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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1- 사랑(갈5:22-2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692 추천수:7 112.168.96.71
2016-04-03 06:24:08

 

성령의 열매 1- 사랑

갈5:22-23

 

오늘부터 제가 9주에 걸쳐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 열매는 예수님의 성품이고 선택 사항이 아니고 예수 믿는 우리가 꼭 가져야 할 성품입니다. 요즈음 아이들 교육에서 “성품이 답이다”라고 말하며 성품 교육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데 교회 생활의 행복도 성품이 답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성품 고약한 사람과 얽히면 교회 다니는 것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성품 고약하면 만나는 사람들 불행하게 만들고, 가는 교회마다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번 기회에 말씀을 듣고 우리 성도님의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품으로 바꾸어 진정 행복한 신앙생활, 행복한 교회 생활, 행복한 가정생활, 행복한 사회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만 주렁주렁 풍성하게 맺히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품이란 사람의 성질과 됨됨이 또는 성격과 품격이라고 사전에서는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격, 성품, 성향, 기질 등과 같은 말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성품이란 한 개인이 자신을 포함한 주위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인격의 총체이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 감정, 행동의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합쳐져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학문적으로 정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하면서 어떤 사람은 성품은 타고난 것이서 바뀔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정말 잘 안 바뀝니다. 교회에 10년 20년 다녀도 여전히 고약한 성질 안 바뀝니다. 30년은 신앙 생활해도 한 성깔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타고난 성품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섬겼던 교회에 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선임 장로님이었습니다. 아주 신앙에 열심이신 분이었습니다. 은사도 받아 교회를 위해 물질로 많이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성깔 하는 성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주일학교 전체 교사 헌신예배를 드리는데 그 장로님을 순서에서 빼었습니다. 여러 장로님들이 있으니까 당시 주일학교 관계된 장로님들을 순서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선임장로인 자신을 순서에 빼었다고 사무실에 와서 큰 소리하며 한 바탕 난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뒤끝은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만 뒤끝이 없지 그 분노의 화살을 맞은 상대는 뒤끝이 평생 갈 수도 있습니다. 그 장로님은 표정만 보면 분노가 끓고 있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참 사람 성품 안 바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얼마든지 성품 바뀔 수 있습니다. 안 바뀐다고 믿으면 안 바뀝니다. 바뀐다고 믿으면 바뀝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하시면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성품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예수님의 성품으로 우리의 성품이 바뀔 수 있습니다. 믿고 이번 기회에 성품을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장애인으로 10개 교회를 개척한 김수만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완전히 성품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나이 40세에 뜻밖의 사고를 당하여 오른 쪽 무릎 위(대퇴부)를 잘라내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기도에 전념하여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일어서게 되었답니다. 절뚝거리며 복음전도자로 나서 10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답니다. 장애인으로 손수 목수일을 하며 교회를 건축하였다고 합니다. 전도하러 가면 절뚝거리는 김수만 장로님을 아이들이 슬쩍 건드려 넘어뜨려서 방천 둑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했답니다. 두루마기를 입은 채 온몸이 흙 범벅으로 되었고 또 어떤 때는 의족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 저만치 내팽개쳐졌답니다. 그런데도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인상을 찡그리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웃는 얼굴로 툭툭 털고 일어나서 그들을 위해 기도했답니다. 그들을 모두 장로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김장로님의 기도처럼 그들이 성장하여 장로가 되었답니다. 성품은 예수님을 믿으면 후천적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나와 내 가족과 내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성품을 바꿀 수 있습니다. 가시가 되는 성품 바꿀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불행하게 하는 성품 바꿀 수 있습니다.

9 주간에 걸쳐 말씀을 듣고 확실하게 성품을 바꾸어 행복한 신앙생활을 회복되는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먼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성령의 열매 중 맨 앞에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분명하게 반영해 주는 최고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3:1-13;벧후 1:5-7). 사랑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데 있어서 유일한 표증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철학자로 라브리 운동을 하신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제자의 뱃지'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싫은 사람, 미워지는 사람, 원수같은 사람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정직하게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보기 싫고, 만나면 표정이 굳어지고, 인사하면 얼굴 돌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되지 않고 미워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얼굴을 지금 떠 올려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여전히 미워지고 떠올리기도 싫습니까? 그 사람이 있는 천국이라면 그곳에 가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20절을 보십시오. 원수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열 등을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9절 보세요. 육체의 일입니다. 육체의 욕심에 따라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자신을 정의의 사도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교회를 정화하고 개혁하는 의로운 투사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엄하신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형제를 미워하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마귀의 자식이라는 말이고 지옥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심각한 죄라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요한 일서 4장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요일2:9)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은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정의의 사로라고 생각하며 형제를 미워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잘 믿는 체 하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미워하고 흉보고 비난하면 그것은 스스로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경건을 폭력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 목사님을 미워하며 험담하고 정죄하면 그 사람은 적군인가 아군인가를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사람인가 하나님의 사람인체 가장하고 사탄에게 쓰임받는 사람인가를 잘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잘해준다고 무조건 그 사람의 말을 믿고 따르다 보암직도 먹음직도하게 위장하고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달려드는 사탄의 유혹의 올무에 빠질 수 있습니다. 목사를 미워하고 장로를 미워하고 권사를 미워하고 집사를 미워하고 사모를 미워하게 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게 하는 것은 다 사탄의 전략에 속한 것입니다. 사탄이 오랜 세월 썩 먹어 온 고전적인 수법입니다. 교회를 파괴시키려는 사탄의 정체이고 우리의 교회 생활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인생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인생은 불행해 집니다. 돈의 많고 적음, 명예의 많고 적음, 권력의 많고 적음에 행복이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사랑의 많고 적음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아주 기묘한 방법으로, 바리새인처럼 정의의 사도로, 아주 정당한 명분으로, 아주 보암직도, 먹음직도 하게 포장하여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게 하여 우리의 교회 생활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리는 선수입니다. 아담 이후 아담부부를 서로 미워하게 하고 가인을 유혹하여 아벨을 쳐 죽이게 하면서 지금까지 써온 가장 작 먹히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도 먹혔고, 예수님 가장 측근이고 가장 영향력을 많이 받았던 제자들에게도 먹혔던 방법입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면 엄청난 큰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1일날 한의원 원장집사님 예배를 드리는 데 모든 병은 전조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 알아 빨리 조처하며 쉽게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병을 키우고 나중에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워하는 것이 살인 죄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것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성령의 열매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열매입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열매가 아닙니다. 내가 사랑해야 하겠다고 노력한다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큰 은혜를 받았다고 큰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받았다고 큰 사랑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죄 지은 사람 7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자신은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붙들고 목을 비틀며 빚을 갚으라고 하는 악한 종의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은 약 5조의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돈의 60만분의 1인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목을 비트는 것이 인간입니다.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해서 사랑이 풍성한 것 아닙니다. 직분이 받았다고 사랑이 풍성한 것 아닙니다.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반드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받듯이 사랑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병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받듯이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와 사랑의 열매는 차원이 다릅니다. 은사를 받으면 방언도 말하고 천사의 말도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의 능력도 받고 구제하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도 있습니다. 은사는 보이게 드러나고 그 은사를 통하여 교회가 부흥되기도 합니다. 유명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인기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마치 연예인처럼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제가 병고치는 은사를 받아 안수기도 한 번 하면 불치병자들이 한방에 치유가 된다면 매주 우리 교회는 인산인해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잘 못 관리하고 사용하면 교회를 어지럽히고 영적 질서를 파괴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수많은 은사를 받았는데 그 은사로 인하여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경쟁심이 생기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은사가 있지만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싸움의 도구가 될 수 있고 자기 우월감을 과시하고 타인을 깔보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의의 사도인체 합니다. 자신이 상대를 비난하고 미워하며 비판한 것이 교회에게 유익이 되고 하나님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바로 자신의 작은 경건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경건 폭력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눈에는 들보가 있는데 그 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의 티끌만 보면서 미워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왜 은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분열에 앞 자비 노릇하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은사는 있지만 그것으로 불법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시인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며 계속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사위입니다. 민족을 구원한 사람입니다. 적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동지입니다. 그런데도 미워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잘못된 상상과 추측에 근거한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그가 잘못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너 미워하지 않겠다고 약속도 하고 다짐도 합니다. 그런데 결국 다윗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다윗을 미워하는 미움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는데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을 조금이라고 건드린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국회의원 공천을 보십시오. 미운털 박히니까 그 수많은 위험과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미워하며 공천에서 탈락시키지 않아요.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음을 정직하게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24절 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분쟁도, 시기도, 분냄도 당짓는 것도 분열을 조장하는 것도 이미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을 주님이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으니까 예수님이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사는 삶이 아니나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사랑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게 하실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서 풍성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의 주재권, 나의 판단권, 나의 결정권을 예수님께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가질 때 그리스도의 최고의 성품인 사람의 열매는 풍성하게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왕이 되어 살면 그 사람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꼴 보기 싫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그 사람을 향하여 주님이 가지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 그 사람을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원수로 보이지 않고 형제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러면 제 시선을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정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과 그분의 표정과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애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애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님께 시선을 맞추고 동행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그렇게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예수님이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로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뀌어 집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품인 사랑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으로 아무 대가도 없이 오지에 선교사로 나가도 스데반처럼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순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고 사랑해도 그 보상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먼저 십자가에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에게 나타나게 되기 시작합니다. 이 사랑으로 형제를,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주님께서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노력 산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열매를 많이 맺는 방법을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매맺는 사랑은 손양원 목사님처럼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자신의 양자는 사랑으로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문둥이가 된 성자 다미엔 신부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와이 군도 몰리카 섬에서 문둥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문둥이가 된 다미엔이 실천한 사랑입니다.

오래 전에 삼포능자의 [사랑하며 용서하며]라는 책을 읽으며 감명을 받은 내용이 있습니다. 1954년 가을 연락선인 토오야 호가 태풍을 만나서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승객 몇 천 명 중에서 1,011명이 이 날 밤의 조난으로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토오야 호에는 2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구명대가 없는 젊은 남녀에게 자기들의 구명대를 주고는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선교사 사진을 자기 방에 지금도 걸어 놓고 있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는 맞지 않는 사람, 아직 내 마음에 증오가 가시지 않는 사람, 아직 미운 감정이 정리 되지 않는 사람, 계속해서 피해를 주고, 괴롭히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여전히 미워하고 비난하고 쑥덕거리고 있다면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졌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3절을 보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이미 깨끗하여졌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죄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우리의 삶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요일2: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심지어는 요한일서 3장 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리라” 여기서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현재형으로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남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말씀, 복음, 성령)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이제는 죄의 종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어 죄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풍성이 맺히려면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죄가 싫어집니다. 남을 미워하고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사는 것이 역겹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주님을 생각하고 말할 때도, 일할 때도, 잠잘 때도 주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같이 있으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교회 다니면서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죄가 자신을 주장하게 하고 있다면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깨끗해지면 늘 주님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지만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죄를 이기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면 죄에 끌려가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사랑의 열매는 주님과 얼마나 친밀하게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의 수준은 주님과 친밀감의 수준입니다. 주님과 친밀해 지면 미운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고 싶고 무엇인가 베풀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말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열매들인 ‘카르포이(καρπὸι)’라고 하지 않고 열매인 ‘카르포스(καρπὸς)’라고 단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갈 5:22). 이것은 아홉 가지 열매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의 뿌리인 성령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완전하게 아홉 가지 열매를 맺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이 열매는 성령을 좇아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로 아가페, 희락, 화평인데 이 열매는 모두 하나님의 특성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둘째는 인내, 자비, 양선인데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입니다. 다른 이들을 인내와 자비와 선으로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셋째는 충성, 온유, 절제인데 이는 내적 영성 즉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입니다.

 

이 모든 열매가 어떻게 맺혀지게 됩니까?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십시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비결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의 열매는 자동적으로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따라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에게는 두 마음이 주어집니다. 사도 바울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 마음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령의 소원이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마음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내가 성령을 따라 행할 수도 있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의 열매가 넘치게 맺힙니다(요7:38-39)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그리스도인이 맺어도 되고 안 맺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라도 계속 맺어야 하는, 책임을 수반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는 우리의 선택에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다른 성경에서는 모두 ‘하라(Do 또는 Be)’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성령의 열매인 희락은 빌립보서 4장 4절에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화평은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 모든 사람과 화평함을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인내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에서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고 말씀합니다. 자비는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양선은 에베소서 2장 10절과 골로새서 1장 10절에서, 충성은 디도서 3장 8절과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온유는 디모데후서 2장 24절에서, 절제는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모두 ‘하라(Do 또는 Be)’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계속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의지적으로 미워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라는 기로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비난할 것인가 칭찬하라 것인가 순간에 칭찬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원수들 앞에서 성령님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주어질 때 순종하여 행동으로 옮기면 사랑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님이 돌을 던지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프로이드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공격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두려움(불안)과 공격성(분노)은 인간 행동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공격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강력한 공격 본능을 타고난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이며 따라서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웃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웃을 성적으로 이용하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스 롯터는 "순수한 의미의 몰아적인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불가능하다"라고 말을 합니다. 장 마리 펠트(Jean-Marie Pelt)는 그의 책 [정글의 법칙 ? 식물· 동물· 인간의 숨겨진 공격 본능]에서 바닷속 물고기와 새,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은 물론 우리가 모르고 지나친 작은 식물들까지도 생존과 번식을 위해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만 적용되는 인간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백기를 드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웃을 사랑합니까? 경쟁자를 사랑합니까? 원수까지도 사랑합니까? 성령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면 가능합니다. 사랑이 지상명령인 것을 알고 의지적으로 사랑의 말씀에 순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스티브 세인트가 쓴 '창끝(End of Spear)'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창끝'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었습니다.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와오다니(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사로 갔다 모두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살해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들이 남편들의 뒤를 따라 아우카족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의 남편을 죽인 사람들은 정성껏 섬겼습니다. 추장을 비롯한 모든 아우카족들이 이들의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부인들이 본국으로 떠날 때에 아우카족 추장이 물었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십니까?"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벳이 말했습니다. "남편들은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들이 그들을 죽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우리는 남편들이 그렇게도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엘리엇 등을 창으로 찔렀던 5명의 아우카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답니다. 그 가운데 4명은 목사가, 한 명은 전도자가 되었답니다. 아우카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답니다. 5명의 아우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 살해된 5명 선교사 가운데 한 명인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해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억지로 맺으려고 해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 충만하여 매 순간 매 순간 말씀에 순종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정의 사도가 되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잡아 죽이려던 바울이 어느 날 예수님을 믿게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변하였습니다. 갈5:13절 이하를 보십시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고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사도로 사랑을 강조한 사도 요한을 보십시오.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종교적 우월주의,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출세를 위해 예수님을 따랐고 편협한 열성분자였습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사는 종교적 영웅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씀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없음을 정직히 우리는 고백하여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십자가에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으로 그 사람을 보면 우리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성령 충만하면 말씀에 순종할 능력이 생기고 말씀에 순종할 때 풍성한 사랑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않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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