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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원(9) 주님 한 분으로 만족케 하옵소서(시편16:1-1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679 추천수:6 112.168.96.218
2017-06-18 18:09:35

 

애원(9) 주님 한 분으로 만족케 하옵소서

시편16:1-11

 

가끔 아내가 핸드폰을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 찾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집 안에 있으면 전화번호를 누르면 핸드폰이 “나 여기 있어요” 라며 노래를 불러주니 쉽게 찾습니다. 심한 사람은 냉장고에 넣어놓고 찾는 사람도 있고, 핸드폰 들고 핸드폰이 어디 있는지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만난 집사님은 차를 가지고 나갔다가 그만 차를 가지고 나간 지를 깜박 잊고 차를 놓아두고 전철로 집에 왔다고 합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를 섬기시던 집사님인데 대학원을 나왔고 아직 50대 초반입니다. 이 말을 하며 아내는 가끔 핸드폰 차에 놓고 내리를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위로를 받은 것을 보았습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에서 지원했던 어떤 선교사님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내를 놓아두고 혼자 차를 몰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건망증이 심한 아내가 있었답니다. 하도 건망증이 심해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답니다. 의사 선생님이 “어디가 아파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어보자 아내가 “제가 건망증이 심해서 왔는데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의사가 “어느 정도 심하시나요?”라고 질문하자 아내가 “뭐가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내가 텔레비전 홈쇼핑을 보면 뭐든지 그럴듯한 것이 나타나면 주문을 한다고 합니다. 일단 사들이고 나면 잊어버린답니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집안에는 쓰지 않은 물건으로 가득 찼답니다. 참다못하여 이 문제로 어느 날 부부가 심각하게 다투었답니다. 남편이 “당신 것 모두 가지고 나가”라고 소리를 쳤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큰 가방을 쫙 열어 놓고 말했답니다. “다 필요 없어요. 이 가방에 하나만 넣고 갈래요. 당신 어서 가방 속으로 들어가세요.” 아내의 다가 남편 하나입니다. 이 아내가 아무리 건망증이 심해도 사랑하는 남편 한 분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아무리 영적 건망증이 심해도 주님 한 분 있으면 행복하고 만족하게 살 수 있다는 신앙 고백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없다고 해도 주님 한 분 만으로 행복하고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복음 찬양 가운데 “주님 한 분만으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한 번쯤 듣거나 불러보았을 것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해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능력이 되신 주, 나의 모든 삶 변화 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이 찬양처럼 정말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사람 다윗은 오늘 시편에서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입법, 사법, 행정권을 쥔 절대 군주로 40년을 통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한 것같습니까?

1절에 보면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주님께 피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위협으로부터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달라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듯이 자신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피한 것을 보면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무엇인가 큰 위협을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그 상황을 알 수 없지만 다윗은 장인인 사울에게 패해 도망자 신세로 살 때라면 목숨이 위태로울 때입니다.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수배자로 블레셋에 망명까지 했습니다. 압살롬이라는 자식의 반역으로 쫓겨났을 때이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 버렸을 때입니다. 질병에 걸려 있을 때라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심각한 상황에 쳐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다윗은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밖에(알)”는 전치사로 “외에”라는 뜻입니다. 나의 주님 외에는 나의 행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차도 있어야 하고, 가족도 있어야 하고, 명예도, 권력도, 실력도, 건강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들 아무것도 없어도 주님 한 분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 한 분으로 행복하게 산다고 하면 너무 세상물정 모르는 광신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 만 있으면 건강도, 부도, 명예도, 권력도, 가족도 다 필요없으니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된다고 이 세상 모든 것을 관심 갖지 말고 살라는 극단적인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다 목회자가 되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주어져도 행복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주어진다할지라고 주님을 떠나서는 나에게 행복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복'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말할 때, 선함이라는 단어와 같은 '토브'입니다. 이것은 “내가 가진 모든 선한 것은 다 주님께로 온 것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다윗의 고백은 야고보서에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오며,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 우리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듯이 사람이 참된 만족에 이르는 조건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채우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다윗이 처한 것처럼 오늘의 삶이 힘들고 지쳐있는 성도님들 계실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쓰리고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통 속의 청년들, '고'단한 장년들, 그리고 '고'독한 노년.> 경제 성장은 되었는데 오늘 이 시대는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시대입니다. 우리나라 청소년 만족도는 OECD 회원국 중에 꼴치에서 두 번째하고 합니다. 48개국을 조사해 보니까 47위라고 합니다. '세계 행복의 날'을 맞아 UN이 각국의 '행복도 순위'를 발표했는데 우리나라는 55위였습니다. 경제력은 세계 13-14위 되는 데 만족도나 행복도는 낮은 것입니다. 음악이 시끄럽다고 일하는 사람 밧줄을 잘라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 어려운 세상에서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비결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언제 끝나나 시계만 보지 말시고, 또 서론이 길이 설교 길겠구나 짐작하며 지루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말씀을 통해 찾아오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일어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우리는 왜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왜 다윗은 주님 한 분만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까? 본문에서 세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존귀한 자로 대접하며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비록 위협을 당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사는 성도들은 어떤 자입니까? 존귀한 자입니다. “존귀(아디르)”라는 말은 “고귀함, 영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마지막에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에 더없이 존귀한 자들입니다. 2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성도는 주님을 나의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 예수님의 핏값으로 의로운 신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간음죄도 짓고, 살인죄도 지었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거주할 집도 없이 수많은 세월을 목숨하나 건지기 위해 도망자 신세로 살기도 했습니다. 부귀영화를 다 잃어버리고 하루아침에 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어떻게 대접합니까? 존귀한 자로 대접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로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요즈음 국회에서 하는 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보십시오. 수십 년 전의 흠만 나타나도 자격이 없다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잡아 비참하게 짓밟아 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존귀한 자로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고 우리를 핏값으로 사서 왕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삼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 한 분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그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가난하여 월세를 살아도, 비록 지금 병이들어 고통 가운데 처했어도, 비록 늙고 병들어 돌보아 주는 이 없어도, 비록 취업을 못하고 결혼을 못했을 지라도 우리 성도는 존귀한 자입니다. 어떤 존귀한 자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는 존귀한 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산업과 잔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운동선수는 1인 기업입니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는 소유주이십니다. 주님 안에 부귀영화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것,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앞날도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산업은 자신이 몫으로 받은 것입니다. 잔은 다윗이 받아 누리게 될 신분과 지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보다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모시고 있게 때문에 하나님 한 분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에게 분깃을 주시고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도록 지켜 주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주시는 재산이나 지위, 성공 등 그것으로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주어질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혜택으로만 만족을 누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면 내 삶에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하나님 한 분으로 행복하며 만족하게 살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를 하면서도 행복하고 만족한 가운데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Because)라는 상대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가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만일’(If)이라는 조건적 신앙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라는 절대적 신앙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 황실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 동안 훈련을 받고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라고 합니다. 절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협박합니다. 그 때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업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지면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지금의 상황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주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줄로 재어 준 구역, 분배 받은 땅, 지금 내가 처한 상황입니다.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12 지파가 땅을 분배 받을 때 어떤 지파는 큰 땅을 차지합니다. 어떤 지파는 초원을 차지하는데 어떤 지파는 광야를 차지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 땅이 어떤 땅이든 그 땅을 아름다운 땅으로 받아들이며 만족하면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대안 동경을 통해 자꾸 불평과 원망을 하고 삽니다. 기차를 다고 시골에 가는 사람들은 들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를 보면서 행복을 느끼며 나도 한가한 농촌에서 평화롭게 저렇게 살아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땀 흘리면 농사짓는 농부는 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나도 언제 저렇게 기차를 타고 여행할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것을 대안 동경이라고 합니다. 다 남의 떡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행복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지금 내가 처함 삶의 자리를 아름답게 보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한 삶을 사는 신앙인은 돈 많이 벌지 못하는 내 남편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주름투성이고 건망증이 심해지는 아내이지만 지금 내 아내가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월세내고 사는 내 집이, 부족한 내 아들 딸이, 연봉 적은 내 직장이,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아도 내가 섬기는 내 교회가 아름다운 곳입니다.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자족한 삶을 말합니다.

평생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던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모신 삶 자체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초가삼간도 나는 만족하네 값진 재물도 내겐 없지만 내게 주어진 하늘나라에 가면 내겐 황금과 은만 있네 내게는 하늘 저 위에 집 있네 햇빛 비치고 찬란한 그곳 그 날이 오면 다시 방황치 않고 순 황금 길을 거닐겠네. 나 가난해도 외롭지 않네 천국길 가니 실망 없다네 나그네로서 면류관 쓰며 거문고 타는 천국 가네” 그래서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자녀가 내 교회가 내 직장이 내 나라가 실로 아릅답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2.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사는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다윗은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세 가지를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사는 존귀한 신앙인은 훈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이해 못할 상황이 다가온다해도 불평하고 원망하고 근심 걱정 가운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는 하나님이 그의 기업이 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훈계를 자신의 성찰할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밤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성찰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밤에는 자신을 성찰하면서 주께서 하신 말씀을 되뇌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알았습니다(시 19:7).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시 119:100)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사는 존귀한 신앙인은 믿음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요동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미동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무는 흔들리면서 거목이 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은 나무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무는 흔들려도 걸어서 다른 곳에 가지 않습니다. 나침반과 같은 것입니다. 나침반이 흔들리지만 다시 북쪽을 향합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영혼의 근육이 튼튼해 진 것입니다. 어려움을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생명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고난도 함께 받은 것입니다.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괴로움만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한다고 말하면서도 수많은 우상들 앞에서 흔들립니다. 돈의 우상, 명예의 우상, 자식의 우상, 권력의 우상, 건강의 우상, 쾌락의 우상, 평안함의 우상 등 수많은 우상들이 평생 동안 우리를 흔들어 댑니다. 그 때 그것을 하나님으로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 보아 앞서가지 않는다는 말도 되지만 다윗이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항상 동행한다는 말입니다. 위기를 당할 때나, 순탄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변함없이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내 우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이라는 번역이 빠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나의 오른 쪽에 계심으로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우편이라는 말은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최고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강력한 보호자로 실재 임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동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셋째는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사는 존귀한 신앙인은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동치 아니하겠다는 말의 부연설명입니다. 끝을 보십시오. “살리니”라고 말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것입니까? 마음이 기뻐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영도 즐겁게 살겠다는 말입니다. 육체도 안전히 살겠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왜냐하면 주께서 다윗의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고 멸망을 시키지 않을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미래적인 일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믿음의 눈으로 확신을 하는 것입니다. 위기를 극복해주고 죽음에서 거져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했는데 선취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직 보이지 안하고 아직 다가오지 않았지만 믿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해 주실 것을 믿고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어떻게 고백합니까?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생명의 길을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 앞에서 충만한 기쁨, 주의 오른쪽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천 년 후에 오실 메시아적 믿음이라고 신약 성경은 해석해 주시고 있습니다. 시편 16편을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메시아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25~28절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바로 설교했는데 이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행 2:25~28)."

사도 바울도 마찬 가지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행 13:34~35)."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 사도행전의 대표적인 사람 베드로와 바울이 동일하게 이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내용이 단순히 다윗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 2:29~31)." 다윗이 선취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행 13:36~37)"라고 말씀함으로써 이 구절은 다윗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육신은 죽어서 묻혔고 썩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 몸이 썩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구절들은 분명히 다윗의 메시아 예언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라고 약속을 들었습니다(삼하 7:12-13). 다윗은 희미하지만 그 말씀을 믿었고 성령님께서는 다윗의 시를 통해 우리에게 예수님이 확실하게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시편에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기고 했고, 또한 주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해서 증거하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1절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에게 "그렇다면 어찌해서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계속해서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시 110:1). "주(하나님)께서 내 주(그리스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주님은 시 110편에서 다윗 왕이 그리스도를 "주"(하나님)라고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마 22:41-45) 이 말은 다윗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16편 8-11절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1000년 전에 성령의 감동으로 다윗이 예언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힘들다고 합니다. 대부분 힘들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 때문입니다. 건강 때문입니다. 이 땅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만족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 천국에 들어가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 그 천국에서 영원히 살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님 한 분 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 행복과 만족의 대표적인 정서가 기쁨입니다. 기쁘게 살지 않으면 행복도 만족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감정은 중요합니다. 하버드 대학교 법대와 의대 교수인 다니엘 샤피로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감정을 흔들어라>에서 회사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사람들이 가장 고려하는 사항은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을 행복하고 만족하게 하는 감정은 기쁨입니다.

기쁨에는 느낌을 통한 기쁨이 있습니다. 오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기쁨입니다. 둘째는 성취를 통해서 얻는 기쁨입니다. 취업이 되고, 돈을 벌고, 결혼을 하는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기뻐합니다. 셋째는 베푸는 기쁨입니다. 자원 봉사를 할 때,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구제를 할 때처럼 자신의 것을 나눔을 통해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들은 조건적이고 제한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예수님 만나면 병으로 근심이 가득했던 가정에 기쁨이 임합니다. 자식의 질병으로 근심하는 아버지가 기쁨을 회복합니다. 불치병을 앓던 딸을 둔 어머니가 기쁨을 회복합니다. 삶의 회의에 빠진 자들이 기쁨을 회복합니다. 예수님 만나면 기쁨이 샘솟게 됩니다. 이 기쁨은 기쁨의 원천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기쁨입니다. 구원받은 기쁨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누렸던 기쁨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이 기쁨은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함을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주님 안에서 살면 기쁨이 가득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이유는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에는 신앙생활의 3대 원리가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무엇입니까?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선취적 믿음을 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살 수 있습니다. 기쁨은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입이 웃으면 얼굴이 웃고 얼굴이 웃으면 마음도 웃고 마음의 웃으면 세포가 웃고, 세포가 웃으면 인생이 웃습니다. 기쁨이 보약입니다.

 

“주님 한분 밖에는 아는 사람 없어요. 가슴 깊이 숨어있는 주를 사랑하는 맘 주님 한분 밖에는 기억하지 못해요 처음 주를 만난 그날 울며 고백하던 말 나는 행복해요 죄 사함 받았으니 아버지 품안에서 떠나 살기 싫어요. 나는 행복해요 사랑이 샘솟으니 이 세상 무엇이든 채우고도 남아요.” 이런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께 찬양하고, 어떤 경우도 흔들리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7.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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