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5:6
몇 해 전 연세 많으신 권사님을 심방을 가니까 “미스터 트롯”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거기에 출전하는 가수들이 너무 멋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대회에서 일등이 된 임영웅은 이름처럼 일약 영웅이되어 거대한 팸덤을 형성하며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니까 가수 임영웅의 전국 투어 콘서트 티켓은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피케팅’(피가 튀길 정도로 치열한 티케팅)으로 전석이 매진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래 가격의 몇 배가 넘는 암표가 성행하는데 암표는 기본 2배에서 비싼 좌석은 30배까지 팔리고 있답니다. 지난 9월 14일과 10월 5일 예매가 이뤄진 콘서트에서는 서울 공연 연석(붙어있는 좌석) 표 2장이 555만원에 올라왔답니다. 왜 이렇게 555만 원의 암표를 사서까지도 관람하려는 사람들은 임영웅 콘서트에 주리고 목이 마를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주리고 모마른 것들이 있습니다. 요즈음 총선을 앞에 놓고 정치인들은 권력에 주리고 목말라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돈에, 어떤 사람은 지식에, 어떤 사람은 건강에, 어떤 사람은 쾌락에, 어떤 사람은 명예에 주리고 목말라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주리고 목마른 것을 채우면 배부를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들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보면 가난하여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왔을 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직역하면 ‘복이 있도다. 주린 자들과 의를 갈망하는 자들은 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충분히 만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주리다(페이논테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약간 배가 고픈 시장기가 아니고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한 후 주림같은 주림으로 생명을 걸고 찾는 지속적인 배고픔입니다. 결핍 중에 가장 비참한 상태입니다. 무엇인가 강열히 갈망하는 상태입니다. ’목마르다(딥손테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말라하는 목마름입니다. 문법적으로는 현재 시상으로 한 번 목마름이 아니라 끊임없는 목마름, 계속 진행되는 목마름입니다. 이 말씀은 배고파 죽어가는 자가 먹을 것을 찾듯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자가 한 방울의 물을 애걸하듯이 구하는 자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경제적으로 부요한 강자가 아니라 지극히 가난한 약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백성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억압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배부름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0년 동안 입법, 사법, 행정권을 가지고 물질과 권력과 명예와 지식과 쾌락의 목마름을 지칠 정도로 채웠던 솔로몬의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12:8)”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다 바람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
1. 예수님은 헛되지 않고 참으로 배부르게 하는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주리고 목마름의 목적이 육적 기갈이 아니라 “의”인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디카이오쉬네)’란 무엇을 말씀할까요?
우리 말 큰 사전에 "사람이 행해야 할 올바른 도리"라고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경제적 정의(正義) 개념으로 "공정한 가격과 분배의 실현" 정치적 개념으로 "올바른 법의 통치", 법적 개념으로는 올바른 재판의 구현 등으로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옳고 바른 것을 통틀어 "의"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의란 옳고 바른 것을 말합니다. 정의는 법적, 도덕적, 사회적 다양한 측면에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법적 정의는 법에 따른 옳고 바른 것을 의미합니다. 법에 금지된 살인, 폭행, 절도 등을 하면 불의한 범죄가가 되어 형벌을 받습니다. 도덕적 정의는 법률에 정해져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옳고 바른 것입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치와 기준에 따르지 않으면 비윤리적인 사람이 되어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격리당합니다. 사회적 정의는 사회 구성원 간의 옳고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공정과 평등, 연대와 협력 등은 사회적 정의로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적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다 상대적 의입니다.
성경에서는 그 보다 넓고 다양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인을 대상으로 하는 마가복음에는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마태복음에서는 일곱번(마 3:15; 5:6, 10, 20; 6:1,33; 21:32)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다섯 번은 산상설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크게 두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앞에 “너희”란 소유대명사가 붙은 경우(5:20;6:1)입니다. 이는 윤리적인 의(righteousness)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의를 말할 때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으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의는 사랑과 함께 대표적인 하나님의 속성입니다(시11:7). ”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119:137)” 둘째는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 죄와 불의가 없는 세상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은 의로운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창세기 18:19절에서는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세기 18:19)”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와 의를 행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56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사56:1)”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사56: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613개의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통치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공정하신 분으로 죄와 불의에 대한 공정한 심판을 하십니다. 5장 20절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철저히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의를 축적함으로 의인이 되고 천국에 들어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의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을 이루는 의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나은 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벽한 의입니다.
마태복음에 쓰인 두 번째 의미의 의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독립적으로 쓰여진 의가 다섯 번 나옵니다(3:15; 5:6,10; 6:33; 21:32). 오늘 말씀은 우리 말에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지만 그 의(텐 디카이오쉬넨)입니다. 종교적인 의미의 의(justice)로 죄인을 심판하고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인 공의(公義)입니다. 또 하나님의 통치의 의를 구분할 때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의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의로 구분할 수 있는 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과 동의어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사46:12,13; 사51:5; 이사야 56:1)” 이것은 상대적인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의입니다. 사람의 도덕적 행위로 얻는 의가 아니라 의를 이루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이 의를 누가 이루십니까?
마태복음 6:33를 찾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나라입니다. ‘의’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으로서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는 의를 위하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3:15)”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구속사를 이루시는 것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의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2절에는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씀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여 ‘그 의’를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에 많은 예언들이 있지만 예레미야 23장 5-6 구절만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다윗의 의로운 가지가 누구이겠습니까? 궁극적으로 사무엘서에서 약속한 다윗의 언약을 통해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르게 되는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된 의입니다. 인간의 표준에 의한 도덕적인 의나 행위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준에 의한 완전무결한 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의란 하나님과 관계가 정상화되어 죄가 전혀 없는 상태,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상태,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법적, 도덕적, 사회적 의와 달리 종교적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의를 잃은 인간에게 의를 부여하는 칭의,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는 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더 나은 의’(마태5:20)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한 자마다 살인의 죄에 해당하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0-11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2. 누가 자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3장 10-12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사람이 죄를 법하였으매 하나님의 영생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를 지어 죄인이 되는 것보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모든 사람은 죄악 가운데 출생합니다. 아담의 후예들은 모두 죄악 가운데 출생한 것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행함의 자범죄가 아니라 상태의 원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씀합니다. 대표와 연합의 원리에 따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와 미국이 통상 협약을 하면 내가 직접하지 않지만 그 체계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태어나지 않는 아이들도 그 상태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의를 얻기 위한 사람의 시도는 결국 어떤 결과를 낳게 됩니까? 롬3:20,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미국과 통상 협약을 뛰어 넘어 거래를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대표가 새로운 협상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3.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이 되어 진정한 복을 누리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하였습니까? 롬3: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는 무엇을 말씀하겠습니까?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과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그 의”입니다.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모세와 시편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해주신 예수님을 말씀합니다(사45:8; 렘23:5; 사55:1-3). 구약에 많은 예언들이 있지만 예레미야 23장 5-6 구절만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다윗의 의로운 가지가 누구이겠습니까? 궁극적으로 사무엘서에서 약속한 다윗의 언약을 통해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3장 22절을 보십시오.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한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4-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쌓는 의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의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버리신 의,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칭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쓰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율법주의 자, 완전주의 자가 되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의인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믿습니까? 이것을 인정하고 믿는 자가 진정 복받은 자입니다. 롬3: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아무나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만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죽어 주었습니까? 오직 예수님 만이 불의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 주었습니다.
산상 수훈을 듣고 있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의에 배부른 자가 복이 있다니 영원히 천국에서 배부를 것이라”라고 가르쳤습니다. 백성들은 의를 쌓다가 지쳐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죄인이라고 조롱받고 가난하다고 비난받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돌이키기 전에 일어나는 첫 굶주림과 목마름을 가지고 예수님께 온 것입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할 때 처참한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자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도저히 맞출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통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한계 앞에서 애통하고 신음하여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예수님께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행해 진짜 행복한 사람은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러 오신 것을 드러내며 그 사실을 믿고 육신적 허기가 아니라 영적 허기를 가지고 그 의를 갈망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 배부른 사람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고 오히려 의로움 하나 없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원한 의로 천국으로 인도되고 배불러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리는 복은 무엇이겠습니까?
배부름입니다. ‘배부름(코르타스데손타이)’은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데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사람에게 사용할 때 이것은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음식을 먹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하나님께서 그를 빈 배로 돌아가게 하지 않고 그의 갈망이 채워지고 그의 영혼이 만족함을 받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는데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의의 결핍으로부터 해방되어(롬3:28,30)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경제적 만족이나 육체적, 정신적 만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만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를 얻기 위해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학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살을 소신 공양으로 미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2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완전히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사단은 의롭지 못한 우리를 계속 정죄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를 쌓아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의를 힘입어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의가 없는 자에게 예수님의 의가 전가 되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의 의에 배불러 예수님을 배척하지만 죄인은 의에 목말라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의로움을 받아 의에 목마르게 되고 사탄의 끝없는 정죄 앞에서도 의로 참 만족은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4장에 보면 인생의 목마름으로 남편 다섯이나 두고 산 여인이 나옵니다. 정죄의 눈길 앞에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부끄러워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한 낮에 공동 우물터에 물을 길러 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불의를 전부 아시는 예수님 앞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하게 그 여인에게 물 한 그릇 마음 놓고 먹게 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생수의 근원으로 오신 것입니다. 쾌락의 목마름에 빠지면 결국 시작 자체가 불행을 향한 늪이 되어 버립니다. 어제 서울에 노회 목사님 중 원로목사 추대식 순서를 맡아 갔다오는데 차에서 라디오는 트니까 이런 광고가 나왔습니다. “마약 시작하면 끝입니다. 우리 한번 해볼까 끝내 주거든 청춘 끝, 다이어트해 이거 하 나리면 끝이야 건강 끝, 집중이 잘 안 돼 이거 하나면 끝나 미래 끝, 걱정 말고 시작해 봐 뒤끝 하나도 없어 젊은 끝, 끝내준다 인생 끝, 마약 시작이 인생 끝” 쾌락에 목마르면 바닷물을 먹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 갈증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갈증만 계속됩니다. 돈고 명예도,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인생살이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리고 목마를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 나와 생수를 마시면 그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면 영적 기갈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사야 사49:10에서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예수님께 나오면 샘물 근원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로마서 8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둘째, 우리의 의로 누리는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주시는 의를 기반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한 참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누적되는 의로 행복이 주어질 것같지만 실제로는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부조리한 세상, 불공평한 세상에 대하여 원망하며 좌절하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면 얼마든지 부어주신 의로 배부르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의 늪에 빠져 살지 않아도 우리 하나님이 은혜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의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의입니다(5:10, 20; 6:1, 33). 의로우신 우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데 초점두고 살면 의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사야55장 1-3절에서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계시록 22장 17절에서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라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고전2:9)을 미미하게 맛보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세계에서 완전한 거룩함으로 충만해 질 것입니다(요일3:2). 그 때 우리의 죄는 영원히 해결될 것이고 더 이상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내 노력과 공로로 내 의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배부름입니다.
시편 107:5-9절에서는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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