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흔들린 때(12)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시편13:1-2
오늘은 온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는 주일인데 우리 어린이들은 임진왜란 하면 누구의 이름이 떠오릅니까? 아마 이순신 장군일 것입니다. 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일본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일본을 통일한 군사 지도자이자 정치 지도자입니다. 이 사람이 저지른 악행 중에는 기독교인의 박해입니다. 1597년 6명의 선교사와 20명의 신자를 십자가에 메달아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나기 전에 병으로 죽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고 대대적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녔다는 한 가지 이유로 펄펄 끓는 온천물에 던지는 고문을 가했고 처형했습니다. 신앙인을 잡아다가 예수님이나 마리아상을 밟는 행위인 ‘후미에’를 통하여 그것을 밟으면 살려주고 밟지 않으면 처형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님같으면 그런 상황을 당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 상을 땅에 놓고 밟으면 살고 밟지 않으면 목을 쳐 죽인다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과거 일제가 우리나라를 36년 동안 지배했을 때 우리나라에서 천황을 숭배하는 황국 식민을 만들려고 신사 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즉 천황에게 복종하는 백성을 만들려고 신사 참배를 강요했을 때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감옥에 끌려가 채찍질과 물고문, 온갖 폭력을 당하며 순교하였습니다. 만약 우리 성도님들이 그때 살았다면 신사 참배를 했겠습니까? 그때 신앙인들 대부분은 신사 참배를 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근 300년 동안 일본의 권력자들은 잔인하게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는데 화형을 시키기도 했고, 수장을 시키기도 했으며, 참수형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때 순교한 우찌보리라는 사람이 있는데 우찌보리가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5살짜리 아들을 포함해 일가족 4명과 기독교인 11명의 손가락을 잘라 추운 겨울 바다에 수장을 시키기도 했답니다. 손가락을 자른 이유는 수영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답니다. 17세기 일본에서 기독교인이 박해받을 때를 배경으로 나온 소설인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화로 나와 유튜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7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무참하게 고문을 당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참수를 당하고 바다에 십자가를 세워 달아 놓고 밀물과 썰물로 고문은 당하다가 무참하게 순교를 당합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로드리고 선교사는 왜 이 순간에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느냐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비참하게 순교 당하는 사람들의 현장에 내려와서 살려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면 악을 제거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왜 계속 악을 제거하지 않고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고 고통을 당하게 침묵하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면 모든 악의 존재를 알고 계실텐데 왜 선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도록 방치하고 침묵하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선하시면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기독교 신정론이라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다윗도 하나님의 침묵에 대하여 고통스럽게 탄식하며 부르짖습니다. 그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골리앗이 쳐들어왔을 때 어린 다윗이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맷돌을 가지고 나아가 골리앗을 쓰러뜨려 이스라엘 민족을 구한 사람입니다. 사울왕의 정신병을 고쳐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당시 최고 권력을 가진 사울 왕에게 시기, 질투를 당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겨나 10여 년 동안 광야에 도망 다녔고 여러 차례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며 목숨을 위협받을 때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개입하여 사울을 죽이든지, 사울의 마음을 바꾸던지 해야 할텐 데 극심한 고통 가운데 절규하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침묵하는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습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 시편 13편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편 22편 1절에서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지 아니하시고,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절규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신 것 같고, 하나님의 얼굴이 자신에게서 숨겨졌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하나님의 침묵의 강을 건널 때가 있습니다. 사업을 열심히 해 보려고 하는데 해도 해도 되지 않고 점점 더 어려워져 부도의 위기를 당합니다. 성실하게 신앙 생활하며 정직하게 살았는데 병에 걸려 계속 고통을 당합니다. 일 년도 아니고 5년 10년 계속됩니다. 신앙 생활하며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 편법을 저지르고 악하게 사는 사람들은 잘 먹고 잘사는데 신앙 생활하는 나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잘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윗같은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인생이 흔들려 침몰하지 않고 결국 그 침묵의 강을 건너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최고의 왕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삶이 흔들리지 않고 그 침묵을 강을 잘 건너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삶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침묵의 시기에 더 하나님께 나아가 탄식의 기도에서 그치지 말고 하나님의 침묵의 이유를 알기 위한 기도를 함으로 침묵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다윗은 10여 년 동안 이어지는 고통과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고 어떻게 합니까?
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때까지?("아드 아나)"라는 말이 4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어느 때까지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고통의 끝이 언제인지 몰라 탄식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그 끝, 즉 미래를 몰라 탄식하는 것입니다. 사망의 물결이 목까지 차올라 조금만 더 있으면 그 물에 잠기는 절박한 상황에 있는데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은 사람처럼 된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고통을 못본 체 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이 본인이 생각한 것보다 이해 못할 정도로 길어졌다는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주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숨었다는 것은 고통의 현장에 하나님이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기 때문에 탄식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신실하게 섬겨왔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이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는커녕 자신의 고통을 모른 체하고 일부러 멀리 숨어버리셨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오랜 고통 속에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면서 다윗의 마음에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마음속 깊은 곳에 번민과 근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종일토록은 하루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날마다 근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마음을 지배해 버립니다. 자신을 치는 불의한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원수들을 자신을 치며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예측할 때 지금 고난받는 자신은 잘못되고 불의한 자는 잘될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을 내려 원수들을 망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불의하 자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다윗보다 추앙받으며 인정받는 자리에 올라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여 잘먹고 잘 사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망과 탄식 기도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회의주의 자가 되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 버립니다.
오늘날 신앙인들도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하고, 질병에 걸려 죽고, 사업이 잘 되지 않고, 취업이 안되고, 사고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신앙적 회의를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거나 충격적으로 다가오면 신앙에서 떠나 무신론자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진화론을 쓴 다윈도 어릴 때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심장이 과도하게 뛰는 심계항진, 설사, 각종 피부 질환, 불면증 등에 시달렸습니다. 8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지극히 사랑했던 첫째 딸 애니가 10살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이런 일을 당하느냐고 신앙적 회의를 하고 하나님을 떠나거나 영적 침체에 빠집니다. 무신론자가 되던, 회의론자가 되던, 불가지론자가 되어 버립니다. 교회를 다니다가도 가나안 교인이 되어 버립니다.
무신론자 데이비드 흄도 어릴 때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보고 10대에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악을 막아내기 원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가? 그랬다면 하나님은 무력한 자이다. 막아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기 원하지 않았는가? 그랬다면 하나님은 악한 자이다. 하나님 막아내기 원했다고 막아낼 수 있었는가?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무신론자 슬라보예 지젝은 "모든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와 악의 존재 사이에 있는 괴리감에 직면하게 된다. 전능하고 선하신 신의 존재와 가스실에 죽은 수천 만명의 아이들 고통 사이에는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이 있지 않는가? 기독교가 말하는 전능하고 선하신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그것을 믿고 실천하는 개인들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는 무신론이며 그리스도는 괴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존재하는데 악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악이란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악이란 살인, 강간, 도덕질 등과 같은 도덕적 악과 지진 스나미 태풍과 같은 자연적 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항상 자유롭게 옳은 것만 선택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자연 재해가 일어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지 못했으니 무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존재하는데 악이 횡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지 않은 악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하신 데도 악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믿음 좋은 신앙인도 이런 일을 당하면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실존적 회의론에 빠지게 됩니다. 모세와 엘리야, 요나와 예레미야도 그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모세는 200만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이끈 민족지도자입니다. 홍해를 가른 사람입니다. 돌에서 물을 나게 한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 선지자를 물리친 사람입니다. 놀라운 기적은 나타낸 사람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 12만명을 회개시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여달라고 할 정도로 회의 주의와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말씀을 백성에게 전해도 듣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불의합니다. 과중한 사역으로, 강압적으로 떠밀려 사역을 했지만 괴로운 나날은 계속되고 사역의 열매는 없고 감옥에 저항에 부닥치고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고통 가운데 탄식하며 회의주의에 강에 빠져 죽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하나님에 대하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면모와 관련하여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하나님은 엘로힘을 번역한 말로 천지를 창조하시며 세상 모든 만물과 인간을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명칭입니다. 다윗은 우리 하나님이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다 아시고 자신의 일에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 개입하실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얼굴을 숨기신 것처럼 여겨졌던 하나님에 대하여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하사(하비타)"라는 말은 "열심히 바라보다. 주시하다. 주목하다."하다는 말입니다. "응답하시고(아나)"는 본래는 보다는 말입니다. 원수들의 핍박으로 고통받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자신을 살펴 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영원히 잊으신 것이 아니라면 나를 생각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얼굴을 더 이상 숨기지 마시고 내게 응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하이라)"라는 말은 "빛나다 빛을 비추다"라는 말로 일차적으로 질병과 슬픔으로 흐려진 자신의 눈을 밝게 해 달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역을 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숨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눈을 밝혀 하나님의 얼굴의 생명의 빛을 보게 해 달라"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눈을 떠 이 부조리한 상황을 이해하는 영적 통찰력을 달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두어진 영안을 밝히셔서 더 이상 좌절 가운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밝은 미래를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온갖 근심과 번민으로 자기 눈이 어두워졌다고 말할 만큼 힘든 다윗은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의인이 고난 받는 현장에서 마치 하나님이 침묵하고 악이 횡행하여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지 않는 것 같은 현장에서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힘 있게 신앙 생활하려면 그 상황을 정확히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고난을 보는 영적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는 피상적으로 보면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지 이유를 모릅니다. 왜 신앙 좋은 사람이고 할 일 많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천국에 먼저 가는지 이유를 모릅니다. "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지? 왜 야고보 사도가 순교를 당하여야 하는지? 왜 세례 요한이 참수형을 당하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도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인데 사업이 망하고 질병에 걸리며 사고를 당하는 지 이유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이 눈이 열리면 그 고난의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도 기도할 때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영안이 열려야 고난의 이유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조리한 이유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악인이 판을 치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도 하나님의 통치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다윗을 더 하나님께 가까이 하게 하고 더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그 고난의 과정을 거치게 한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깨닫습니다(욥38-42).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며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요셉은 13년 동안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세는 40년의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인내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각 개인에게 다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때로는 이스라엘 사람들 처럼 40년 동안 고난의 광야를 걷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8장을 통해 인생의 광야를 거치게 만든 이유를 명쾌하게 3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 낮추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신8:2)"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하면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사람은 겸손해지지 않습니다. 인간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답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잘되면 사람은 끝없이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교만이야 말로 인간의 최고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하면 그 때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아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구나! 인생이란 내 힘으로 살 수 없구나. 나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이구나" 광야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인간이 인간답게 되지 않습니다.
둘째 이유는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위해서입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광야 학교를 통하여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시킵니다. 약할 때 남의 말 듣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 야곱은 30여 년,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다윗은 17여년을 광야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인격자가 되었습니다. 365일 내내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만 계속된다면 대지는 사막으로 변해 버립니다. 구름도 끼고 바람도 불고 비도 와야 자연이 유지되듯이 고통이 있어야 행복도 진정으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낮추시고 훈련하여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8:16)"라고 말씀하십니다. 근본적으로 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부모들이 이빨 빼는 고통을 감수하고 아이들의 이빨을 빼주는 이유는 건강한 이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의인이 고난을 당할 때 왜 고난을 당하는 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원망도 하고 회피도 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에도 다 뜻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어야 깊은 바다 물고기도 산소가 부족하지 않아 살 수 있습니다. 천국 가면 분명하게 우리는 내가 당한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봄 여름이 있어야 가을에 열매도 맺는 것입니다. 바람이 있어야 비행기도 떠는 것이고 물이 있어야 배도 항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돌이 있어야 개울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고 레일이 구속인 것같지만 레일이 있어야 기차는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픔이 있어야 진주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큰 복이 무엇입니까? 천국의 복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복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신앙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성공을 못해도, 출세를 못해도, 부자가 안되어도, 승진을 못해도, 때로는 실패해도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다윗은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119:71)."
2.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삶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도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며 주의 구원을 기뻐하며 침묵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여기서 "사랑(헤세드)"는 "인자, 은총, 자비"라는 말로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말합니다. "의지한다"는 말은 "확실하다. 신뢰하다"는 말입니다. ‘의뢰하였사오니’에 해당하는 ‘바타흐티’는 완료 시제인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너무나 힘든 고통으로 인해 거의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의심할 정도까지 이르렀던 다윗이(1,2) 그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은 것은 그가 과거 이와 유사한 상황들에서 주의 구원을 받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는 여러 번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한 적이 있었는데,하나님은 그 때마다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그를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바타흐티’라는 완료 시제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이미 확고하게 결정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해 주었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확실하게 믿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믿고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신앙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명을 받았으면 그 사명 수많은 과정을 거치지만 반드시 우리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기도 응답되지 않았다고 포기하지 말고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약을 받은 후 약 17년 만에 이스라엘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난의 현장에 계시는 것입니다.
침묵이라는 소설에서 로드리고 신부도 잡혀 신문을 받게 되는데 교활한 일본인들은 '후미에'라는, 예수님상이 새겨진 동판을 나무판에 붙여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려 주는 고문을 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차마 그 '후미에'를 밟고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저주저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밝히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그러자 로드리고 신부는 통분합니다.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나는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침묵한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순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 왜 침묵합니까를 되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침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통의 현장에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사랑하사 그 모진 고문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침묵하셨는데 그 침묵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으로 사랑으로 우리도 흔들리지 않고 주의 구원을 기뻐하며 침묵의 강을 건너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말라기도 하나님의 침묵 앞에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였냐고 질문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런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기까지 사랑한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과 구원을 확실히 믿고 이기는 것입니다.
엘리 위젤은 나치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던 시대의 한 중앙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그는 15세 때 가족과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고, 부헨발트 수용소에서는 아버지가 독일군에게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알리고 내전과 인종 대학살 같은 인류의 처한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앞장섰다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그가 강제수용소에 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가 수용되어 있던 수용소에 발전소가 폭파되는 사건이 있었답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유대인 세 사람이 잡혀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졌답니다. 두 어른은 금방 죽었지만 가벼운 한 소년은 대롱대롱 매달린 채 30분 이상 몸부림쳤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수용자 중 한 사람이 외쳤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이때 비젤 박사는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릴 들었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바로 여기에 있지.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에 매달려 바동거리고 있지.’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의 대가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5절 하반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기뻐한다는 것은 미완료 시제로 기쁨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계속될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는 고난을 당할 때 마음이 근심과 번민으로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니까 주의 구원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나 돈이나 출세나 명예나 건강이나 성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그 구원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 미완료 시제로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구원의 기쁨을 계속 간직하겠다는 말입니다. 신약적 용어로 말하면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천국 백성으로 구원을 받았고 앞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아직 고통의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질병이 치유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 대적과 화해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가난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 합격하고 취업하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적 사랑에 근거하여 확고한 소망 가운데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선취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음도 고통도 질병도 갈등도 없는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 땅에서 보상과 능력과 축복만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 영원한 천국에서 같이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결국 훈련받고 가는 것이 이 땅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라고 노래했습니다.
3.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삶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은덕을 베푸실 여호와를 찬송함으로 침묵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여호와를 찬송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밝힙니다. 신앙의 결단과 의지입니다.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어떤 침묵 앞에서도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즉각적으로 구원은 받지 못했지만 그 하나님을 계속해서 자발적으로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결단과 선택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덕을 베풀어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완료시제로 사용하였는데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 앞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원망하고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다윗에게 일어난 현상은 세 가지입니다.
3절 하반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첫째, 자신이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자신만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마 다윗은 쫓겨 다니면서 어떤 질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이 질병으로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문제만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모든 일에 의욕이 없어집니다. 강박 장애가 생깁니다. 특정한 것을 반복적으로 생각합니다. 식욕도, 성취욕도, 출세욕도 다 잠이 들어 버립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늪에 빠지게 되면 믿음이 의미가 없어지고, 무력감에 사로잡힙니다. 왜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지 사명감을 잃어버리고 몸이 연약해져 잠만 자고 싶고 활력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집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이 없어집니다.
둘째는 원수들이 승리를 자랑하며 떠벌릴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정당하였다고 떠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지 않고 살도 잘 먹고 잘만 산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믿음이 흔들려 대적들이 고소하게 생각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오랜 기간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믿음이 흔들려 대적들이 기뻐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흔들립니다.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흔들립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적들이 그것을 비아냥 거리고 고소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두려움 때문에 배교하고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결단하고 찬송을 선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과가 어떻게 되든 하나님은 내게 은덕을 베풀어 주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고통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골이 깊으면 깊을수록 산은 높은 것입니다. 의를 행하면 주님 때문에 당한 고난은 결국 다 상급이 됩니다.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후대하시고 보상해 주시고, 은총을 주시고, 혜택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나를 관대하게 너그럽게 선하게 대해주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튀르키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독일인 틸만선교사가 성경과 기독교 관련 소책자를 배포했답니다. 46세인 세 아이들의 아버지인 틸만 선교사는 그 날도 출근하며 아내를 포옹하고 아이들을 안아 주면서 "안녕, 사랑한다!" 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답니다. 그는 튀르키예 목사와 한 사람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였답니다. 부활 주일에 5명의 청년이 이 성경공부에 구도자를 가장하고 참여하였답니다. 이들은 '타리캇' 즉 이슬람의 "신실한 신도"라 불리는 단체의 회원들인데 총과 부엌칼과 동아줄 그리고 수건들을 준비하여 알라에게 봉사하기 위해 성경공부에 찾아간 것입니다. 튀르키예 목사가 성경 한 장을 읽었을 때 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답니다. 세 사람의 손발을 의자에 묶었고 핸드폰으로 녹화하며 거의 3시간 동안이나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답니다. 틸만은 156번이나 칼에 찔렸고, 튀르키예 목사인 네자티는 99번 그리고 성도 우우르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찔렸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한 사람씩 손가락들을 절단하고 코와 귀와 입들을 도려냈답니다. 결국 참수를 하였답니다. 가까운 이웃 사무실들에서는 고함 소리와 신음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답니다. 결국 세 사람 모두 무참하게 순교당하였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가족들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터키에서 순교당한 틸만의 아내 수잔나는 TV 회견에서 그들을 용서해주었습니다. 복수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듯이 "오 하나님, 저들을 용서 하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눅23:34)"라고 했습니다. 그때 어떤 칼럼니스트는 "천명의 선교사들이 천년 동안 할 수 없었던 것을 그 한마디로 말했다"라고 신문에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통과 고난을 당할 때 왜 하나님은 침묵하는지 정확히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의 현장에서 은덕을 베푸실 여호와를 찬송할 결단과 선택은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고난과 고통 앞에서도 신앙 흔들리지 말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 사람과 현재만 보며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들어갈 미래의 세계를 보시기 바랍니다.
스티브 세인트가 쓴 '창끝(End of Spear)'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창끝'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었습니다.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와오다니(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사로 갔다 모두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살해되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영적 침체에 빠지고 신앙의 회의론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들은 결단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선택했습니다. 남편들의 뒤를 따라 아우카족에게 들어갔습니다. 자신들의 남편을 죽인 사람들은 정성껏 섬겼습니다. 추장을 비롯한 모든 아우카족들이 이들의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부인들이 본국으로 떠날 때에 아우카족 추장이 물었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십니까?"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벳이 말했습니다. "남편들은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들이 그들을 죽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우리는 남편들이 그렇게도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엘리엇 등을 창으로 찔렀던 5명의 아우카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답니다. 그 가운데 4명은 목사가, 한 명은 전도자가 되었답니다. 아우카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답니다. 5명의 아우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 살해된 5명 선교사 가운데 한 명인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삶이 흔들린 때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삶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탄식의 기도에서 그치지 말고 하나님의 침묵의 이유를 알기 위한 기도를 함으로 침묵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삶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도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며 주의 구원을 기뻐하며 침묵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삶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은덕을 베푸실 여호와를 찬송함을 선택함으로 침묵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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