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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3)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쁨(마2:1-12)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370 추천수:3 112.168.96.218
2017-12-17 13:18:11

 

성탄(3)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쁨

마태복음 2:1-12

 

우리는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성탄절 대표적으로 부른 찬양은 “기쁘다 구주오셨네”입니다. 시골에서 교회에 다닐 때 성탄절이면 새벽송을 돌았습니다. 함박눈이 오는 날 친구들과 함께 새벽송을 돌며 집 앞에 가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늘 부르면 권사님, 집사님들이 나와 과자를 듬뿍 받아 교회에 왔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모두 시골 교회에 다니면서 새벽송을 불렀던 추억을 생각하며 이 찬양을 한 번 불러 보겠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하여라” 3절입니다. “온 세상 죄를 사하려 주 예수 오셨네 죄와 슬픔 몰아내고 다 구원하시네 다 구원하시네 다 구원 구원하시네”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이 찬양을 부르면서 성탄절 기다리는 기쁨이 있습니까? <감정 시대>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대표적인 감정 6가지를 말합니다. 불안감과 모멸감, 고립감과 좌절감, 그리고 상실감과 죄책감입니다.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은 이 6가지 감정 중 하나 이상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고 초조한 느낌인 불안감과 수치스러운 느낌인 모멸감, 홀로 된 느낌을 주는 고립감, 자신감을 잃은 좌절감, 무엇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의 상실감과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죄책감에 짓눌린 분이 계십니까? 이런 부정적인 감정의 노예가 된다면 성탄절이 다가와도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1997년 IMF 외환 위기가 닥치면서 많은 가정들이 붕괴되었고, 이때 생겨난 불안감은 더욱 심화되어 대물림되고 있다고 합니다. 고용 불안이 여전하고 비정규직 일자리와 취업난으로 너도 나도 불안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중산층은 몰락하고 불안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압축 성장으로 서구권 국가들이 몇 백 년에 걸쳐 이룬 성장을 불과 50년도 안 되어 이뤘지만 IMF로 매시간 11개의 회사가 도산했다고 합니다. 그 후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중산층이 대량 실직으로 한꺼번에 몰락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2017년 국가공무원 9급 선발 예정 인원은 4,910명, 접수 인원은 228,368명으로 경쟁률이 46.5대 1에 달했다는 것입니다. 1997년에 이어 한국 사회는 취업 불안, 비정규직의 공포, 공동체의 붕괴, 살벌한 각자도생이 사회를 이루는 기본이 되어 버려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불안감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세대의 경제적 몰락은 자녀 세대의 항구적인 상처와 불안으로 이어져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서로에게 모멸감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갑질 대한민국이 되었답니다. 갑질은 더 이상 언론에서 나오는 몇몇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특수한 일이 아니라 너나없이 벌어지는 대한민국의 살풍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갑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감정은 모멸감이라고 합니다. 모멸감의 최전선에는 감정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2010년 한국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전체 고용인구 1,600만 명 가운데 고용인구의 70%인 1,200만 명이 서비스직에 종사하고 있고 42% 정도가 비정규직이라고 합니다. 기업은 손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굴종을 강요한다고 합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모멸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두가 외로운 고립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혼밥 혼술족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속도와 언제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스마트폰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의 1인 가구 증가 속도는 세계 최고라고 합니다. 가족 및 친척과의 접촉 빈도는 세계 평균의 절반 수준이라고 합니다. OECD 34개국 가운데 공동체 생활로 위안을 얻고 정체성에 도움을 받는 공동체 지수가 33위로 거의 꼴찌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혼자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 식당이나 술집이 늘고, 함께 차를 마시고 이야기하는 공간이었던 카페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시간과 정성을 들여 관계를 맺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좌절감에 사로잡힌 좌절의 시대라고 합니다. 매일매일 좌절하는 희망이 없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막막하다고 합니다. 열심히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도로서의 계급은 사라졌지만 오히려 계급적 사고는 고착화되어 수저 계급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기회나 가능성까지 나뉘는 현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는 비정규직 내에서 1차 하청, 2차 하청, 계약직, 시간 선택제, 파견노동자, 기간제, 특수고용, 무기 계약직, 호출 노동자 등 새로운 노동 형태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상실과 죄책감이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지적한 불안감과 모멸감, 고립감과 좌절감, 그리고 상실감과 죄책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울하고 괴로운 분이 있습니까?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사회가 어떻게 변해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감정은 나의 선택입니다. 마치 프리즘과 같은 것입니다. 빨간 선그라스를 끼면 세상은 다 빨갛게 보이고 파란 선글라스를 끼면 세상은 다 파랗게 보이는 것입니다. 불쾌하게 세상을 보면 불쾌한 것만 보입니다.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감점은 노예이며 우리가 그 주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감정은 나의 생각과 태도와 믿음의 결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거리에 누워있는 노숙자를 볼 때가 있습니다. 다 똑같은 감정을 가질까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구구절절 비난을 하면서 쓸모없는 게으름뱅이라고 불쾌한 감정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나도 저런 사람이 되었을 텐데하며 감사한 감정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똑같은 장면이지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감정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감정은 현실 자체보다 인식, 생각, 태도, 믿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세상에는 좋고 나쁜 것이란 없다.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인식은 사건의 기본적인 사실보다 훨씬 강력하게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외부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어진 사건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믿음이 우리의 감정 반응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1. 성탄절이 왔지만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첫째는 오늘 성경에 나오는 헤롯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헤롯은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3절에 보십시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은 듣고 소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동만 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아이를 찾아 죽이려고 합니다. 마음만 먹는 것이 아니라 실제 실행을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 아래는 다 죽였습니다.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기뻐하지 못합니다. 걱정과 근심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것을 상실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왕권이 빼앗길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당대 유대 땅에서 최고의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돈 주고 권력을 산 사람입니다. 에돔 사람입니다. 유대의 왕으로 있는 동안 로마의 황제, 유대 총독이 몇 번씩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대를 다스리는 왕으로 살아남을 정도로 국제 정세에 매우 밝고 처세술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사람입니다. 그는 권력욕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큰 영향을 끼쳤던 제사장 가문인 하스모니아 가문에 속한 사람들을 다 처형했습니다. 옛날 권력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10명의 아내를 거느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첫째 부인 첫 아들, 두 번째 부인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장모를 처형했습니다. 다 역모로 처형한 것입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뿐입니까? 두 살 이하 유아들을 비참하게 살해하였습니다. 오죽하면 "헤롯의 왕자보다는 헤롯의 돼지가 더 행복하다"하는 당시 속담까지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 아리스토불루가 대제사장이 되었을 때, 오순절 행사 때 백성들이 그를 환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를 초청하여 파티를 열었는데 그 날 무더워서 목욕파티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자기 처남이었는데 그는 부하를 시켜 장난처럼 대제사장을 머리를 물속으로 처박고 익사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게 동방박사들이 와서 왕으로 나신 이를 찾으니 뒤집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 살고자 하는 자는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 자기 주권이 상실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자유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즐길 것 즐기지 못하고 마음대로 살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성탄절이 되어도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진정한 기쁨은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제사장과 서기관을 불러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서 나겠냐고 물어봅니다. 그 때 그들은 정확히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알려 줍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헤롯의 의도를 알면서도 기뻐하지는 못하고 고자질합니다. 요즈음 용어로 말하면 이신론자들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그 신앙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앙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구분할 때 “신자, 무신론자, 이신론자”로 구분을 합니다. 이신론자 중에서 다시 “비판적 이신론자와 실천적 이신론자”로 구분을 합니다. 이신론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 지식으로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비판은 하지 않더라도 행동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이 믿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학교도 다녔다고 합니다. 교회 생활 모태로부터 했다고 합니다. 자기 친구가 어느 목사 어느 장로하고 합니다.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어떤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행위는 없습니다. 왕년에 자신도 이런 저런 성경공부를 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생활은 엉망입니다. 실천력이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는 가라지 신자일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쁨이 없습니다. 왕되신 예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는 예수님 믿은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진정 나의 구주로 모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차지도 않고 덮지도 안는 미지근한 상태는 썩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냉철한 머리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좋은 기회를 가졌으나 그것을 놓치고 결국 그들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잡이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마27:1-2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결국 빌라도에게 넘겨줍니다. 니체도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칼막스도 사르트르도 볼테르도 성경을 잘 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사르트르가 신은 없다고 했습니다. 니체는 말년에 미쳤다고 합니다. 그가 광기 어린, 그 미침 속에서 낙서장에 남긴 메모는 "신이여, 당신은 살아있다. 나는 죽었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사르트르는 그렇게 자유를 부르짖었지만 1980년 3월 불란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폐수종을 죽을 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있는 자기 아내에게 묻지 못하고 죽어갔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몸을 떨며 의사에게 6개월만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애원하며 “오, 이제 나는 지옥 불에 들어가는구나 절규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10:3) 이런 사람들에게는 감각적이고 찰나적인 기쁨은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기쁨은 없는 것입니다.

 

2. 성탄절을 기다리면 기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동방박사들을 보십시오. 10절을 큰 목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10절에 보십시오. 한 목소리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은 충만이 넘치는 상태입니다. 큰(메가덴) 크고 놀랍고 장엄하다는 뜻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9절을 보니까 그들이 기뻐한 것은 단순한 별이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 별이 자신들을 인도하다가 아기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그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성경에서 정확이 밝혀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누구로부터 메시아 예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러 먼 길을 찾아 온 것입니다. 험하고 먼 길을 오직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만나 기뻐하고 기뻐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자 되어서 기뻐합니까? 선물 받아서 기뻐합니까? 건강해서 기뻐합니까? 성공하고 승진하여 기뻐합니까? 모든 것이 형통하여 기뻐합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메시아로 모셨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쁨은 성취의 기쁨이 있습니다. 승리해서 기쁘고, 소유해서 기쁘고, 합격해서 기쁘고, 사랑받아서 기쁘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손에 넣어서 기쁘고, 돈을 벌어서 기쁘고, 선거에 당선되어 기쁘고, 명예를 얻고 기쁘고, 연구 성과를 얻어 기쁘고, 장난감을 얻어 기쁜 것과 같이 욕구가 충족되어 기쁜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잃어버리면 상실감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감각적인 기쁨입니다. 문제는 이 기쁨은 지나치면 윤리성이 없게 됩니다. 가학증상이 나타납니다. 남은 잘못되어도 나만 잘되면 기쁜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켜 무수한 사람을 죽이면서도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둑이 도둑질 잘했다고 기뻐하고 사기꾼이 사기 잘 쳤다고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소유의 기쁨 성취의 기쁨이라는 것은 원시적이고 육체적이고,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기쁨이고 잘못 나가면 동물적이고 파괴적인 가학적인 기쁨이 되어 버립니다. 이들은 메시아 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한 가지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것 한 가지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것 한 가지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탄절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다는 사실 하나로,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라는 사실 하나로 기뻐하는 절기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죽음에서 구원을 받고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죄 용서함 받고 참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 주님을 통하여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안감과 모멸감, 고립감과 좌절감, 그리고 상실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기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삶 변화 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비록 사업이 잘 안되고, 건강치 못하고 모든 것이 소원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만왕의 왕 예수님을 만난 기쁨,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기쁨 그 기쁨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기뻐한 것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기 때문입니다(민수기 24장 17절) 그 머나먼 길을 고난의 길을 견디며 희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길은 하루 길이 아닙니다. 교통이라야 겨우 낙타입니다. 많은 세월이 걸렸을 것입니다. 사막입니다. 살벌한 광야길입니다. 물도 없습니다. 폭양이 내리쬡니다. 괴로워도 힘들어도 가야한다고 결심하고 다짐하고 걸어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구세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승리해도 기뻐할 수 있고 실패해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병들어도 기뻐할 수 있고 건강해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감옥에 가도 기뻐할 수 있고 핍박을 받아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단순한 육신적 기쁨이 아니라 영혼의 기쁨입니다. 외적인 기쁨이 아니라 내적인 기쁨이고 맑은 날이나 흐린 날이나 언제든지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일시적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죽음도 빼앗아 가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만나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20장 20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 20:20)"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그들은 예수께 경배를 드린 후에 기쁨에 넘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눅 24:52)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6)"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행 8:8)"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 13:52)" 라고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쫓겨 가면서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능욕을 받아도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 5:41)"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기뻐합니다. 바울을 죽을 지라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7)"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고후 7 : 4). 왜 그렇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유의 기쁨 정도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베푸는 것으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존재의 기쁨이고 영적인 기쁨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한 번 아들이 되면 영원한 아들이고 천국에 이르도록 그 어떤 것도 이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신앙인이 되어서도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죄입니다. 단테의 { 신곡} 에 보면 지옥 맨 밑바닥에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여기 왔느냐?"고 물으니까 안내하는 사람의 말이 "다른 죄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믿는다고 하면서 기쁘게 살지 못하고 늘 우울하게 한숨만 쉬며 산 죄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하더랍니다. 신앙인이란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신론적 철학자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신앙인의 3대 삶의 지침을 말합니다. 그것을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6)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이것은 신앙인의 삶의 3대 원리입니다. 그 중 무엇이 가장 앞서 있습니까?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소요리 문답에서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느냐 누리지 못하는냐는 우리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선택의 문제만 남아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어린 아기로 오신 주님을 만나 기쁨으로 살 것인가? 예수님을 만나기는 만났지만 계속적으로 소유하지 못했다고 성취하지 못했다고 슬퍼하고 애통해 살 것인가 입니다.

성탄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기쁨을 회복하는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괴로웠던 것, 슬프고 고달팠던 것 다 십자가에 묻어 버리고 희망의 메시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쁨을 회복하는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모두 다 나를 떠난다 하여도 우리 주님만은 나를 지켜 주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진정 주님 한 분으로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은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합니까?(2, 11)

오늘 성경에 보면 동방박사들은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그들은 그 기쁨을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함으로 표현하였습니다(2).

그들은 예수님을 진정 메시아로 경배하였습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왜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까? 메시야를 만나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크리스마스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장사하는 날 산타크로스의 날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점점 성탄절 예수 지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모 일간지에서 "쏘리, 크리스마스"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젊은이들이 크리스마스는 구세대의 문화라고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공연계엔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콘서트나 뮤지컬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설치된 성탄 트리 꼭대기에 달린 십자가를 두고 “특정 종교의 상징물이므로 철거해야 한다”는 민원이 이어지면서 십자가 크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안티들이 인권이라는 명목으로 예수님 이름 지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 미국 등에서는 종교적 색채가 드러나는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대신 '해피 홀리데이스(Happy Holidays)'라는 인사를 건네자는 캠페인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 없는 성탄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탄절은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 경배하는 날입니다. 중심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들의 지위에 비하면 마구간 초라한 곳에 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겸손하게 경배한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주님을 보는 눈이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배웠다고 조금 가졌다고 예수님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위 때문에 주님께 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 찾으시고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우리의 인생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헤롯은 제사장 서기관은 주신 것으로 경배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기뻐하는 기쁨은 필수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함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왕되시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왕되신 예수님께 예배로 그 기쁨을 표현해야 합니다.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모두 무릎 꿇고 다 경배해 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엎드려 절하세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하나님의 영으로 경배 드리리 ”

 

2)그들은 그 기쁨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11).

이 보물은 당시에는 제일 귀한 것이요 가장 값진 것입니다. 이 예물은 의미가 있습니다. 황금은 왕에게 드리는 예물로써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유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므로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레2:1,2)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약품으로써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것입니다.(요19:39,40) 그것을 팔아 경비로 쓰고 싶은 유혹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예물은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통하여 예수님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받는 것, 성취함도 기쁨이 있지만 왕되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은 드림으로 우리의 기쁨을 표현해야 합니다. 건강이 주어지면 건강으로 지식이 주어지면 지식으로 명예가 주어지면 명예로 권력이 주어지면 권력으로 재물이 주어지면 재물로 그리스도께 드리는 삶을 살면 그 기쁨은 오래갑니다. 우리의 생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 드리는 기쁨이야 말로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일시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생이 다할 때까지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만난 기쁨을 계속적으로 간직할 수 있는 비법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헌신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3) 그들은 말씀의 지시에 따라 살아갔습니다(12)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하니까 그래도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도 경배하도록 꼭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가면 많은 이익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호화로운 잔치에 참여할 수도 있고, 상급도 받고 좋은 교통수단으로 귀국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 되신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왕을 좇음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왕을 따르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가라는 대로 가고 멈추라는 대로 멈추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왕으로 모시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기쁨의 삶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익이 없고, 편리가 없고 인간적인 기쁨이 없다고 하더라도 말씀 붙들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모순투성이고 부조리와 불안과 불만이 가득 찬 세상에서 말씀 붙들고 신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모든 불안감을 벗어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세주로 모시면 모든 모멸감에서 벗어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초라한 조건일지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고립감에서 벗어나 한 형제자매로 기쁨을 누리면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 모든 상실감에서 벗어나 기쁘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족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 모든 죄책감에서 벗어나 주홍같이 붉은 죄도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용서를 받고 참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탄절 예수님을 왕과 구세주로 모시고 불안감과 모멸감, 고립감과 좌절감, 그리고 상실감과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참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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