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흔들린 때(8) 인생의 허무 앞에서
전도서2:11
제가 지난 금요일 [열린편지] “갈 곳을 잃은 배는 결국 난파됩니다”라는 글에서 인생을 압도하는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인생을 마감한 유명 작가 몇 분을 소개했습니다. 그 중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의 거장인 모파상를 소개했는데 그는 누구나가 부러워할 정도로 지중해에 요트가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이 있었으며, 파리에 호화 아파트가 있었으며 은행에는 그가 평생 쓰고도 남을 많은 돈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목숨은 구했지만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18개월 동안 고통으로 절규하다가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반복해서 했던 말이 적혔다고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허무감에 압도되면 모든 것을 내려 놓으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어쩌구니 없고 덧없고 헛되다고 생각되면 그저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어하고 심지어는 삶까지 포기하려고 합니다.
허무주의 자들은 철학적 이유로 삶에 본질적 의미나 목적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는 없다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는 목표나 의미가 결여되어 우울증과 같은 정신 건강의 문제로 발생합니다. 종교적 이유로는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가 단절될 때 영적 공허감으로 생깁니다.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목표 달성 후의 공허감, 상실 경험, 깊은 좌절감 등을 생깁니다. 삶의 목적을 상실할 때, 미래에 대한 불안과 사회적 변화에 대한 적응 실패, 관계의 불안정 등으로 허무감은 증폭됩니다. 외로움과 고립감, 자아 정체성의 혼란, 죽음에 대한 공포, 가치관의 상실, 삶이 힘겨울 때, 큰 실패를 맛보거나 믿는 사람에게 발등을 찍힐 때, 삶에 중요한 의미를 주었던 것이 갑자기 사라질 때 인생은 허무해집니다. 정리하면 인식론적으로 진짜 의미있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존재론적으로 실체를 붙잡을 수 었을 때, 의미론적으로 인생이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회의가 들 때, 허무감에 사로잡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전도서는 성경의 인물 솔로몬 왕이 허무감에 압도되었으나 허무의 늪에서 삶이 흔들지지 않고 어떻게 그 허무를 극복하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40년간 입법, 사법, 행정권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1장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헤벧 하벧림’은 ‘헛된 것들 중에 헛된 것’으로 헛됨을 최상급으로 강조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용구적인 표현입니다. 헛되다(헤벨)라는 말은 69번 나옵니다. 이 말은 수증기, 연기, 안개, 바람, 일시적, 덧없음, 헛됨, 무의미함, 부조리, 불합리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입김이나 안개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세상에 있는 것 중에 머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어떤 질문을 하면서 이렇게 인생은 헛되다고 허무주의 늪에 빠져 인생이 흔들리고 있습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남은 것이 무엇이냐는 뜻으로, 그렇게 평생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여 그 인생의 끝에 남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해 아래 33회)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말입니다. 해 아래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그리고 내세의 희망이 없는 차원에서 살아가는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삶이란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헛되다고 시작하여 12장 8절에서도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1:12-12:8절까지 삶의 허무한 양상들을 소개합니다.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 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 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
1. 자기 중심의 삶은 허무의 늪에 빠지게 만듭니다.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탐구하기 위해 솔로몬은 어떻게 합니까?
1) 오감을 통하여 자기 바깥세계(외적 세계)를 관찰합니다.(1:4-11, 자연 법칙과 질서)
해, 바람, 물 등의 운행을 지켜 봅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끊임 없이 움직이고 있으나(8)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한계 상황을 못 벗음). 어떤 가수의 절규처럼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의미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보세요. 다 지나가면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인식론적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이치를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허무한 것입니다.
2) 자기 바깥 세계에서 눈을 돌려 이성으로 자기 자신에게 향해 봅니다(1:12-18)
1장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그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려하며 그 속에서 살아야 할 삶의 원칙을 찾으려는 자신을 발견합니다(13). 그러나 이성에 비친 세계와 삶을 이해할 수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무능력 앞에(15) 삶의 원칙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마음의 고통만 더할 뿐 해결을 얻지 못하고 인간 지식의 한계에 부디치고 맙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17,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번뇌와 근심만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번뇌와 근심만 있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입니다. 의미론적으로 인간은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3) 삶 속에 뛰어 들어 실제 삶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 보려 합니다.(2장)
2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보자는 것입니다. 4절 이하를 보십시오. 자신을 위하여 집을 짖고 부귀영화를 누려봅니다. ①권세를 누려봅니다. 그는 왕으로 40년간 다스렸습니다. ②부귀 영화를 누려보았습니다. 솔로몬의 그릇은 다 금이엇고(왕상10:21) 은은 돌같이 흔하여(왕상10:27) 귀히 여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왕상10:27) ③지혜를 사용해 봅니다. 잠 3천(왕상4:32) 노래 천 다섯(왕상4:32) 초목(왕상4:33) 동물, 물고기에 통달하였습니다. ④ 쾌락을 즐겨 보았습니다. 1천명의 여인을(왕상11:3) 거느려보았습니다. 2장 10절을 보십시오. 눈과 마음에 원하는 일을 다 해봅니다.
그런데 결론은 무엇입니까? 2장 16-17절을 보십시오. 그의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을 최상의 삶도 죽음으로 종말을 고한다는 사실 앞에 허무해지고 맙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삶의 한계 앞에서 지식과 죽음의 한계 자신의 삶을 자기가 지배할 수 없는 능력의 한계 앞에서 삶이 무의미해져 버림을 느끼게 됩니다. 즉 세계와 나 자신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 것은 실패로 끝나 버립니다. 존재론적으로 인생은 무엇을 하든 손에 잡을 수 있는 실체가 없는 허무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리는데 뭐 그렇게 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 내세 없는 세상은 해 아래서는 지혜도(1:13-18; 2:12-17), 일도(2:18-23; 4:4-6), 쾌락도(2:1-2), 부도(2:3-11; 5:10-6:9), 권력, 재물, 장수도, 유한한 생명 앞에서 헛되다는 것입니다.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을 쓴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을 받고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우울증, 알코올 중독, 만성적인 신체적 고통 가운데 인생을 압도하는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미국 낭만주의 거두였던 에드거 앨런 포도 문학적 천재성은 인정받았으나 그의 삶은 허무과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 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할리우드 섹스 심벌' 마를린 먼로도 37세 젊은 나이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자살했고,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약물 과다복용으로 5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합니까? 의미있는 삶의 해결책을 발견합니다.
4) 눈을 돌려 세계 밖의 하나님께 향합니다.(신, 하나님, 초월자)
3장 11절 전반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만사를 그 때에 따라 아름답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사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속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 인생이란 인간들 만의 세상이 아니야 이것으로 끝나면 얼마나 허무한가? 이 세상이 우연히 되지는 않았을 것야 모든 것이 만든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 만든 분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24, 3:10, 3:11에서 만사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삶이 허무의 늪에서 탈출하여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세속과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른 신앙적 회의주의가 다가옵니다. 하나님을 만나 허무주의에서 탈출하자 독한 회의주의가 하나님 안에서 재미와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다가 옵니다.
2. 그러나 인격적인 하나님과 함께 살지 않는 세상 중심의 관점으로 사는 삶은 허무를 조금은 극복하지만 회의의 늪에 빠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지지 못하고 이 세상 중심으로 살면 역시 인생이란 허무한 것이 되고 맙니다.
1) 지식의 한계 앞에서 시종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3:11절하)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러나”가 붙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신이 자신과 세계 내의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에로 향하는 본능은 부여 받았으나 일의 시종을 깨달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삶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는 속수 무책이라는 것입니다. 5:19-8:15절까지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7: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2) 능력의 한계 앞에서 꼭두가시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3:14).
그러므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데(3:14) 자신이 행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냐?(3:9)는 것입니다. 8:16-11:10까지 그런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하는 이 세상이 왜 그렇게 불공평하며 불의와 부조리가 만연하느냐는 것입니다(3:16) 3장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고 악하고 불의한 사람이 잘먹고 잘사는 세상이 아니냐? 3:1-5:18절에 그런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재판에서 악, 권세자들의 학대 등이 나오고 있습니다.
3. 허무와 회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12:13-14)
미국 콜로라도주립대학의 심리학자 마이클 스티거 등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어디에서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스티거는 삶의 의미를 찾는 행동이 내가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인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의미감의 핵심은 내 삶이 중요하고 나란 존재가 덧없지 않다는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무감이 밀려올 때조차 여전히 내 삶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건강하고 행복하며 심지어 더 오래사는 경향을 보인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를 통해 사람이 해 아래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권세와 부귀와 지혜와 쾌락을 누려보았지만, 이 세상만 상정한다면 죽음 앞에서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는 시각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돌려 보지만 인간은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세상은 불공평과 부조리가 만연하며, 어떻게 살던 악인과 선인도 다 죽음이라는 종말로 끝나니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허무 앞에서 삶이 흔들리지 않고 의미와 재미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1) 인본주의 삶이 아니라 신본주의 삶을 삶으로 독한 허무 앞에서 삶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허무와 회의의 늪에서 벗어난 솔로몬의 결론적인 고백을 읽어보겠습니다. 12장 13절입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전혀 알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명령(계명),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원칙으로 주셔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만들었는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의 행복은 무엇인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가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어떤 것인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죽음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하나님이 알아야 할 것들은 다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시편 111: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 9:10)”
그 지혜의 근본이신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그 예수님을 믿으면 인생은 어떤 상황에서도 독한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를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임을 강조하며, 그분이 우리에게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속함이 되셨음을 가르칩니다.
골로새서 2장 2-3절에서는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를 완전히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세상 사람들이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고 오직 DNA 보존과 확산을 위한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인간을 의미와 가치를 잃어 버린 탐욕의 존재로 가치 절하를 시키며 죽으면 끝이다고 생각하며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 없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즐기며 살아가는 삶을 살 때 인생은 어떤 상황에서도 공허하지 않고 허무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니까 인생은 공허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생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삶을 살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사면 헛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삶이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입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먹고 마시며”라는 단어를 통해 이렇게 하나님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제 1부에서(1:2-2:26)에서 2장 24절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제 2부에서(3:1-5:20)에서 5장 1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제 3부에서( 6:1-8:15) 8장 15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그래서 전도서를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도입시(1:3-11)에서 모든 사람은 죽고 기억함이 없다고 말씀합니다(1:11). 종결시에서(12:1-7)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전도서 12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7절을 보십시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죽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2) 현세 중심이 아니라 내세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살 때 인생은 죽음을 끝난다는 허무의 늪 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현세로 다 끝난다고 생각하니까 어떤 것을 성취해도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닐까요? 불의한 자나 공의로운 자나 동일하게 대할까요? 세상 중심, 현세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하는 이 세상이 왜 그렇게 불공평하며 부의와 부조리가 만연하느냐고 허무와 회의에 빠지는 것입니다(3:16). “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고 악하고 불의한 사람이 잘먹고 잘사는 세상이 아니냐? 왜 믿는 사람이 사고를 당하고 병에 걸려 죽고 고통을 당하느냐?”라고 질문하며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생은 태어남과 죽음을 포함한 전도서에 나오는 스물여덟 사건들이 허무의 파편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과거에나 현재에나 세상만사를 경영하시는 줄 깨닫게 되면 삶은 허무나 지루함의 반복이 아니라 인생에 펼치시는 스물여덟 노고들은 은혜의 선물이고 내세 천국과 연결될 때 사명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지옥도 천국도 없으니 그저 즐기라고 말합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웃음>이라는 장편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은 프랑스인이 좋아하는 다리우스 워즈니악이 올림피아에서 공연 후 자신의 분장실에서 죽기 전 크게 웃다가 갑자기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웃음>에는 사람의 일생에 대하여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2세 때는 똥오줌 가리는 게 자랑거리였고, 3세 때는 이가 나는 게 자랑거리였으며, 12세 때는 친구들 있다는 게, 18세 때는 자동차 운전할 수 있다는 게, 20세 때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35세 때는 돈이 많은 게 자랑거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50세를 기점으로 자랑거리가 뒤집어 진다는 것입니다. 50세 때는 돈이 많이 있다는 게 자랑거리, 60세 때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70세 때는 자동차 운전할 수 있다는 게, 75세 때는 친구들이 남아 있다는 게, 80세 때는 이가 남아 있다는 게, 85세 때는 똥오줌을 가릴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이란 똥오줌 가리는 것 배워서 자랑스러워 하다가 사는 날 동안 똥오줌 내 손으로 가릴 수 있다는 걸 자랑하며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자랑하다 끝나는 것일까요? 지옥과 천국은 사람이 지어낸 동화에 불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동물이나 식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로마서 1:19-20)" 사람마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우상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할 뿐입니다. 자기 우상, 물질 우상, 쾌락 우상, 권력 우상, 명예 우상, 자식 우상, 인간 우상 등 저마다 각종 우상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신의식, 신에 대한 인식, 또는 종교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나라나 어느 종교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이것을 보며 말하기를 천국과 지옥은 유한한 인간이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의 관념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말합니다. 신앙인 가운데서도 천국을 과학 이전에 미신적 사고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간적 천국은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한 거처가 집이나 방과 같은 물리적, 지리적 장소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흐려 놓습니다. 천국이 실존하는 세계임을 성경은 명백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천국과 지옥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지옥이라는 말이 22번 나오는데 예수님이 14번 사용하십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
예수님은 가르침의 시작할 때 "때가 찼고 천국(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1:15 cf. 마4:17)"라고 천국을 말씀했습니다. 예수의 지상 사역을 "예수께서 …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9:35)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가르치심, 천국 복음 전파, 치유(고치심)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간 사역도 천국입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인들이 너무나 천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전략입니다. 천국이 없다고 사탄은 메가폰을 들고 메스컴을 통해, 문화를 통해, 과학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인마저도 천국을 망각하고 살게 만들고 있습니다. 신학마저도 이 땅에 이루어야 하나님 나라를 강조함으로 죽어서 가는 천국을 무시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C. S. 루이스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이토록 무기력해진 이유는 그들이 내세에 대한 생각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천국을 목표로 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게 될 테지만 세상을 목표로 하면 둘 다 잃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서에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 나라라는 말이 113번 나오는데 예수님이 72번 사용하십니다. 우선 천국은 어떤 장소적 개념의 거할 곳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리는 것도 이 땅에 실제하는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이 미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하여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장 21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질 새하늘과 새땅도 실재하는 천국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천국을 누리며 미래에 다가 올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허무주의의 늪에 빠질 수 없습니다.
3) 악인이나 선인이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세의 결산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 불공정과 부조리 한 세상이 만들어내는 허무의 늪 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던 관계없이 악인이나 의인은 똑같은 종말을 맺는다고 사고의 늪에 빠지니까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3:18-19). 죽고 나면 모두가 끝이고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무렇게나 사나 죽으면 다 끝나 버리니까 삶은 의미 없고 허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독한 허무에 빠지면 죽으면 어떻게 살았든 다 끝인데 ‘이렇게 사는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지?’,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생이 다 헛것일 뿐이라면 대체 이 모든 수고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미친 짓 아닌가!’ 등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꼭두 가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하게 살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은 선악 간에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서 평가를 반든다는 것입니다. 결산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가나 결산은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 천국에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니느웨는 니느웨일 따름입니다. 바벨론은 바벨론이 따름입니다. 한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쓸 따름입니다. 집을 지을 때 집 주위로 부목을 대어 벽돌을 쌓지만 집이 완성되면 다 허는 것입니다. 어렵게 신앙생활, 가정 생활, 사회생활, 성가대, 교사, 구역장,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이 헛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간에 은밀한 중에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이 세상 중심으로 아무렇게난 살지 말고 마지막 평가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과연 인간은 꼭두각시일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인간과 인격적 교제를 가지고 가지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인간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로버트에 불과하다”며 “인간이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허무에 빠지는 것입니다.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결코 존재론적으로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 삶 속에 실천하는데 참된 의미과 재미가 있는 것입입니다.
예수믿으며 시어머니를 위해 봉사하고, 남편과 아내, 자식과 부모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억울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일이지만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힘들고 고달푼 인생을 살아 갈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날이 있다는 것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은밀한 것까지 심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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