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7) 화평케 하는 자
마5:9
내일이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입니다. 그러나 전쟁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지금 평화가 없습니다. 러시아는 74%정도가 동방정교입니다. 기독교의 일파인 동방정교는 러시아의 국교입니다. 우크라이나도 67%가 동방정교입니다. 평화를 우선시하는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죽이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도시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전쟁의 성입니다. 지난 3천 년간에 걸쳐 20번 이상 주인이 바뀌었고, 성벽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재건되었던 것만도 10번이나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곳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성지로 전쟁의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1. 평화에 대한 소망
사람들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가인과 아벨의 싸움을 시작으로 해서 오늘까지 줄곧 싸워왔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많은 전쟁을 했습니다. 윌(Will)박사와 아리엘 듀란트(Ariel Durant) 박사에 의하면 지난 3421년 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은 기간은 불과 286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J. 라이트 교수가 ‘전쟁에 관한 연구’(A Study of War)라는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에 의하면 1480년부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461년 동안 영국에서 78회, 프랑스에서 71회, 스페인에서 64회, 러시아에서 41회, 독일에서 23회, 중국에서 11회, 일본에서 9회, 미국에서 13회 등 모두 300회가 넘는 전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지구촌 역사에는 91.6%가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100년, 20세기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서 약 9억이라고 하는 인구가 살상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은 국가 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 간에, 민족 간에 전쟁이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뿐이지 기업 간에, 심지어는 교회 간에, 가족 간에도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뿐 아니라 개개인의 마음속에서도 증오, 시기, 질투로 인하여 전쟁이 벌어집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매일 전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에서 여론 조사를 하면서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전쟁이 없는 평화라고 말할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요?”라는 여론 조사를 했을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평화라고 대답했답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인간을 창조하고 에덴 동산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평강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롬 15: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라고 하셨습니다.
2.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 이유
왜 인간은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전쟁의 노예로 살고 있을까요? 왜 전쟁을 일으킬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미국 예일대 역사학교수 도널드 케이건은 <전쟁과 인간>에서 "인간이 전쟁을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동기는 경쟁자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 이익추구, 명예추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정욕, 탐욕, 욕심 때문입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48장 2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이사야 59장 8절에도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7장 25절에서 "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왜 사람이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까?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가로막고 있는 죄 때문입니다. 죄악의 담이 가로막고 있는 한 인간은 평화를 근본적으로 누릴 수 없습니다. 문제는 죄인데, 이 죄를 인간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며 탐욕을 채우려고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은(약4:4; 엡2:1-3)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육체가 하는 분명한 일에 대하여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열함, 투기’ 등을 말씀합니다(갈 5:19-20). 하나 같이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것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기 전까지는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우리의 힘으로 정욕과 탐심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3.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 방법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없는 평화를 주시기 위해 어떤 방법을 선택하십니까?
이사야서 9장 6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여기 "평강의 왕"은 예수님 탄생 7백여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평강의 왕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7절에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평강의 왕은 예수님이시고 여호와께서 '평화를 이루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열심히 아니라 "여호와의 열심이"이 이 평화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9장 9-10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라고 예언해 주었습니다.
누구를 통해 이 평화를 이루어 주십니까?
누가복음 2장 14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가 목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두려워하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라고 말씀하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바로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9절을 보십시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19:38)”라고 찬양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찬양을 하는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19: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평화를 실현시키십니까? 평화를 해치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예수님을 통해 해결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완변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라고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는 예수님의 피로 평화가 주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사람들은 죄의 본능 가운데 있을 때 결코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죄의 본능인 이기적 교만과 질투심은 평화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죄의 본능인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평화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딤후 2:23에서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 십자가에 화평의 재물로 바치게 함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로마서 3장 23-25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요한1서 2장 2절에서는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1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기 때문에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4.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는 다는 의미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일곱 번째 복을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화평”이라는 말은 구약의 “살롬”과 같은 말입니다. 유대인은 서로 만나면 “살롬”이라는 인사를 했습니다. 평화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에게 “샬롬”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분쟁이 없기를 바라는 정도가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선하고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샬롬은 우리가 바라는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평하면서도 동시에 축복이 내려기를 기원하는 인사입니다. 샬롬이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모든 복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오는 평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입니다. 우리 말로는 화평, 평화, 평안 등으로 번역이 됩니다. 에이레네는 전혀 부족함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완전한 복지, 평온, 번영, 그리고 행복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둘째는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의미에서 화해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단순하게 살롬이나 에이레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를 보면 “에이레노포이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단어는 형용사로 신약성서 전체에서 단 한 번 여기에서만 쓰인 매우 독특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평화’와 ‘행하다(포이에오)’라는 단어들의 합성어로서 단순히 마음속에 화평을 가진 자나 평화로운 자, 또는 화평을 사랑하는 자를 가리키는 수준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화를 만드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평안과 화목을 구축하는 사람입니다. 영어로는 피스메이커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라는 말은 존재의 변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됨을 의미합니다. 문법적으로는 신적인 수통태 형식으로 쓰여져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 하나님과의 평화와 우정이 용납됨을 의미하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짐을 의미합니다.
이분이 누구이겠습니까? 당시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평화가 없을 때였습니다. 그들을 물리치는 메시아를 기다릴 때였습니다. 그 당시 칼로 적들을 죽이며 평화를 누리고자 했던 혈맹당원이겠습니까? 613개이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살롬을 누리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이겠습니까? 배고품고 질병 때문에 찾아온 군중들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겠습니까? 아니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막힌 담을 헐어 버리고 완전한 바른 관계 살롬을 이루신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복지, 완전한 평온, 완전한 번영, 완전한 행복을 주시는 분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의 죄, 반역과 배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어 평화가 없는 분열된 것을 다시 이전 상태로 돌려놓아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만드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화평케 하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성경 갈라디아서 5:20-21을 찾아 읽어 보십시오.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분쟁하고 시기하고 분내고 당 짓고 분리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이사야 57:20,2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진정한 평강이 없습니다. 마음 속에 불안과 불만족과 두려움이라는 존재적 불안, 관계적 냉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관계적 평화가 회복되지 못한 악인은 하나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컬음을 받을 것"이란 말은 수동태인데, 내가 일컫는 게 아니고 남들이 일컬어준다는 말입니다. '아, 저 사람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구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완전히 실행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은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시편 2편은 메시아 예언시인데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는 메시아,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예언해 주시고 있습니다. 참 평화를 주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분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예언해 주시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근본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라고 했는데 바로 화평케 하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5. 인간은 자력으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없음
인간이 평화가 파괴되고 있는 곳에서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당시 열심당원들은 칼로 적들을 죽이며 자신들만이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상정해서 그렇게 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비폭력 평화주의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쳤을까요? 아닙니다.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열심당처럼 예수님이 강력한 힘으로 로마를 제압함으로 그들에게 평화를 주시길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력을 통해 메시아 나라를 건설하여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만 참 이스라엘인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될 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율법으로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평화를 주지 못하고 다툼만 준 것입니다. 디도서3:9절을 보면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니까? 예수님이 상종하지 말아야 할 문둥병자를 창기를 세리를 친구처럼 대하니까 그것을 기준으로 예수님에게 전쟁을 전포합니다. 잡아 죽이려고 예수님 생애 내내 스토킹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서2:15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한 것처럼 진정한 화평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에베소서2:16절에서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으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평케 하는 율법을 100% 잘 지켜 피스메이커가 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받게 된다고 말씀했을까요? 이런 사람이 참으로 복이 있다고 말씀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어느 정도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까? 너무 상대적이어서 그 기준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탐욕이 발동하면 누구나 다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가 될 수 있는데,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분쟁과 다툼과 분열과 분란과 갈등은 만드는 죄가 없어야 하는데 죄없는 인간이 어디 있고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 가지라도 어기면 화평게 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화평을 이루기 위해 화목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희생 제물을 드렸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화평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12-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19절에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화목케 하신 분으로 영접하고 믿어야만 우리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화목하게 하러 오신 분임을 영접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화목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통하여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고 화목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화평하게 하는 직책을 받았기 때문에 피스메이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행복한 자들이고 이런 사람들을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 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20절에서는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선언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행해 즉 오늘날 우리 성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된 자들이기 때문에 '너희는 화평케 하는 자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적으로 결합했으니까 우리에게도 '너희들은 화평케 하는 자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서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화평하게 하는 성도, 동인한 시민 하나님의 권속이 된 것입니다.
6.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살아야 할 신앙인
그러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 5:1절을 찾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1)" 우리 주님께서 화평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추방되었습니다. 인간과의 화평도 깨졌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되어 얼마나 평화롭게 살았겠습니까?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900년이 넘도록 살았는데 틈만 나면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고? 왜 당신이 말리지 않았느냐고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아들들은 결국 화평을 깨뜨리고 죽이는 일까지 합니다. 예수님이 화목 제물이 되어 화평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자신과의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니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죽음을 깨뜨리시고 사흘째 되는 날 부활하셔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평안, 화평, 평화,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있습니까? 탐욕의 노예가 되어 걱정과 근심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까? 질병으로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까? 가난으로 다툼과 갈등으로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 한 분으로도 평안과 평화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웃과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5:23-24에서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평화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죄라고 하는 장애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라"(요 일2:2)로 드려졌습니다. 욥기 22장 21절에 보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2)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통해 화평하게 되었으니 화평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피스메이커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나 타인이 볼 때 저사는 트러블메이커가 아니라 피스메이커라는 것을 인정받고 살아야 합니다. 대립과 분열을 일삼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같이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풀어 쓰자면 '화평케 하는 복된 자여,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참 복되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의역할 수 있고 ‘예수 믿어 복받은 자는 화평케 하는 자인데, 그럴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이미 복을 받아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은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갈 때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 답게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1절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화평을 지키기 위해 구하고 따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과제입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여러 세력들에 대항하여 평화를 고수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의 삶의 목표입니다. 신앙인은 갖가지의 질병, 가난, 사회적인 불의와 사고, 이데올로기로 인한 갈등, 인종간의 갈등, 계층간의 갈등, 지역갈등, 노사갈등, 세대갈등, 진보와 보수의 극한 충돌, 종교간의 갈등, 더 나아가 국가간의 갈등,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지도록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만들었으니 예수을 통해 화평하게 하는 하나님이 자녀가 된 신앙인은 예수님의 사역을 본 받아 하나님과 이웃과의 화평을 지키며 살 뿐 아니라, 이웃들이 그렇게 살도록 인도해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런 화평의 사역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화평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주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화평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약3:17은 화평은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지혜로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할 수 있는 한 모든 다툼을 피하고 더 나아가서 타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을 수습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민에 대한 평화의 사자로서, 미움과 앙숙을 불식시키는 자들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평화를 파괴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주어진 평화를 확산시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화목할 수 있다면 우리의 부르심 안에서 분쟁하고 다투는 모든 상황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20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었으니 이제 겸손해야 합니다. 화평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일에 만족해야 합니다. 교만은 자신의 권리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원인이 되고, 다툼을 일으킵니다. 성경은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잠13:10)”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는 선하거나 악한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래 참음은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와 불쾌감 그리고 경솔함 등을 참는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직분을 가지고 피스메이커로 살았던 아브라함은 롯의 목자들과 함께 거하지 못하고 서로 다투게 될 상황이 되었을 때, 그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면서,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8-9)하며 자신의 권리를 양보했습니다. 화평의 사역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분노하셨을 때 중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화평을 가져고게 하였습니다(시106:23; 출32:10-11). 아론도(민 16:47-48), 다윗도 그렇게 하였습니다(삼하 24:17). 이사야(사 59:16; 63:5)와 예레미야(렘 15:7; 12:11)와 에스겔(겔 22:30-31)도 화평의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 화평을 복을 빼앗아가는 신성모독이나 학대, 믿음에 대한 경멸, 간음, 전쟁 등 무수히 많은 죄악들로 가득한 이 땅에서 화평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낮은 울타리>라는 잡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밖은 벌써 어두웠고 몹시 추웠습니다. 예닐곱 살쯤 된 조그만 사내아이가 상점 정문 밖에서 서 있었습니다. 신발도 신지 않았고 옷은 걸레나 마찬가지인 상태였습니다. 아무도 그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그 길을 지나가던 한 여자가 아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상점 안으로 들어가 새 신발과 따뜻한 옷을 사 주었습니다. "자. 이제 집으로 가서 즐거운 명절을 보내렴." 그러자 아이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보며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하나님이세요?" 여자는 미소를 짓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냥 하나님의 가족 중 한 명이란다."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아주머니가 하나님의 가족인 걸 저는 벌써 알았어요."
3) 우리가 이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직책을 받았으니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린도후서 5:18,19)”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2:2)"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만 화평을 누리면 안됩니다. 전쟁의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시아야서 52장 7절에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의 소식, 복음을 전하는 발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피스케이커로 변화되려면 화평케 하러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제대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지옥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 있어도 화평이 없다면 그곳은 지옥과 같은 곳이지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불완전한 평화이지만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전한 평화가 영원히 이루어 집니다. 이 세상에는 마귀와 죄가 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평화를 계속 누릴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재림하시고 모든 악을 멸하실때만이 영원한 평화가 이루어 집니다(사 2:1-5,사 35:1-2,사 35:5-6,사 65:17-18,계 21:3-4,벧후 3:11-13). 주님 재림하시는 그날 마귀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탐욕이 노예가 되어 피 터지는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같은 조상을 모시고 있는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증오를 품고 서로 죽이는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참 진리를 모르고 화평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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