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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은 후 복을 누리려면(창9:20-2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831 추천수:5 112.168.96.71
2016-06-26 11:17:26

 

은혜 받은 후 복을 누리려면

창9:20-27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목회를 잘하여 교인 수만 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간이 나빠 쓰러지고 말았답니다. 빨리 간이식을 받지 못하면 위험하게 되었답니다. 30년 동안 신실하게 목회하여 많은 교인들이 목사님을 통해 은혜를 받고 도움을 받았답니다. 목사님이 신유의 은사가 있어 질병에서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았답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의 기도를 통해 암에서 고침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잉태의 복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목사님의 모움으로 파탄난 가정이 행복해졌고, 어떤 사람은 목사님의 도움으로 사업이 번창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목사님의 중매로 자식들이 잘 되기도 했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은혜와 도움을 받은 성도님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목사님께 자신의 간의 일부를 주겠다고 나섰답니다. 무려 100명이나 되었답니다. 그래서 선임 장로님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답니다. 간이식해 드리겠다는 100명의 교우들을 모으고 모두가 간이식을 할 순 없으니 새 깃털을 이층에서 던져서 그 깃털이 머리 위에 떨어지는 교인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목사님께 간이식을 해드리자고 했답니다. 모두가 동의하여 장로님이 2층에서 새 깃털을 던졌답니다. 깃털이 떨어지자 여기저기에서 “오 주여, 후~~~ 후~~ 후~~~~ 할렐루야, 오 주여, 후~~~ 후~~ 후~~~~ 할렐루야”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고 살지만 은혜를 은혜로 갚는 복을 누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후 지속적인 축복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은혜를 받은 후 축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으로 만족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아 시대 때 세계에 대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그 홍수로 인하여 노아와 그 가족만 살아남았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만 홍수로 죽지 않고 살았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아가 실력이 좋아서일까요? 돈이 많아서일까요? 외모가 잘 생겨서일까요? 좋은 일을 많이 해서일까요? 창세기 6장 8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잘 나서 살려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참선이나 구도나 고행이나 수도나, 행위나 열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큰 은혜를 입었는데 그 은혜를 받고 축복을 누렸을까요?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홍수 후에 35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기록은 축복받은 영웅의 기록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실패의 기록으로 마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이고 영웅전이라면 이렇게 술 취하고 추태부리는 노아의 기록은 빼버렸을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9장까지는 승리한 노아의 기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큰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를 누리는 삶이 아니라 실패한 삶으로 노아에 대한 성경 기록을 마감하겠습니까? 이 성경을 읽은 사람들에게 노아의 실수를 통해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무슨 교훈을 주시기 위해 이 말씀을 기록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홍수에서 살아나 노아가 한 것이 무엇인지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9장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이것이 뭐 잘못되었습니까? 포도주를 마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시기는 마시되 취하였습니다. 잔뜩 마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만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스스로 옷을 벗어버려 알몸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하체를 다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통제한 것이 아니라 술이 자신을 통제한 것입니다. 자신이 자기를 통제한 것이 아니라 술이 자신의 손과 발과 입을 통제해 버린 것입니다. 술의 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포도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인'입니다. 그러데 그 앞에 정관사 '하'(the)가 붙어 있습니다. 그 포도주라는 말입니다. 방주를 짓기 전에도 그 포도주를 마셨는데 방주에서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그 술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도 계속 마셔왔던 포도주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노아가 이미 포도주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 잘 못되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싫어하는 패역한 세대,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지적할 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17장 27-2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물로 심판하는 노아 시대 때, 불로 심판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특징을 말하시면서 마시고, 마셨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술 취하는 것은 패역한 세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잠언서 23장 3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5장18절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라는 말씀으로 대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면 술의 노예가 되어 성령의 통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술 취해 벌거벗고 추태를 부린 것은 큰 은혜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홍수 이전의 패역한 세대와 방불한 상태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노아는 그 무시무시한 홍수를 경험하고도 다시 이전의 패역한 세대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홍수 이전 세대와 홍수 이후 세대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홍수 사건을 경험했는데도 불구하고 삶은 결국 옛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노아가 고독해서 그 공허함을 술로 채우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아는 친구들, 일가친척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잃었으니 얼마나 상실감이 컸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대체물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진정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술로 만족하고 행복해하려는 비정상적인 행복감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독입니다. 그것이 종류만 다르지 하나님 대신 대체물로 삼는 돈이든, 일이든, 권력이든, 성이든, 명예든, 쾌락이든, 자식이든, 인기든, 존경받음이든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면 은혜를 받은 후 진정한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주고 모든 것을 축복의 도구로 주셨는데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진정 축복받는 삶을 살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의 도구로 주신 대체물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종이 되어 하나님으로만 만족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에 대하여 마태복음 6장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신앙인의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이것 붙들어야 예수님 구주로 믿는 은혜를 받고 이 땅에서 참으로 행복하고 만족하게 살 수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안는데 하나님께서 잘 먹고 잘 살게 만드는데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든 우리를 굶기겠냐는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얼마나 좋은 옷을 입고 있냐는 것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데 십자가의 은혜를 부어주신 우리를 하나님이 방치하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우리가 은혜 안에서 행복하고 만족하게 사는 축복의 비법입니다. 많이 있어도 적게 있어도, 높아져도, 낮아져도, 건강해도 병들어도, 잘나도 못나도, 합력해도 불합격해도,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이 만족한 삶을 사는 축복의 비결입니다. 믿습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된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짐

목소리 높여 찬양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삶 변화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지난주 거동하기 힘들어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노인요양병원 환우들에게 매일 찬양을 들려주고 있는 이건훈 의사 선생님의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노년에 질병으로 요양병원에 와서 오랜 세월 믿음을 잘 지키다가 말년에 예배하지 못해 믿음을 잃어버리는 환우들이 안타까워 천국을 노래하는 새처럼 매일 찬양한다고 합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환우들의 병상을 찾아가 기타를 연주하며 찬양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의사인데 그의 나라와 그 의를 우선순위로 두고 사는 것은 그분이 받은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성령 체험을 한 후 헌신의 삶을 약속했답니다. 그러나 대학 입학 후 주님보다 세상과 더 가깝게 살았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하나님이 보고만 계시지 않았답니다. 2007년 군의관으로 제대할 무렵 갑작스러운 고열로 사경을 헤매었답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질환이었고 치사율도 높았답니다. 그는 병상에서 선데이크리스천으로 살아온 자신을 돌아보며 깊이 회개했답니다. 그리고 이 질병에서 건져주시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약속했고 주님은 그를 고쳐주셔서 나머지 삶은 하나님이 주신 보너스라고 생각하며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는 어르신들이나 말기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찬양하며 산다고 했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열린 교회 온 식구들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은혜 후의 축복을 누리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은혜를 받은 후 축복을 누리려면 덮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술 충만하여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낸 노아를 누가 보았습니까? 22절을 읽겠습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보았습니다. 여기서 보고(라아)라는 말은 단순히 힐끗 지나쳐 보았다는 뜻이 아니고 만족스럽게 응시하였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단순히 쳐다보는 것을 넘어서 즐기며 조롱하며 보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함의 실수는 아비의 하체를 본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그것을 보고 악의적으로 즐긴 데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고하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와약게드'라는 말입니다. '배반하다, 재미로 해설하다, 누설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와우 계속 형으로 노아의 아들 함이 노아의 벌거벗은 수치를 즐기며 보고 바로 이어서 형제들에게 그 아비의 부끄러움을 누설하고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단순이 정보를 전달한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말하면 다른 성도의 수치를 계속 즐기고, 떠벌리고, 화젯거리로 삼은 것입니다. 한 번 했으면 그만 두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소문내고 다니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상대의 흠이나 약점을 잡아내어 들어냄으로 자기를 높이려는 못된 인간의 습성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남 더러운 것 드러낸다고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누워서 침 뱉는 꼴입니다. 자기 아버지 나쁜 사람 만들면 자신의 나쁜 아버지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자회 회사 사장 나쁜 사람 만들면 자기만 잘난 사람이 됩니까? 자기 교회 목사님 나쁜 사람 만들고, 자기 교회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나쁜 사람 만들면 자기만 잘난 사람이 됩니까?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있으면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습니다. 행복하지 못합니다. 목사의 잘못을 과대 확장하여 끝없이 소문을 내면 누가 그 교회에 다니겠습니까?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허물을 떠벌림으로 행복하겠습니까? 이런 것은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사단이 하는 것과 같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25절 같이 읽겠습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함은 아들 가나안과 함께 복합적으로 저주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종들의 종이라는 말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으로 '가장 비천한 종'을 의미합니다. 이 저주는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어 가나안 족속은 여호수아 시대에 셈족인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가장 비천한 종의 형태로 전락되었고(수 9:23), 그 나머지는 솔로몬 시대에 완전 정복당했습니다(왕상 9:20, 21). 그 후에도 칼타고인이나 애굽인들, 페르샤인, 마게도냐인, 로마인 등과 같은 야벳 족속들에 의해 계속 철저히 정복당하였습니다.

 

그런데 함으로부터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전해들은 셈과 야벳은 어떻게 했습니까?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버지의 겉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아비의 수치를 보지 아니하고 덮어 주려는 조심스럽고도 사려 깊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셈은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찬송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라크'는 사람에게 적용되면 '그를 축복하다'는 뜻이 됩니다(신28:6;룻3:10).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셈에게 축복 베푸시기를 원한다는 축복기도입니다. 셈의 후예 가운데 복의 근원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3:15)은 후일 셈의 후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나셨고 그로 말미암아 복음이 온 누리에 퍼짐으로써 성취된 것입니다.

야벳은 창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문자적 뜻은 '야벳에게 넓은 공간을 주사'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야벳 족속의 영토와 인구 뿐 아니라 문명, 문화에도 관계된 복입니다. 구라파의 문화와 과학, 희랍의 철학, 로마의 법정신 등은 야벳의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셈의 장막에 거하며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는 것입니다.

 

함도 셈도 야벳도 똑같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은 후 셈과 야벳의 가문은 축복을 받았고 함의 가문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함은 아버지의 실수를 드러내고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잠언17장 9절은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은혜받은 후 확장과 축복을 누리면서 덮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덮어주시는 은혜의 복을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노아 홍수 사건은 하나님의 덮으시는 은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방주에 넣어 심판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세 아들이 뭔가 다른 사람들보다 착하고 성실하고 열심을 부렸기 때문에 덮어주는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 때문입니다. '덮다'라는 단어 '캇싸'는 단순히 '덮어서 가리다'라는 뜻도 있지만 '죄를 가려서 용서하다'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림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라고 말씀할 때 '가리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캇싸'입니다. 함은 그것을 망각한 것입니다. 셈과 야벳은 바로 인간의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모델인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덮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않고 짐승의 가죽으로 덮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출애굽 당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덮어 살려 주었습니다. 그 덮개가 성막 안에서는 시은소 위의 제물의 피로 나타납니다. 시은소는 은혜를 베푸는 자리입니다. 인간의 실패를 상징하는 십계명 돌 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 항아리를 법궤 뚜껑으로 덮고 그 위에 무흠한 제물의 피를 부어 죄를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덮개가 바로 골고다 언덕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축복을 누리는 삶의 비법은 덮어주는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 덮어줌의 은혜를 로마서 4장 7절 이하에서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은혜 받고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덮어주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 허물 들추며 비방하는 것은 그 사람과는 달리 나는 잘났다는 간접적인 자기 우상화의 표현입니다. 인간이 잘 나면 얼마나 잘았습니까? 약간의 정도의 차이지 다 비슷비슷합니다. 지난 주 유럽연합에서 영국이 탈퇴했습니다. 이것으로 일본의 아베수상이 4년간 200조엔 풀어 만든 엔 저(低)를 만들었는데 4시간 만에 원위치로 돌아가 버렸답니다. 인간의 힘 그렇게 대단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버리면 한 순간에 마른 막대기처럼 변합니다. 교회 다니면서 너무 자기 잘난 맛에 남 정죄하면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보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늘 함의 눈이 되어 사람들의 죄만 찾으며 까발리고 그것으로 재미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런 삶은 결코 축복의 삶이 아닙니다. 직장생활도 교회 생활도 가정생활도 축복된 생활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이단들처럼 목사의 흠만 잡으려고 눈알을 부리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대에 은혜의 축복을 누리겠습니까? 설교를 들으면 심판자가 되어 심판하고 검사가 되어 고소합니다. 목사가 설교를 통해 자신을 비난하고 정죄한다고 생각하여 설교자를 원수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은혜받고 노아의 후반부 350처럼 침묵의 인생을 살지 말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험한 세상에서 방주를 짓는 승리하는 전반부 인생을 살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무슨 일을 하면 늘 심판자과 검사의 자리에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맨 상대의 티끌만 찾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함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지옥에 갈 죄도 용서해 주었는데 정죄의 눈으로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흠잡고 그것으로 말잔치하고 즐거워한다면 결코 은혜 받은 후 축복의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고후5:17~19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이 화목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드러내어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명백하게 드러난 죄와 실수 허물일지라도 덮어 주어 화목하게 하는 사람이 되면 은혜 받은 후 어디에서든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예전에 들었습니다. 몇 만 명 나오는 대형 교회인데 목사님이 어떤 성도와 간음했다는 소문이 퍼졌답니다. 그래서 제직회를 했답니다. 갑론을박하면서 교인들이 목사님을 정죄할 때 한 권사님이 나와서 말씀했답니다. “설령 우리 목사님이 바람을 피웠다고 해도 용서해줍시다. 우리 목사님처럼 설교 잘하고 잘 생기고 학력 좋은 분이 실수로 바람 한 번 피울 수도 있지 그것 용서해 줍시다. 다윗 같은 사람도 바람 피웠습니다. 우리도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더 추악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는 자가 돌로 먼저 치라고 했습니다. 신앙이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더 거론하지 말고 용서합시다.”라고 말해 잠잠해 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함처럼 다른 이들의 부족함이나 실수나 실패를 즐기며 조롱하듯 까발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없는 것도 지어내고 만들어 남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실수나 실패나 부족함을 재미삼아 남들에게 설명하고 누설하고 다니며 자기 잘난 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우리가 남들보다 뭐가 특별하게 잘 나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덮어주심의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간음한 여인의 죄를 드러내고 폭로하며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닙니까? 간음한 여인 죄를 덮어 주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베드로가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갔을 때 그에게 조반을 해주고 사랑으로 덮어 주시며 사명을 맡겼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보십시오. 설교 듣고 목사의 흠만 찾으며 반찬거리로 삼았습니까? 아볼로가 잘못된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그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초청하여 대접하고 덮어 주었습니다.

 

지난주에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장로님의 간증을 신문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이제 90세이지만 원로 장로님으로 거동이 불편하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세 번 투석하러 병원에 다니기 때문에 교회에 잘 나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능교회 창립 멤버이고 원로 장로로 있지만 교회를 잘 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새벽기도를 갈 수 없으니까 TV로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장로님은 “내 생활 중에 교회 가는 것이 제일 즐거워. 교회에 가면 좋지. 전부들 좋아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내 권사님이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건강상 매 주일 교회에 나가지 못하니까 나가지 못한다고 운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보고 싶다면서요. 그래서 모시고 가는 게 힘들지만 교회에 나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연예인교회 설립에 동참하고 동료들을 전도하고 가족들까지 전도하며 바쁜 연예인 생활 중에도 틈틈이 해외선교 활동을 했답니다. 남몰래 고아원과 정신지체 아이들도 많이 후원하고 특히 아프리카 우간다 지역에 학교 설립을 지원하였답니다. 현지에선 '구봉서학교'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자가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장로님은 "그런데 말야. 참 이상하지. 딴 때는 괜찮은데 교회 욕하고 목사님 미워하면 꼭 아프더라고"라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고 기사를 마감했습니다.

 

발락같이 이웃이 범죄하고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비야처럼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고 배 아파하지 말아야 합니다. 타락한 바리새인들처럼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기 위해 선동하며 상대의 고통을 즐거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면서 자기는 잘났다고 자기 우상화를 시도하면 결국 은혜 받아 구원을 받았지만 이 땅에서 삶의 축복은 누리지 못합니다. 성도의 죄를 들추어내고 고소하는 검사 역할을 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성도의 죄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재판관인 하나님이 하는 것입니다. 고소하는 자리에 나아가면 사탄의 역할로 자신을 추락시키는 것이고 재판관의 자리에 앉으면 하나님의 자리를 나아가는 교만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덮어 주고 용서받고 용서하며 사랑하며 함께 은혜의 축복을 누리고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덮어주는 은혜로 은혜 받은 후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은혜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 받은 후의 축복의 삶도 중요합니다. 은혜 받은 후 축복의 삶을 지속적으로 누리기 원하시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남의 죄와 허물 실수를 드러내는 삶이 덮어주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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