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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교회 생활 DNA 사랑(3) 사랑의 영원성(고전 13:8-1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009 추천수:6 112.168.96.71
2016-07-24 12:05:26

 

행복한 교회 생활 DNA 사랑(3) 사랑의 영원성

고전 13:8-13

 

요즈음 또래 목사님들을 만나면 기억력이 없어져 고민이라는 분을 자주 만납니다. 어떤 목사님은 찬양을 부르는데 반주자가 다 끝났는데 계속 반주하고 있어 야단을 쳤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난 후 자신이 주기도문을 잘못했다고 합니다. 그 똑똑했더너 유명한 물리학자요 수학자인 뉴우턴도 노년에 심한 건망증으로 자기의 이름까지 잊어버렸고 제자들도 분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뭐 오래 기역하지 못한다고 낙심할 것 없습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 다녔던 성도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동생의 남편 동서가 선교사님이신데 지방에 아내와 함께 갔다고 합니다. 올라오는 길에 휴게실에 들렸는데 아내가 출발할 때 혼자 출발해 버린 것입니다. 아내가 화장실에 갔다가 아직 타지 않았는데 뒤에 탄 줄 알고 출발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 이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건망증이 있다고 세상 다 살았다고 할 필요 없습니다. 어떤 여 집사님은 딸 결혼시키기 위해 머리를 손질하러 갔다고 합니다. 늘 하던 미장원에 갔는데 미용사가 파마할까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무심코 습관적으로 하세요 했는데 머리를 하고 앉아 있자니 딸의 결혼식인데도 모르고 파마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첫 사랑으로 이렇게 자주 잃어버립니다. 교회 생활을 행복하게 하려면 십자가의 사랑을 잊지 말고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라야 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부득이하게 이사 다니며 평균 7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여러 교회를 다니는데 어느 교회를 다니든지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생활하면서 진짜 행복하게 교회생활을 하게하는 요인은 무엇이겠습니까? 미국사회학리뷰(ASR 12월호)에 실린 ‘종교, 소셜네트워크와 삶의 만족’(임채윤∙로버트 퍼트냄 공저)이란 연구보고에 따르면,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나누는 우정이 사람들을 좀 더 행복하게 하는 요소라고 합니다. 매주 교회에 출석하면서 3-5명의 가까운 친구를 둔 사람들의 3분의 1은 “삶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답했답니다. 그에 비해 매주 출석은 하지만 가까운 친구가 없는 사람들은 단지 19%만이 “삶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답했답니다. 신앙생활에 행복감을 주는 것은 교회의 규모나 목회자가 누구인가보다는 교인들 간의 따스한 친교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님과의 관계이지만 행복한 교회 생활은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그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교회 생활의 행복 DNA는 사랑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행복한 교회, 행복한 세상을 만듭니다.

 

교회 생활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DNA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 진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고린도 교회처럼 사랑한다고 첩을 두는 교인들이 있고, 자기의 아버지의 첩을 겁탈하는 아들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일을 교회에서 저질렀다면 우리 성도님의 교회 생활이 행복하겠습니까? 아마 신문에 나게 되고 사람들은 비난할 것이고, 그런 교회에 다니는 것이 창피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 등 4파로 나누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다툼이 있었습니다. 교회 생활을 불행하게 하는 요소가 이 다툼입니다. 예언하는 사람, 방언하는 사람,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서로 잘났다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서로 사랑으로 섬기며 덕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기 잘난 맛에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교회에 파당이 생겨 하나가 되지 못하고 교회의 질서가 무너져 버리니까 교회생활이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도 제멋대로 제 잘난 맛으로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생활이 불행해 집니다.

고린도 교회에 대해 바울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고후12:20)”이 있는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생활이 행복하겠습니까?

야고보서 3장 16절에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라고 했습니다. 행복하지 못합니다. 시기와 다툼과 혼란과 악한 일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내가 육체의 불행을 초래하는 암세포같이 이런 사람이 되어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대단한 것같지만 도토리 키 제기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면 1층이나 100층이나 그것이 그것입니다. 1.5와 5의 이야기 있지 않아고 숫자가 클수록 대우받는 나라에서 1.5가 5보다 작아 항상 1.5는 5에게 깎듯이 대했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1.5가 5를 못본체하고 그냥 지나가니까 5가 화가 나 "1.5야~ 너 왜 나 못본체하고 지나가?"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1.5는 웃으며 "나 어제 점 뺏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점 하나 빼니 15가 된 것입니다. 뭐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는데 “누가 신앙생활 잘하네. 누가 설교 잘하네. 누가 교회 부흥시켰네. 누가 헌금 많이 하네”하며 정죄하고 비난하고 잘난체 하고 싸웁니까? 우리 교인들은 열린교회 다니면서 절대 싸움질 하여 교회 생활 서로 불행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쟁이 교회 내에서 해결이 되지 않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고린도전서 6장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사회 법정에 고소를 합니다. 오늘날도 교인들이 얼마나 서로 고소고발을 하고 있습니까? 사랑이 많다고 해서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 어느 교회의 고소 고발이 끊임없습니다. 횡령, 배임, 사문서 위조로 방화혐의, 재정장부 열람, 폭행, 예배 방해, 분리예배금지, 손해배상 소송, 명예훼손, 노트북 절도 등 한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수백건을 고소 고발하고 있습니다. 교회 헌금만도 재판비용으로 얼마나 낭비를 하겠습니까? 이런 일에 휘말린 교인들이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어느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든 고소고발하며 싸움에 휘말려 불행한 교회 생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다 싫어하는 사람도 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서로 좋은 사람들 만나 신앙 생활하게 하면 됩니다. 왜 내가 싫다고 다른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신앙생활하게 합니까? 목사의 설교가 싫고, 심방받기도 싫고 보기도 싫으면 본인이 좋아하는 목사님 만나 신앙생활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인이 싫고 교인이 미워지면 본인이 좋아하는 교인들과 목회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 패거리 만들어 교회를 전쟁터로 만들어야 합니까? 모두가 목회자가 싫으면 본인이 목회자가 되어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면 됩니다.

 

근본적으로 신앙생활하면서 왜 이런 다툼이 일어납니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입니까?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주님의 나라의 확장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교회의 부정을 제거하고 깨끗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입니까?

야고보서 4장 1절에 정확하게 답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정욕으로부터 나옵니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사명을 가지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다투는 사람들은 자신이 신앙생활 최고로 잘하는 것처럼 위장을 합니다. 마치 정의의 사도가 된 것처럼 자신은 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하며 상대를 정죄합니다. 그러나 디모데 전서 6장 5절에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부패해진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신앙인의 최고의 진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방로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경쟁이 다툼을 일으키고(눅 22:24), 미움이 다툼을 일으키고(잠 10:12), 교만이 다툼을 일으키고(잠 13:10), 욕심이 다툼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잠 28:25)

이런 다툼의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교회 생활 행복하게 하려면 사랑해야 합니다.

잠언 10장 12절에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는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했습니다.

 

1. 우리는 행복한 교회생활을 위해 없어지는 것으로 다투지 말고 영원한 사랑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세 가지 동사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예언과 지식은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방언은 그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교회생활의 행복을 방해하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예언, 지식, 방언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오히려 교회생활을 불행하게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사를 자기 과시의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다툼의 재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은사는 누가 주신 것입니까? 12장 11절을 보십시오. 성령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손 역할 발 역할 눈 역할 입 역할 다 다릅니다. 그런데 눈이 손더러 쓸데없다고 말합니다. 머리가 발더러 쓸데없다고 말합니다. 서로 귀하고 아름답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은사를 주었습니까? 고린도 전서 12장 25-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서로 돌보아야 합니다.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신 은사로 다투니까 고린도 전서 13장을 통해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사랑 외에 다른 은사들은 다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언도 지식도 폐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방언도 그친다는 것입니다.

9절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다 아는 것 같지만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지식의 정도와 그 방식에 따라 '에피스테메'와 '독사'의 지식으로 나뉩니다. 에피스테메는 온전히 알지 못하고 섣부르게 아는 것입니다. 독사는 사물을 전체적으로 온전히 아는 지식을 뜻합니다. 은사로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니까 다툼과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알기 때문에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힙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이 있습니다. 아주 교회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새벽 기도회부터 주일 성수, 헌금 생활 참으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알렐루야’ 찬양을 부르니까 그것은 마호멧을 찬양하는 찬양이라고 목사님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히브리어 ‘할렐루야’고 헬라어 ‘알렐루야’와 혼동해서 사용되었고, 라틴어로도 ‘알렐루야’로 발음하므로 가톨릭에서는 ‘알렐루야’로 사용한다고 설명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교회가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교회 다툼도 대부분 전체를 알면 이해가 되는데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부분적으로 알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고 자랑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인 것은 폐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텔레이온)은 “시간적으로 완성된 것, 최상의 것, 아무런 결함이 없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말합니다. 그 때은 이 세상의 은사는 폐하게 됩니다.

은사는 하나님을 알고 믿고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수 있도록 주신 것인데 예수님 재림하면 그 기능을 다하는 것들입니다. 모든 구원이 완성되면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의 뜻은 '떨어지다, 넘어지다. 박살이 나다. 붕괴되다.' 라는 말입니다. 무대에서 연기하던 배우가 무대 아래로 끌려 내려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표현은 사랑은 없어지지 아니하며 혹은 실패하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배우가 무대에서 자기역할을 마치고 사라지는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 여름 무성했던 나뭇잎들이 가을에 시들고 떨어지는 것처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권력이나 인기나 명성, 박수갈채나 지명도도 한 순간 반짝하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촛불은 햇빛 앞에서는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언제까지나(우데포테)'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언제까지나 라는 의미도 말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결코 무엇 무엇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실패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천국에 가지고 가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가지고 가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둘째는 전도한 영혼입니다. 셋째는 사랑의 추억이라고 합니다. 인생의 가을날 다 떨어져도 사랑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구원이 완성된 후에도 영원히 지속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이 이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었고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 땅에서 사랑하며 살다가 영원한 나라에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천국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교회이나 불행한 교회이냐는 사랑이 풍성하냐 사랑이 메말랐느냐 따라 다릅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각종 은사가 없어도 사랑 하나로 행복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의 물에 녹아져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교회, 사랑으로 생동감이 있고, 사랑으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화복하고, 사랑으로 기대가 있는 교회 생활이 행복한 교회생활입니다.

 

2. 우리는 행복한 교회생활을 위해 단편적인 것으로 다투지 말고 사랑으로 성숙해져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은사를 받았지만 사랑에는 미성숙하였습니다. 다툼과 싸움을 하는 고린도 교회를 사람들의 모습을 어린아이라고 바울은 설명을 합니다.

3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밥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습니다. 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기와 분쟁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3장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말할 때 투정합니다. 짜증을 잘 냅니다. 칭얼거립니다. 아주 자기 중심적입니다. 깨달음이 부족합니다. 이해를 못합니다. 통하지를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단편적입니다. 근시안적입니다. 이기적이고 배타적입니다. 사랑이 미숙하면 유치하고 편파적이고 고정관념과 아집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전체를 모르고 부분을 보고 전체로 판단을 합니다. 종합적이고 통합적인 인식이 없고, 한 부분만 보고 전체를 다 판단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릴 때 집이 무척 커 보였습니다. 마당에서 자치기도 하고 제기차기도 하고 놀았습니다. 집으로 공을 만들어 공도 찼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에 가면 너무 작습니다. 학교 운동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눈에는 돈이 가장 크게 보이고, 명예가, 권력이, 명성이 가장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보면 사랑의 엄청나고 영광스러운 가치 앞에 놀라게 됩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구리거울로 자신을 보는 것처럼 온전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은사의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밝히 보지 못하니까 서로 주장을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서로 싸우고 다투고 오해하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에는 발생형 문제가 있고 목표형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발생해서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만든 것을 '발생형 문제'라고 합니다. 지금 문제는 없지만 더 개선하고 발전하는 목표를 만드는 문제를 '목표형 문제'라고 합니다. 어떤 문제든지 중요한 것은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영어로 'Fact-Base 사고'라고 합니다. 명확한 사실을 규명하고 나서 가설이나 추측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을 수직으로 파고드는 분석적인 사고와 생각을 수평으로 넓혀가는 창의적인 사고를 하다보면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깊고 넓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전부로 알고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모든 것들이 다 밝혀질 것입니다.(12절)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직접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친밀한 사랑 안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사랑 있는 지식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다 알게 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사랑도 수준이 필요합니다. 어느 수준까지 이르려면 연습을 해야 합니다. 심리학자 말콤 글래드웰은 ‘1만 시간의 법칙’을 통해 누구라도 하루에 3시간씩 10년을 노력하면 한 분야의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남들을 취미로 지도할 정도의 사람들은 연습량이 대략 4천 시간 정도이나 잘하는 사람들은 8천 시간 남짓을 연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트는 1만 시간을 채우지 않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김연아는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연습’이라 할 만큼 지독한 연습벌레였다고 합니다. 프로골퍼 최경주는 하루 8시간씩 4000번 이상 공을 쳐내는 피나는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한 시즌에 토슈즈를 수십 켤레씩 버릴 만큼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무대에 오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기계적으로 연습한다고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만 시간의 재발견. 안데르스 에릭슨, 로버트 풀 지음>에서는 단순한 기계적 연습보다 성장이 가능한 연습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의식적인 연습(deliberate practice)’이라고 하는데 의식적인 연습을 위하여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하고 연습 시에 ‘집중’하여야 하며, ‘피드백’과 ‘수정하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합니다. 연습은 ‘얼마나 오래’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른 방법’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연습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방법의 차이’가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를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무려 50년 동안 거의 매일 체스를 두었지만 그의 체스 실력은 평범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단순한 기계적 연습으로 20년 운전한 사람보다 의식적 연습 5년을 한 사람이 더 운전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사업도, 공부도, 운동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도 의식적 연습을 해야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5단계로 설명합니다. ①받는 단계: 무조건 받기만 하는 유치한 단계입니다. ②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단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③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는 단계: 성숙한 사랑입니다. ④자기에게 해롭게 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단계: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⑤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 생명을 내 놓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그때는 주를 맞대고 보리, 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듯 우리도 주를 알리.'

진정 승자는 사랑하는 자입니다. 사랑의 수준이 높은 만큼 인생의 수준도 높아집니다.

 

3. 행복한 교회생활을 위해 반드시 지금 믿음, 소망, 사랑이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영원한 사랑의 동기로 살아야 합니다.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는 말은 조금 정확하게 번역하면 항상이라는 부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머물러 있다"라는 말입니다. 12절에 두 번이나 나오는 '그 때(토테)'라는 말과 대조하여 '지금은(누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한 그 때와 대조되는 지금입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명백하게 아는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때 바로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한다는 말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 세 가지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믿음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일이 바로 믿음의 역사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말로만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믿음입니까? 7절에 보십시오.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믿음하며 데살로니가 교회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였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표준이야 믿음 하면 그 사람들처럼 살아야 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8, 9절을 읽어 보십시오.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고 모든 우상을 버리고 참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할머니 4명 할아버지 한 명 집사님 한 명이었습니다. 저희 가정까지 다섯 가정이었습니다. 그 때 처음 시작할 때부터 5명의 아이를 도왔습니다. 지금은 우리 성도님의 믿음의 역사로 1000여명의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있고 13개의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행복한 교회생활을 위해 소망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소망을 가졌고 소망하기 때문에 인내가 있었습니다. 6절에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많은 환난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마게도니아의 전도에 나서 빌립보 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전도하여 세운 교회입니다(행 17:1-9) 데살로니가는 근처에 헬라 신들의 근거지인 올림푸스산이 있어 대단히 우상이 성행한 도시였습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악한 무리들이 떼를 지어 바울을 죽이려고 찾아다녔습니다. 그 뿐 아니라 바울을 도왔던 주민들까지도 찾아다니며 다시는 돕지 못하도록 협박하였고 그것 때문에 바울을 3주일 밖에 머물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죽음을 피해 약 60Km 떨어진 베뢰아라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서 그곳까지 찾아가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행17: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복음을 들은 몇몇 유대인들과 헬라인의 큰 무리와 또한 귀부인들이 예수를 믿게되었고 그들은 엄청난 핍박을 견디면서 교회를 든든히 세웠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을 바라보고 그 어려움과 핍박을 참고 견디며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무너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작시했다는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이 그 수난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견디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사자굴에 들어가고 십자가에 매어달리고 화형을 당하면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신앙 때문입니다. 밤이 깊어 지면 깊어질수록 별들이 더 빛나는 것처럼 우리의 환경에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더욱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깊어지는 것입니다. 풍랑 인연하여 더 빨리 가는 것입니다. 소망 가운데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행복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동기가 된 수고입니다. 이 수고는 '코포스'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고생을 말합니다.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4절에 보십시오. 이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5절에 보니 복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수고를 감당할 때 교회 생활은 행복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고 사랑해도 그 보상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먼저 사랑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문둥이가 된 성자 다미엔 신부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와이 군도 몰리카 섬에서 문둥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문둥이가 된 다미엔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오래 전에 삼포능자의 [사랑하며 용서하며]라는 책을 읽으며 감명을 받은 내용이 있습니다. 1954년 가을 연락선인 토오야 호가 태풍을 만나서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승객 몇 천명 중에서 1,011명이 이 날 밤의 조난으로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도오야 호에는 2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구명대가 없는 젊은 남녀에게 자기들의 구명대를 주고는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선교사 사진을 자기 방에 지금도 걸어 놓고 있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네 사람의 군목을 위한 기념 예배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연이 이렇습니다. 1943. 1. 22 폭스, 구스, 폴링. 웨싱턴 군목이 '도체스터 호'에 승선하였다고 합니다. 그해 2월 3일 55분 독일 잠수함 u-233 이 도체스터 호에 접근하였답니다. 얼마가지 안아도체스터 호는 어뢰를 맞고 점점 물에 잠기기 시작했답니다. 네명의 군목은 잠기어 가는 함정 속에서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구명정을 커내어 주기 시작하였답니다. 사용할 수 있는 구명정은 모두 바닥이 났습니다. 마지막 남은 구명정까지 모두 꺼내어 주고 그들은 갑판에 어깨를 맞잡고 섰습니다. 그들은 어깨를 맞잡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날 배에 따고 있던 병사 904명 중 605명이 전사하였습니다. 물론 전사자 명단에는 장렬하게 죽어간 4명의 군목명단도 끼어 있었습니다. 1951. 미국 국민은 네 목사 기념 예배당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1961. 1. 18 의회 표결로 "그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한 특별훈장"을 수여하였고 그들이 천국에 간 2월 3일을 네 군목을 위한 기념일로 정하여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평생 십자가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수고하면 우리의 교회 생활을 참으로 행복한 교회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직역하면 "그런데 그것들 중에서 더 탁월한 것은 그 사랑이다" 믿음은 지성에, 소망은 감정에, 사랑은 의지에 우선적으로 간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재림하는 날 믿음은 실현되고 소망은 성취됩니다. 오직 사랑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영화의 날, 천국에서 사는 날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시간 속에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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