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를 넘어 확신으로(12)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 있다고?
하박국3:18
요즈음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고유가 등으로 사람들이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보다 심각한 건은 정신 건강입니다. 제가 태어날 때는 우리 나라는 세계 최빈국에 속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풍요로운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습니다.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라는 책에 의하면 세계인을 100명으로 축약하여 생각하면 마을에 사는 사람들 100명 중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들어 있고 집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 안에 드는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가용을 소유한 자는 100명 중 7명 안에 드는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 중 1명은 대학 교육을 받았고 2명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엔 옷을 걸쳤고, 머리 위로는 지붕이 있어 잠잘 곳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75%의 사람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더 심각한 문제는 경제보다 정신 건강의 위기입니다. 성장은 했지만 성숙은 아직 미숙합니다. 어린이 같은 어른을 여기 저기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자살율은 OECD 회원국 중 근 20년 째 1위입니다(2016,17년 제외). 2022년 대한민국의 자살 사망자 수는 12,906명이었습니다. 이는 하루 평균 35.4명, 즉, 2시간마다 3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10-30대 청소년 죽음 원인 1위기 자살입니다. 65세 이상 노인 자살율 인구 10만 명당 48.6명으로, 전체 인구 자살률 26.9명보다 훨씬 높다고 합니다. 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 1위 수준입이라고 합니다. 나치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 내 자살률과 비슷한 수준보다 높다고 합니다. 여성 자살율은 OECD 평균의 3배나 된다고 합니다. 성인 37%가 우울증이나 우울 증상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불안장애, 공항장애, 불안 장애, 알코올 중독, 컴퓨터, 인터넷 중독 등 각종 중독에 정신이 병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1인 가구가 600만에 이르렀다고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고 고독사는 점점 늘어나 자살로 사망의 16.5-19.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외로움은 하루 15개의 담배를 피우는 것만큼 몸에 해롭다고도 합니다. 행복도는 OECD 38개국 중 35위로 최하위권에 속하고 우리 나라 아동과 청소년 87%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삶의 만족도도 OECD 꼴치 수준이라고 합니다. 이런 정신 건강의 위기는 개인이나 가족, 사회에 심각한 피래를 입히고 있습니다. 심장질환, 뇌졸중, 당뇨병 등 만성 신체질환의 위험을 증가시킵니다. 생산력이 저하되고 관계가 악화되어 각종 사회적 갈등과 범죄 증가 이루어집니다. 정신 건강을 위해 쓰는 비용은 OECD 평균 40%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건 예산의 1.9%밖에 쓰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 때 어마어마한 돈을 사용하였는데 3년 동안 코로나로 돌아가신 분보다 자살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은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살 예방을 위해서 일본은 한국의 18배 이상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일본은 영국처럼 외로움 장관을 세워 정신 건강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정신 건강 위기의 원인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요인으로 유전이나 뇌손상, 호르몬 변화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심리적 요인으로 스트레스, 외상 후 장애, 부정적 사고 방식, 낮은 자존감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 요인으로 빈곤, 사회적 고립, 차별, 폭력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환경적 요인으로 약물 남용, 수면 부족, 불건강한 식습관 등 다양한 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상실에 있습니다. 탈종교화된 사회일수록 정신 건강은 위기에 몰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부인해도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공허를 극복하고 참 만족한 삶을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 하나님과 함께 에덴 동산에 살면서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자 정신 건강의 위기기 찾아 온 것입니다. 외로운 것입니다. 불안한 것입니다. 상실의 뿌리가 있어 하나님이 아닌 무엇을 채워도 공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마음에서 추방시키면 모든 것을 상대화되고 절대 기준을 상실하기 때문에 인생은 만족을 모르고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이 고백처럼 뒤돌아 보면 헛되고 헛된 것뿐입니다. 참 만족과 행복과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니까 정신 건강의 위기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를 보십시오. 목사 집안에서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떠나 버립니다. 그전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살았던 인간들에게 신을 붙들지 말고 초인으로 거듭나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특별하다고 느끼는 자는 제 발로 정신병원에 가기 마련이다.”라고 했는데 1889년 1월 초 니체는 길거리에 쓰러졌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정신 착란 상태였습니다. 아무것도 붙들지 않으려고 하며 초인을 추구한 니체의 정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고 동생 집에서 미친 상태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히틀러를 보십시오. 어렸을 때 목사가 되고 싶어했고 교회에 들어가 강단에 서서 목사 흉내를 내며 설교하곤 했던 히틀러는 부활절이 되면 월급을 몽땅 털어 달걀을 사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권력의 노예가 되어 권력을 붙들고 유대인 600만을 학살하며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그는 1945년 4월 30일 권력의 상징인 권총으로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스탈린을 보십시오. 공산주의를 붙들고 살았던 스탈린도 한때 러시아 정교회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권 이후 기독교인들에 대한 숙청과 박해를 아예 제도화해 버렸습니다. 비밀경찰은 지하교회까지 샅샅이 색출해 수백만 명을 구금하였고, 신자들은 사형에 처해지거나 드넓은 시베리아 곳곳에 세워진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렇게 공산주의를 붙들고 편집증적 의심과 공포정치를 획책했던 그는 1953년 3월 1일 쓰러졌고 아무도 의사를 부르지 않았으며 반신 마비 상태로 4일을 앓다 인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기쁨을 잃어 버린 인간들에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리기 위해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기쁨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16:22)”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사실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600여전 전에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하박국이 살던 시대는 어떠했습니까?
하박국이 살던 시대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가 살던 세상은 어떠했을까요?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로 인하여 창자가 흔들렸고 내 입술이 떨었다고 했습니다.
무든 소리를 들었습니까? 1장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갈 대아 사람들이 쳐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 사람을 말합니다. 지금 말하면 북한이 처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경제 위기가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니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바벨론이 처들어 온다는 것입니까? 1장 2-4절을 보십시오. 하박국이 산 때는 이미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 남쪽 16대 유다 왕 요시아 통치 말년부터 18대 여호야김 시대까지입니다. 예레이먀와 동시대 선지자입니다. 이때의 왕은 유다 여호야김 왕 때입니다. 죄악, 패역, 겁탈, 강포, 변론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권력 있는 자의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학대, 압박과 착취, 파괴, 약탈, 살해 등이 있었습니다. ① 애굽 왕의 호의를 얻으려고 많은 은과 금을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 애굽에 바침으로 권력을 유지하였습니다.(왕하23:35) ② 왕하24:4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③ 자신의 사치스런 생활을 위하여 궁전을 크게 짖고 이 일을 위하여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였고 백성들을 압박하여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렘22:13, 14, 17) ④ (렘36:20, 23)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리를 화로에 던져 불태웠습니다. ⑤ 선지자 예레미야와 서기관 바룩을 잡아 없이 하려한 자였습니다.(렘36:26) 렘 22:17에 한마디로 "네 눈과 마음은 탐람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강포를 행하려 할뿐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최고 권력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유화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국민을 괴롭히고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악인들이 의인을 못살게 구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재판관은 바른 재판을 하지 못하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탈취하는 때였습니다.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보며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박국 선지자는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어떤 회의에 빠집니까?
하박국 1장 2-3절을 보십시오. 어느 때까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나님이 가만히 보고만 있냐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왜 악인을 징벌하지 않으십니까?(2-3)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어느 때까지 이렇게 악한 사람이 잘살고 의로운 사람이 고달프게 살아야 합니까?"하며 부르짖어 기도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장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너희 나라 사람을 다 치겠다고 하셨습니다.(6) 갈대아 사람은 신흥 바벨론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사납고 성급한 백성이며, 넓은 땅을 두루 다니며 침략하고 착취하는 자들이고(6) 그 힘으로 자기의 신으로 삼는 자들입니다(11). 그런데 이들이 이스라엘을 치겠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이러한 하나님의 답변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의혹은 더 깊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있어서 악한 세력이 사용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벨론을 통한 남유다의 심판은 원수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삼하 7 : 8-16)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2. 그들이 쳐들어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1) 생존권이 위협받습니다.
①과일나무가 시들고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 이는 그들의 양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성치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마실 것을 줌으로 그들을 기쁘게 해 주었던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기름을 버터와 같이 사용하는 감람나무도 그 소출을 내지 않아 그들이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하고 실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② 밀의 소산을 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밭에 소산이 없을 것입니다.
③ 가축이 멸절될 것입니다.-먹을 것 없어 혹은 약탈로 가축이 없을 것입니다.
(2) 생명에 위협을 받습니다.
그래서 지금 선지자의 창자는 흔들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깊은 내심의 불안과 동요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선지자의 입술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이 제대로 안되는 고통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선지자의 뼈가 썩어지는 아픔을 느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있는 상황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어떤 질문을 하나님께 드립니까?
1장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더 악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치는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1장 17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3. 우리는 무엇으로 인하여 기뻐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로 인하여 하박국은 기뻐합니다. 18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비록 전쟁의 위협이 있다할 지라도, 경제 불황으로 먹을 식량이 없다 할지라도, 선한 사람이 어렵게 살고 악한 사람이 잘 살아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할지라도, 비록 나에게 건강도, 물질도, 아파트도, 실력도, 다른 사람의 호감을 받을 만한 미모도, 그럴듯한 인격도, 오늘 먹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오직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다는 고백 참으로 위대한 고백입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 여호와 안에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하박국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조국의 장래를 환경과 국제 정세, 인간에게 돌리지 않고 여호와 안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을 믿지 않고, 밭에 소출이나, 가축 떼들을 믿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시대와 환경에도 영원히 변하지 안으시고 참 기쁨을 주시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4. 우리가 회의에 빠질 수 밖에 없은 환경 속에서도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1) 하나님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온갖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세상 만물이 변한다하여도 늘 내 곁에 계셔서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갈대아인이 쳐들어와 모든 것을 약탈해 가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입니까? 1장 13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더러운 자들을 들어 쓰십니까?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거짓된’이라는 말은 신실함이 없는 자, 악을 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왜 이런 사람이 설치고 다니는데 가만히 놓아두고 악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 침묵하냐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바벨론 나라가 언제 쳐들어오는가 보기위해 성루에 망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자신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실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때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2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2:2)"
하나님께서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불만만 제기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묵시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남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해 잠시 바벨론을 들어 사용하실 뿐 바벨론도 결국 그들의 죄악대로 심판받아 반드시 멸망할 것이고 결국 의인의 종국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2:1-20) 억울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화있을 진저(9,12,15,19)라고 선포합니다. 그들은 잠시 유다를 징계하는 몽둥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다섯가지의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탐욕(5-8), 불의한 이득(9-11), 피흘림(12-14), 협박(15-17), 우상숭배(18-20) 등으로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날이 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억울함을 당합니다. 불의한 일을 당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억울함을 당합니까? 거래처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습니까?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라는 말을 달고 살고 있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언제나 정의로운 사회가 옵니까? 언제 좋은 세상이 옵니까? 언제 선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이 옵니까? 언제 악인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됩니까? 라고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 보았지만 그런 세상 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의혹을 품는 것입니다. 이런 하박국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은 다시 말씀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합 2:3)"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정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한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때입니다.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하여 의혹을 품고 회의하며 방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더디게 보일 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징계 받을 세상,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세상, 좋은 세상, 공의가 실현되는 세상,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질 세상을 더디 온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다리지 못하여 실패했습니다. 모세도 때를 기다리지 못해 살인자가 되어 실패했습니다. 야곱도 기다리지 못하여 수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아간도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전략품을 훔치다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롭다하면서 의혹을 품고 못 견디어 하는 하박국 선지자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불의한 시대에, 부조리한 시대에 의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와 의인을 대구로 놓고 말씀합니다. 그의 마음은 불의한 자, 정직하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교만과 믿음을 대구로 놓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정직하지 못한 악인은 그 교만으로 인하여 망할 것이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갈대인의 악한 자들은 망할 것을 말씀하고 유다 남은 자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을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의인된 자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10:37-38)" 근본적인 의미는 로마서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롬1:17, 갈3:11). 인간의 본질은 악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3절의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가 반드시 오실 것이요 그는 결코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누구겠습니까? 히브리서 10장 36-38절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오실 이가 누구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마3:11 요1:15,27,30 3:31 행1:25)
율법이나 도덕은 이 세상의 악을 절대로 고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과응보 원리의 노예가 아니십니다. 율법이나 도덕으로는 죽어다 깨어나도 이 세상의 악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해답니다. 오늘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교만하고 거짓된 악으로 가득 찬 바벨론과 같은 세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답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심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있어도 예수님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심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실현이 지체되는 듯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의인이 고통을 당하며 억압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잠간일 뿐이며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면 의인에게는 영원한 축복이, 악인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단12:1-3). 우리는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는 이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가 시행되는 그 날이 분명히 올 것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을 보며 “어찌하여, 왜”라는 질문을 수백 수천번 던져, 아니 평생 던져도 그곳에서는 기쁨이 없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을 붙들 때 참된 기쁨이 회복되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주시는 누구도 뺏아갈 수 없는 기쁨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고 있는 마게도니야 교회를 보십시오. 고후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시련과 환란이 있었습니다. 극한 가난이 있었습니다. 보통 가난이 아닙니다. 발바닥까지 내려앉은 가난입니다. 그런데도 넘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많은 환란, 극한 가난 속에 기대되는 것은 원망과 저주, 불평과 슬픔 탄식뿐일 터인데 그들은 기뻐하였습니다. 그것도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후 8:1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심이니라"
바울은 환란 가운데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고린도 후서 7장 4절을 보십시오.
"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우리는 일이 잘 되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응답되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가 잘되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질병에서 낳아 기뻐할 있습니다. 우리는 승진하여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돈을 벌어서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무엇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까? 눅10:2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나가 귀신들이 항복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이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오스트리아의 대 작곡가인 하이든(Haydn, Franz Joseph)에게 한 사람이 "당신의 미사곡은 어떻게 그렇듯 즐거운 감을 줍니까?"고 묻자, 하이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운 기분이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기쁨이 있습니까?
2) 여호와는 우리의 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힘'이란 '부', '능력', '강한 군대'란 뜻입니다. 전혀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지금 선지자는 침략자 바벨론 군대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리고 그 결과 그 땅이 황폐되어 생존의 여건이 끝나고 말 죽음의 비극을 보면서도, 반면에 '힘'이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힘이 되신 여호와가 궁극적으로 저들에게 승리를 안겨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면 모든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황금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황금이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황금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 황금의 위력이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황금이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를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다르리니 내가 황금의 위력 속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노래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이 어떤 사람은 권력이 어떤 사람은 명예가,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힘입니다. 능력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은 농작물이나 가축 떼처럼 없어질 무능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게 침략 당할 정도로 무능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란을 당할 때 끝까지 침묵하고 등 돌리는 무능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에 전혀 손을 쓰시지 못하는 무능력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개인이나 역사의 키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문제 해결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과 물질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이 임할 것입니다.
한나를 보십시오. 그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번민하였습니다.(삼상1:6) 울었습니다.(7) 마음이 괴롭고(10) 슬펐습니다.(15) 그는 무엇을 통하여 기쁨을 회복하였습니까?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켜주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상2:1을 보십시오.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에스더를 보십시오. 에스더 9장 22절 유대인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영원토록 슬픔으로 방치하시는 무능력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힘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진리를 안 사도들은 갖은 고난에서도 기뻐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기뻐할 만한 상황입니까? 그런데 왜 기뻐합니까?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응답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기 때문입니다. 약한 떼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울은 감옥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하나님은 우리의 힘입니다.
3)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승리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3장 19절 중에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높은 곳에 다닌"다는 말은 승리자가 서는 위치를 말합니다. 다는 말로 하면 세상을 내려다 보는 위치를 말합니다. 이 말씀의 직접적인 뜻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을 받아, 다시 시온의 땅,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구원의 승리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나의 높은 곳'이란 낮은 바벨론 포로에서 되돌아 온 '시온' '예루살렘' '가나안 선민의 땅'을 가리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얼굴이 비추는 곳이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등반과 같습니다. 죽음의 계속도 만나고 거친 암반과 산소 부족으로 고통당하는 죽음의 사각지대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정상에 이르도록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확장한다면 새로운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환란이 닥쳐와도 고난과 환란 그 자체만 보지 않습니다.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 보고 역사의 종국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다다를 천국의 기쁨, 영광을 바라봅니다.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면 기쁨이 살아지고 회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왜 어찌하여라는 질문만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왜나 어찌하여라는 답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을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성경 말씀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체험받을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갖은 고난 가운데서도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 여호와의 힘, 여호와의 승리를 보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님에게는 기쁨이 있습니까? 늘 주름잡힌 얼굴로 슬픈 마음으로 살아가십니까? 늘 우울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늘 불행의 노예가 되고 싶습니까? 기뻐하십시오. 갖가지 고난 가운데 처한 바울 사도는 빌 4:4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기뻐하지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은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함이니라"(요15:11)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없느니라"(요16:22)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왜,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 질문만 던지면 평생 회의 속에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과 함께 살면 평생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7-19절을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 고백으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4.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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