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3) 온유한 자
마5:5
예수님은 세 번째로 행복한 사람에 대하여 “복 있는 자여 그들은 온유한 자이다. 그들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온유한 자는 복 받은 자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이 땅을 기업으로 받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맨 앞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 것같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국어사전에서 온유(溫柔)라는 '성격,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소개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도덕적 성품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온유는 헬라어 “프라우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헬라 세계에서 해석은 사납고 거친 것에 반대되는 부드럽고 잘 참으며 친절한 것을 뜻합니다. 도덕적 성품으로 교만하고 화내고 참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참음을, 특히 고통을 오래 참으로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를 뜻합니다. 플라톤은 온유는 폭력이나 잔인의 반대라고 했고 헤로도토스는 온유는 노여움의 반대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격이 포악한 자가 아니라 부드럽고, 따뜻해지고, 온화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하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들으면 “아니 예수님, 억척스러운 사람, 포악한 사람, 땅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지, 어떻게 온유한 자가 땅을 얻습니까? 저는 온유한 복부인, 온유한 왕, 온유한 땅 부자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보세요. 어떻게 온유한 자가 전쟁을 일으켜 땅을 차지합니까? 용감한 자가 전쟁을 일으켜 땅을 차지하지요?”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땅은 난폭하고 공격적인 자의 것이지 온유한 자의 소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온유한 자는 이 땅에서 땅을 차지하기보다는 오히려 땅을 빼앗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로 돌아가 상상해 보세요. 당시는 로마가 유럽 사회를 지배할 때입니다.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며 잔인하고 폭력적인 정권으로 철권통치를 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도 이미 제국주의 로마에 망해 로마의 속국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들은 로마를 거슬리는 세력을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처형했습니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인 땅을 확장하는 로마인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잔인함이 아니라 용맹이었습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하는데 가장 숭배하는 미덕 중에 하나가 용맹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죽이고 땅을 차지하면 그 사람을 영웅으로 취급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유순하고 참고 기다리고 양보하는 온유란 불필요한 가치관이었습니다.
지금도 땅을 차지하려는 전쟁터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하면 누구도 긍정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전쟁을 일으켜 땅을 차지하고 있는 푸틴이 온유한 자입니까? 끝없이 땅을 차지하려 했던 히틀러가, 나폴레옹, 알렉산더가, 칭기즈칸이, 무솔리니가, 레닌이, 시저가 온유한 자입니까? 무자비하고 냉혹한 자들입니다. 지금도 역시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이지만 만 명을 죽이면 정복자로 존경받는 시대입니다. 온유함보다 포악함으로 더 많은 획득을 했습니다. 교통사고가 날 때 온유함으로 대하면 더 큰 손해를 보는 세상입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상속받아도 쉽게 빼앗기기가 쉽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처럼 성품으로서 온유를 말씀합니다. 그러나 땅을 차지하는 온유는 그런 성품은 아닌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땅을 차지하는 온유함이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라틴어 온유를 나타내는 ‘미티스(mitis)’는 “말에 재갈을 먹인다” “길들여져 잘 콘트롤 할 수 있는 가축”이라는 말로 거칠고 사나운 말에 재갈을 물림으로 착하고 순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온유를 나를 엄하게 다룰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상냥하게 관대하게 대하는 사람의 미덕으로 본 것입니다. 반항하는 백성에게 보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반항하는 백성을 친절하게 다루는 왕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야생동물이 길들여 지면 온순해 집니다. 길들여 진 말을 타고 가서 싸우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말이 용감해져 전쟁터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온유를 단순한 성품을 말하기 보다는 닥친 상황에 대처하는 자세나 반응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로 이해해 이런 사람들이 땅을 차지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사람과 관계에서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온유에 중점을 둔 해석입니다. 온유한 자를 모든 본능과 감정을 잘 훈련시켜 자기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는 사람으로 해석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자기 자신을 내맡기고 헌신함으써 하나님의 지배를 온전히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도 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또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생명 속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길들여져 자기 통제력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땅을 차지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그런 의미에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했을까요?
개혁 개정 성경에 온유라는 말을 검색해 보니 27번 나옵니다. 신약성경에 온유라는 말은 17번 나옵니다. 헬라어 온유를 말하는 “프라우스”는 9번 나옵니다(고린도전서 4:21; 고린도후서 10:1; 갈라디아서 6:1; 6:23; 에베소서 4:2; 골로새서 3:2; 디모데전서 6:11; 디모데후서 2:25; 디도서 3:2). 형용사로 3번 언급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 11:29; 21:5; 베드로전서 3:4). 아더 핑크는 그동안 학자들에 의해 연구된 것은 “인내 또는 체념의 신념, 비이기심 또는 극기의 심령, 온순 또는 비보복의 심령” 등으로 정리하며 성경에서 온유의 내포적 의지를 찾으면 첫째 겸손(마11:29; 엡4:2) 둘째 관용(고후10:1; 딛3:2) 셋째 성내는 것과 반대(약1:20,21) 넷째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시25:9) 등으로 정리했습니다.
여기서 땅을 유업으로 받는 온유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구속사적 점진적 계시의 관점에 성경을 전반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예수님이 온유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1:29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도덕적 성품으로 온유한 자라는 말씀일까요?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지 않는 땅의 심판을 말씀하면서 예수님을 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을 가진 자들 앞에서 내 마음은 온유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온유한 마음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거룩하고 온유한분일 뿐 아니라 자신의 설교를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영혼을 온유한 자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을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마21장 5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여기에 나타나는 겸손은 “푸라우스”를 번역한 말로 예수님께서 마음이 온유하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겸손이라는 말로 달리 번역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구약에 메시아로 오실 분을 소개할 때 예언한 말씀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구약의 “아나브” 의미를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문맥에 따라 겸손으로도 온유로도 번역이 됩니다.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땅을 차지하게 하는 왕 메시아로 오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땅을 읽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에덴 땅을 그들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함으로 그 땅에서 추방되었습니다(창3:23).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여 아브라함을 불러 그 땅을 줄 것을 약속해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이삭에게, 야곱에게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 땅이 또다른 에덴으로 상징화되는 가나안 땅입니다.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출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우리 하나님이 내려가서 직접 인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땅으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출32:13; 33:1). 기업으로 주시는 이 땅(나할라)은 단순한 땅이 아니라 약속과 성취, 상실과 회복으로 주시는 땅입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충실하게 순종함으로 따랐습니다. 모세는 구약 성경에 온유의 대명사처럼 나옵니다. 민수기 12장 3절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모세가 도덕적으로 온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할까요? 모세의 성품이나 기질을 말할까요? 성경을 보면 모세는 욱하는 성질을 못 죽이고, 애굽 군사를 때려죽였습니다. 모세는 대단히 온유한 면도 있지만 백성을 야단치고 화를 냈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반석(盤石)을 두들겨 패기도 했고, 첫 번째 십계명 돌 판을 받아서, 시내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잔치를 벌이자, 그 첫 번째 십계명 돌판을 집어던져서, 박살을 내기도 했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는데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받았나요?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 느보산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온유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의 부드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닥친 상황에 대처하는 자세 반응이 늘 하나님께 겸손하게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보다 하나님 앞에 선 자의 마땅한 자세를 말합니다. 피조물이 자기 자리를 떠나 버린 것이 교만이고 자신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 겸손입니다. 모세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붙들려 구속사를 이루는데 나귀처럼 쓰임받은 상태에 있는 자였다는 말입니다. 온갖 고통과 환난, 억울함, 억압, 낮아짐, 굴욕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도구로 쓰임받아 끝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과정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를 온유한 자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름 자체가 건져낼 자입니다. 예수님의 모형으로 산 사람이 모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 하나님의 뜻에 길들여진 자 모세가 죽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상속받은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믿음의 사람들이 천국을 상속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 가장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온유한 자로 칭해 줄 때는 구스 여인을 취했다고 비난받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리암이 바리새인 역할을 할 때입니다. 왜 이방여인을 취하냐는 것입니다. 의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그것 때문에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보며 진짜 메시아이면 로마를 물리치고 우리에게 땅을 회복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율법의 틀에 메여 십자가에 처형장으로 보내어 버렸습니다. 모세는 수많은 비난과 고통, 압박 앞에서도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붙들려 하나님의 뜻대로 산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이 온유한 자라고 말씀할 때 단순하게 도덕적 성품적으로 온유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의 좌판을 엎어버렸습니다. 바리새인들 외식하는 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고 어떤 죄인도 모두 받아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성취하기 위해 끝까지 순종함으로 인간을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땅을 얻는 말과 연관시켜 생각할 때는 착하고 온화해서 온유해서 땅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착하고 온유하게 의롭게 살아야 땅을 차지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켜 의로운 사람이 되면 그 땅을 다시 차지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모토는 율법을 잘 시켜 땅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아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민14:33;신4:21). 율법 준수에 실패해서 바벨론 포로가 되었고 로마의 압제하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제 율법을 지킴으로 나라를 되찾자고 가르치고 율법 준수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 기업으로서의 땅을 상실하는 이유는 그들의 범죄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고, 그들에게 의가 없어서 그 의에 대한 보응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왕상8:32). 그래서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는 방법은 율법을 지키는 의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시편 25편 9절에 나오는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라는 말씀을 통해 온유한 자는 정의로 지도받는 자이고 정의와 도를 배운 자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예수님이 그 주인공으로 오셨는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약속인데 (창17:8, 출6:8, 출32:13, 민34:2, 레20:24, 대상16:18, 시135:12, 사57:13, 렘12:15)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천국을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씀합니까? 히브리서 11장 8-10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그 땅은 단순히 가나안 땅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주어질 새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영원한 나라 천국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에게 상속으로 주어질 땅은 단순히 이 땅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정관사 the가 붙어 있어 약속의 땅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3-16절까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하늘에 있는 것이고 한 성을 예비했다고 말씀합니다.
이사야를 통해 분명하게 예언해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사6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1:7)”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66:22)”
그 새하늘과 새 땅이 어떤 땅이겠습니까? 계시록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1-2)”
어떻게 그 땅을 하나님 주십니까?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4-26)”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런 일을 이루실 것을 이미 구약에 예언해 놓았는데 성경을 잘 아는 바리새인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그 땅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35:33에 “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히브리서 9:14절에서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거듭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이기 때문입니다(마 26:28, 막 14:24, 눅 22:20). 벧전 1:18-19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구속했다고 말씀합니다. 구속이란 값을 지불함을 의미합니다. 그 값은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값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7). 원죄와 자범죄까지 완전히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이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고(마 26:2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1:7). 이 피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켰습니다(계 1:5). 잘못 쓴 글을 지우개로 지우듯이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영원히 지웠습니다. 멀리 옮기셨습니다(시 103:12). 주의 등 뒤로 던졌습니다(사 38:17). 도말해 버렸습니다(사 44:22). 사 43:25에서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내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32:1에 ‘허물을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땅은 단순한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오늘날 부동산이 아니라 나귀 타고 오시는 온유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실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와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 자신의 왕으로 모신 온유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통치권이 회복되고 이미 마음 천국이 이루어지며 온유한 자들이 살고 있는 곳에 복음의 영향력이 끼쳐지게 되고 결국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온유한 모세가 광야에서 죽으심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처럼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도덕적 성품으로 온유를 분명하게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땅을 상속받는 온유는 그런 도덕적 성품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장 21절에서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강팍하게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천국을 주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인 것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이 온유함은 우리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통제권으로, 훈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로 주어집니다. 갈5:22-23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이 없이는 누구도 천국을 차지하는 온유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인격의 수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영을 통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을 모심으로 나타나는 후천적인 성품입니다.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온유한 성품도 선물로 주십니다.
이 말씀을 정확히 알려면 예수님이 구약의 어떤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구약에 이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땅’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오는데, 주로 유대땅(2:6)과, 이스라엘(2:20,21), 어느 지역(4:15, 9:26, 24:27,45). 하늘과 땅(5:18,35), 하늘과 구별된 장소(6:10, 9:6), 지면(10:29), 흙(13:5,8,23), 육지(14:24), 온 세상(12:40,42) 등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거주의 뜻(마9:29, 15:33, 행7:4)으로 땅과 비유로써 약속의 땅(마24:30; 27:45)은 성경에서 달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온유한 자가 차지할 약속의 땅은 시편 37편 1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시편 37편 11절 말씀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편 37편은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여 말씀하는데 땅을 차지할 자가 온유한 자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용한 “온유”는 “아나브”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은 문맥에 따라 “가난함, 겸손한, 괴로운, 온순한, 빈곤한, 비천한”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땅과 관련하여 이 온유한 자가 어떤 자라고 본문 자체가 말씀하고 있습니까? 땅을 차지하는 온유한 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시편 37: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다순한 도덕적 품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서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어떻게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서 머물며 풍성이 먹고 살 수 있습니까? 4절 보십시오.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온유함이 단순한 도덕적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라고 말씀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주의 복은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는 단순한 도덕적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자들은 이미 온유한 마음을 가진자들로 천국을 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천국은 도덕적 성품의 온유함으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온유함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온유함에 참여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유이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주보에 “행복 추구와 가치있는 삶”이라는 칼럼을 써 놓았는데 이 땅에서 가장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종교는 “행복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인은 자신이 만든 행복교 교주 앞에서 ‘길고 행복하고 건강한 삶’이라는 독특한 슬로건을 붙여 놓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가치 있는 삶(미로슬라브 볼프 외 저)>이라는 책에서는 사람들은 길고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데 그중 가장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파스칼은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은 모든 행동의 동기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동조차 그러하다.”라고 말했는데 누구고 짧고 불행하고 병든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삶은 반드시 길고 행복하고 건강한 삶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세 사람의 삶의 예를 듭니다. 첫째는 삶이 길지 않았던 마틴 루터 킹의 예를 듭니다. 그는 서른아홉에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암살을 당했습니다. 킹은 안전한 근무 환경과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선 흑인 청소부를 지지하기 위해 멤피스를 찾았답니다. 1964년 노벨평화상 수상 후 킹의행보는 대중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답니다. 그는 유색인종의 권리 신장에 힘썼고, 베트남 전쟁을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빈민 캠페인’이라는 단체를 설립해 빈민층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요구했지만 어떤 움직임도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답니다. 한 여론 조사에서는 응답 대상자의 75퍼센트가 마틴 루터 킹에게 부정적인 견해를 표시했답니다. 암살당하기 전날 밤, 마틴 루서 킹은 자신의 생명이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답니다. 그때 그는 “다들 그렇듯 저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 장수하길 바라죠. 하지만 이제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을 뿐입니다. 그분이 저를 산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산 너머로 약속의 땅을 봤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곳에 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께 알립니다. 언젠가 우리는 약속의 땅에 이를 겁니다!” 마틴 루터 킹은 단명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장수를 누릴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좇지 않았답니다. 자신의 견해가 대중에게 지지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공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조용히 긴 삶을 누릴 수도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장수보다 중요한 가치를 추구했답니다.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산 링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강한 우울감에 시달렸답니다.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링컨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답니다. 친구들은 링컨이 자해를 할까 봐 걱정했답니다. 링컨의 임기에 미국은 남북으로 나뉘어 끔찍한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는 전쟁을 치렀는데 링컨은 “지옥보다 더한 곳이 있다면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라고 한탄했답니다. 하지만 링컨은 대통령으로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기를 선택했답니다. 링컨은 자신이 지닌 재능과 에너지를 행복을 찾는 데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답니다. 링컨은 불행으로부터 달아나지도 않았으며, 미래에 닥칠 불행을 두려워하며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았답니다. 건강하지 않은 삶을 산 콘스탄스 리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만성 류머티즘을 앓고 있었는데 그것이 심장을 약화시켰답니다. 그녀는 영국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온몸과 마음으로 다해 싸웠는데 여성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 투쟁하다 투옥되어 음식을 거부했답니다. 영국 정부는 그녀의 약한 심장을 핑계로 교도소에서 억지로 입을 벌려 목구멍에 호수로 음식을 주입시켰답니다. 그녀는 그 사실을 폭로하였으며 두 번이나 단식 투쟁이 남긴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심장 발작과 깊은 병세로 고통을 받아 예전과 같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없었답니다. 그러나 결국 영국은 1928년에 21세 이상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답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목표로 건강을 포기한 리턴의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에게 큰 울림이 되었다고 합니다. 행복을 찾으라는 상담사의 조언은 어머니의 입시 전략보다 딸에게 큰 힘을 줬답니다. 저자는 마틴 루터 킹, 에이브러햄 링컨, 콘스탄스 리턴은 초능력을 지닌 영웅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었다고 말하며 불완전할지라도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다시 한번 삶의 가치를 고민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짧고 불행하고 병약한 삶”을 누구나 추구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건강과 행복, 심지어는 삶 자체를 희생해서라고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장수, 행복, 건강보다 더 추구해야 할 가치를 찾았다면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때로는 짧고 불행하고 병약한 삶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33세에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모세는 왕자의 자리를 내어놓고 지팡이 하나 들고 광야에서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바울은 병든 몸으로 평생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는 자는 온유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고 평생 성령의 열매 온유함을 주렁주렁 맺고 행복한 삶을 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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