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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2-기쁨(갈5:22-23, 빌4:4)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075 추천수:2 112.168.96.71
2016-04-11 06:47:54

 

성령의 열매 2-기쁨

갈5:22-23, 빌4:4

 

오늘은 성령의 열매 두 번째 기쁨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성품도 바꿀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10년 20년 예수님을 믿어도 변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성품이 아니라 얼마든지 사랑이 풍성한 성품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풍성한 사랑을 하려면 첫째,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처럼 심각한 죄이고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상대를 죽이려하지 말고 내가 죽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면 사랑은 자동적으로 풍성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다면 예수님과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관계를 회복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주님과 친밀도와 정비례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아가페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니까 매순간 육체의 욕심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원을 따라 행하여야 사랑의 열매가 맺힌다고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미워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것을 마음과 말고 행동으로 매순간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성품이 사랑으로 풍성해 질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성령의 열매인 희락(기쁨)입니다. 기뻐하는 성품입니다. 늘 얼굴에 웃음이 가득찬 성품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믿으며 싱글벙글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얼굴을 피지 못하고 구기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주 전에 교회에 구기자나무 한 구루를 사놓았는데 “구기자 전설”이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한국 남자들이 세상의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다 무기력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약 한 첩을 다들 잘 못 먹어서 라고 합니다. 그 약은 구기자라고 합니다. 구기자 한 잔 씩을 잡수어서 다 구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아내가 너무너무 근심이 되어 남편에게 뭘 하나 선물을 했답니다. 그러자 그 날부터 남편은 생기가 돌고 어깨를 피고 기쁨으로 활기찬 삶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궁금해서 무엇을 먹였겠습니까? 물어 보니 [피자] 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마음과 얼굴을 활짝 펴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령의 열매 중 “희락(기쁨)”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얼굴이 활짝 피고 기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기시기 우리 주님으로 기뻐하는 주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 속에 내 마음 속에 있네 나는 기뻐요 정말 기뻐요 주 예수 사랑 기쁨 내맘에 ...."

중세시대의 기독교는 인생의 낙을 누리는 것(즐겁게 사는 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중세시대의 금욕주의를 다룬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327년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을 풀어 가는 추리 소설입니다. 늙은 수도사 ‘호르헤’가 이단으로 금지된 책을 수도사들이 읽자 이들을 독살한 것입니다. 수도사들이 읽은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의 필사본이었는데, “웃음은 예술이며 식자(識者)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라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르헤는 수도사는 웃음과 거리를 멀리 두고 엄숙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읽은 수도사들을 살해한 것입니다. 요즈음도 교회에서 기쁘게 살고 신앙생활 즐겁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재미없고, 즐겁지 못하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재미있는 세상 좀 살고 세상사는 재미가 없어질 만할 때 믿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회생활은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재미가 없으면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교회 밖 세상에서 “태양의 후예”를 보며 깔깔대며 아주 즐겁고 재미있게 잘 놀다가 교회만 오면 얼굴 표정이 굳어지고 표정이 아그립바 상을 하고 무거워져야 합니까? 예배당은 재미가 있고 쉼이 있는 곳입니다. 싱글벙글 웃을 수 있는 곳이고 실수가 용납되는 곳이고 서로 용서해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기쁨을 방해하는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기쁨으로 일어나는 곳입니다. 소요리 문답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이라고 배웠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배우고 세례 문답을 받을 때 고백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43:4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한자어로는 ‘극락(極樂)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즐겁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울할 수밖에 없는 민족의 고통을 보고 서 있는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슬픔 많고, 고통 많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기독교인의 3대 생활 강령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살전 5:16-18)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4절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을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가정생활, 직장생활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각종 실과 맺는 나무를 두시고 계절마다 맛있고 탐스러운 과일을 먹으며 즐겁게 살게 하셨듯이 오늘 날도 세상에서 기쁘고 즐겁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열매인 기쁨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주 안에 거하면 풍성한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즐거운 삶을 살기 위해 기쁨 사냥을 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 중에는 헛된 기쁨이 있습니다. 도덕성을 상실한 기쁨입니다. 일반적으로 도덕성을 상실한 기쁨을 쾌락이라는 용어로 사용합니다. 전도서 2장 1절에서는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헛된 기쁨입니다.

불란서 작가 에밀 졸라를 유명하게 만든 ‘나나’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나나는 극장 여배우로 활약하다 세탁부인 어머니와 기와장이였던 아버지와 살았던 그 지긋지긋한 가난이 두려워서 돈을 모으기 위해 매춘부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아름다운 그녀 주위엔 수많은 남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바쳐가며 나나의 사랑을 얻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백작은 나나의 쾌락의 포로가 되어 가산을 탕진합니다. 부유한 은행가도 나나와의 쾌락을 좇다가 형편없이 파산해 버립니다. 군인 형제들 중 형은 나나로 인해 공금을 횡령하다 몰락해버리고, 동생은 나나와의 사랑에 빠져 결국 자살해버립니다. 나나 자신도 왕궁처럼 화려한 거실에서 결국 천연두에 걸려 죽어갔습니다. “쾌락은 가장 완전하게 인간을 파멸시킨다.”는 것을 나나의 일생을 통해 그려준 것입니다. 쾌락의 꿀을 핥아먹는 파리 떼처럼 깊이 들어가면 결국 날개와 발에 꿀이 묻어서 죽고 맙니다. 죄가 가져다주는 쾌락이 있습니다. 우리 몸에 스릴을 줍니다. 순간적인 만족을 줍니다.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생활에 흥분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즐거움을 결코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일시적인 죄의 쾌락’에 대해 말합니다(히11:25). 하나님은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잠 21:17)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쾌락을 좇는 자를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4:19)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쾌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지녔던 삶의 한 특징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도 전에는 행락 (쾌락)에 종노릇한 자였습니다"(딛3:3)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됩니다"(딤후 3:4). 우리 예수님은 진정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는 것이 기쁨의 좋은 소식이고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질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즐거움은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의 기쁨은 샘솟는 기쁨입니다. 마르지 않는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쾌락이 아니고 희락입니다. 순간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죄로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후회없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말초적으로 허망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기쁨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로 단어로 나타납니다. 대강 기쁨을 10가지 단어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환희의 기쁨인 ‘아갈리아오’, 낙천적인 기쁨인 ‘유뜌메오’, 좋은 기분인 ‘유프라이노’, 즐거움이나 유쾌함을 의미하는 ‘헤도네’, 용기를 의미하는 ‘따르세오’, 유쾌함을 의미하는 ‘힐라로스’, 자랑하는 기쁨인 ‘카우카오마이’, 행복한 기쁨인 ‘마카리오스’, 뛰는 기쁨인 ‘스키르타오’, 내적인 기쁨인 ‘카라’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희락은 바로 카라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기쁨이라는 말이 326회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가 기쁨을 표현해주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입니다. 이 기쁨은 주님과 관계 속에서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기쁨입니다(눅 19:6; 행 8:39; 13:48; 행 15:3; 살전3:9; 골 2:5; 빌 1:4,18; 롬 16:19)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4: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3:1절에서도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립보서 4:10절에서도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이라고 주 안에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죄용서의 기쁨, 주님 안에서 누리는 죽음을 초월한 기쁨,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도 응답의 기쁨, 주님 안에서 누리는 동행의 기쁨입니다. 우리 인생살이는 가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 직장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의 문제, 인간 관계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죽음과 고통, 실패, 상실과 사고가 있는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카라”의 기쁨은 감각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향기 맡고, 만족할 만한 소리 듣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부드러운 접촉을 통해 만족하고, 맛있는 것을 맛보는 데서 오는 기쁨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이세상 사는데 중요하지만 이런 조건과 환경에 좌우되는 기쁨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조건이 주어질 때 잠깐 있는 것이지 얼마 못가는 것입니다. 성취에서 오는 기쁨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취업을 하고 출세를 하고,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권력과 명예를 잡는데서 오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성취를 통해 얻어지는 기쁨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주어지는 기쁨은 환경과 조건이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지금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바울의 환경과 조건을 보십시오.

빌립보서 1장7절을 보십시오. 1:13, 감옥에 갖혀 있습니다.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집도 없습니다. 자녀도 없습니다. 누구 돌보아 줄 사람도 없습니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는 계속 기뻐하고 기뻐하고 있습니다.(빌1:18; 2:17)

빌립보 교회는 1장에서 불화를 초래하는 다양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2장 그들은 에바브라 디도의 질병 때문에 걱정하였습니다. 3장 그릇된 이단 그릇된 삶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기뻐하고 있고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질병에 걸리고 그 질병을 위해 기도했지만 응답되지 않을 때도 기뻐하였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안질 때문에 하나님께 고쳐줄 것을 세 번 기도했을 때에 하신 고후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가지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자신이 비난 받고 있는데도 기뻐하였습니다.

빌1: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쫓겨나면서도 기뻐하였습니다.(행13:52)

이런 기쁨이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를 보십시오. 환란, 시련, 극한 가난 가운데 넘치는 가운데서도 기뻐하였습니다(고후8:1-2) 그들은 기쁨이 넘쳤습니다(고후 7:4)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주 안에서입니다.

초기 기독교인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기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도들이 그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기뻐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재산을 다 빼앗겼습니다.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였습니다.

베드로도 로마 황제의 악랄한 핍박을 목격하면서도 "벧전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9)"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비유에서 아주 귀중한 것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농부처럼 우리는 보화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마 5:12; 눅 6:23; 행 5:41). 바울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익을 위해 고난 속에서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고전 1:24).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수많은 고난과 불편함을 당해도(벧전 4:13) 주님 만날 날을 생각하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벧전 4:13)라고 말씀합니다. 더 좋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기에 그들의 산업을 빼앗긴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히 10:34). 예수님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던 것처럼(히 12:2) 최후의 심판을 기억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주님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언젠가 완전한 기쁨을 맛보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승리의 노래가 기쁨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이르렀으니(계 19:7)”.

 

둘째는 성령 충만으로 우리는 풍성한 기쁨의 열매를 맺힐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의 열매는 세상이 주는 것도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맺어주시는 열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18)”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쁨의 열매는 성경 안에서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이미 성령을 받았다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맺혀지는 열매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합니다.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델레스 철학도 있었지만 에피쿠로스 학파인 쾌락주의도 있었습니다. 직접적인 관찰과 이론적인 추론으로 시험된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선하고 나쁜 것은 쾌락과 고통의 지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며 좋은 것은 기쁜 것이고, 나쁜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쾌락과 고통은 선함과 악함의 궁극적인 도덕적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쾌락이 곧 선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쾌락을 쫓는 동성애를 반대하면 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동성만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 한 명에 여자 2명 여자 두명 여자 한 명에 남자 두 명이 결혼하는 것도 합법화 시켜달라고 합니다. 동물적 쾌락을 누리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기쁨이 그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산 주 신문에 보니까 “30여 년 전 입양 보낸 친아들과 결혼해 아기 낳고 싶다는 영국 여성도 생겼습니다. 아들과 성적 관계를 가지면서 근친상간이 아니라 ‘유전적 성적 이끌림(genetic sexual attraction)’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쾌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인간의 자유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방종하고 방탕하는 곳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진정한 기쁨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영적 기쁨 충만은 곧 성령 충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과 기쁨 충만은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사도행전 교회가 기쁨 충만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순교하면서도 기뻐하며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빌립이 가는 곳마다 기쁨을 회복시켰습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신체적으로 고통을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령 충만을 받자 그 마음에 기쁨으로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성령의 불을 체험하던 순간을 『팡세』의 마지막 편 「메모리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654년(31살) 11월 23일 밤 10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불’ 이었다. 철학자와 식자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파스칼은 기쁨이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우울이 달아나버립니다. 상복 입은 마음이 살아집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면 기쁨이 충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론적으로 만 안다고 기쁨이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의지적으로 기뻐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내 영혼의 샴페인>이라는 책을 쓴 마이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두운 성격의 소유자였답니다. 우울한 성격 때문에 20대 후반에는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말았답니다. 하루하루 기쁨이 없는 암담한 삶을 살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제 앞으로 90일 동안 주님 안에서 기뻐하겠다.’라고 결단을 하였답니다. 90일 동안 무조건 주 안에서 기뻐하며 감사하기로 결심했답니다. 무조건 기뻐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점검하기 위하여 90일 동안 그에게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90일 동안 억지로 기뻐하기로 실험해 보니까 실제로 기쁨이 밀려오더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좀처럼 떠나지 않고 자기 내면 안에서 지속적으로 작동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가 앓고 있던 우울증이 치료되었답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에 따라 순종하다 보면 상황은 기쁨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니라(요15:10-11)" 했습니다. 의지적으로 기뻐하다 보면 실제 마음이 기뻐하는 마음으로 변하고 모든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신비의 역사이고 기적의 역사입니다. 지난 1백 여 년 간 '웃으면 즐거운 기분이 되는가, 즐거운 기분이 웃음을 짓게 하는가' 달리 표현한다면 '웃음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감정이 웃음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한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일부러라도 미소를 지으면 더 행복감을 느끼고 억지로라도 슬픈 표정을 지으면 더욱 슬퍼진다고 합니다.

웃음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만 카슨스입니다. 그는 희귀병인 '강직성 척수염'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완치율이 낮은 병이라고 합니다. 그는 나이 오십에 이 병으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원통하고 분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느날 책을 읽다가 성경말씀인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다.'라는 말에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하, 가장 좋은 약은 마음의 즐거움에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나는 오늘부터 웃어야지, 즐겁게 살아야지'라고 다짐하고 계속 웃었다고 합니다. 계속 웃으니 아픈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어느 날부터 손가락 하나가 펴지게 되었답니다. 웃음으로 치료된 그는 너무 신기해서 하버드 대학을 찾아가고, 스탠포드 대학을 찾아가서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의 소리를 들은 의과대학교수들은 처음에는 비웃었지만, 그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의과대학 교수들이 웃음에 대한 연구를 착수했다고 합니다. 웃음 치료에 대한 연구를 하여 의과대학을 정식으로 다닌 사람이 아닌데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답니다. 그는 '웃음은 방탄조끼다.'라고 말합니다. 웃으면 외부로부터 침입할 수 있는 세균에 저항할 수 있는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웃음은 몸이 항체인 T세포와 NK(내추럴 킬러)세포 등 각종 항체를 분비시켜 암세포를 잡아먹고 더욱 튼튼한 면역체를 갖게 한다고 합니다. 웃으면 건강의 문이 열립니다. 사업의 문이 열립니다. 웃으면 닫히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웃어야 교회 생활 행복해 집니다. 내 의지로 안되면 성령 충만을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성령 충만은 회개할 때, 순종할 때, 사모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면 성령 충만하게 되고 기쁨도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3)" 요한복음 16:24절에서 예수님은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도 기도하다 받았고(행1:14) 성령 충만한 오순절 성도들은 기쁨 충만하여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들이 기쁨으로 섬기니까 매일매일 만나도 지루하지 하지 않고 매일매일 예배드려도 기쁨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죽음 앞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6:5절 행7:55)

 

셋째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풍성한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하는 바울을 보십시오. 빌립보서 1장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슨 방도로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시기의 대상이 되고 비난을 받는다하여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하는 일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은 기뻐할 수도 있지만 금방 그 기쁨을 잃어 버리고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기쁨까지 빼앗겨 버립니다. 자꾸 자신과 자신의 일만 보면 잘되면 교만해지고 잘못되면 낙심해 버립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기쁨을 누리려면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희락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라고 고백하듯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면 언제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를 보십시오. 나라가 망할 위기에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합니다.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습니다. 밭에 식물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박국 선지자는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박국 3장 18절에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18세기경 구두 만드는 실습생이었던 죤 와르(John Warr)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밑에서 일하는 견습생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새로 온 견습생은 귀찮아했습니다. 어느 날 실습생이 위조 화폐 1 쉴링을 진짜와 바꾸려다 붙잡혔답니다. 얼마나 우울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수치스런 죄책감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에게 가서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주었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믿게 되었고 헌신적인 제자로 성장하여 인도 선교사로 놀랄만한 결실을 맺은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가 되었답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에 보는 사람과 사람들의 일을 보며 슬퍼하고 우울해 하지 말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의 성품은 기쁨의 성품으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바라보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십시오. 슬퍼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61:10)"

스바냐 선지자를 보십시오. 여호와의 날의 심판을 바라보면서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바냐 3장 17절을 보십시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시편 90편은 모세가 기록한 유일한 시편입니다. 이 시편의 배경은 민수기 14장에 나오는 가데스바네아(민13:1-14:35) 사건입니다. 이 시편은 모세가 가데스바네아(민13:1-14:35)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었는데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는 너무나 비관적이었습니다. 모세를 갈아 치우자는 것입니다. 이럴 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갈아치우자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 모세는 14절에 "동틀 녘에 당신의 사랑으로 한껏 배불러 평생토록 기뻐 뛰며 노래하게 하소서.(공동 번역)"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백성을 보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12:7)"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다 없어져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상실로 우울해 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빈손 들고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없어져도 본전입니다. 상실에 집착하면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슬퍼할 수 밖에 없는 가족을 보면서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를 만들어 가시고 훈련시키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아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대로 아들을 훈련시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아들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죽는 날까지 잃지 않는 기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천국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기쁘게 이 땅을 떠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희락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 어디에서나 환영받습니다.

 

첫째는 주 안에 거하면 풍성한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둘째는 성령 충만으로 우리는 풍성한 기쁨의 열매를 맺힐 수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풍성한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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