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하나님(7) 예수님의 증인으로 변화시키는 성령님
행1:8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것인가를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우리의 운명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성품을, 능력을, 신체 이미지를, 생활 습관을, 인생 길을 변화시켜 주신다고 성경을 통하여 교훈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베드로의 삶을 통해 인생의 목적을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성경을 통해 살펴 보고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1. 베드로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은 마태복음 4:18-20, 누가복음 5:1-11, 요한복음 1:40-42 등에서 소개되어 있습니다. 시도행전과 누가 복음은 의사인 누가가 기록하였는데 누가는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 예수님이 그를 부른 것으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상당히 상징적이고 의미 있는 기록입니다. 그의 인생 목적은 고기잡으면 잘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물질이 스스로 존재했고 스스로 존재한 물질이 진화되어 인간이 되었다고 믿고 있는 진화론자들은 인생의 목적은 생존과 번식에 있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라고 보았지만 결국 같은 말입니다. 이 땅에서 자신과 자기 자식이 잘먹고 살 사는 것을 다른 단어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대학 들어가고 그래서 자신들이 좋다고 하는 직장에 들어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고 평생 자식들 잘 가르치고 잘 먹고 잘 살는 것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히 태어나 우연히 살다가 우연히 죽은 존재일 뿐인데 뭐 인생에 복잡하고 머리 아픈 특별한 의미나 목적을 부여할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짐승처럼 아무런 의지가 없는 것이니 그저 잘 먹고 잘 살며 즐기다가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을 “한 번 뿐인 인생 즐기다가 가자”라고 삶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베드로의 인생 목적은 무엇으로 변화되었을까요?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베드로는 인생의 목적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인생의 목적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 4:19)"라고 분명하게 베드로 인생의 목적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즉 고기를 잡아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여 살리는 자로 인생의 목적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사역자로 삼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주신 소명이었습니다. 베드로를 이 땅에 태어나게 만들고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목적이었습니다.
3.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목적인 이 소명을 평생 사명으로 잘 감당했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사명으로 부여잡고 모든 것을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왜 따라 다녔을까요? 여전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고기잡이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수님을 통해 성공하여 남부럽지 않게 잘먹고 잘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하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고 헤롯의 악한 권력을 무너뜨리고 다윗 같은 이스라엘 왕이 되면 좌의정이나 우의정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여 권력을 잡고, 부를 이루고 명예를 얻어 출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권력 다툼을 하였습니다.
어느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0-21)."라고 요구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분노합니다. 베드로 뿐 아니라 다른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마20:24).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놓고 최후의 만찬을 하는데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를 것을 놓고 다투고 있었습니다(눅22:24-27).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을 사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붙들고 살아가야 할 인생의 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소명을 받았지만 그 소명을 사명으로 품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니까 다 옛날로 돌아가 고기잡이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로 가서 고기를 잡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처음 베드로를 부를 때처럼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주님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가 평생 붙들고 살아야 할 사명, 즉 인생 목적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을 통해 돈 벌고 권력 잡고 명예 얻고 출세하여 성공하는 것이 인생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인류 구속사를 성취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 성도님의 가슴을 우리는 공감의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불렀는데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인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의미합니다. 이 일이 쉽운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다 순교하였습니다. 그래서 헬라어 “말투스(증인)”는 나중에 순교자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아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예수님에 대한 충성된 증언이자 믿음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불가능할 지라도 성령 충만을 받으면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모시면 권능 있는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사명으로 붙들고 그 소명을 인생 목적으로 삼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 목적을 붙들고 살 수 있도록 권능을 주십니다.
5.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삶의 현장에서 이 목적을 어떻게 삶의 현장에서 성취해 가십니까?
2장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베드로를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전합니다. 2장 31-3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베드로가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사는 장애인을 고치자 당시 권력자인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장로와 서기관 사람들이 증인으로 삶을 사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협박을 합니다. 그 때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4장 8-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자신을 높이는 삶이 아닙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한 삶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를 위한 삶이 아닙니다. 자신의 성공 출세를 위한 삶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못하도록 위협을 합니다(18) 그 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4장 19-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6. 이렇게 성령 충만하여 인생의 목적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고 사니까 어떤 결과가 이루어집니까?
1) 죽음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려고 하지만 결국 죽음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권력도, 돈도, 명예도, 지식도, 아름다움도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죽음 후에 무엇이 있을까?” 70세가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면 남은 삶은 다가오는 불안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후의 세계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며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라고 말씀해 주셨지만 공감이 되지 못했습니다.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음 직전의 사람들을 만나고 쓴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것들'에 관한 기록인 <인생 수업>이라는 책에는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 늦게 깨닫는다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죽음 이후를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베드로는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자 확신이 생겼고 죽음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함께 모험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과 살며 경험하게 되면 삶의 목적이 달라지게 되고 삶의 목적을 주신 예수님을 신뢰하며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15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대제사장이 공회 앞에 세우고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위협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사도행전 5장 3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그들이 크게 노하여 죽이려고 합니다(행5:33). 그런데도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4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렸듯이 베드로도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사도행전 9장 4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실제 경험하니까 죽음의 노예로 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죽음을 초월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공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활력있고 생동감 있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결핍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참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대부분 인간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결핍을 채운다고 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짠 물은 먹으며 먹을수록 더 목마르듯이 결핍이란 채워도 채워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져 있는데, 그 구멍은 세상의 쾌락이나 물질욕으로 채울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불만족과 실망으로 끝납니다. 그 구멍 뚫린 빈자리에 하나님을 모실 때에만 채울 수 있고,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결핍은 참 만족을 주시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때 채워집니다. 그 사건이 나면서부터 장애인이 된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결핍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절망이고 하나는 기회입니다. 결핍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핍은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결핍의 순간은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 비상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결핍은 도약을 위한 기회입니다. 결핍은 성장의 동력입니다. 때로는 가난이라는 결핍이 기회입니다. 때로는 병약함이라는 결핍이 기회입니다. 때로는 배우지 못한 결핍이 기회입니다. 때로는 사고가, 질병이, 실패가 또 다른 삶으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결핍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핍으로 낙심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앙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고 만들어 낸 신을 믿는 것도 아니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빈틈을 채우는 신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보고 믿거나, 결핍을 채우려고 믿으면 그 믿음은 모래위에 지는 성처럼 쉽게 무너집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우리의 결핍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순교록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김영희 편역)>에 나오는 수많은 순교자는 그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오직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한 평생 살다 그 신앙을 끝까지 지키려다 순교하였습니다.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엇인들 주시지 않겠습니까? 공기는 인색하지 않습니다. 크든 작든 그릇이 비어있기만 하면 그 빈자리에 가득 채워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베드로는 그 사실을 깨닫을 것입니다. 자신이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을 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넘치도록 잡게 해 주신 이미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2534)”라는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실제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을 받고 그는 변한 것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았지만 하나님이 다 채워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영혼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이사야 55:1-2)”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는 말씀의 진리를 성령 하나님을 통해 깨닫게 되고 삶을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탐욕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다 보니 탐욕의 노예가 되어 이렇게 세상에 전쟁이 그칠 날이 없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예들의 마음 속에는 탐욕이라는 수렁이 있습니다. 이 탐욕이 행복을 담아 줄 것으로 착각하는데 탐욕의 수렁에는 행복이 담기지 않습니다. 탐욕은 자신과 공동체를 재앙의 수렁으로 끌어갑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탐욕입니다. 죽음보다 강하고, 피보다 진하며, 생명보다 귀한 탐욕이 굶주린 사자처럼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찾고 있지만 탐욕은 물거품 같고, 이슬 같고, 아지랑이 같고, 뜬구름 같은 것입니다. 탐욕이 키워가는 부동산 거품은 빈부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개발의 탐욕이 만들어 내는 환경오염과 온난화, 식욕의 탐욕이 만들어 내는 바이러스 질병의 확산, 쾌락의 탐욕이 춤추게 하는 향락산업, 권력의 탐욕이 발목잡는 움츠린 평안 등으로 지구촌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취금지시 불견인(取金之時 不見人)라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탐욕에 중독되면 눈앞의 위험도, 친구도, 이웃도, 공동체도, 예의도, 양심이나 염치도 보이지 않습니다. 청교도인 에스겔 홉킨스는 이 탐욕이 어떻게 인간을 포로로 만드는가를 4단계로 설명하였습니다. 첫째 단계는 죄가 우리 안에 형태를 갖추기 전에 악한 생각 또는 죄의 싹이 움트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이러한 악한 생각을 채워줄 대상이 나타날 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셋째 단계는 부패한 육욕적인 세력과 죄악으로 눈이 멀고, 마지막 단계는 탐욕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멸망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탐욕의 노예가 되면 저물도록 걷기만 하다 쓰러져 죽은 톨스토이의 우화에서 나오는 농부처럼, 딸을 황금으로 만들어놓고 통곡하는 미다스의 왕처럼, 성경에 나오는 롯의 아내, 가룟 유다처럼 인생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무거운 것을 움켜쥐고는 멀리 갈 수 없습니다. 가볍게 가야 먼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탐욕의 수렁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해 결국 멀리 가지 못하게 합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사람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홀로 사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 하와를 만들어 같이 살도록 했습니다. 착취하는 배필이 아닙니다. 탐욕을 채우는 배필이 아닙니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서의 배필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다 돕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권력에 탐욕을 부리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탐욕으로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인간의 불행은 탐욕에 있습니다. 탐욕은 사람을 영적으로 피폐하게 만들고, 때로는 물질적으로도 파멸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탐욕은 자꾸 더 많은 것을 추구하게 만들어, 결국 그것이 사람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9-10에서는 탐욕이 어떻게 사람을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지를 경고합니다. "부하게 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빠지나니, 이것이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함이라. 돈을 사랑함이 만능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탐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절단하게 하고, 탐욕은 사람과 갈등을 만들어 내고, 탐욕은 공동체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면 탐욕으로부터 자유함을 받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17에서 "주께서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8:5-6에서는 "육신을 따라 사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라 사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으로 인생의 목적을 변경하면 탐욕으로부터 해방되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 받고 인생의 목적이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삶으로 바꾸어진 사람들입니다.
그 모습이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성도들이 함께 사는 사도행전 교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47절까지를 읽어 보겠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4장 32-3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도록 변화된 인생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영적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모이기를 힘썼으며 물건을 통용하고 서로의 부족함과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눈에 보이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삶의 현장에 나가 고난받는 이웃의 삶에 동참하였습니다. 봉사와 구제와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교회 안에 친교의 미덕은 세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 친교를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 삶에 목마른 사람들은 살맛나는 교회 공동체에 날마다 합류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주일은 홀로 쉬는 날이 아니라 함께 모여 각자 부여된 재능으로 열심히 선을 위해 섬기는 날이 되었습니다. 로드니 스타크 교수는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을 통해 교회가 당시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후 40년 로마제국의 기독교인들은 불과 1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그후 300년 동안 기독교는 매년 40%의 성장을 거듭하면서 신자가 3천 3백만 명으로 늘어났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인구가 5천 6백만 명이었답니다. 그는 기독교가 그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한 원인 중의 하나를 애착관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애착 관계 네트워크 규모 확장”이라는 것입니다. 교리를 보며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대인 애착관계를 통하여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적인 애착관계 네트워크가 넓게 형성되어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적인 애착관계 네트워크가 급속히 확산된 이유 중의 하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가 당시 이교도들에게 '신비한 멋과 매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후 165년에서 180년까지 로마제국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역병이 돌았답니다. 이때 로마제국의 인구 중 1/12, 5백만 명이 사망했고, 어떤 때에는 하루에 5000명이 죽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답니다. 그런데 이 기간 기독교인들의 생존율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 높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돌보는 데 정성을 다했고, 특별히 병자들을 위해 희생적인 노력을 기울였답니다. 주후 251년에도 또 다른 전염병이 돌아 도시가 텅 빌 정도가 되었을 때 비 기독교인들은 전염병자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자신의 생명만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정반대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헌신을 다했답니다. 전염병이 자신에게도 전파되어 죽어갔지만, 이교도들을 도우며 행복하고 평화롭게 이 세상을 떠나갔답니다. 이런 기독교인을 보며 주변 사람들은 크게 감동했고 인종이나 성별, 신분을 초월한 이 애착관계 공동체는 급한 속도로 넓게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위기로 인하여 대인적 애착관계를 유실한 이교도가 기독교인과의 새로운 애착관계로 대체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커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추우면 따뜻한 곳에 더욱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추울 때 추운 곳에 계속 머물고 싶은 사람이 없고 미움과 시기와 비교와 분쟁, 자랑과 이기심이 가득한 곳에 가고 싶은 사람도, 머물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1서 3:18)”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5-17)”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7. 우리 성도님들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까? 그저 아무 목적 없이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모든 물건은 다 목적이 있어 만들어졌습니다. 스마트 폰도 목적이 있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 앉아 있는 의자도 목적이 있고 피아노도 목적이 있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모든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목적이 있어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님과 저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아무런 목적 없이 우연히 존재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을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사야 43장 7절에서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내가 그를 지었고, 그를 만들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과 저는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일을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를 해도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 돈을 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출세를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공해도 실패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명예를 얻고 권력을 얻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삶이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삶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 영광을 위한 삶으로 하나님을 반역하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같이 되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하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예인 인간들은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노예가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유리 방황하는 인생으로 전락되었습니다. 영적 죽음, 죄의 속박, 인생의 목적 상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등 인생은 결핍과 고통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헛되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4장 18절에서는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허망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2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인간들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목적을 가지고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허무를 극복하며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느날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요한복음 10장 10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 주시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단 12:3)"라고 했습니다.
장자옥씨의 <마지막 남은 생명>이란 글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두명의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 어느 군 형무소에 두 사람의 사형수가 있었답니다. 한 사람은 전방에서 총기를 난사하다가 민간인 몇 사람을 죽였고, 또 한 사람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분노를 참지 못해서 동료를 죽였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아 집행 날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 중 첫 번째 사람은 죽기 전에 고기를 실컷 먹고 싶었답니다. 그렇지만 돈도. 사식을 넣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결과 자기의 몸을 대학병원에 해부용으로 팔기로 하고 선금 10만 원을 받았답니다. 죽기 전에 실컷 먹고 싶었던 고기를 주문해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먹고 싶었던 고기지만 3만 원어치 이상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가 맛있게 먹고 있을 때 옆 친구가,“야. 그거 맛있겠구나.”하니까.“맛은 무슨 맛. 내 몸뚱이를 팔아서 먹는 고긴데”하면서 숙연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총재산이 15,000원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자기도 이것 가지고 먹을 것을 실컷 사 먹을까 궁리하다가. “마지막 남은 생명인데 무엇인가 좋은 일 한 가지는 하고 가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어느 교회 성가대가 위문차 왔습니다. 함께 오신 전도사님께 “무엇인가 좋은 일에 사용해주십시오”하며 15,000원을 건네드렸습니다. 이 돈을 받은 전도사님은 '어떤 좋은 일에 쓸까' 궁리하다가, 마침 그 교도소 교회당을 새로 짓고 헌당을 하게 되어 부족한 돈을 더해서 아담한 강대상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헌당식 날 그 사연이 알려지면서 뭇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수에서 감형되어서 무기징역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유언의 말씀으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증인이란 "확신을 가지고 이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증인이란 행동으로써 말하는 것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죄로부터 해방하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주게 하고 함께 인류를 행복하게 살게 만드는 근원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가 성령충만하니까 삼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행2:41). 5천명이 회개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3:6).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가야할 곳이 어디이니까? 우리의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자식입니까? 우리가 가야할 온 유대는 어디입니까? 친척입니까? 친구입니까? 직장 동료입니까? 우리가 가야할 사마리아와 땅끝은 어디입니까? 나를 미워하는 자입니까? 천대받고 가난과 질병에 죽어가는 자입니까? 장애인입니까? 최빈국입니까?
남은 인생 무엇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겠습니까?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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