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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5) 긍휼히 여기는 자(마5: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1705 추천수:4 218.155.63.46
2023-12-10 04:34:04

행복한 사람(5) 긍휼히 여기는 자

5:7

 

오늘은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에 대하여 주님이 주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당시 긍휼히 여기는 것이 멸시되던 시대에 이 말씀을 잘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 시대는 시대정신이 참으로 잔인한 시대입니다. 당시 영화들을 보면 얼마나 잔인했는가를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네로 황제가 신앙인들을 사자에게 물리는 것을 보면 군중들이 원형극장에 앉아 환호합니다. 네로는 예수님 후의 사람이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인간성이 상실된 문화는 별반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플라톤 아이스토텔레스 세네카 같은 철학자들이 있었지만 오직 건강한 자녀 많이 키울 수 있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네카는 건강하게 출생하지 못한 사람은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을 매우 이성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대적인 정신의 지배를 받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의 사상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호세아 66절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했는데 그래 긍휼이 여기는 자가 복이 있어 그런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어라고 받아들였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긍휼"은 사전에 보면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준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신앙인 가운데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긍휼이 여기는 자의 복은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도덕적으로 복 있는 자는 긍휼히 여기는 자이고 긍휼히 여기는 자만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일까요?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자만 복을 받는 다는 말일까요?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되고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가 된다는 말일까요? 이 말씀을 기원이 아니라 감탄문입니다. “복이 있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이라고 감탄하며 선언하는 것입니다.

 

1. 이 말씀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긍휼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언어는 외연과 내포가 있어 그 말이 어떤 상황 어느 시대 누구에게 쓰였느냐에 따라 그 말이 포함하는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헬라어 원문은 엘레에몬이라는 말로 쓰였습니다. 이 말은 형용사인데 엘레에오라는 자비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입니다. 저는 대조해 보지는 않았는데 학자들에 의하면 이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LXX)역 성경에 30회 나오는데, 그 중에서 25회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으며, 4회는 인간을 가리키고 있다고 합니다(11:17; 19:11; 20:6; 28:22). 원문으로 신약 성경을 찾아 보면 신약성경 전체에서 단 두 번만 쓰였습니다(5:7; 2:17). 뜻은 자비로운, 인정이 많은, 긍휼히 여기는입니다. 그런데 긍휼히 여기는 자에서는 형용사를 굳이 쓰고 있는 것은 형용사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누구를 긍휼히 여기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상태에 있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구약 성경 히브리어는 라하밈헤세드로 쓰여졌습니다. ‘라하밈슬퍼함’, ‘애통등의 뜻이 있는 반면, ‘헤세드긍휼’, ‘자비의 의미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라하밈(레헴)’은 어머니의 모태를 의미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갖는 측은 지심을 상징화시켰을 것입니다. 룻기에서는 이방 여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세드로 표현하고 있고, 호세아에서는 창기를 향한 하나님이 사랑을 헤세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 이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를 보면 문맥에 따라 세가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팔복을 이해할 때 모세가 십계명을 말씀하는 것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나라로 상징화된 가나안 땅에서 지켜야할 기본법입니다. 나라가 이루어지려면 주권, 백성 땅이 기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통치자로 오셔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영원한 천국에 참여한 자들의 복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통치 개념으로 8복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지난 주 에 대하여도 그런 관점으로 보았지만 오늘 긍휼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긍휼입니다.

시편 103:8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바클레이는 헤세드는 구약성경에서 150회 이상 나오며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의 90 퍼센트 이상이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행동에 관하여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성품으로 긍휼, 하나님의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행동으로서 긍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낳을 때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1:58)”라고 할 때 사용한 긍휼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2:4)”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벧전1:3)”라고 이 말을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대부분 자비’, ‘은혜를 의미하며 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합니다(22:27; 34:6; 대하 30:9; 85:15; 102:8; 110:4).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는 것(15:13), 비를 내리게 하시는 것(37:13), 등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을 향한 구체적인 도움이요, 구원이며, 용서입니다(19:19; 24:27; 삼하 7:15; 22:51; 106:7).

 

둘째, 인간이 인간에게 베푸는 긍휼입니다(18:33 16:24). 하나님이 뜻을 성취하는 인간으로서의 긍휼입니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것으로 긍휼은 타인이 슬퍼하면 슬퍼하고, 애통하면 애통하는 공감의 심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이 당한 것처럼 슬퍼하도록 만드는 긍휼입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은혜로 주시고 그들이 긍휼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긍휼을 베풀어야 할 대표적인 사람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입니다. 출애굽기 2221-27절까지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이렇게 긍휼을 행하라고 말씀하면서 하나님은 그 이유를 나는 자비로운 자즉 긍휼의 하나님인 것을 말씀합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 제도를 만들어 주면서 긍휼을 행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은 긍휼을 해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근본적으로 상태가 죄악 가운데 출생하여 긍휼을 행하는 자로 태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긍휼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긍휼을 행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긍휼의 수준에 이를 수 없고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일만달란트 빚진 사람에게 임금이 탕감해주니까 기뻐하던 자가 집으로 가다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그 빚을 갚지 못하자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실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2:13)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긍휼 없음으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직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로마서 9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역사 속에 하나님이 긍휼에 참여할 자를 만드는 방법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게 하지 위해 하나님은(3:12) 하나님은 인간이 긍휼이 여김 받는 길을 역사 속에 제시하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나타나 하나님의 긍휼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을 성경에서 쓸 때 세 번째 의미가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성품이 실제 역사 속에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의 행함으로 나타나는 긍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21)”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어떤 예언을 해 주었습니까?

이사야 611절을 찾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이 말씀은 누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까?

누가복음 418절을 찾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긍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은 예고해 주었습니다. 호세아는 예수님과 같은 말입니다. 호세아 16절을 보면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4절에서도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223절을 보면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긍휼이 불붙듯 하도다(11:8)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예수)가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 30을 갖고 가서, 기어코 아내를 사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미가서 718-19절에서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일을 역사 속에 시행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마태복음 936절을 보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세 가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며, 고치시는 사역을 말씀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에 긍휼 사역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불쌍히 여기고 민망히 여겼다는 말씀이 많이 복음서에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보실 때 그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그가 귀족이든지 천민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살면 지옥가는 인생들을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고통중에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병든자,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 장애인, 귀신들린 자, 소외된 자, 홀로된 자 등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주시는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6시간 동안 처절한 고통 가운데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저희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저주받아야 할 마땅한 인간을 저주받지 않고 복을 받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2:6-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했는데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후 1:16)"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모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긍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이 실현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 죄인과 동일시하며 인간과 똑같이 시험을 당하였고(4:15) 시험을 당하면서도 사람을 도와 주었습니다(2:18). 그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긍휼히 여긴 것처럼 너희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나는 자다. 그가 복 받은 자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여기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누구일까요?

팔복에서 복된 사람, 행복한 사람은 성도를 말합니다. “너희즉 당시 예수님께 찾아온 제자들과 무리들을 말합니다. 불신자를 놓고 남을 불쌍히 보고 느끼고 도와주는 사람이 복된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긍휼을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긍휼을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헤세드 차원의 긍휼입니다. 이러한 긍휼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천성적인 긍휼이 아니라, 태양 빛을 받아 비추는 달과 같이 하나님의 긍휼을 직접 체험 한데서 나온 그러한 자비적 행동입니다. 누군가의 긍휼을 받음으로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긍휼입니다. 이 헤세드는 우리 말로 번역되었을 때 약 90%'긍휼'로 번역했고, 40회 정도가 '인애' '사랑과 자비'로 번역했습니다. '긍휼'이란 말은 주로 죄로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질 때 '긍휼'로 표시했습니다. 6212절에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할 때 그 인자함이 헤세드입니다. 긍휼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입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긍휼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공유적 속성으로 비슷한 긍휼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대로 남을 긍휼이 여기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 자에게 주권적으로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33:16,18,19 9:14,15). 로마서 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는데, 그런 범죄한 인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6:23). 그런 죽을 죄인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해 주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긍휼이 여기다긍휼을 베풀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긍휼이 있는 자, 긍휼을 아는 자라는 그런 의미의 형용사로 구성된 어구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여! 그대들은 긍휼을 알고, 긍휼이 있는 자들이다. 그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므로.’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는지 에베소서 21-7절 이하를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는 허물과 죄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세가지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살았습니다. 사탄의 종노릇하고 산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는 긍휼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밖으로는 세상 풍조를 따르고, 안으로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 것입니다.

이렇게 산 우리는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해 주었습니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밝히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시게 함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긍휼에 동참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왜 그렇게 긍휼을 베풀어 주었습니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여기에서 자비하심으로써는 긍휼하심으로써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는 목적에서입니다. 우리의 긍휼로 우리가 긍휼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긍휼하기 때문에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없이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하여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915절에서는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조금도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3:5)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1:30-31절에서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보니까 주님의 긍휼을 입을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구원 입기 전에는 주님의 긍휼을 도무지 모르던 사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보니까 주님의 긍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자였는데, 지옥갈 인생인데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달리심으로 우리에게 크신 긍휼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향하여 긍휼이 여기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이니다.

마태복음 1521절 이하를 보면 가나안 여자가 소리질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키리에 엘레이손)”라고 부르짖는 모습이 나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은 긍휼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의 정직한 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여인에게 긍휼이 부어진 것은 그의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완전한 긍휼이 부어지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는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라고 말씀하실 때는 믿음이라는 것을 전제로 먼저 예수님을 통하여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로서 그 긍휼로 긍휼히 여기는 자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927-29에 나오는 두 소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믿느냐고 물어보고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통로로 긍휼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긍휼이 아니라 주님이 공급하시는 긍휼을 먼저 받고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와야 할 긍휼은 내 자신의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기 전에 내가 긍휼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도 긍휼히 필요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4.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자는 어떤 복을 받을까요?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라는 미래적인 표현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로 번역된 엘레에데손타이엘레에오의 직설법 미래 수동형으로 소위 신적 수동태입니다. 미래형이 사용된 것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 종말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종말 심판 때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4,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 긍휼을 베푼 지를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긍휼로 갚아 주시며 영원한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긍휼 행함이 종말의 긍휼 얻음의 보증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118절에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한 것처럼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비, 곧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3절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결국 최후 심판 때 주어질 긍휼은 지금 여기서 받아 체험되고 또 이웃과 함께 나누는 그 긍휼의 온전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의 복은 나누어 생각하면

첫째, 긍휼을 잃어 버리고 지옥에 가고 지옥처럼 살아야 할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3:12; 11:6-7).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부어주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긍휼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부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값없이 부어주시는 긍휼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든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다윗의 고백처럼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86:15)”라고 기도하며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내 힘으로는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긍휼로 고통중에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1:27; 6:6; 13:16; 58:5-6 등등).

재판관은 긍휼로써 판결하고 정치인은 긍휼로 다스리며 목사는 긍휼로써 설교하고 부자는 긍휼로 청지기 직을 감당하며 상인들은 긍휼로써 매매하고고, 고용주는 긍휼로써 고용인을 일하도록 하며, 고용인은 긍휼로써 고용주를 섬기는 것이 얼마나 행복입니까?

셋째, 우리가 보는 것(15:9)에 대하여, 듣는 것에 대하여(1:3-4; 2:5), 느끼는 것에 대하여(고후 1:8; 1:4) 긍휼의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 복입니다(고후1:3). 누가복음 636절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신는 데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닮을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원수같은 인간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힘으로 잠깐 사회 그늘 진 곳에서 자원봉사하고, 환경 운동을 하며, 자애우를 위해 봉사하는 것 잠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 긍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요즈음 선거철을 앞에 두고 정치꾼들이 좌우로 대립되어 긍휼을 잃어버린 이리떼가 되어 치열하고 치졸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제로섬 게임(Non Zero-sum game) 세상에서 남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남이 죽어야 자신이 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긍휼을 베풀고 남에게 양보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불이익과 패배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매정하고 냉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정을 억제해야 하며, 표독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약자를 괴롭히는 시대입니다. 남의 고통을 쾌감으로 알고 아이들을 학교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영상과 매스컴은 점점 비정하고 잔인하게 인간성 파괴, 인간성 상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인정을 억제하고 독하게 마음 먹고 살아야 먹고 살고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참으로 행복한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제자 오늘 주보 긍휼이 필요한 세상에 피에르 반 파센(Pierre Van Paassen)<우리 시대의 날들(The days of our years)>이란 책에 나온 이야기을 소개해 놓았습니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 '부르그''유고린'(Ugolin)이라는 착한 꼽추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여서, '솔랑지'(Solange)라는 누이가 그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누이가 도둑의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습니다. 얼마 후 석방되었으나 그녀는 직장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불구인 동생이 병석에 눕게 되자 그녀는 몸을 팔아 동생의 약값을 대었습니다. 유고린이 마을에 나갔다가 사람들에게 넘어뜨림을 당하고 발길질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중심으로 춤을 추면서, "네 누이의 연인들이 각각 한 프랑씩 지불했다."라고 조롱하며 외쳤습니다. 마침 그 동네의 나이 많은 신부가 와서 피투성이가 된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멸감과 치욕을 이기지 못해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고, 누이 역시 동생을 따라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늙은 신부는 '이 어린 것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자비가 없는 사회에 의해 살해당했다.'라고 비통해하며 말했습니다. 그들 남매의 장례식 때 많은 사람으로 성당이 꽉 찼습니다. 신부는 강단에서 설교하면서 통곡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여! 생사의 주관이신 주님께서 심판 날 나에게 '네 양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실 때 나는 주님께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 두 번째로 '네 양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셔도 나는 주님께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네 양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부끄럼을 무릅쓰고 '그들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리떼였습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라 함께 사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긍휼을 통한 복을 어떻게 누리길 원할까요?

마태복음 913절을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27절을 보십시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183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232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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