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를 넘어 확신으로(6) 세상에 수로 안 되는 일도 있다고?
사무엘상14:6
요즈음 국회의원 선거철이 되었습니다. 각 정당과 출마자들은 유권자의 수를 확보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쟁을 치열하게 치르고 있습니다. 유권자의 수를 확보하는 자들이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대학을 들어가는 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능에서 얼마나 많은 정답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수의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수의 화폐를 확보하느냐의 전쟁을 치르고 있고 그 전쟁에서 승라는 화폐 수에 달려 있습니다. 연예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느냐로 성공과 실패를 결정합니다. 전쟁도 결국 수의 전쟁입니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고 있는데 사상자 50만 명 육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두 나라는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 추가 모병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유럽이 개입하면 핵전쟁을 일으킨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그러자 독일이 핵무장을 하겠다고 합니다. 2023년 스웨덴 싱크탱크 스툭흘름 국제 평화 연구소 공개한 연감에 따르면 냉전 이후 핵무기 감축을 위한 세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2023년 기준 북한을 포함한 아홉 개 나라가 약 1만 2,500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도 현재까지 30기를 보유하고 있고 향후 50~70기의 핵탄두를 더 많들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북한 외에도 러시아와 중국 등 전 세계 총 핵탄두의 약 60퍼센트 가까이가 우리나라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우리는 지금 전 세계에서 핵탄두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닉 스켈론은 전쟁에 승리한데는 세 가지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가 SWAT(우세한 무기와 전략체계; Superior Weapons and Tactics System)였고 둘째가 높은 힘 대 공간 비율(수가 많은 사람 이김)이었으며 셋째가 강력한 방어위치였다고 합니다. 결국 전쟁을 이기려면 수의 우위가 있어야 합니다. 무기수의 수, 군인의 수, 경제력의 수, 전략의 수, 지원국의 수 등 수가 많아야 이기는 것입니다. 전략가들은 수적 우위는 3배가 되면 무난히 승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북한은 그 전략을 쓰고 있습니다. 110만명의 군인이 있습니다. 남한은 인구가 줄어 36만 쯤된다고 합니다. 계속 인구가 줄면 북한이 3배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국방 혁신 4.0을 통해 수적 열세와 핵에 의한 비대칭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미래 전략을 세우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울이 왕 2년에 일어난 블레셋과 전쟁은 수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 전쟁인데 수가 월등하게 적은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두 나라의 군대를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세요.
군인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블레셋 군인들은 얼마나 됩니까? 13장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이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보병이 해변의 모래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특수병력인 기병이 6천입니다. 지금 말하면 전차가 3만이니까 특수한 훈련을 받은 전차병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인들은 얼마나 됩니까? 13장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3천 명입니다.
무기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블레셋 군대는 전차가 3만입니다. 마병이 6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의 무기는 얼마나 됩니까? 13장 22절을 같이 읽겠습니까?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
왜 이렇게 전략 무기 전술 무기를 만들지 못했습니까? 경제력과 과학 기술이 부족해서일까요? 19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당시 철기 시대였는데 패권국인 블레셋이 신무기를 만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과학이 발전하지 못하고 기술자가 없는 것입니다. 전쟁은 과학과 기술을 접목한 신무기를 만든 사람들이 승리하게 되어 있는데 지금 핵보유국이 자신들만 핵을 보유하고 다른 나라는 핵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국가의 위상과 경쟁력은 대체로 경제적 부와 군사력에 의해 좌우되는 데 경제력과 군사력을 결정짓는 공통분모가 그 나라의 과학 기술의 힘입니다. 자연과 우주의 현상과 원리를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자연과학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응용을 목적으로 개발된 기술이 신무기를 만들어 내어 그 나라를 강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세계 최고의 패권국인 미국 연방정부는 미국은 예산을 크게 국방 예산과 비국방 예산으로 나눌 정도로 국방예산에 치중하고 국방 예산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1,000조가 넘는 천문학적인 돈을 국방비로 사용하며 그 중 60-70를 국방 연구 개발비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력도 부족하고 무기체계도 비교가 되지 않으면 전술이라고 좋아야 할 텐데, 전술은 어떻습니까?
블레셋의 전술을 보십시오. 13장 17-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노략꾼들이 세 대로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나와서 한 대는 오브라 길을 따라서 수알 땅에 이르렀고 한 대는 벧호론 길로 향하였고 한 대는 광야쪽으로 스보임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지역 길로 향하였더라” 뛰어난 전술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술은 어떠했습니까?
13장 3절을 보십시오.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쳤습니다. 아무런 대책없이 선제공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장 6-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9절을 보십시오. 다급하니까 왕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월권을 행하여 사무엘이 드려야 할 제사를 자신이 드립니다. 권력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남은 백성이 얼마나 됩니까? 1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남은 백성이 6백명 가량이 됩니다.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수적으로 이 전쟁은 100전 100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마감하였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약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이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는 성경에 나오는 전쟁을 단순한 물리적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라를 위한 언약 전쟁, 혹은 거룩한 전쟁, 성전, 영적 전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성전을 영적인 방법으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고전14:8; 고후10:3; 딤전1:18-19). 우리의 투쟁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질서가 파괴된 우주를 지배하는 악마의 세력들이고(엡6:10-12) 우리의 무기는 인간들을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영적인 무기입니다(고후10:4; 엡6:13-17) 우리의 기본적인 전쟁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죄에 대한 싸움입니다. 물리적 전쟁은 국가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지 교회의 차원에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물리적 영적 전쟁은 권력에 대한 욕심과 욕망으로 시작되며 악마의 세력들이 현재의 세상 질서에 죄와 죽음을 가져다 주는 도구들 중의 하나입니다(약4:1-2).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 세속적 가치관과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성과 진실성과 화해성, 하나님 나라의 의를 해치는 거대한 세속적 가치관과 싸우고 있습니다. 다원주의, 다윈주의, 과학주의, 배금주의, 인본주의, 유물주의 등과 같은 거대한 물결 앞에서 우리는 수적 열세를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수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언약 전쟁, 영적 전쟁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1. 전쟁의 승리는 인간과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승리해야 합니다.
언약 전쟁의 실제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사울 왕은 어떻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13장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제사장 만이 드려야 할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정확히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수단화시키고 도구화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신분을 망각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고 제사장 사무엘이 해야 할 일을 월권하여 행한 것입니다. 예배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화, 도구화시켜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무엘이 오지 않으니까, 백성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람만 보고 상황만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14장 2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언약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13장 6절을 보십시오. 수와 상황만 보니까 전의를 상실하고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바위 틈에 숨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떨었습니다(7). 흩어졌습니다(8). 심지어는 우물로 숨었습니다.
완전한 숫적 열세로 전쟁을 승리한 요나단은 이 전쟁의 승리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믿습니까? 승리의 비결은 사람의 수에 있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시면 어떤 조건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상황을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언약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군대의 수는 거의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미디안과 싸우는 기드온의 전쟁을 보십시오. 미디안 군인 13만 5천을 3백명이 용사로 이기게 한 것입니다. 히스이갸와 이사야로 하여금 산헤립 군대 18만 5천을 하루 밤에 물리치게 했습니다. 언약 전쟁은 우리 홀로 싸우는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신명기 20:3-4절에 언약 전쟁 앞에 서 있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신다는 것입니다(출14:1; 신9:3; 삿4:14)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급한 상황에서도,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갈 수 없는 사면초가의 절박한 상황에서도 시각을 하나님께 돌리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앞쪽에 서 있으면 뒤를 볼 수 없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숲속에서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인간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초월적 세계는 알수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프레임이 바뀌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떤 일을 당할 때 사람의 판단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휴리스틱(Heuristic) 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률이나 효용의 극대화를 꼼꼼히 따지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 어림짐작으로 가장 그럴듯한 것을 선택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삼촌은 아무리 담배를 피워도 건강하게 90세까지 잘 사셨다. 그러니 담배가 건강에 나쁘다는 것은 틀린 이야기이다." 감정적인 판단입니다. 둘째는 알고리즘 (Algorithm) 판단입니다. 논리 판단, 과학적 판단, 이성 판단, 합리적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판단에 있어 전문가의 의견을 중요시합니다. 사이먼은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5만 단위(chunks)의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정보에 대한 지식 구조를 이 정도로 세우기 위해서는 10여 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적 판단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신 탁월한 지혜를 가지신 전문가 중의 전문가입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서 있는 다윗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전쟁을 본 것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삼상 17:46)"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라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전쟁을 보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십시오. 모두가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때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14:8-9)" 우리 인생의 승리는 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행복과 형통도 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름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평생 하나님과 함께 하여 언약의 전쟁,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상실된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을 가지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사울은 없는 것을 봅니다. 사무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군인 3천 명이 있었습니다. 은혜로 주신 무기가 남아 있는 군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다 제사를 잘 못드리고 다 떠나 버리고 6백 명이 남습니다(13:15).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은 목적이며 그에게 주어진 것이 도구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모르니까 도망가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농기구가 있습니다. 그것도 그들에게 남아 있는 무기입니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하나님만 의지하면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블레셋의 수많은 군인과 전차, 마병을 보고 도망하였습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도피하고 무기력증에 사로잡히는 이유가 힘을 비교하여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기가 없습니다. 상대는 전차가 있고 기마병이 있습니다. 칼과 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칼과 창이 없습니다. 겨우 사울왕과 요나단에게만 칼이 있습니다(삼상13:22). 겨우 남은 군데는 600명입니다. 블레셋 군인은 전차병만 3만대이고 기마병 6천 보병은 바다의 모래같습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전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요나단을 보십시오. 군인의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가지고 나가 싸웁니까? 자신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차도 없습니다. 기마병도 없습니다. 삼상 13장 22절을 보십시오. 그에게는 칼 한 자루가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칼을 가지고 나가 싸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잘못된 계산법으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없는 것만 자꾸 봅니다. 그리고 시도도 해 보지 않고 좌절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돈이 없느냐. 나는 못배웠는냐. 나는 능력이 없느냐. 나는 외모가 아름답지 않느냐. 나는 이미 늙었느냐. 나는 믿음이 없느냐. 나는 말이 둔하냐" 늘 없는 것만 보며 절망하며 무기력해집니다. 자본과 기술, 인재가 있어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 다 얻을 수도 없고 모든 것 다 가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단에게 가장 필요한 것 주신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는데 칼 10자루 필요 없는 것입니다. 칼 한 자루가 가장 전쟁에는 좋은 무기인 것입니다. 열 자루가 있으면 전쟁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무기가 아니라 짐인 것입니다. 골리앗을 치는 다윗을 보십시오. 어린 그에게 큰 갑옷이나 큰 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목동으로 익숙한 물매와 돌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사용하신 것입니다. 모세에게 전차나 비행기를 주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목자로 40년 간 양을 칠 때 사용했던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시고 12바구니를 거두웠습니다. 사람이 돈이 없어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돈에 그만큼 무게를 두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인재가 없다고 불평하며 시도도 해 보지 않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시작했던 일 인재난 타령을 하며 접을 수 있습니다. 요나단에게 1명의 군인이 있었습니다(13:2). 천명 중에 999명은 떠나 버린 것입니다. 남아 있는 것이 은혜이며 남아 있는 것이 하나님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면 사탄도 대적도 무릎을 꿇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잃어 버린 지난 것에 얽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예전에 5년 동안 다니시면서 등록하지 않다가 5년 만에 등록하시고 심방을 요청하신 성도님이 계셨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지만 얼굴 표정이 늘 어두웠습니다.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웃지도 않고 인사해도 제대로 받지도 않습니다. 남편이 법관이었는데 이혼을 한 것입니다. 그 이혼의 아픔으로 대인관계를 꺼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발목잡혀 노예처럼 살며 영적 전쟁에서 실패하면 안됩니다. 지금 남아 있는 자신이 중요합니다. 배신하고 반역하고 간첩노릇하는 만명이 있으면 무엇하겠습니까? 목숨 걸고 같이 싸울 충성스런 부하 한 명보다 못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에게는 죽음까지 같이 갈 수 있는 충성스러운 부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라" 떠나고 배신한 사람에게 시각을 고정시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증오와 분노만 생깁니다. 복수심만 마음에 가득찹니다. 그러나 아무리 적어도 나와 함께 사명을 감당할 한 사람에 시선을 주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사명 가지고 나아가면 필요한 사람 붙여 주십니다. 엘리야가 혼자 남았다고 엘리야가 영적 무기력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 19:18)"라고 말씀합니다. 주신 것이 하나님께 헌신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사용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경은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이사야60:22)"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나님이 이루면 이루시는 것입니다. 없는 것 보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실패를 보면서 무기력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아직 남아 있는 건강이 있고 아직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3. 절대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절대 신앙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에게 주신 무기가 말씀이고 그 말씀을 믿고 행하면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삼상 9장 16절을 보십시오, 그를 세울 때 블레셋을 이기도록 사명을 주어 부르신 것입니다. 사무엘상 12장 5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그런데 말씀을 어기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3장 13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말씀보다 이성을 중요시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왕위에서 폐위된 것입니다. 한 번 엄한 경고를 받았으면 돌이켜야 하는데 또다시 말씀을 거역합니다. 15장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말렉과 전쟁을 합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15장 9절을 보십시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어떻게 합니까? 요나단이 무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행동을 보십시오. 이성적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 전쟁을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패전은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계산만 하고 있었다면 그는 전쟁에 나가 싸워 이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숫적으로 비교되지 않지만 이기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나님은 수에 억매이는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기 체계에 억매이는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요나단은 어떻게 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앙입니다. 요나단의 작전 계획을 보십시오. 단순합니다. 매복하여 언덕에 이르러 몸을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그때 적들이 꼼짝 말아라 우리가 내려 갈 때까지 그대로 기다려라라는 소리가 나면 그대로 있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로 올라오너라라고 하면 올라 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블레셋 사람들을 넘겨 주겠다는 신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험적인 믿음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는 참으로 미련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세상을 만들고 전쟁의 승패를 주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행동했습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판단하려면 코끼리의 코만 보면서 코끼리를 뱀같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공시적(公示的) 관점 즉, 전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통시적(通時的)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전후 사정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초월적(超越的)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신앙적 관점입니다. 언약 전쟁에서 언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언약대로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선악과를 안 따먹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걸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수가 많아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이성에 의한 객관적 판단입니다. 통계에 의한 경험적 판단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맞는 말은 아닙니다. 다양한 변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것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방 안에서는 창을 통해서만 밖을 볼 수 있듯이 사람도 자신들의 창이 있습니다. 바라보는 창이 다르기 때문에 결정도 달라졌습니다. 이것을 "결정의 프레이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측하고 판단하는 이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문제는 이성을 절대화하는데 있습니다. 이성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는데 있습니다. 이성을 무시하면 맹신이 됩니다. 이성을 절대시하면 이성적으로 계산하여 안되면 절망하고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삶이 수확 공식처럼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면 인생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무생물은 기계론적으로 적용될 수 있지만 생물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보편적 법칙은 전략과 수, 방어진지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좌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것만이 전쟁에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전쟁이 뜻하지 않은 질병과 자연 재해 등으로 승패가 갈리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계산을 절대시하고 그것으로 실패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며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 이성이 신앙에 의해 쓰임받을 때 우리 인생은 날개를 달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을 절대시하고 이성이 믿음의 발목을 잡게 되면 이성은 신앙의 세계로 전진하는데 올무가 됩니다. 신앙인은 이성의 노예가 될 때는 오히려 그 이성 때문에 인간은 교만해지고 무기력증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의 행동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떨림이 일어납니다(삼상 14: 15,19,20, 19: 7-4; 14: 15), 하나님이 동사하십니다(삼상 14:45), 큰 구원을 이루고(삼상 14: 23,39,45, 삼하 23: 9-12, 삼상 19:5). 낙망했던 사람에게 새 용기를 주게 됩니다.(삼상 14: 21-22, 삿 5: 13, 학 1 장).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이라는 언약 전쟁 앞에 서있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여호수아 8장 7-8절에 말씀합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예수님도 사탄이 유혹할 때 다 말씀을 물리쳤습니다. 예베소서에서도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믿는 믿음이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크기만큼 우리 삶은 풍요로워지며 우리의 미래는 밝아지는 것입니다. 말씀 붙들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 진정한 인생 승리이고, 말씀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풍요이며 형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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