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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하나님(10) 분열 성향을 변화시키는 성령님(엡4:1-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3076 추천수:2 218.147.218.173
2024-11-03 14:58:38

성령 하나님(10) 분열 성향을 변화시키는 성령님

4:1-3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요한 신학적인 논제를 두고 다섯 명의 신학자가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답니다. 논쟁이 끝날 즈음 사회자가 방청석에 질문이 있는지를 묻자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질문했답니다. "도대체 하나의 성경을 두고, 이렇게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여기 모인 다섯 분의 신학자들의 견해가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논쟁에 참여했던 한 신학자가 웃으면서 말했답니다. "다섯 명 중 네 명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야 의견이 하나로 통일될 겁니다." 인간은 죄악 가운데 출생했기 때문에 분열 성향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특별한 성향이 있습니다. 성향은 한 사람의 성격, 태도, 가치관, 그리고 행동 방식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로,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내향적과 외향적 성향, 감정 중심과 논리 중심 성향, 계획적 성향과 즉흥적 성향, 창의적 성향과 실용적 성향, 모험적 성향과 안정적 성향, 사교적 성향과 비사교적 성향, 권위적 성향과 자율적 성향 등 다양합니다. 이런 성향은 사람의 고유한 유전자가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듯이 다 다릅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분열 성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세계적 암 전문의' 김의신 박사는 세계 최고 암 치료기관인 미 MD앤더슨 암센터에서 32년간 종신교수로 일하면서 미국 최고의 의사11차례나 선정되었는데 미국에 살면서 7번이나 다른 교회를 다녔답니다. 한국인 교회와 미국인 교회를 동시에 다녔는데 미국인 교회는 한 번도 분열되어 갈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자신이 다녔던 한국인 교회는 7교회가 예외없이 분열되어 나누어졌답니다. 분열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흑백논리, 감정의 급격한 변화, 일관성 부족, 과도한 민감성, 친밀한 관계에서의 어려움 등으로 하나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분열 성향에서 벗어나기 힘드가를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은 이런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우리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바로 적응하고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우리에 넣어보았다. 그들은 얼마간의 적응기간을 거친후에 친구가 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침례교인과 장노교인 그리고 천주교인을 한우리에 집어 넣어보았다. 그들은 바로 싸움을 시작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격렬한 싸움을 하는 것을 보았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분열 성향을 가진 인간관계의 위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이 춥다고 느낄수록 따뜻함을 위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나 우리는 가까워질수록 자기 안에 감추어둔 가시로 서로에게 예리한 상처를 입히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춥고 추운 겨울의 고독 속에서 각자 외롭게 죽어간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분열 성향을 우리 성령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1.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분열 성향을 어떻게 변화시켜 주십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분열 성향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분열적이고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성향을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인내, 자비, 선함, 신실, 온유, 절제를 통해 우리의 성향이 변화시켜 주십니다. 분열 성향이 강한 사람을 통합 성향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를 머리로 우리가 지체 된 것을 깨닫게 만들고 유기적인 공동체로 지체 의식을 가지고 살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화평케 하여 둘을 하나로 만들어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게 만들어 줍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해 버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였다는 사실을 믿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원수가 아니고 남남이 아니고 동일한 시민, 하나님의 가족,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는 것을 믿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하면 분열 성향에서 변화되어 하나가 되어 화목과 화평을 누리며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나된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주시기 위해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매는 줄은 성도들을 서로 묶어 주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입니다(3:14). 내가 어떤 조건에 의해 하나된 것이 아닙니다. 나와 뜻이 맞아서, 내 말을 잘 들어 주어서, 나와 이해타산이 맞아서 하나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 되게 하셨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믿도록 성령의 세례를 부어 주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고향이 같고, 이해 타산이 같고, 피부 색이 같고, 말이 같고, 같은 학교, 같은 지역 출신, 같은 또래, 같은 취미, 같은 경제 수준이기 때문에 하나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4-6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하나입니다. 몇 번이 나옵니까? 일곱 번이 나옵니다. 7이 완전수이기 때문에 일부러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그렇게 기록하게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를 어떻게 분류하고 있습니까? 4-5절에서는 세 개씩 짝지어져 있고 마지막 7번째는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6절에는 만유를 4번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개씩 짝지은 것은 어떻게 배열하여 있습니까? 처음 세 개는 성령께 대한 것이고, 다음 세 개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고, 마지막은 성부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는 교회의 지체로써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분 안에 있는 단일성 즉 세분이 일체이시다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을 지상에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성령의 사역에 의해 나타나는 통일성이 우리의 하나됨의 근거이고 이유입니다(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몸이 하나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지체들이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무엇입니까? 내가 전부라는 생각입니다. 나만 중요하고 내가 느끼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 내가 하는 말이 전부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위대하고 신비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임을 말씀합니다.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 전체가 이루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손이 눈을 눈이 손을 발이 입을 나는 네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부분은 다른 부분과 상호 의존 관계가 있습니다. 몸속에는 독립된 개체가 없습니다.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과 관계에서만 그 의미와 존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한 지체가 불구가 되면 몸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한 지체도 필요 없는 지체가 없습니다. 중요시 되지 않는 지체가 없습니다. 지체끼리 경쟁하는 몸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체끼리 서로 경쟁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업신여긴다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구조적으로 하나이고 필연적인 관계입니다.

무엇이 그 몸을 살아 있고 생명력 있는 유기적 조직체가 되도록하는 것입니까?

바로 그것은 성령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성령의 활동의 결과입니다. 교회를 만드시고 유지하시고 부흥케 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일로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교회 안에 역사하시며 교회의 통일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있는 타락, 부패, 바르지 못함, 왜곡된 지식, 뒤틀린 본성, 교만을 깨닫게 하고 책망하여 겸손하고 애통하며 회개하게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수선하고 페인트 칠하고 광택을 내는 일과 같은 그런 일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일을 합니다. 우리는 수선받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다시 만들어 집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연합시킵니다. 그토록 많은 분열과 차이와 오해가 있는 것은 대부분 부르심의 소망을 바라보지 못하는 데서 기인됩니다.

성자와 성자의 사역이 우리가 하나됨의 근거와 이유입니다(5).

이제 사도는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에 비추어 교회의 연합을 설명합니다.

주도 하나이요. 주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한분이시기 때문에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에 더해 서도 안되고 주님의 이름과 동등한 위치에 다른 이름을 두어서도 안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값으로 산 분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할 근거와 이유는 하나님이 하나이시다는 말씀입니다(6).

하나님은 한분 분이십니다. 만유의 아버지이시고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만유"란 넓게는 모든 사물 천지 만물 우주, 그 밖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좁게는 궁극적으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면 믿는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하나 되었으니 힘써 지켜야 합니다. '지킨다'는 말은 '감시한다. 굳게 지속한다. 보존한다.'라는 말입니다. 현재형 분사로 계속적으로 지키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연합하라거나 하나 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연합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3장까지 이미 말씀하였습니다. 4장부터 실제 신앙생활을 말씀하시면서 첫 번째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건강해지려면 온 교인들이 이미 하나가 된 것을 힘써서 보존하여야 합니다. 분열된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신분과 직분으로 계층화되어 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춤추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여자나 남자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전라도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충청도 사람이나, 강원도 사람이나, 경기도 사람이나 제주도 사람이나 다 하나가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을 다해 지켜야 합니다.

 

2. 그러면 이미 우리의 분열 성향을 변화시켜 주신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바퀴가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려면 4가지 살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오늘 성경을 네 가지 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1) 우리가 분열 성향에서 벗어나 하나 된 삶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겸손으로 해야 합니다.

분열 성향을 가진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흑백논리입니다. 자기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것입니다. 하얀 색과 검은 색 사이에는 수많은 색이 있는데 그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자기만이 옳다는 성향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만해져 버립니다. 오늘 말씀은 분열 성향을 성령 하나님이 변경시켜 주었으니 겸손하게 하나 됨을 위해 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겸손은 마음을 낮춘다는 말입니다. 자기 몸을 낮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만, 교만, 오만 자기주장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말합니다.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보잘 것 없는 자인데 은혜로 산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만, 교만, 오만 자기주장 만이 판을 치는 교회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가정, 회사, 사회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화목할 수 없습니다. 모든 불화 뒤에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든 것은 겸손이다."이라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겸손은 모든 미덕의 바구니"라고 했습니다. 지식도, 미모도, 명예도, 봉사도, 헌신도, 권력도, 돈도 겸손의 바구니에 담겨야 교회를 분열시키지 않고 하나 된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보존합니다. 예수님은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라고 했습니다. 2:2-8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왔습니다. 죽기까지 낮아지고 낮아졌습니다. 요한 복음 13장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사회적인 지위, 학문, 권력, 명예가 교회에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16:18)"라고 말씀합니다. 교만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암세포와 같습니다. 암세포가 있으면 몸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암세포는 여섯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가 증식 신호가 자체로 충분한 것입니다.

둘째는 항 증식 신호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머리의 지시를 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신앙생활 하려고 합니다. 누구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자신이 대장 노릇하여야 합니다.

셋째는 무제한 증식입니다.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만 높고 자신만 인정받고 자신만 최고라는 것입니다. 넷째가 세포자살 회피입니다. 마땅이 죽어야 할 때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때 내려놓아야 할 때 내려놓아야 하는데 끝까지 자아가 살아 있고 자존심이 살아 있습니다. 다섯째가 지속적 혈관 신생 여섯째가 조직 침투 전이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속한 몸을 죽여 버립니다. 교만도 똑같습니다. 동조 세력을 확대 재생산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대항하고 분열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교회를 무너뜨리고 자신도 망합니다. 모든 불화와 분열, 불평과 원망과 시기 뒤에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늘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교역자가 모자라고, 장로가 모자라고 이 교회가 모자라고 자기는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여자나 봉사자, 섬기는 자가 아니라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평가자, 심판자로 살아갑니다. 마치 자신이 검사나 된 것처럼 사탄이 즐기는 고발자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암세포처럼 이미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해 주신 교회를 병들게 해 버립니다.

한국 교회사에 자랑스러웠던 유명한 분 가운데 한분이 바로 조만식 장로님이십니다. 산정현교회 장로님이셨습니다. 그 교회 송창근 목사님 후임으로 주기철 목사님을 모시러 평양 문창교회를 갔습니다. 가서 주기철 목사님께 "우리 교회에서 목사님을 모시기로 당회가 결의하고 초빙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주기철 목사님이 "장로님, 장로님은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저희 교장 선생님이셨습니다. 교장 선생님 장로님 계신 데서 제가 어떻게 목회합니까? 못합니다" 그러니까 조만식 장로님이 무릎을 꿇고 "그때는 제가 교장이었고 지금은 장로입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 가시면 제가 잘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했답니다. 결국 주기철 목사님이 그 교회에 가서 섬기게 되었는데 어느날 예배 시간에 조만식 장로님이 예배 시간에 10분 늦게 왔답니다. 기도 당번인데 늦게 왔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마침 그것을 보았습니다. "조만식 장로님 거기에 서 계시죠" 장로님이 가방 들고, 중절모 들고, 구두 들고 들어 오다가 서 있으라고 하니까 그대로 서 있었답니다. 그것을 본 교인들은 예배 시간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답니다. '존경받고 나이 많은 장로님을 저렇게 무례하게 했으니 교회는 이제 큰 시험이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도 주기철 목사님은 거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강하게 설교를 마쳤답니다. 설교를 마친 다음에 "조 장로님 기도하시죠" 할 때 장로님이 기도하였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주의 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으니 용서하여 주소서" 그날 교인들은 다른 때보다 더 은혜가 충만했답니다.

 

2) 우리가 분열 성향에서 벗어나 하나 된 삶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온유해야 합니다.

분열 성향이 강한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는 감정의 급격한 변화입니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감정이 극단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가까운 친구에 대해 잠시 좋은 감정을 느꼈다가, 사소한 일이 생기면 실망감이 크게 나타나고 그 친구와의 관계를 끝내 버립니다. 너무나 강하여 부러지는 것입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한 없이 실은 것입니다. 부드러움, 온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왕의 마음처럼 강퍅한 것입니다. 싸우려고 하고 부딪치기를 잘 하는 것입니다. 물처럼 모든 것을 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했는데 신앙 생활하면서 하나 됨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온유(프라우스)"부드럽고 온화한 친절, 마음이 조급하지 아니하고 너그러운 상태, 경솔하지 아니하고 침착한 상태, 마음이 단기적이 아니라 여유 만만한 상태, 극단에 서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라틴어의 온유(mitis)"말에게 재갈을 먹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 말로 온유(아나바)"굽히다, 굴복한다, 혹은 절을 한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에 굴복해서 굽히는 게 아니고 스스로 굽히는 것입니다. 온유는 폭력과 잔인, 교만의 반대이며, 친절, 사랑, 겸손 등과 사촌간입니다. 강퍅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집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폭발하지 말아야 합니다. 속된 말로 설치지 말아야 합니다. 연약함은 아닙니다. 강한 자가 자기의 힘을 조절함으로써 지니게 되는 부드러운 성품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의 자세를 온유함으로 할 때 화목이 있습니다. 일치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겸손과 항상 동반해서 사용되는 덕입니다. 야생 짐승이 짐을 나르거나 밭을 가는 등의 일에 그 힘이 사용됐을 때 그것을 가리켜 "온유해졌다"고 말씀합니다. 온유하지 못하다는 것은 폭발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조정하는 힘이 없어질 때 우리는 폭발하고 맙니다. 그러면 하나 됨은 깨어지고 맙니다. 가정도 교회도 부부관계도 부자 관계도 온유를 잃고 폭발하면 깨어집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는 "모든 가능한, 모든 종류의 겸손과 온유,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든지"라는 말입니다. 주일 이든 평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잘 될 때나 못될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회의가 잘 진행될 때나 의견대립이 있을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사람을 상대하든, 어느 곳에 있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도 온유하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거북이는 거북이의 목을 강제로 뺄 수 있는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북이의 목을 빼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거북이를 따뜻한 화롯불 가까이에 놓아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센 바람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태양이 계속 빛과 열을 내리게 되면 나그네는 자연스럽게 외투를 벗게 됩니다온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나약하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드럽고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온유한 사람은 머저리같이 보이고 경쟁 사회에서 도태될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온유한 자가 승리합니다.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라고 했습니다. 사납고 힘센 짐승들이 세상을 다 차지할 것 같지만 기껏해야 험한 산을 차지할 뿐 온순한 짐승들이 넓은 평원을 차지합니다. 강한 이빨은 벌레도 잘먹지만 부드러운 혀는 쉽게 상하지 않습니다. 폭력과 칼로 세상을 정복하려 했던 나폴레옹, 히틀러, 뭇솔리니는 땅을 차지한 듯했으나 다 빼앗기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던 공산주의는 100년이 못되어 무너졌습니다. 무력으로 세계 최대의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원나라의 시조 징키스칸의 나라도 10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37:11)"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가 분열 성향에서 벗어나 하나 된 삶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분열 성향이 강한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가 일관성의 부족입니다. 분열 성향이 강한 사람은 그날그날의 감정에 따라 사람이나 상황을 평가하기 때문에, 일관성이 떨어지고 관계가 불안정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분열 성향을 변화시켜 주었으니 하나가 되어 공동체로 화평을 누리려면 일관성을 가지고 오래 참으라고 말씀합니다.

"화를 내지 않고 오래 동안 자제한다."하라는 말입니다. "오래 견딤"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내게 피해를 주는 사람에 대하여 용서하므로 견디는 마음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참아준다는 것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말을 참는 것입니다. 상처 주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지만 참는 것입니다. 말을 참지 못하면 말썽이 나서 관계가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성도가 할 말 다 하면 교회가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할 말을 참아야 직장이 조용해집니다. 할 말을 참아야 부부가 화평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오래 참음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참는 다는 것은 감정을 참는다는 것이고 참는다는 것을 행동을 참는 것입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6)"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백성들이 구경합니다. 관원들이 비웃습니다. 군인들이 희롱합니다. 신 포도주 주며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합니다. 함께 달린 강도가 비방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수모 고통을 당하였지만 오래 참았습니다. 끝까지 참았습니다. 참지 못하면 하나됨은 깨어지고 맙니다.

 

워치만 니의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국교회 성도 한분이 어느날 자기 논의 물이 자꾸 줄어드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옆에 있는 논 임자가 자기 논에서 물을 허락도 없이 자꾸 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최근에 교회 나오기 시작한 초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상대로 회복시켜 놓으면 그 이튿날 또다시 수로를 돌려놓는 것이었답니다. '이럴 수가 있나?' 분노가 생겼지만 그런 자기의 모습을 보고 안 되겠다 싶어 기도하면서 "주님, 저 사람이 틀리고, 내가 올바른 일을 하는데 왜 내 마음속에 평안이 없습니까?고 여쭈었다고 합니다. 계속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구했더니 "너는 올바른 일을 위해서만 살겠느냐? 그 이상으로 살 수는 없겠느냐?"는 음성을 들었답니다. 그래서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깨달음이 와서 이튿날은 일찍 일어나 자기 논의 수로를 이웃 논으로 돌려놓았더니 얼마 후 그가 찾아와서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인 이시군요, 저도 이제는 당신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 올바름의 노예가 되면 바래새인처럼 분리주의 자가 되시 쉽습니다. 분열 성향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올바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나가 참지 못하는 그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시고 화평케 하셨습니다. 나의 올바름 때문에 막힌 담을 허시기 위해 예수님은 그 수많은 수모와 고통을 당하시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의 올바름도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라는 말씀 앞에 무릎을 굻어야 합니다.

 

4) 우리가 분열 성향에서 벗어나 하나 된 삶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용납해야합니다.

분열 성향이 강한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가 과도한 민감성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쉽게 받아들입니다. 타인의 말이나 행동을 크게 오해하거나, 비판에 대해 과도하게 방어적으로 반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꾸어 주지 않으면 상대를 용납하지 못하고 원수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 직장인이 동료를 처음에 매우 좋아하며 이상적으로 바라보다가, 그 동료가 업무에서 작은 실수를 하면 "이 사람은 전혀 신뢰할 수 없어"라고 판단하고 배척해 버리는 것입니다. 남녀가 연애 초반에 상대방을 아주 이상적으로 보다가, 사소한 다툼이나 의견 차이가 생기면 갑자기 상대방이 전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느끼며 관계를 끝내버리는 것입니다. 친구가 약속에 늦으면 이 친구는 나를 전혀 존중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며 그 친구와 거리를 두고 연락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균형 잡힌 관점이 없고, 감정의 안정성 없으며, 타인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 폭이 너무 좁은 것입니다. 늘 타인을 예수님의 마음처럼 수용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시각으로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 생활하면서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풍성한 관계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셨는데 서로 용납함으로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용납이란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춰 바꾸려는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들임"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에 대하여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잘못한 사람에 대하여 책벌을 보류하는 태도입니다.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이해하다는 말은 영어로 'understand'입니다. 'under(아래) + stand(서다)' 아래 있는 것이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성령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자신이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럴 수 있냐고, 장로가 그럴 수 있냐고, 권사가 그럴 수 있냐고 집사가 그럴 수 있냐고 남편이 아내가 그럴 수 있냐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주님의 피 값으로 산 관계는 파괴되고 맙니다. 죄인들을 이해하려면 죄인들 속에 들어가야 되고, 병든 사람을 이해하려면 병든 사람 속에 들어가 그 심정을 이해해야 됩니다. 저쪽에서 짜증을 낼 때 '병들었으니까 짜증을 내겠지, 그 상황에서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라고 이해를 해야 넘어갑니다. 받아들입니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권사도, 아내도, 남편도, 부모도, 자식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가가의 보혈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습니다. 다윗같은 성군도 이웃집 여자를 간음하였고 살인 교사를 하였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마가 문제로 바나바와 다투었고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돈을 좋아하고 설교를 못하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완벽하면 왜 교회에 나옵니까? 왜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믿습니까? 35살 나이로 노벨 평화상을 받고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이며 미국 최고의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마틴 루터 킹같은 목사도 바람을 피웠습니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한 달에 25일 이상을 집에서 떠나 생활하다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FBI국장인 에드거 후버가 그를 몰락시키려고 도청을 하여 킹 목사의 아내 코레타에게 소포를 보냈을 때 그의 아내를 그것을 쓰레기 통에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탄 퀴리 부인도 유부남 제자랑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노벨상마저 타지 못할 뻔 했다고 합니다. 링컨도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지만 얼마나 많은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까? 록펠러는 어떻습니까? 세계 제일의 전설적인 부호였던 록펠러는 시카코 대학을 비롯해서 12개의 종합대학과 12개의 단과 대학 및 연구소를 지어 사회에 기증하고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불편한 진실은 있습니다. 탐욕스런 악덕 자본가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미국에 설교 잘 하시기로 유명한 찰스 스윈돌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주일날 설교 중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교통신호도 정확하게 지키십시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예배가 다 끝나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만 딴 생각을 하다가 빨간 불인데도 모르고 지나갔답니다. 아마 비판하기 좋아하는 성도들 같으면 시험들어 교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수삼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찍어 목사 추방운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교인들이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목사님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설교해 놓고 어겨 너무나 창피했답니다. 그래도 교인들을 쳐다보지고 않고 그냥 차를 몰아서 얼른 집으로 와 버렸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아까 어디에 차 가지고 지나가셨죠? 내일 우리 교인들이 목사님 만나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이튿날 점심시간에 목사님은 목에다 무얼 걸고 약속 장소에 나갔답니다. 거기에는 '나는 죄인이다'(I am guilty)라고 쓰여 있었답니다. 교인들은 막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환영했답니다. 교인들의 반응에 목사님은 갑자기 뒤를 돌아섰는데 뒤에는 또 다른 글이 걸려있었답니다. 거기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쓰여 있었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흠이 없고, 모순되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크리스천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인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을 저술한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 목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과거 어떤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1987년에 알려지자, 즉각 죄를 시인하고 대학생 선교 단체인 IVCF 총재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였습니다. 교회도 사임하였습니다. 설교, 강연, 집필, 방송 등도 모두 끊고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지도 팀의 인도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2-3년이 지난 후 이 팀은 맥도날드 목사님이 완전 회복되었다는 판정을 내렸고, 이후에 사역으로 복귀하였습니다. 맥도날드 목사도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 다시 담임 목사로 청빙 받아 갔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진정 겸손하고 영적인 목사가 되어서 죄에 넘어진 목회자들의 멘토가 되었고, 성적인 죄로 물의를 일으켰던 클린턴 대통령의 영적 상담자가 되어 회복을 돕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이 내 비위에 맞지 안는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바꾸려고 하는 일에 열심을 내다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집을 떠난 못된 탕자에게 "네 행동을 다 고치고 떳떳한 인간이 되어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탕자가 그 추한 모습 그대로 돌아 왔을 때 그를 받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처음부터 사도였습니까? 바울이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종으로 완전하였습니까? 용납이라는 말 앞에 무엇이 수식되어 있습니까?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욕하고 침 뱉고, 옆구리에 창을 박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조롱하는 자들을 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도 용서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라"(18:22)고 했습니다. 하나 되는 건강한 교회 생활을 하려면 용서해야 합니다.

오늘 2-3절 말씀을 큰 소리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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