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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넘어 확신으로(5) 38년인데 일어날 수 있다고?(요한복음5:6-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1615 추천수:4 218.155.63.46
2024-03-03 13:40:28

회의를 넘어 확신으로(5) 38년인데 일어날 수 있다고?

요한복음5:6-9

오늘 성경에 보면 38년 된 병자에게도 이성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제사를 드리는 양들이 출입하는 양 문이 있었습니다. 그 양문 곁에 은혜의 집이라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은 가끔 물이 움직였습니다. 미국 옐로스톤 국립 공원에 '간헐천'이 있습니다. 호수 안에 커다란 구멍이 있어 가스와 온천수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물이 부글부글 끓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굉장히 높게 솟구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데스다 연못도 간헐천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당시 과학이 발달되지 않을 때이니까 이 연못이 한 번씩 스스로 물결이 흔들리는 현상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천사가 가끔씩 내려와서 이 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물이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려 있던지 낫게 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베데스다가 전국에 소문이 퍼져 그곳에는 3절 말씀처럼 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이 입소문을 타면 확대 재생산된 소문에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 많은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다섯 개의 행각을 지어 놓았습니다. 이 행각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공공건축 양식으로서 일렬로 길게 늘어선 줄 기둥 위에 지붕을 덮은 공간을 뜻합니다.

그런데 상상해 보십시오. 이 연못의 이름은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었지만 실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1등만 성공하는 치열한 약육강식의 시장이었습니다. 경쟁의 집, 일등만이 살아남는 전쟁의 터였을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물이 움직이면 먼저 들어간 사람만 낫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고 삶의 터전입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소리쳤을 것입니다. "물이 움직인다! 물이 솟아오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사람들은 모든 일을 뒤로하고 쏜살같이 물을 향해 뛰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치료가 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주식을 투자하라고 합니다. 누군가 이 사업을 하라고 합니다. 누군가 이것을 먹어 보라고 합니다. 누군가 이렇게 해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누군가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은 다 나아서 집으로 돌아갔겠지라며 자조석인 목소리로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나에게 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어라는 냉소적이고 비관적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는 몇 년 동안 이곳에 나와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38년 동안 베데스다에 희망을 걸고 있지만 고침을 받지 못한 것은 확실합니다. 얼마나 냉소적이고 비관적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그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병 낫기 경쟁에서 늘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공할 수 있는 외적 도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형제가, 친구가 자신을 베데스다 연못에 넣어 주지 않아서 이렇게 38년을 패배자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남 탓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님 때문에 가난하게 살고, 목사님 때문에 은혜 못받고, 교회 때문에 신앙이 냉랭해졌고, 대통령과 정치인 때문에 경제가 이 모양이고, 자식들 때문에 노년에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을 외부에 돌리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빠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성공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체적 조건도, 지적 능력도, 기능적 능력도 성공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 보았는데 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을 내부에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학습성 무력감"에 빠집니다. 패배주의자가 됩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냉소주의자가 됩니다. "뭐 되겠어,", "뭐 변하겠어", "뭐 잘 되겠어", "뭐 사람 다 그렇고, 그렇지" 남편과 아내와 자식을 바라보면서 "뭐 올해도 뻔하지"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 교회에 나와 은혜받았다고 하면 "너도 교회 오래 다녀봐"라고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성도님도 계속된 실패로 인해 이런 일은 도저히 되지 않을 것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요? 이 사람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1. 예수님은 베데스다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방법을 바꾸어 주님의 은혜를 통해 불구에서 일어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육적, 정신적, 영적 불구를 가진 38년 된 병자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세가지 명령을 합니다. 먼저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네 자리를 들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일어날 수 없는 그에게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방법 접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 붙들고 일어나라는 말씀힙니다. 방법의 변화를 통해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만 들어가야 낫는다고 그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을 붙들고 살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은 예수님이 제시하는 방법을 붙들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는 아무도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길이 그에게 가고 있습니다. 누운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병이 오래된 줄 알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무도 자신의 처지, 자신의 아픔, 자신의 눈물, 자신의 고통, 자신의 사정을 몰라 준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그의 아픔을 보고 계셨고, 예수님은 그의 고통과 눈물과 사정을 알고 계셨습니다. 나의 질병, 나의 고통 나의 실패,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주님이 아십니다.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친구도 다 나를 떠나 버린다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가, 혹은 두 가지가, 혹은 세 가지가 동시에 찾아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적 불구가 있다고 인생의 불구가 아닙니다. 사람 중에 한가지라도 불구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내 마음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술중독, 담배중독, 영상 중독이 있습니까? 부채와 질병, 고치지 못하는 성격으로 절망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생명의 한계, 능력의 한계, 인식의 한계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불구가 없다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지요. 얼마든지 예수님의 은혜를 받으면 불구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에 대한 소망과 간절한 바람, 견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헬렌 켈러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육신적 불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3중 장애를 극복하고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여 우등으로 졸업했고, 장애인을 위한 학교, 도서관, 병원을 건립하며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페니 크로스비는 생후 6주 만에 시각장애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한평생 만여 편의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닉부이치치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니까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를 다니면 희망 전도사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외치고 다니지 않습니까? 팔다리는 없지만 대학에서 회계학과 재무관리를 복수전공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지 없는 삶(Life without Limbs)'이라는 장애인 비영리 단체를 만들고 세계를 무대로 강연하고 있지 않습니까?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경, 헬렌 켈러, 마하트마 간디, 테레사 수녀,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위대한 지도자 3백 명을 분석해본 결과 그들 중 25%는 심각한 심리적 장애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 중 50%는 유년 시절에 학대를 받았거나 빈곤한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불구는 있습니다. 닐 루덴스타인의 아버지는 교도소 경비원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식당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종업원이었답니다. 그런데 닐 루덴스타인 박사는 하버드 대학의 26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찾아 오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예수님을 이런 분으로 믿으십니까? 다는 아닐지라도 은혜을 받으면 내가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일어나 자리를 가지고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간절히 바라면 예수님이 은혜만 주신다면 어떤 불구도 극복하고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한센 씨 병 환자가 일어난 것처럼, 남편을 먼저 보내고 외아들 하나를 의지하고 살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만나 일어난 것처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질병으로 죽어갈 때 예수님을 만나 일어난 것처럼 우리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은 "나는 소생할 가망성이 없다."라고 절망하지 말고 예수님이 은혜를 주시기만 하면 "나는 아직도 소생할 수 있는 가망성이 있다."라고 희망을 가지고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은혜만 주시면 38년 풀리지 않던 숙제가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기만 하면 38년의 육신적 불구, 정신적 불구, 영적 불구를 극복하고 일어나 행복해질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생각의 올무의 자리를 가감하게 들고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안식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사람이 지속적으로 실패하는 경우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이 가슴 깊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적인 불구, 정신적인 불구, 영적인 불구를 앓고 있는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질문을 했겠습니까? 이 질문은 어쩌면 병자에게 대답이 필요 없는 어리석은 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도를 가지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는 베데스다에 누워있기는 하였지만 이미 38년 동안 한 번도 그 연못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입니다. 들거에 누워 마음이 패배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냉소주의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일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강력한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어나 걷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참 안식은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다는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38년 동안 실패했던 마음 바꾸라는 것입니다.

<실패에서 성공으로>라는 책을 쓴 프랭크 베트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구선수였는데 부상으로 야구선수 생활을 접어야 만했습니다. 살기 위해 보험 세일즈맨이 되었습니다. 29세 때 세일즈맨으로서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생명보험회사에서 근무하던 20년 동안 전국 5위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실패에서 성공으로 전환한 동기를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보험을 팔려고 노력했지만 성과 없이 여러 날을 구인광고에 응모하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회사에서 그만두려고 짐을 정리했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사장과 세일즈맨들의 회의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답니다. 영업사원들에게 탤보트 사장은 "영업이라는 일은 결국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밖에 나가서 하루에 네댓 명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영업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마치 태양이 갑자기 구름을 비집고 나와 쨍하고 비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이봐, 프랭크, 너는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잖아. 너도 매일 밖으로 나가서 네다섯 사람한테 자신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할 수 있어.' 자신에게 말한 것입니다.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생각을 성공할 수밖에 없는 생각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하루에 적어도 네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2개월 동안의 모든 방문 결과를 완벽하게 기록해 두었답니다. 그 결과 그의 영업은 70%가 첫 번째 면담에서, 23%는 두 번째 면담에서, 그리고 7%는 세 번째 면담에서 성사된 것을 알았고 자신의 시간 50%가 그 7% 때문에 소비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발견을 토대로 그는 첫 번째 면담과 두 번째 면담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고, 성공적인 세일즈맨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도 사냥에 성공하는 확률은 대략 스무 번 중 한 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물어 보십니다. 진정 낫기를 원하느냐? 전도에서, 성격을 고치는데서, 습관을 고치는데서, 일에 성공에서, 공부에서, 직장에서 진정 낫기를 원합니까? 진정 부자되기 원하십니까? 진정 질병에서 치유되기 원하십니까? 진정 마을 교회가, 구역이 내가 맡은 부서가 부흥되기를 원하십니까? 누워있는 생각에서 일어서는 생각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왜 "네 자리를 들으라"라고 두 번째 명령을 했겠습니까? 왜 이 말씀을 구태여 했을까요? 그냥 일어나라고 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구태여 왜 문제가 될 만한 말씀을 했을까요? 9절을 보십시오. 그날이 안식일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이들이 시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침상을 들고 일어나 걸은 것이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는 그 일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의 4계명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은 철저히 지킨다고 총 39개 조의 안식일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죽어가는 사람도 치료하지 않고 간단한 응급조치만 했습니다. 그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침을 뱉어서 땅이 파이면 밭을 간 것으로 간주해서 안식일을 어긴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굳이 침을 뱉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바위에다 침을 뱉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천 보 이상을 걷지 못했습니다. 손수건도 나르지 못했습니다. 병자를 침대에 누인 채 운반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침대만 운반하는 것은 노동이라 생각하여 안식일 법을 어긴 것으로 죄로 취급했습니다. 39번째 규정이 물건을 옮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너에게 안식일 법을 어기게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줄 알고 어떻게 합니까?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그들이 예수님을 박해합니다. '디오코'라는 말은 사냥개를 앞세워 범법자를 추적하고 그를 끝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괴롭게 한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십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안식일의 본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안식일 날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과 동일시하며 안식일의 주인인 것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12:8). 그리고 안식일의 본질은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 병든 자를 고침으로 그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참 안식은 바로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참 안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2:16-17)"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말씀합니다. 그 안식일의 실체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진정한 인생의 안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길 원할까요?

그가 들었던 자리, 들 거, 침상은 그가 38년 동안 누워있었던 안식일로 대표되는 율법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38년 동안 율법의 종이 되어 살고 있는 불구가 된 유대인, 그 율법에 노예가 되어 있는 유대인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우리 성도님들에 네 자리는 무엇입니까? 고정관념, 편견, 아집, 자신을 절대화하는 자기 우상화 등 자신을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병든 마음입니다. 주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 안식,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생각을 바꾸어야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육체적 병만 낫았다고 참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 자유를 주신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셔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우리가 믿는 분도 예수님이시고, 우리의 모델로 삼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자꾸 사람을 보고, 제도를 보고, 일어난 일을 보며, 부수적인 것을 보며 냉소적이되고 학습 무기력증에 빠져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옳은가 그른가? 맞는가 틀린가? 지켰느냐 안 지켰냐?"에만 관심을 가지면 참 안식이 없습니다. 내가 심판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심판자는 예수님이십니다. 마음이 내가 기준이 되어 나를 도와줄 사람, 내 능력 등에 초점을 맞추면 끝없는 비교주의의 늪에 빠지기 때문에 어떤 것이 주어진다해도 참 안식과 참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의지해야 할 것이 아니라 들고 다스리여야 할 들거가 무엇입니까? 행복을 줄 것라고 생각하는 물질입니까? 미래를 활짝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입니다. 바른 판단을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성입니까? 자신을 왕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윤리적 삶입니까? 38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붙들고 있는 침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안락을 줄 것이라고 붙들고 매달린 침상이 무엇입니까? 베데스다 연못입니까? 어떤 교회가, 특별한 목회자가 참 자유와 신앙의 행복과 진정한 안식을 주는 베데스다 연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대기업만 우리 가정에 경제적 자유와 행복과 진정한 안식을 주는 베데스다 연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일류 대학만 우리 자녀들에게 자유와 행복 진정한 안식을 주는 베데스다 연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문제는 지금 내가 누워있는 내 침상입니다. 다른 곳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님의 마음을 의지하는 근본적인 침상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기준이 되는 침상이 무엇입니까?

그 무거운 짐을 다 예수님께 맡기고 예수님만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과 안식을 주십니다. 아무리 화려한 침상에 누워있다 해도 예수님 없는 인간은 결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없는 사랑은 끝없지 채워지지 않은 사랑의 결핍으로 갈등과 다툼과 전쟁을 치르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결핍을 극복하고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이 만든 올무로 자유를 제안하고 평안을 내팽개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참 안식을 누려야 할 그가 안식에서 제외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병자는 육신적 안식 뿐 아니라 정신적인 안식도 못누렸습니다. 경제적 안식도 못누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모든 올무에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예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는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행동을 바꾸어 죄의 노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걸어가라"고 세 번째 명령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계속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계속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행동의 전환을 요구하는 말씀힙니다. 사람들의 소문에 따라 고침받기 위해 그곳에 계속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행동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성에 순종하는 행동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말씀에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9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말씀에 순종할 때 일어난 기적입니다. <성공의 비법>이라는 책을 쓴 위르겐 횔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계획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서 이를 72시간 내에 실행하지 않았을 경우 이 생각이나 계획이 실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라도 실행에 옮기는 경우는 겨우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각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들으면 즉각적으로 행동을 전환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말씀에 불순하여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를 방해하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예수님은 어디에서 다시 그 사람을 찾아갑니까? 명절에 성전에 한두 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시 성전에서 누구를 찾아갑니까? 38년 병에서 고침 받은 그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는 38년 동안 성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은혜의 집에서 은혜를 누리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근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를 예수님이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메케티 하마르타네" 이 말은 "더 이상 계속해서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한 38년의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이 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죄는 한계를 가져오게 되고 한계는 바로 결핍이고 타락을 한 인간은 사랑의 결핍으로 갈등과 다툼과 전쟁을 치르고 사는 것입니다. 지혜의 결핍으로 내일을 두려워합니다. 자비의 결핍으로 피터지는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결핍으로 원수가 되어 시기하고 질투하고 사는 것입니다. 물질의 결핍으로 거지처럼 사는 것입니다. 건강의 결핍으로 고난, 고통이 다가옵니다. 결핍으로 육신의 병고와 심리적 아픔과 사회적 갈등과 가난이 다가 오는 것입니다. 마치 뿌리 뽑힌 나무처럼 아직은 시들지 않았지만 서서히 시들고 나중에선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결핍을 극복하고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질병이 다 그 원인이 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섭리로 겸손하게 하기 위해 주신 질병도 있습니다(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나사로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걸린 질병도 있습니다(11:4). 욥처럼 사단의 시험으로 질병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2:7). 때로는 영적으로 훈련시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부주의로, 잘못된 습관으로, 전염병으로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센씨 병에 걸린 모세의 누이 미리암처럼(12:1-16), 교만하다 발에 불치의 병이 든 아사가 왕(대하 16:12-14)처럼, 제사장만이 하는 제사를 드리다가 한센씨 병에 걸린 웃시야 왕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로 말미암아 걸린 질병도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614-16절에서는 질병의 원인에 대하여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찐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은 죄로 인하여 질병에 걸렸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청소년 사망원인 중 1위인 질병이 에이즈는 주로 죄로 인하여 감염되는 병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사람의 질병도 죄의 결과로 발생된 질병이었습니다. 죄가 인간을 비참하게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38년의 인생을 완전히 짐승취급도 못받는 인생을 살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행복해지고 참 만족을 누리려면 육신의 질병만 고쳐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질병을 고쳐야 합니다. 죄는 단절을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과 단절을 만들고, 인간과 단절을 만들고, 자신과 단절을 만들어 버립니다. 진정한 행복과 단절을 만들어 버립니다.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중독이 되어 그 감옥에 갇혀 가두어 버립니다. 작은 불씨라고 놓아 두면 온 산을 태워 버립니다. 죄의 심각성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인리히 법칙이 있습니다. 1:29:300의 법칙입니다. 눈을 치우지 않았을 때 중상자가 1명 나올 경우 경상자는 29, 경미한 경우는 300명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죄로 말미암아 질병에 걸려 38년 동안 인생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린 그 죄를 누가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은 것이야말로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 양문을 통과하여 영원한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어떤 죄라도 용서함 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구원시키려도 오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넘어졌던 그 죄가 우리의 숨통을 끊으려고 올가미를 메고 있는데 그 올가미를 끊을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죄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구멍 난 그릇에 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진정 영육 간에 건강한 삶을 살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5:32)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은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24절을 같이 읽에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고 참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실 때 걸어가라는 말은 계속 걸어가라는 말입니다. 한 번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렇게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 죄의 노예에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은혜로 선택해 주시는 구주이십니다. 가난하다고, 무식하다고, 추하다고, 무능력하다고, 인기가 없다고, 힘이 없다고, 병들었다고, 늙었다고 세상사람들이 용도 패기하여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고 찾아오시는 메시아이십니다. 나의 질병, 나의 고통, 나의 아픔, 나의 실패, 나의 사정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친구도 다 나를 떠나 버린다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행복해지고 참 만족을 누리려면 육신의 질병만 고쳐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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