시고 예수님께 나아가면 12년 동안 되지 않은 일도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희망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2) 허망에서 끝내지 않고 희망으로 나아가려면 두 번째 뛰어 넘어야 할 장애물이 사람의 장애물입니다.

이 여인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가면 분명히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나아가는데 누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며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무리 가운데 끼어 들어갔습니다. 적극적으로 그 경쟁자들 틈에 끼어들어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희망을 이루려고 나아갈 때 방해하는 장애물이 사람입니다. 경쟁자이고 비판자입니다. 좋은 일을 한다고 모두가 나를 지지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일반적으로 1 명의 지지자가 있으면 2명의 반대자가 있고, 7명의 무관심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에 늘 경쟁자는 있고 비판자는 있는 것입니다. 희망을 이루려면 이 경쟁자의 담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비판자의 담을 디딤돌로 삼아야 합니다. 모세가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었을 때 모두가 모세를 지지하였습니까? 2명만 모세에게 긍정적이었고 8명은 부정적이었습니다. 백성들은 8명의 부정적인 말을 듣고 모세를 비난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사람들 때문에 주신 희망의 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바울을 지지했습니까?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열열 지지자인 부리스길라와 아굴라같은 부부도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지지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위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설교를 못한다고 했습니다. 돈만 좋아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사람 장애물에 포기한다면 세상에서 이룰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몇 주 전 대학생 시절 때 학교에서 말씀을 가르쳤던 학생이 목사가 되어 우리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참 설교가 어렵다고 지금도 제대로 성도님의 얼굴을 보고 설교를 할 수 없다고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제가 그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은혜 받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설교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베드로의 예를 들어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3천명, 5천명 회개하고 돌아온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 회개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 설교를 듣고 이를 갈고 그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목사가 설교한다고 모두가 좋아하고 은혜받고 지지해 줍니까? 오랜 전에 저희 교회에 1년 정도 다닌 한 자매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은혜가 되지 않아 교회를 떠나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을 수 있는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을 찾아 가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설교도 은혜 받은 사람이 있고 은혜 못받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보도 실망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장애물 앞에 무릎 꿇으면 희망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설교하실 때 다 은혜를 받습니까? 회개하고 돌아옵니까? 모든 사람들이 변합니까? 사랑했던 제자 가룟 유다는 스승을 인신매매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려워지니까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감동된 것이 아니라 흠만 잡으려고 쫓아다녔습니다. 하던 일을 허망으로 끝내지 않고 희망으로 일어서려면 사람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요즈음 교회와 교인들에게 실망하여 교회를 다니지 않고 혼자 믿는다는 “가나안” 교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안나가”의 거꾸로 이름을 붙여 가나안 교인들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완벽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족한 인간끼리 모여 함께 신앙생활하게 하신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완벽하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겠습니까? 세상 어느 곳이 완벽한 곳이 있고 세상 어떤 교회가 천국같은 교회가 있겠습니까? 다 죄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우리는 다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의 답을 가지고 있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교회일 열심해 해 보려고 하다가 사람들 때문에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오후 예배드렸는데 우리 교회에 오후 예배에 참여하신 집사님이 면담을 요청하였습니다. 한 참 동안 자기 교회 목회자를 비난하고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목사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 아닙니다. 사람은 믿을 존재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의 대상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잘 믿는 것 같은 베드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위기를 당하니까 부인하고 저주 까지 하고 도망가지 않습니까? 그렇게 신앙시를 짓고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은 다윗도 여인을 겁탈하고 그 남편까지 죽이지 않습니까?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첩을 두고 살지 않습니까? 모세를 보십시오.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고 80년을 훈련받은 사람이지만 분노하여 바위를 치고, 구스 여인을 취하여 아론과 미리암으로부터 비방을 듣지 않습니까? 완벽한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 보면서 실망하고 냉소주의자가 되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 나빠지는 미래로 나아가면 안 됩니다.

 

3) 허망이 아니라 희망으로 일어나려면 세 번째로는 관습의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이 여인은 혈루증 앓은 환자입니다. 당시 문둥병 환자와 혈루증 환자는 격리 수용되었고 성에서 쫓겨났습니다. 당시 문화적 관습에 의하면 정상인에게 손을 댈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그녀는 사회 통념상 여자로서 뿐 아니라 부정한 자로서 공중(公衆) 앞에 나설 수 없는(접촉 불가) 입장이었으나 그러한 사회,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담대히 예수께 접근하여 손을 댄 것입니다.(레 15:19-27). 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접근하여 손을 대는 것입니다. 관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관습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편견으로, 때로는 고정관념으로, 때로는 자존심으로, 때로는 문화로, 때로는 전통으로, 때로는 시대 정신으로 나타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과 함께 희망으로 일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몇 달 전 담당 목사님께서 유초등부에 잘 나오던 아이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할머니가 불교인인데 손녀는 교회에 다니고 싶은데 할머니가 나가지 못하게 하니까 교회에 못나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 집안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유교 집안이기 때문에라는 관습의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 허망한 인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가는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전통이라는 관습의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학교 졸업식을 하는데 우리 청년들은 조심을 해야 합니다. 시대정신이라는 관습의 장벽도 뛰어 넘어야 합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자유의 날개를 달았다고 새벽 1시까지 이성친구와 단둘이 영화를 보면서 부모가 간섭하면 자유데 왜 간섭하냐고 짜증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없는 즐기는 만남 아무리 즐겨보아도 허망한 것입니다. 철이 들으면 후회만 남는 것입니다.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종교 다원주의를 부르짖으며 기성세대의 전통적인 질서와 가치관을 거부하는 것이 마치 자유인이며 문명인처럼 생각합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마치 개화되고 문명화된 신앙인처럼 생각합니다.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인정하는 것이 마치 폭넓은 인격자처럼 생각합니다.

 

대학에 가면 이성과 과학의 전당에서 신앙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생각하며 교회를 훨훨 떠나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무신론자들은 신은 인간의 자유와 발전을 반대하며, 인간을 속박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빼앗으며, 인간의 소외를 가져 오게 하였다고 하며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이제 걱정을 멈추고 인생을 즐겨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즐기고 마셔도 하나님 없는 삶은 허망함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과학이 어떻게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진화, 진화 이론, 진화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진화는 일종의 경험적 데이터고 진화 이론란 그런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과학적 설명입니다. 그러나 진화주의는 과학이라기보다 하나의 철학이나 사조입니다. 종내의 진화의 증거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가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하나님이 종내의 진화를 만들어 내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과학이 하나님이 없다고 증명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믿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과학 기술로 똑같이 달나라에 가도 무신론자는 하나님 없다고 하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계 최초의 우주인인 구 소련의 가가린은 “우주에 가서 하나님을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어윈 대령은 달에서 지구를 보니,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곳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보고 찬양을 했다고 합니다. 우주에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느꼈고, 할렐루야 찬송을 하고 감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기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천지 만물은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물입니다. 지구의 크기는 완벽합니다. 만약 지구의 크기가 조금만 작아도 수성처럼 현재의 대기권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반면에 조금만 커도 지구의 대기에는 목성처럼 대기 안에 많은 양의 수소를 품고 있게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지구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태양에서 더 떨어져 있게 되면 우리는 모두 얼어 죽게 됩니다. 반대로 조금만 더 가깝게 되면 모두 타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우주가 창조주 하나님 없이 통일된 법칙에 따라 완벽하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태양과 완벽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지구, 물의 독특한 화학적 성분비, 인간의 뇌, DNA,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존재를 완벽하게 우리에게 알려 주신 분이십니다.

대학에 가면 죽지 않는다는 교주를 따르는 신천지나 교주가 죽자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교회나, 감옥에 가있는 정명석을 따르는 JMS나, 죽은 문선명을 따르는 통일교 등이 유혹을 합니다.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자신의 교주를 통해서, 자신 집단에 들어와야 십사만 사천 속에 들어와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양심을 마비시키는 거짓에 허망한 것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이단을 따르면 양심이 마비되어버립니다. 어머니를 아줌마라고 하면서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부모를 속이면서도 얼굴 하나 붉히지 않습니다. 병들면 교주가 와서 간호해 주고 돈을 주고 보살펴 주겠습니까? 자신을 끝까지 돌보아주고 사랑해주는 부모를 속이고 교주를 위해 젊은 청춘을 허비하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허망합니까?

우리 인생을 허망하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허무에서 해방시켜 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행복도, 우리의 만족도 예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2)"라고 말씀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예수님은 구원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3)" 어떤 이단의 교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행 16:31)"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방해하는 어떤 인간의 장애물도 다 극복해야 합니다. 어떤 관습의 장애물도 극복해야 합니다. 어떤 사상의 장애물도 다 극복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께 희망이 있습니다. 2017년 마지막 주일 연말이 되었습니다. 미래가 깜깜합니까? 돈 때문입니까? 건강 때문입니까? 능력 때문입니까? 사람 때문입니까? 중독 때문입니까? 예수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허망한 인생이 예수님을 만나면 미래는 희망으로 바뀌어 집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질 것입니다. 마음의 장애물, 사람의 장애물, 관습의 장애물을 뛰어 넘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최고의 자산입니다. 능력있는 믿음으로 미래를 더 희망차게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라는 말씀이 여러분과 저의 생의 미래에 희망차게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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