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2) 애통하는 자
마5:4
예수님은 복있는 자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첫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나 현대나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면 ‘그렇습니다’라고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부자가 복있지 어떻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냐고 항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인 하나님이시데도 불구하고 이사야서에 예언된대로 지극히 가난한 자로 오셔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자의식을 가진 심령이 가난한 자를 구원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인 파산 선고를 받은 자 즉 영적으로 예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자입니다. 마음이 비어 있는 자, 예수님만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구주임은 인정하는 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 영적 무능함을 깨닫는 자, 영적 파산 상태에 있는 자, 자기를 의존하지 않고, 이제껏 살아온 자기 인생에서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회귀하는 자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령의 가난을 자각한 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메시아로 모시는 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 자신의 무능, 부적격성을 깨닫고 온전히 그리스도만 신뢰하는 마음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가 천국 백성이 되고 천국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자기 의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인생은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된 자가 죽으면 가난이 없는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되며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원한 천국의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행복을 위해 부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포한 후 바로 이어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도 그 당시나 지금이나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모두가 기쁨을 추구하는 세상이고 기뻐하는 자가 행복하지, 어떻게 슬퍼하는 자가 행복하겠습니까? “행복=기쁨”이 정상적인 등식이지 어떻게 “슬픔=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1.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한 애통은 원어로 “펜데오”라는 말로 죽은 자를 장례할 때(창23:2), 국가적인 재앙이나 하나님의 심판을 슬퍼할 때(암5:16; 계18:11; 15:19), 사랑하는 자가 죽었을 때 격심한 슬픔 비통을 표현하는 말로,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슬퍼할 때(창37:34) 사용된 단어입니다. 성경에는 운다는 말이 9가지 정도의 표현이 있는데 펜데오는 감정적인 슬픔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슬픔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거나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가슴이 찢어지고 숨이 막히며, 온 마음과 몸이 떨리고 뼈까지 쑤시며 고통을 느끼는 그 같은 슬픔을 말한다고 합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사랑하는 요셉을 잃은 늙은 야곱이 통곡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와같은 애통입니다. 가장 사랑하던 아들이 하루아침에 행방불명이 되어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옷을 갈기갈기 찢고, 허리에 굵은 베를 두르고, 땅을 치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날마다 통곡했습니다. 단어적인 뜻으로는 이러한 애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애통을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한 번 애통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으로는 계속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6:21 클라이오)과 연관시켜 같이 생각해 볼 때
첫째,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애통은 크게 육적인 애통과 영적인 애통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애통은 신앙에 관계된 것이고 육적인 애통은 감정적인 것에 해당됩니다. 다윗이 죄를 회개하며 흘리는 눈물(시32:1-5) 이나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죄를 위해 애통하는(렘9:1) 것이나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훈계하며 흘리는 눈물(행20:31)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는 눈물(마26:75)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서(요11:35)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시며(눅19:41),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흘리신 눈물(히5:7) 등이 여기에 속한 것입니다. 육적인 애통은 여동생 다말이 암논에게 욕보임을 당하였을 때(삼하13:1-9)와 암논이 죽임을 당하였을 때 압살롬과 다윗이 흘린 눈물(삼하18:33-19:4)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애통의 의미는 심령의 가난처럼 육신적인 의미도 포함됩니다(눅6:21절은 육신적인 울음 강함). 여기서 애통은 당하는 슬픔이 아니라 자발적이니 슬픔입니다. 눅6:21절을 보면 슬픔 자체에는 어떤 가치가 분명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슬퍼한다는 뜻으로 문법적으로는 계속 슬퍼한다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난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슬픔이 마냥 불행만은 아닙니다. 때때로 슬픔도 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주보에 울음과 건강에 대하여 제가 정리하여 써 놓았는데 눈물은 각종 질병을 치유하게 한다고 합니다. 울음은 천연 치유제로 스트레스에서 몸을 지키는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감정적으로 흘리는 눈물에는 카테콜아민이라는 스트레스호르몬이 많이 들어있답니다. 눈물을 통해 스트레스호르몬이 배출되면 심장질환이나 고혈압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된다는 것입니다. ‘눈물 치료’는 암ㆍ알츠하미머ㆍ류머티스 당뇨ㆍ화병ㆍ 만성질환 등에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아랍의 격언에 "항상 햇빛만 나면 사막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듯이 때로는 슬픔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도 합니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현대인이 마음의 병에 걸리면 울어야 할 때에도 울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 눈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고도 말합니다. 세상의 어떤 일은 눈물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슬픔은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네빌 탈봇트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맨 밑바닥에 내려 갔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슬픔 가운데 빠졌을 때, 하나님을 만난 사람, 실패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 죽을 수밖에 없는 심한 중병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르틴 루터가 그의 친구가 갑자기 죽었는데 거기에 충격을 받고 수도원에 들어갔고, 프란시스코같은 사람도 심한 병 중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애통이 복으로 인도하는 길이 됩니다. 야고보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10-11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결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근심은 죽음을 가져오지마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구원을 얻게 합니다. 그럴 때 애통하는 자는 행복합니다. 현재의 고통과 눈물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궁극적이고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한 애통의 눈물을 흘리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애통입니다. 죄로 인해 계속 애통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믿음으로 가지게 되는 거룩한 애통으로서, 심령이 가난하면 애통하기 마련입니다. 신앙을 가지게 되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라는 찬양을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바울은 A.D. 48경 갈라디아서 1:1절에서 하나님의 사도라고 고백했지만 A.D. 48경 고전15:9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A.D. 63년 경에는 엡3:8절에서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중에 작은 자라고 순교하시기 전 1년 전에는 딤전1:15절에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의 연약성과 죄로 애통해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생각하고, 애통한다는 것은 물질적, 혹은 명예적 손실과 상실에서 오는 애통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사별이나 고난 또는 실패에서 오는 애통이 아닌 그 이상으로 것으로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피어슨 박사는 “우리의 영적 상태의 절실한 궁핍과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은 불의에 대한 애통이며 우리가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우리가 믿었던 자기 의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항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애통은 항상 의식적인 심령의 가난함과 동행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애통하는 자가 복된 것은 슬퍼하는 모든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 인해 애통해 하는 자들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슬퍼하고 애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하여 애통하고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사람은 성군으로 불리우는 다윗입니다. 그는 결코 의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애통함이 있는 죄인이었고, 눈물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두고 그가 겪는 사건 사건마다 계속적으로 회개했으며, 그런 회개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함께 범죄한 밧세바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에도 묵묵히 원망 없이 왕좌를 내놓고 피난 길에 오릅니다. 그는 언제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핑계가 전혀 없었습니다. 회개는 자기자신을 꾸짓고 깨뜨리는 아픈 눈물인 것입니다. 참회개는 누구도 원망하지 아니하며, 어떤 환경이나 나로 범죄하게 한 어떤 여건에도 핑계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라는 직선적이며 절대적인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같은 뜨거운 회개의 눈물, 그 애통함이 있을 때 그가 복된 것입니다. 후회하는 것과 회개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뉘우친다고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한 죄인의 바른 응답인 것입니다. 이 눈물은 단순한 심리적 비애현상이 아니라 죄인이 돌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 내 죄를 용서해 주실 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통한 자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2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예수님은 슬플 자를 위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왜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습니까? 이사야 61장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3)”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슬픔을 어떻게 했습니까? 이사야 53장 4절을 찾아 읽어 보겠씁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애통해 하며 예수님께 나온 자 즉 제자들이 복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가룟유다는 똑같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똑같이 자신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애통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끌려가 고난 받으시는 것은 보고 너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은 30을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성소에 던지고 돌아와 애통하다가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갈망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어떠한 사람이든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애통하며 예수님께로 나오면 예수님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며 죄를 용서해 주시고 큰 위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라고 말씀하셨으며,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언하시는도다(시편 34: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한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셋째, 세상을 향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보면서 마태복음 11장 17절에서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멸망하는 세상에 대한 애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 애통해하면서 애통한 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한 애통입니까? 왜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무엇을 빼앗긴데 대해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1장에서 애통의 목적은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이 기쁨을 빼앗긴 것은 그들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라를 잃어버린 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애통’의 목적은 각 사람의 죄에 대한 슬픔과 죽음에 이르는 비애이지만 나라를 잃고 권리를 빼앗기고 통한하며 모든 희망을 빼앗겼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파멸되고 의지할 데 없으며 철저한 상실과 무력함과 절망적인 현실 상황에 대하여 애통하는 자들에게 메시아가 오셔서 위로해 주실 것을 이사야는 예언해 주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예수님이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기 위해 오셨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애통해하는 너희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의 앞제 앞에서 현 세상에서 탈취당하는 자들, 압제당하며 고난을 받는 자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애통해하고 있는 제자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실제로 착취당한 자들이고 애통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애통해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슬픔으로 애통하는 자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은 그 십자가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며 애통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말씀했는데 죄로 망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아픔을 보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동족과 지구촌의 형제를 보며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사회구조적으로 애통해 해야 할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물의 선지자는 예레미야는 죄로 사무친 세상을 보면서 애통해했습니다(예레미야 4:19 이하).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요 11:35),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눅19:41), 인류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애통해하였습니다(히5:7). 존 낙스는 스코틀렌드를 보며 애통해 하며 "나에게 스코틀렌드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타락을 보며 애통해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타락한 종교를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이러한 애통은 예수님께서 죄악된 세상을 보시고 애통해 하신 것과 같습니다. 불의한 자가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고, 오히려 선한 사람이 멸시와 천대를 받고 고통을 받는 세상을 보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66:10)”
2. 왜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까?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위로라는 말은 ‘파라칼레오’라는 말로 ‘곁에서(파라)’와 ‘부른다(칼레오)’의 합성어로, 죄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모습을 반영해 주는 단어입니다. 수동태 형식으로 쓰여졌는데 이 ‘위로’는 어떤 인간의 위로가 아닌 하나님의 위로인 것입니다. 이 ‘위로’는 하나님 나라가 올 때 이루어지게 되며 그때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의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죄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이 곁으로 불러주시므로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로자는 누구십니까? 이사야 51장 12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우리의 위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이사야 51장 3절을 보십시오. 황폐한 곳을 위로하십니다. 이사야 66장 11,13절을 보십시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위로하십니다(사66:11,13) 위로의 결과 어떻게 됩니까? (1)광야가 에덴같고 사막이 여호와의 동산같이 되고(사51:3) (2)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고(사51:3; 52:9) (3)두려워 안하게 됩니다(사51:12). 위로는 이 땅의 부나 명예, 권력, 제도,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 곁에 갈 수 없는데 누가 위로자이신 하나님 곁에 가게 하십니까? 누가복음 2장 25-27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가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며 마침 그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위로자'는 그리스도의 대명사요 또한 성령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요 14:16; 26:15). 애통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2:1에도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대언자는 “파라클레토스”로 우리가 범죄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변호해주시고 대언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시며 상담해 주십니다. 요한복음14:16-18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죄가 얼마나 많은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많고 깊어도 애통해 하는 자들은 위로해 주십니다. 애통해 하는 자를 위해 오셔서 애통한 자로 십자가에 돌아가셨기에 애통과 위로 사이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있습니다. 삭개오도, 간음한 여인도 죄를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자들은 위로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첫째,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는 천국에서 다시는 애통함이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가 온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절망적 애통(계18:7-8)을 할 때가 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런 애통을 받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애통은 죽음인데 우리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며 눈물을 다 씻어 주십니다.
계시록 7장 17절에서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 위로는 인간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3-4)” 애통한 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애통한 자를 찾아와 애통한 자를 복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애통한 자를 품에 안고 대신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와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통해 하면 사는 자들에게 영원한 천국에서 참된 위로를 받고 살게 하여 주셨습니다. 죄인임을 깨닫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만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은 버림을 받습니다(눅18:1314, 롬5:1-3) 모든 눈물을 닦아 주고 영원한 위로를 받습니다(눅16:25; 계21:3,4)
둘째, 이 땅에서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데 위로를 주십니다. 그것을 성경에 나온 내용으로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애통하는 자에게 견디는 힘을 주십니다. 어떤 고통가운데서도 이기는 힘을 주십니다. 고린도 후서 1장 6절에 보면,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애통하는 자에게 과정 속에서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들의 삶은 항상 불안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면 평안을 얻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에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후서 13장 11절에 보면,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여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하였습니다.
3) 애통하는 자에게 결과적인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는 많은 실패와 좌절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면 희망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 보면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26편 5절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에수님은 요한복음 16장 20,22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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