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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넘어 확신으로(8) 이렇게까지 용서해야 한다고?(누가복음23:34)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5908 추천수:3 218.155.63.46
2024-03-24 01:48:50

회의를 넘어 확신으로(8) 이렇게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누가복음23:34

 

미국에는 문명의 발전에 자유로운 사도행전적 교회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하는 아미시 공동체가 있습니다. 범죄, 폭력, 이혼, 약물 복용이 거의 없이 예수님이 원하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 함께 모여 사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보다 공동체를 우선하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에서 2006102일 총을 든 남자가 들어와 학교에서 인질극을 벌였습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니켈마인스에 있는 아미시 마을에서 우유배달부 칼 로버츠가 하나님에게 복수한다고 총을 들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9년 전, 딸이 태어난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죽은 사건 때문에 하나님에게 분노를 품고 있었답니다. 이때 교실 안에서 있던 학생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13살 아이는 동생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먼저 쏘라고 했습니다. 이일로 5명이 죽고 5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원한에 사무쳐 울분을 터트리며 복수해야 할 그들은 범인을 즉시 용서하고 그의 가족에게도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총기 사건이 일어난 후 몇 시간 뒤 몇몇 아미시 사람들은 범인의 가족들과 만나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각지에서 몰려든 기자들은 아미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렇게 빠른 시간에 용서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미시들은 "우리는 날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건 후 범인 장례식에 참여한 75명 중 절반 이상이 아미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미시들은 모금된 펀드 중 일부를 로버츠 가족에게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아미시 공동체의 사람들은 가해가 가족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자유와 희망을 주었고 무서운 짐에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아미시들은 "용서를 거부하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용서는 자연스러운 우리 삶의 일상입니다. 용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미시는 주일에도 보통 3시간 이상 예배드리고 봄·가을에 있는 성찬 주일에는 8시간 동안 예배하며 교인들은 성찬식이 끝나고 나면 동성끼리 세족식을 한다고 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목사는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용서하고 원한을 버릴 것을 권고하고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한다고 합니다. 성찬식을 하기 전에 교인 간 용서와 화해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교회 지도부는 몇 주에서 몇 달간 성찬식을 연기한다고 합니다. 성찬식은 주일 오전 8시부터 휴식 시간 없이 오후 4시까지 진행되는데 성찬 예배는 자신을 성찰하고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의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열쇠 구실을 한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일을 당했다면 이렇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앙갚음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최고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용서를 인간 대 인간의 수평적 차원으로 만 바라보지 않고 우리를 십자가에서 용서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수직적 차원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해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3:13)”라는 말씀을 실제 삶에서 실천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유품>이라는 짧은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천국에 가셨는데 평소 아버지는 뭐가 노트에 열심히 기록하는 것을 보았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책상 서랍을 보니 그 노트가 있었답니다. 펼쳐 보니 노트에 많은 사람의 이름과 함께 여러 가지 내용이 적혀 있었답니다. 어머니에게 어미니, 이 많은 사람의 이름들은 왜 여기 적혀있어요라고 물어 보았답니다. “, 그것은 평소 아버지께 크던 작던 피해를 준 사람들이란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그 사람들을 날마다 한 사람씩 이름을 써가면서 기도를 했단다. 하나님께 말이야. 아버지께서는 그 사람들을 위해 용서와 화해의 기도를 드렸단다라고 하셨답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 시간마다 용서와 화해를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드리고 있습니까? 지극히 형식적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요즈음 세상은 실제적으로는 용서 실종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용서보다 복수를 열광하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요즈음 국회의원 선거철인데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상대의 약점, 상대의 과거의 발언을 어떻게든 드러내어 응징을 가합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처참한 보복을 선언하며 서로를 죽이는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도 조금만 자신에게 불편함을 주면 가급적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댓글로 수많은 분노와 증오를 표출하고, 갈등과 분열을 심화하며, 복수에 대한 집착으로 상대를 악마화하는 문화속에서 사는 우리가 이렇게 자식을 죽인 사람까지 용서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회에서 시원하게 복수하고 힘으로 제압해야 하지 약자가 되어 용서하고 산다는 것이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느냐고 회의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로마의 권력과 유대교의 종교 권력 앞에 지극히 약한 약자가 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자신을 죽이고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 첫 번째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수많은 고통과 모독을 당하며 발과 손에 못을 박히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 첫마디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말씀, 용서해주는 말씀입니다.

 

1. 우리가 어떤 사람까지 용서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용서를 구하는 저들은 누구일까요?

첫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는 로마 군인들입니다.

33,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채찍을 가했으며 손과 발에 못을 박았고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겉옷을 네 명이 나누어 가졌고 속옷을 제비뽑아 가져갔습니다. 그들에 의해 아침부터 아침 9시까지 채찍에 맞았습니다. 19;23-25에는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군중들 앞에서 옷을 다 벗긴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입니까?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할 때 모욕을 주기 위해 임신한 여자들을 발가벗겨 행진하게 한 후 죽였다고 합니다. 고리덴 붐 여사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독일 병사들이 그를 수용소에서 발가벗겨 대중 앞에 세웠는데 그때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은 발가벗겨 놓고 얼마의 돈을 챙기기 위해 옷을 나누어가지고 값비싼 속옷은 나누면 제값은 못받으니 제비를 뽑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원문에 보면 속옷은 키톤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 통으로 짠 옷으로 당시 제사장이 속옷으로 입는 옷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어떻게 했습니까? 3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왕이신 예수님이 이런 모독을 당하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권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힘이 없는 사람이야 당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을 당하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끌어 언덕 밑으로 던져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라고 가르쳐 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말씀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둘째는 35절에 나오는 구경하는 백성들입니다. 관망하는 자들입니다. 백성 중에는 오병이어의 기적 때 예수님이 주신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질병에서 고침받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려움을 당하니까 방관자가 되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부추이기도 했습니다. 때론 침묵이 외침보다 더 큰 죄일 수 있고, 관망이 행동보다 더 큰 잘못일 수 있습니다. <신곡>에서 단테가 지옥의 가장 어두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고 말한 것처럼 침묵과 관망은 때로 가장 심각한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비웃은 관리들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비웃습니까?

35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우리 성도님은 이런 비웃음을 당하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넷째는 같이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입니다.

3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자기 주제도 모르고 이렇게 무고하게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 가운데는 모든 인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조금만 무시당해도, 조금만 거부당해도, 조금만 비난받아도, 조금만 모욕당해도, 조금만 학대당해도, 조금만 고문당해도, 조금만 버림받아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를 가르쳐 주었고 용서를 실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3:13) ”라고 말씀합니다. 용서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과 멀어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몸이 쇠약해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외롭게 삽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에 묶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하면 예수님을 닮습니다. 용서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해치는 자를 용서하고, 미워하는 자를 용서하면 주님의 형상을 닮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은 평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얼굴에 웃음이 없는 사람,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용서받은 증거가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자기 속에 용서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얼굴에 상처가 깃들어 있는 사람은 어린시절부터 용서하지 않은 상처가 축적된 것입니다.

용서하면 건강해집니다. 모든 건강은 상처의 치유로 이루어집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병이 깊어집니다.

용서하면 다른 사람과 화목합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고독합니다. 아무도 그를 따라주지 않으니까요. 용서하면 내 마음에 자유가 옵니다. 용서하면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용서는 가정생활을 행복하게 합니다. 가정생활을 원만하게 못하는 사람은 속에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쓴 뿌리를 품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심각하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조금만 상처를 주어도 그것을 생채기로 간직하고 씹고 씹으며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은 용서해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2. 우리는 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용서해야합니까?

오는 본문에서 왜 예수님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말씀합니다. 죄를 짓기 전 아담과 하와는 인식의 한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세상을 밝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 인식은 어두워졌습니다. 앎은 왜곡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 사람에 대한 왜곡된 지식, 만물에 대한 왜곡된 지식으로 오염이 되어 버렸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돕는 배필로 지은 사람에 대하여 서로에게 죄와 책임을 전가시킵니다(3:12). 하나님과 참된 지식으로 교제했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난 후 하나님을 피하고 숨습니다(3:8). 죄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피조 만물에 대한 지식을 망가뜨려 버렸습니다. 자연이 모두는 그런 원죄 하에 태어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도 그런 인식의 한계에 놓여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에서 이런 인간들을 용서해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든 다 인식의 한계가 있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박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꿇고 경배하고 찬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처형하는데 앞장 섰던 빌라도와 가야바와 헤롯과 유대 권력자들은 자신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빌라도는 백성의 환심을 하고 로마 제국의 안정을 명분을 내세워 자신이 정치적 이익을 취득하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했습니다. 가야바와 유대 권력자들이나 헤롯 역시 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나 관리, 행악자, 백성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의 하수인 노릇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류 구속사를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 지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메시아를 거역하고 처형하는 사람들은 다 무지몽매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조롱하고 핍박하고 처형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마음 속에서 추방하고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처형하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진실을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지하여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무지하여서 예수님을 배척하고 무지하여서 죄를 짓는 인간들을 용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대속자로 죄인의 괴수로 두 행악자들과 함께 중앙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당해야 할 온갖 수모과 고통을 다 당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 오시기 700여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다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선명하게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메시아가 범죄자를 위해여 기도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해 놓았습니다(53:12).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자의 역할을 감당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의 대가로 단번에 속죄제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용서의 길은 죄에게 내려진 형벌을 대신 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2007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33명의 생명을 빼앗은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가해자는 조승희라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잘 뒤섞여 놀지 않았고 말이 없었던 그는 미국에 이민 온 뒤에도 외톨이 그 자체로 생활해야 했다고 합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던 큰 교회 대신 조그만 교회를 다녔고 여전히 사교성이 부족했으며 하루 내내 돈을 벌어야 했던 부모를 볼 수 있는 시간도 그에게는 거의 없었답니다. 학생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승희의 침묵과 무표정한 얼굴, 낮고 굵은 목소리를 비웃었고, 물건을 던지고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1달러 지폐를 흔들며 뭐든지 말을 하면 돈을 주겠다고 놀리기도 했답니다. 학생들은 그에게 욕을 퍼붓고 때리기도 했답니다. 그는 그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과 분노감을 갖게 되었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버지니아 공대 학생들은 32명을 살해한 조승희를 용서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학교는 추모비를 세울 때 그도 희생자로 받아들여 사망자 33명 추모비 가운데 왼쪽에서 네 번째로 추모비를 마련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분노와 적개심 속에서도 용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추모비 앞에는 "네가 그렇게 절실히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아팠단다. 머지않아 너의 가족이 평온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승희야,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네가 아무런 도움과 안식을 찾지 못한 게 너무 안됐고 가슴이 미어진다. 네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지만 이제는 평화와 사랑도 조금은 찾기를 빈다", "네가 그렇게 절실히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아팠단다. 머지않아 너의 가족이 평온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등의 글을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물론 몰라서 범죄하는 것이 절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되어진 사건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면 우리는 훨씬 더 수월하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죄인인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구원사를 성취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용서란 대가 없는 하나님은 은혜라는 것을 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며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속죄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모독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는 흔적을 남기는 용서가 아닙니다. 대가가 조건을 전제로 한 용서가 아닙니다. 뒷끝을 남기는 용서가 아닙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기억지도 않으시는 용서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1:18)”라는 용서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43:25)”라는 용서입니다. 죄악 가운데 사는 인간들은 이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가책, 죄의식과 정죄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 인간은 부족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으로 용서한 것처럼 우리도 무지로 말미암아 죄를 짓고 사는 인간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의 용서란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반응을 요구합니다. 용서받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요구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난 용서할까를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18:22)”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도 예수님처럼 용서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알고 십자의 용서를 이해하고 사는 사람들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용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적으로 풀어 말하며 그들이 알지 못하여 구속주이신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말을 들은 분노한 군중은 돌을 던져 스데반을 죽입니다. 그 때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한 마디의 기도는 수백 번의 설교보다 더 분명하고도 강력하게 스데반 이 어떤 믿음을 소유했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용서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면 증오와 보복이 난무하는 세상을 하나님이 원하는 의와 화평과 희락이 있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폭행과 추행의 기억을 안고 살아갔던 한코리 텐 붐의 이야기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강연 여행을 다니던 중 코리 텐 붐 여사는 수용소에서 자신을 학대하고 고문했던 독일군을 만났답니다. 그는 유대인 포로들을 온갖 수단을 사용해 괴롭혔고, 여성들을 범했답니다. 코리의 사촌 언니도 그 사람에게 겁탈을 당한 후에 생을 포기했답니다. 그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답니다. 코리 여사는 도저히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할 수가 없어서 얼른 마음속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저는 하늘에서 진노의 벼락이 내려 이 사람을 때리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저를 좀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달랐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못 박고 죽이고 침 뱉으며 채찍으로 때리고 조롱하며 가시관을 씌워서 나를 괴롭힌 사람들을 내가 용서했지 않느냐? 너도 용서해 주어라”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못합니다라고 여사가 기도하자 성령의 능력이 임해서 여사의 손이 움직여졌답니다. 코리 여사의 손이 그 사람의 손을 잡자 그 사람이 말했답니다 네덜란드 사람인 당신이 전쟁 때 우리 독일 사람이 저지른 죄를 용서하고 복음을 전해 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늘 주님 앞에 나왔으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코리 여사의 고백에 의하면 그 순간에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의 사랑이 여사에게 넘치게 임했답니다. 순식간에 미움과 원한이 눈 녹듯이 다 녹아 버렸답니다. 진실로 하나님이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셨을 때 그는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됐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한 사람보다 용서하지 못한 자신이 더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를 받아야 할 대상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못하는 본인이 더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쓴 마음을 품으면 뇌하수체, 신장, 갑상선과 다른 내분비샘으로부터 특정 호르몬이 나와 불면증, 변비, 소화불량, 두통, 면역력 저하, 세포 재생산 능력의 감소, 암 등 질병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정신적 고통, 신체적 건강, 관계 악화, 개인적 성장 방해, 갈등 심화, 폭력 증가, 불신과 분열, 사회 발전의 장애 등이 일어나고 감정적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하게 하며, 정신적으로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인 관계나 대신관계가 정상적이지 못합니다. 쓴 마음의 해독제는 용서입니다. 용서할 때 원한이 없어지고, 응어리가 풀리고, 한이 무릎 꿇고, 관계가 회복됩니다.

<인생의 응어리를 풀라>의 저자 크리스티 김은 용서하지 않은 자가 당하는 영적 피해를 12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둘째, 용서하지 않으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셋째, 용서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넷째, 용서하지 않으면 그런 이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다섯째,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과 멀어집니다. 여섯째,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일곱째, 용서하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여덟째, 용서하지 않으면 몸이 쇠약해집니다. 아홉째, 용서하지 않으면 외롭게 삽니다. 열째,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에 묶입니다. 열한째,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열두째,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상대를 용서하지 않고 그 분노를 계속 가슴에 두고 계속 괴로워할 것인가 아니면 용서라는 자물쇠로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줄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교훈에 대한 확신, 주님의 명령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도피의 수단도, 상대보다 우위를 점하는 것도, 복수의 수단도, 감정의 회피, 자기 희생도, 사회적 압박에 대한 굴종도 아닙니다. 용서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며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의미이고(23:34),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11:14).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죄 값을 치르고 죽어야만 하는 죄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용서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힘들지만 신앙인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용서하심과 같이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4:32). 성경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18:35) 말씀합니다. 용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6:37)" <왜 용서해야 하는가(아놀드 저)>라는 책에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용서한 이들이 나옵니다. 찰스 윌리엄스는 알코올 중독으로 자신의 유년 시절을 악몽으로 만든 어머니를 용서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상처가 나머지 인생마저 송두리째 망치도록 더 둘 수는 없었다고 용서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또 순찰중인 경찰관 스티븐 맥도널드는 흑인 소년에게 총을 맞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되었으나 소년을 용서했습니다. 그는 척추에 박힌 총알보다 가슴속에 자라는 복수심이 더 끔찍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세계적인 뮤지션인 장폴 삼푸투는 199490일 사이에 100만명이 죽은 르완다 대학살 때 부모와 세 형제와 누이를 동시에 잃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알코올과 마약에 손을 대며 감옥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는 오랜 분노 끝에 늘 끌어안고 있는 두려움과 분노가 나를 죽이는 진짜 적이다라는 것을 깨닫고 용서를 택했습니다. 목사인 저자는 우리 중에 살인이나 강간 같은 엄청난 일로 용서를 해야 하는 상황을 겪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매일 배우자나 자녀, 친구나 동료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하루에 수십번도 더 그런 일을 겪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는 보지 않을 낯선 사람을 용서하기는 쉬워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훨씬 더 힘들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숱하게 배신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분노와 불신에 잠겨 사는 것보다 용서하는 게 훨씬 낫다고 그에게 가르쳤다고 말하며 내가 적을 용서할 때 적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사실은 나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과 관계 속에서 깨어진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열쇠라고 말합니다. “증오를 증오로 갚으면 증오만 더 증식시킬 뿐이며, 별이 보이지 않는 밤하늘에 짙은 어둠만을 더할 뿐이다.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오직 빛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미움이 미움을 몰아낼 수는 없다. 오직 사랑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미움은 미움을, 폭력은 폭력을, 그리고 가혹함은 가혹함을 낳는다. 마치 구덩이 밑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만이 오직 적을 친구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미움에 미움으로 맞서서는 절대 적을 없애지 못한다. 적의를 없앰으로써 적을 없앨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억울하게 27년 동안 외딴섬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여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자 했습니다.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백인경찰이나 군인이 자발적으로 고소자들 앞에서 범행을 털어놓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그 범죄로 인해 재판을 받거나 처벌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청문회 자리에서 반드 브렉이라는 경찰관이 자기의 죄를 털어 놓았습니다. 자신과 동료들이 18세 소년을 총으로 쏘고 시체를 불태운 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그 시신을 바베큐처럼 불에 그슬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8년 후 반드 브렉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소년의 아버지를 체포했는데, 불쌍한 그 아내는 경찰관들이 남편을 장작더미에 묶어놓고 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뒤 불을 붙이는 광경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아들과 남편을 차례로 잃은 노부인에게 법정에서 말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판사는 물었습니다. "반드 브렉 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있도록 부탁한 후 한 가지 요구 사항을 추가했습니다. "반드 브렉 씨는 제 가족을 모두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아직도 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많습니다. 제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한 달에 두 번 우리 집에 와서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나는 반드 브렉 씨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용서했다는 것을 반드 브렉 씨가 알 수 있도록 그를 안아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0)"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았다면 무엇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용서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용서하며 하나님 나라의 의와 화평과 희락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생 쓴 마음 가지고 살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용서로 용서받고 용서해 주며 의와 평안과 희락을 누리며 살겠습니까?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4.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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