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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흔들릴 때(3) 죽음 앞에서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72228 추천수:2 218.155.63.46
2024-06-16 03:05:33

삶이 흔들릴 때(3) 죽음 앞에서

20:22-24

 

사람에게 가장 공평하게 다가오는 것은 죽음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여자나 남자나 권력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미남이나 추남이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예외 없이 죽음은 다가 옵니다. 죽음에 대하여 분명히 아는 것은 첫째, 사람의 평등으로 누구나 죽는 다는 점이고 둘째는 시간의 평등으로 우리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장소의 평등으로 우리는 어디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점이고 마지막 넷째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다가 오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려고 하고 피하려고 하며 극복하려고 하지만 죽음을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거꾸로 매달아도 사는 세상이 낫다','죽어 석잔 술이 살아 한잔 술만 못하다' 등과 같은 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 집중하고 현세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인간 성장 발달의 마지막 단계이고 누구나 피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고 미리 그때를 알 수도 없습니다. 지나친 삶의 집착은 죽음의 공포를 가져다 줍니다. 죽음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혐오, 죽음에 대한 기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대단한 의지력을 가지고 살던 사람도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죽음 앞에서 삶이 흔들려 휘청거리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20세기를 풍미하던 대표적 지성의 한사람으로 그의 무신론적 사상은 복음주의에 도전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는데 큰역할을 했습니다. 사르트르는 심지어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기도했습니다. 사르트르는 평소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존재를 결정한다. 인간은 신과 상관 없이 존재한다. 인간은, 자기가 죽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인지하는 것이 죽음이고, 죽음과 그 뒤에 대해서는 인간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일종의 사건에 불과한 죽음으로부터 인간은 자유로워야 한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무신론적 자유를 외치던 그가 정작 자신의 죽음 앞에서 심한 공포로 인한 발작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 아내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19803월 폐수종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보인 그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프랑스 정부가 그의 명성을 고려하여 노출을 막을 정도로 심한 것이었답니다. 한달 후 그가 75세 나이로 사망하자 신문들은 사르트르는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그토록 비참했던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대서특필했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이런 내용의 글을 투고했답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죽어서 가야할 곳,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죽음 후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죽음은 파멸이며 끝이었습니다. 인생은 웰빙(well-being)도 중요하지만 웰다잉(well-dying)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잘 살다 잘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우리도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각자 주어진 사명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앞에 놓고 어떤 자세를 취합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죽음 앞에서 평생 사명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겠다고 말씀합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데는 자기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기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대부분 죽지 않고 오래 오래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평소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무시하려고 하고 피하며 삽니다. 사람은 죽음에 대하여 부정하거나 인정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는데 현대인들은 죽음에 관하여 완전히 무시하고 사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라고 말합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과 죽음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저 죽도로 일하면서 화폐를 모으고 그 화폐로 죽기 전에 죽도록 다쓰고 즐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죽음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죽음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살려고 해도 죽음은 우리를 무시하지 않고 언젠가는 찾아 옵니다. 어느 날 젊은 날 불치의 병으로 찾아 올 수 있고, 사고를 통해 찾아 올 수 있으며, 노년에 질병을 통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죽음이 눈 앞에 보이면 그 때 사람들은 흔들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평생 연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책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말기 환자들 2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막상 죽음이 앞에 다가오면 5단계의 정신 상태를 거처가더라는 것입니다. 1단계: 부정과 고립입니다. “검사가 잘못 된 건 아닐까? 의사가 실수 하는 건 아닐까?”라고 의심하고 다른 병원에 가서 다시 한 번 검사하고 확인하고 심한 경우에는 모든 의사들이 다 짜고 나를 골탕 먹이려 한다고 생각하고, 치료를 거부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고 합니다. 2단계는 분노한다고 합니다. “왜 하필 나야?”라는 생각에 분노와 원망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내가 이런 병에 걸린 건 너희 때문이야라고 가족이나 사회에 적의를 드러내기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신앙을 떠나 버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3단계는 협상한다고 합니다. “이번 한번만 하나님이 고쳐 주시면 착하게 살겠어요라는 식으로 무신론자가 종교에 귀의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4단계는 우울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효과 없이 계속 진행되는 병세를 보면서 심한 우울감에 빠진다고 합니다. 이 우울에는 반응성 우울과 준비성 우울이 나타난답니다. 반응성 우울은 자기가 죽으면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걱정으로 발생하는 과거의 상실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고 준비성 우울은 친구나 가족 애인이나 소중한 물건들을 잃는다는 다가올 상실 때문에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생각에 치료를 중간에 포기하기도 하고, 남겨질 가족들이나, 일들을 걱정하면서 우울증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5단계는 수용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겪은 후에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게 되고, 할 수 있는 일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마지막까지 노력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담담하게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를 겪는 것은 죽음을 끝으로 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을 전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실되는 것, 잃어버리는 것을 너무나 귀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죽음을 통해, 육신의 고통과 고난을 통해 더 많은 것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려 바울처럼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하며 사명을 붙들고 인생의 마지막 경주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은 한 과정이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후에 있는 영원한 내세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디모데 후서 46-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우리 성도님은 이런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소멸이 아닙니다. 리처드 도킨슨은 죽음을 자연선택의 일환이며 생명의 순환이라고 말하며 죽음이 이후의 삶을 바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무신론자 히친스는 죽음 이후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의식과 경험이 끝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신경과학자 샘 해리스는 죽음은 뇌의 활동이 멈추는 순간이고 죽음 이후에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에 이미와 목적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죽음은 컴퓨터가 고장나듯이 뇌의 활동이 멈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들의 말대로 소멸이고 끝이라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이 땅의 삶은 얼마나 불공평하고 모순됩니까? 죽음이란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주더라도 피해야 할 것이고, 죽음은 거부하고 부정하고 도피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근원일 것입니다. 과학자라도 다 죽음을 끝이라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앤서니 프루는 20세기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였지만 그는 "나는 이 우주가 자연적 과정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원인의 원인을 물어보면 어떻게 원인자 없이 우주가 스스로 존재했겠습니까?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는 책임자였던 프랜시스 콜린스도 무신론자였지만 "과학과 신앙은 양립할 수 있다. 나는 과학이 신의 창조를 이해하는 도구라고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무신론자였으나 죽음을 앞두고 신앙을 갖게 된 많은 사람들은 주로 개인적인 경험, 과학적 발견, 그리고 영적 체험 등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죽음 앞에서 두려움 없이 평안히 천국을 사모하며 이 땅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은 죄로 말미암은 단절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싹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영적 죽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육적 죽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지옥에 가는 것을 영원적 죽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진짜 우리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영원적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영원히 지옥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이를 두려워하라(마태복음 10:28)"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0:14-15절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의대 정신의학과 신경 행동과학 명예교수로 40년 동안 1천 여명의 임사체험자를 연구한 브루스 그레이슨 박사가 <애프터 라이프>라는 책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는 미국정신의학회에서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석학회원으로 선출된 정통 의학자로서 전공 분야 의학 연구로 여러 차례 중요한 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책에 의하면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현격하게 삶이 변화된다고 합니다. 임사 체험을 한 사람들은 예전 방식대로 살지 않고 두려움을 줄어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는 체험자 많다고 합니다. 10여 년 동안 1300여 명의 임사체험자를 조사한 미국의 종양학 전문의 제프리 롱 박사는 그의 저서 <죽음 그 후>에서 임사체험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의식이 몸 밖으로 나오는 유체이탈 체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바라보며 인생을 새로운 관점으로 살아갔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죽음이 심판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습니다.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두렵고 떠리고 죽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지옥에 들어가는 관문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삶이 끝나면 그 후 또 다른 영생의 삶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25:46)"라고 예수님은 말씀해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이 사실을 믿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임사 체험을 하는 사람들처럼 죽음 후의 세계를 실제 경험해 보았습니다. 고린도 후서 122-4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죽음 후의 삶에 대하여 직접 경험을 한 바울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권력이나 물질, 명예, 지식, 가족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신 복음 전함의 사명보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붙들고 살아갔습니다.

 

바울을 아끼는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아가보라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되어 이방인에게 넘겨 줄 것이라고 예루살렘에 제발 올라가지 말라고 애원합니다. 그 때 바울은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사도행전 21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런 바울에게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해 주십니까?

사도행전 23:11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다시 죽음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23:11)”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사명이 예루살렘에서 마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까지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명을 이루기까지는 죽지 않은 것이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사명을 다 마칠 때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던 바울은 썩거나 녹슬지 않고 닳아 없어지는 삶을 걸으며 이렇게 고백하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우리도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각자 주어진 사명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이빗 리빙스턴은 신학과 의학을 공부해 27세 때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문명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아프리카 29,000마일을 여행하며, 아프리카의 선교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여러 차례 풍토병에 시달려야 했고, 적대적인 원주민들에게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했으며 사자에게 왼쪽 어깨를 물려 크게 부상을 입기도 했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리빙스턴이 결국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리빙스턴은 사명자는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말했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죽음 앞에서 고문을 합니다. 회유를 합니다. 조롱하고 모멸을 가합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마지막 생명까지 빼앗기 위해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창으로 찌릅니다. 예수님을 공포에 시달리며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인류 구원사역을 다 완수하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면서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죽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이 땅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서이지 항상 죽음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죽음 앞에 흔들리지 말고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사명을 붙들고 끝까지 완주하고 주님 앞에 설 때 잘 했다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2. 우리도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성령에 이끌림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2-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은 죽음 앞에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여기서 매여라는 말은 묶다. 속박당하다라는 말입니다. 문법적으로는 완료 수동태 분사로 바울의 마음이 이미 성령님께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했다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이미 여러 성에서 체포당함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뜻에 따라 죽음 앞에 당당히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사명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려면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죽음 앞에서도 불안과 공포의 노예가 아니라 용기와 평안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후 늘 두 마음이 내면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원입니다.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7:19)”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라고 고백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어서 516-17절에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삶을 보십시오.

인디옥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 목사로 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그때 어떻게 합니까? 사도행전 13:2-4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성령님을 따릅니다. 사도행전 166-10절을 찾아 보십시오. 바울은 소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십시오. 성령님이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로 갑니다. 성령으로 인도를 받아야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고 성령의 사역이 이루어지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14)"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담대하게 죽음의 과정을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책에는 죽음 앞에서 죽음의 두려움으로 신앙을 떠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사단의 좋아하는 사람으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쌓는 것은 어렵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다윗 그렇게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살았지만 여인의 몸을 바로보는 시선하나도 그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수많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무너뜨리는 것은 폭탄 한 가지 있으면 아무리 높은 집도 순신간에 무너집니다. 나무 한 그루 거목이 되려면 많은 시간과 수많은 변수가 조합되어 세워집니다. 그러나 그것 무너뜨리는 것은 톱 한자루 있으면 됩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쉽게 무너집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70대 나이로 천국에 갔습니다. 뉴욕에서 리디머 교회를 개척하여 기독교 인재를 양성하며 세계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여러 책을 썼고 <죽음에 관하여>라는 책을출간할 무렵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평생동안 죽음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며 상담한 목사이지만 죽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답니다. 갑자기 닥친 죽음에 대한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목사님과 사모님은 많은 시간 눈물 속에서 보내었다고 합니다. 둘 다 일흔을 지나고 있었지만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말짱했답니다. 그래서 지난 오십 년간 해오던 사역을 앞으로도 계속 할 수 있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답니다. 여전히 많은 계획이 있었고 또한 자녀와 손주라는 큰 기쁨이 있었답니다. 병이라는 건, ‘내가 정말로 엄청 늙었구나라고 스스로 느낄 때나 찾아오는 불청객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아직은 아니지. 아니, 이건 말이 안 되지. 하나님, 지금 나한테 뭘 하시는 건가요?” 시편에 나오는 감정 표현처럼 주님, 왜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오 주님, 일어나십시오. 왜 주무십니까?” “오 주님? 나를 영원히 잊으신 겁니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죽음 앞에서, 그것도 자기가 생각하기에 부당한 이유로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믿음이 흔들리거나 또는 아예 믿음을 잃어버리는 기독교인들을 적지 않게 목격했답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상황을 만나자 신앙이 자동적인 위안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답니다.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자동적인 위로와 실존적인 능력을 제공하지는 않았답니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관한 합리적이고 또 의식적인 인정에도 불구하고 불치병 진단은 당장 내 속에서 무척이나 강력한 심리적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답니다. “뭐라고? 말도 안 돼, 난 죽을 수 없어. 이건 다른 사람들한테나 생기는 일이지 나한테는 아니야.” 이런 터무니 없는 말을 소리내서 말했을 때, 목사님은 바로 이 착각이야말로 그때까지 내 마음 속에서 나를 움직이던 실질적인 작동 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답니다. 존 칼빈(John Calvin)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머물 것처럼 일을 벌이면서 살고 있다. 죽은 시체를 볼 때면 아주 잠시 덧없는 삶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하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우리 마음은 다시금 내 자신의 영속성이라는 생각으로 고정된다.”라고 말한 것처럼 기술적인 측면에서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현실 속에서 죽음은 여전히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었답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나마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가정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를 생각했답니다. 삶은 다 내 중심으로 잘 돌아가야 하고, 이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죽음 앞에 서기까지는 부활도 사실 상당 부분 이론적인 문제에 불과했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시편 기자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한 것처럼 말씀 속에 빠져 들어 하나님을 만났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단지 내가 믿고 한 켠에 제껴두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나를 지탱하는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믿고 매일 기도했답니다. “오늘 밤 잠이 들고 내일 아침 당신의 은혜로 인해 눈을 뜰 때 내게 기쁨을 주는 생생한 사실에 사로잡히게 하소서. 그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또한 나의 의를 위해 다시 부활하셨기에 내게도 최종적인 부활이 임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했답니다. 죽음 앞에서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만들려고 노력할수록, 이 세상 속에서 평안함과 안정을 더 뿌리내리려고 노력할수록 그 천국을 오히려 더 누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을수록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물위에 뜬 태양과 꽃병 속의 꽃 한 송이에서도 이전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답니다. 하나님이라는 실재가 내 마음을 더 많이 채울수록, 비록 느리고 고통스럽고 또 많은 눈물이 따라왔지만, 이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단순한 기쁨이 내 하루하루를 채우는 행복의 원천이 되어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채우면 채울수록 하나님이 주시는 위안과 평안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달콤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고통이나 욕심이 우리의 마음의 지배하는 삶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면 죽음 앞에서도 순교할 수 있고 죽음 앞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순교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찬양하며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지도자 폴리갑은 155223일로 추정되는 서머나 전체 시민의 10-20%에 달하는 약 2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머나의 스타디움에서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처형을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재판정에서 고문과 죽음을 당하기 보다는 개심하라고 권고를 받았답니다. 그 때 그는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나를 한 번도 저 버린 일이 없다.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라고 응답하였답니다. 재판관이 그를 산채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했을 때 재판관이 붙인 불은 순간적이지만 지옥의 불은 영원하다.”고 대답하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111년 사자에게 뜯어 먹힌 이그나티우스는 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만 된다면 화형이나 십자가나 사나운 짐승의 공격도 참고 견딜 것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저스틴 마터는 165, 참수형을 받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귀중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퍼피튜아는 202, 투기장에서 찟겨 순교할 때 형제자매들에게 전해주세요. 믿음 안에 굳게 서고, 서로 사랑하라고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당당하고 평안하게 그 죽음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3. 우리도 죽음 앞에서 아름다운 이별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죽음을 앞에 놓고 마지막 이별을 합니다. 이별은 늘 아픈 것입니다. 이별하면서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36-3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함께 무릎꿇고 기도합니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않고 입을 맞춥니다.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하리라고 전송합니다. 우리의 죽음도 이렇게 끝난다면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요양원에 들어가 쓸쓸히 홀로 주는 것보다 온 가족과 일가 친천 친지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하고 임종 예배를 드리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며 떠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죽음일 것입니다.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책에 보면 저자 퀴블러 로스가 어릴 때 경험했던 어느 농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그 농부는 살 가망이 없었답니다. 그는 집에서 죽는 것만을 원했고 그의 요구는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졌답니다. 그는 딸들을 침대 머리맡으로 불러 각각 몇 분씩 대화를 나누었답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차분하게 준비했고 자신의 물건들과 땅을 분배했답니다. , 그의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재산을 분배하지 말 것을 당부했답니다. 그는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그가 해왔던 일과 여러 가지 책임들을 자식들이 나누어 해줄 것을 요구했답니다. 친구들에게도 집으로 한 번 더 찾아와달라고 부탁했고 그들과 일일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답니다. 그는 당시 어린아이였던 나와 내 형제자매들까지도 불렀답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의 가족과 함께 슬픔을 나눌 수 있었답니다. 마침내 눈을 감는 순간, 그는 자신이 손수 지은 집에서 친구와 친지 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보금자리, 오랫동안 살아온 그곳에서 꽃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모두가 지켜보았답니다. 그러면세 현대의 장례식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코미디 전방대 사회를 보신 코미디계의 대부격인 김경태 장로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은 죽음 앞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나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셨으니 오늘 내가 죽는 것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최선의 사건이다"라고 감사히 받아들였답니다. 그래서 본인이 장례식 순서를 다 짜고, 누가 설교하고, 누가 무엇을 하고, 절대 상복은 입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는 연예인이었기에 옷이 많았답니다.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옷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옷들을 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주라하고, 그 중 제일 낡은 옷을 자기한테 입혀달라고, 그것을 입고 가겠다고 했답니다. 부인이 그건 안 된다고,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니까 장로님은 웃으면서 그러면 나더러 벌거벗고 가라는 말이냐고 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하나 기도하고 마지막으로 목사인 사위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숨이 차서는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하다가 돌아가셨답니다

 

바울은 이제 죽음으로 만날 수 없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무슨 유언을 남깁니까?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에베소서에서 사역했습니까? 바울의 인격이 겸손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감성이 풍부한 눈물의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편견 없이 성도가 유익한 것은 담대하게 회개와 믿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아름다운 인격 4가지를 발견합니다. 겸손, 긍휼, 신앙의 지조, 편견없는 공평을 발견합니다. 인격적인 면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들을 향해 유언적으로 무엇을 부탁합니까?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먼저 조심스럽게 행동하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자신부터 살피고 성도들을 잘 돌보라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소홀한 사람은 양떼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결코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로 성령에 의하여 그 임무가 위탁되었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교회는 주님의 피값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1-35절을 통하여 자신의 사역 방식을 기억하고 본받아 사역할 것을 부탁합니다. 삼년을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가르쳤음을 기억하라고 합니다(31). 탐욕없이 가르친 자신의 삶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33-35).

우리는 본문에서 세가지 삶의 유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파괴적인 삶의 유형입니다. 가는 곳마다 파괴합니다. 이단들이 들어와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든 파괴만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이기적인 삶의 유형입니다. 장로 중에 일부가 자신을 쫓으라하고 자신의 말로 가르칩니다. 무엇이든 자신의 이기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의 유형입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 편지로 빛으로 소금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이 땅을 떠나면서 자식들에게 아는 사람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겠습니까? 냄새를 남기겠습니까? 향기를 남기겠습니까?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이 땅에 있는 것 다 내려 놓고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흔적은 남습니다. 그것이 넓게 남을 수도 있고 좁게 남을 수도 있습니다. 짧게 남을 수도 있고 길게 남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그 정도와 길이와 상관 없이 바울 만큼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우리로 말미암아 조금은 하나님이 원하는 세상이 되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누구에게나 다 어느날 예고 없이 죽음을 공평하게 찾아 옵니다. 어떤 삶의 방식으로 결산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각자 주어진 사명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성령에 이끌림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죽음 앞에서 아름다운 이별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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