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적(5) 예고된 예수님의 탄생
마태복음1:18-25
제가 지난 주 화장실에 비누받침을 달려고 타일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아무리 뚫어도 뚫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장로님에게 타일구멍을 어떻게 뚫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타일 뚫는 도구로 뚫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도구로 뚫지 않으면 타일을 깰 것같아 그만 두고 문득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무엇이든 전문가는 도구가 필요하고 그 도구를 잘 다루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사람을 변화시켜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그 일에 얼마나 도구를 잘 개발한 전문가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수십년 동안 목회자로 살고 있지만 참 부족합니다. 자식 하나도 제대로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지 못하는 참 연약한 자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올해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동성연애자가 찬성률 87%로 당선되었고 러닝메이트 부총학생회장으로 출마한 학생이 선거 공약으로 학교 내 전도를 청원경찰을 동원해서도 제재하겠다고 내걸어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소개하고 당당하게 그런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고 그를 담임한 목사나 그의 부모는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회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릴 때 놀기 좋아하고 화장하기 좋아하는 한 여성이 결혼을 하였답니다. 임신을 하여 자식은 자신보다 잘 잘 키워보겠다고 희망을 가지고 아이를 낳았답니다. 첫 아이의 출산으로 비명을 지르며 힘들어하던 산모가 분만을 끝낸 후 간호사에게 물었답니다. "이제 다 끝났나요?" 그 때 나이 지긋한 간호사가 산모에게 말했답니다. "끝나다니요. 이제부터 시작이죠. 앞으로 20년 정도는 계속 힘들 거에요." 그런데 딸이면 편할 줄 알았는데 딸아이를 기르는 것이 정말로 힘들었답니다. 아이가 자라 미용실에 머리를 해 주러 갔는데 아이가 제 맘대로 머리를 자르려고 하니까 엄마가 그렇게 하면 보기 싫다고 스타일을 고쳐 주려고 했답니다.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이건 내 머리야!"라고 소리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도 지지 않으려고 "이거 내 돈으로 자르는 거야!"라고 야단을 쳤답니다. 치사하지만 돈을 무기 삼아 딸을 마음대로 다스려 보려고 했지만 딸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럼 난 머리 안 해."하고 나가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딸이 자라 사춘기가 되니까 공부는 안하고 맨날 멋만 부렸답니다. 그래서 무당을 찾아가 “도대체 제 딸이 누굴 닮아 그런 걸까요?”라고 물었답니다. 무당이 눈을 지그시 감더니 "혹시 집안에 외국인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더랍니다. "아뇨. 왜요?"라고 하자 "이상하다. 따님이 외국인을 닮았다는 환상이 보이는데…."라고 하더랍니다. 어머니가 “제 딸이 닮았다는 그 외국인 이름이 도대체 뭡니까?"라고 하자 "따님이 그렇게 공부도 안 하고 화장하고 멋만 부리는 것은 Jiemy(지에미)라는 사람과 닮아서 그렇다고 말씀하시군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참 잘 변하지 않습니다. <바른 마음(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가 인류학·심리학·뇌과학·진화론 등의 다양한 연구를 바탕으로 ‘왜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밝힌 책입니다. 그 교수는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이야기를 합니다. 피아제는 동물을 연구했는데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동물들이 스스로 발달 단계를 거치며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을 본 것입니다. 아이들을 연구하는데 아이들 앞에서 똑같은 유리컵 두 개를 준비해 거기에 똑같은 양의 물을 붓고 이 두 유리컵에 똑같은 양의 물이 들어 있는지 아이들에게 물었답니다. 아이들은 "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런 다음 피아제는 길쭉하게 생긴 유리컵을 하나 가져다 아까의 두 유리 컵 중 하나의 물을 붓고, 이번에는 길쭉한 유리컵과 물을 그대로 둔 유리컵에 똑같은 양의 물이 들어 있는지 물었답니다. 그러면 예닐곱 살이 채 안 된 아이들은 물 높이가 더 높기 때문에 길쭉한 컵에 물이 더 많이 들어 있다고 대답했답니다. 이 나이의 아이들은 유리컵에 물을 옮겨 담아도 총량은 그대로라는 사실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물의 양이 그대로라고 어른들이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아무 소용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살 짜리 아이에게 물의 총량이 보존되는 원리를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정 연령(인지능력이 생기는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했답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준비만 되면 아이들은 유리컵에 물을 담으며 노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그 이치를 깨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물의 양이 보존된다는 사실은 선천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아니요 어른에게서 배우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그 이치를 깨치는데,다만 그러려면 반드시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하고,더불어 거기에 맞는 적절한 경험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번 정직하게 생각해 보세요. 고정관념이 잘 바뀌지 않습니다. 이제 4개월이 있으면 국회의원 선거를 하는데 누구를 찍을 것같습니까? 합리적이고 신앙적으로 생각을 합니까? 보수당을 찍는 사람은 누가 나오던 상관없이 대부분 항상 보수당을 찍을 것입니다. 진보당을 찍는 사람은 항상 진보당을 찍을 것입니다. 그 교수의 견해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다음이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개인보다 집단의 차원에서 더 강력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만들어진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만든 기준으로 적을 만들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진영논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하기 힘든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하면 변할 수 있겠습니까?
정신 의학자 해리스 박사에 의하면 인간은 세 가지 경우에 천성이 변한다고 합니다. 첫째, 현재 상황이 너무 괴로울 때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둘째는 소망이 안보일 때 인간은 변할 수 있으며, 셋째, 유레카 상황(Eureka Stage)에서 인간은 변할 수 있고 합니다. 어느날 자신도 모르게 큰 깨달음이 있을 때 변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유레카 상황이 장 피아제(Jean Piaget)가 말하는 발달 단계입니다. 어떤 단계에 이르러야 사람은 깨달을 수 있고 변한다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변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 "스위치(칩 히스, 댄 히스 지음)"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다이어트에 성공한 여대생의 이야기에서부터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간단하지만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낸 사례 뒤에는 공통의 패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심과 후회의 지긋지긋한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데는 어떤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팬들에게 팝콘을 주었는데 어떤 종류의 영화를 보던 '더 큰 그릇 = 더 많은 섭취'라는 공식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사람들이 팝콘을 덜 먹게 만들고 싶으면 해결책은 더 작은 용기를 제공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변화는 종종 사람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상황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상황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앉은 자리를 바꾸면 새로운 세상이 보입니다. 분명한 목적을 보여 주고 할 수 밖에 없는 동기를 만들어 주고 갈 수 있는 지도를 그려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려 주기 위해 차원을 달리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해 상황을 바꾸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아무리 물이 똑같다고 설명해 주어도 모르듯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차원으로 내려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기로 이 땅에 오신 성탄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 이것이 기적입니다. 철학자 키엘케골는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왔는가를 농촌 소녀와의 사랑에 빠진 왕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천한 소녀를 사랑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왕가의 혈통도 없었고 공식적인 교육을 받은 일도 없고, 그녀는 누더기같은 옷을 걸치고 농촌의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왕은 이 소녀를 너무나도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 사랑을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왕의 자문관들은 정 그렇다면 명령을 내려 그녀를 왕비로 삼으시라고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강요된 순종으로 얻은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를 왕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참모는 소녀의 지위를 격상시켜 궁중으로 데려 오라고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녀가 정말 마음으로 왕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녀가 얻은 지위와 보석 때문에 왕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가 왕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왕은 잠시 왕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농부가 되어 그가 사랑하는 소녀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농부로 살며 그녀가 입고 있는 동일한 누더기를 입고 동일한 음식을 먹고 동일한 오두막집에서 살아가며 그녀의 사랑을 얻기로 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1.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21).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라는 이름의 뜻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그것은 그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위험에서 구한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구원하다는 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이며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댓가를 지불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와야만 합니다. 대속하려면 대속자는 죄가 없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9장10절에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말씀하였고 마가복음 10장45절에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나비가 되지 못하게 하고 애벌레로 살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죄가 우리 눈과 귀를 가리면 영적 세계에 대하여 아무리 들어도 알 수 없고 아무리 보아도 볼 수 없습니다. 파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세상 모든 것을 다 파랗게 보입니다. 꽃은 빨갛고 눈은 하얗다고 말해도 거짓말한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쟁취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함께 더불어 사는 복지 국가를 만들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류는 17-19세기를 거치며 자유를 챙취하기 위해 투장하였습니다. 20세기에 와서는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21세기는 물질로 잘 사는 복지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해결된다고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코 인간은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인간은 진정한 평등을 실현할 수 없고 참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뿌리가 다 썩어 가고 있는데 열심히 전지해 주고 거름 준다고 나무가 무성해 지고 아름다운 꽃이 피겠습니까? 썩을 뿌리부터 치유해야 합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죄는 인생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죄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도록 합니다. 죄는 시기심을 조장합니다. 죄는 믿지 못하도록 합니다. 죄는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죄는 만족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죄는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합니다. 인류 역사와 개인의 삶에 암적 존재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야 개인과 가정 인류에게는 미래가 보장되고 참된 행복과 평강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불화하고 인간끼리 반목과 질시, 욕심에 사로잡혀 평화를 잃어 버리고 자기 스스로도 모순과 친죄 성향을 갈등하는 사람들에게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참된 평강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지옥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에 치루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죄를 덮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어 죽음에서 해방되고 죄에서 용서받고 천국 생활로 거듭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홍수로 조난을 당하였는데 구조대원이 왔습니다. 그런데 구조대원을 손을 뿌리치면서 어떻게 이곳에 왔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진짜 나를 살릴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로보캅 같지 않은 그를 보고 자신을 살릴 수 없다고 고집부리면서 스스로 살 수 있다고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교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죽고 맙니다. 구조대원이 내민 손을 뿌리치지 말고 가면 안전하게 살아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은혜의 손을 뿌리치지 않으면 천국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셔 십자가에서 내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만 믿으면 새로운 차원의 인생이 펼쳐집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좋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잃었습니다. 뒤에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하들과 함께 지방 순시를 갔습니다. 저작거리에서 거지들이 춤을 추면 놀고 있었습니다. 구경하고 있는데 자신과 비슷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신하에게 데려오게 하여 보니 뒤에 점이 있었습니다. 분명 자신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거지를 향하여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왕국에 가서 살자." 이 거지가 어떻게 하면 왕궁에 가서 살 수 있습니까? 자기 앞에 서 계신 분이 자기 아버지라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우리도 이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이 정복된 영원한 나라에 가서 산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것은 잘 믿습니다. "어떤 탤런트가 아프리카 어느 나라 대통령을 접대하여 흑인 아이를 낳았더라."라고 말하면 그것을 믿고 다른 사람에게 열심히 전해줍니다. "어느 탤런트가 결혼하기 전에 임신했다."고 하면 자신은 그 탤런트를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고, 실제로 임신 기록을 보지도 않았는데 잘 믿습니다. 우리가 전해 들은 것이 100% 사실적인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기억의 한계가 있고 다 자기가 본 것으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라는 책을 보면 스무 명의 사람들에게 링컨이 새겨진 미국 동전을 보여 주고 그리라고 하니까 여덟 가지 특징을 빠짐없이 그린 사람은 열렬한 동전 수집가 한 사람뿐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실을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실험입니다. 그런데 온갖 시시콜콜한 것은 잘 믿으면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객관적 사실과 수많은 증거가 있는데도 잘 믿지 않습니다. 어느 시골에서 깡패하시다가 목사님이 되신 분이 부흥사로 가셔서 부흥회를 했답니다. 그런데 동네 깡패들이 부흥회를 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예배당에 들어와 설교 방해를 하자 서울 깡패 출신 부흥사 목사님이 내려가 다 때려 눕혔답니다. 그러자 시골 깡패들이 무릎을 꿇고 "형님, 알아보지 못하고 죄송합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 믿으라고 하였답니다. 설교를 듣던 깡패들이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믿을 것을 믿으라고 해야 하지요."라고 말했답니다. 그 때 부흥사 목사님이 "믿으라면 믿어 까불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얻어터지기 전에 믿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육신의 기적이, 십자기의 능력이 부활의 기적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분 계십니까? 믿어서 손해될 것 없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국 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초가삼간도 나는 만족하네 값진 재물도 내겐 없지만 내게 주어진 하늘나라에 가면 내겐 황금과 은만 있네
(후렴) 내게는 하늘 저 위에 집 있네 햇빛 비치고 찬란한 그곳 그 날이 오면 다시 방황치 않고 순 황금 길을 거닐겠네
나 가난해도 외롭지 않네 천국길 가니 실망 없다네 나그네로서 면류관 쓰며 거문고 타는 천국 가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니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모태의 삶은 끝이지만 새로운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끝이지만 또 다른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벌레가 고치가 되고 고치가 다시 나비로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으면 영원한 천국에서 살 수 있고 이 땅에서도 천국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길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23).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까?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천사는 두려워하는 요셉에게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미 예수님 탄생 700년 전에 이사야7:14, 8:10에 예언해 놓으신 말씀으로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의미의 "임"과 우리와 라는 의미의 "마누"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엘"이 결합된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죄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를 떠나갑니다. 사랑하는 부모도 떠나가고 사랑하는 아내도 남편도 시간이 지나면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친구들도 때로는 사소한 이해관계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도, 절망할 때도, 슬픔에 잠길 때도, 배신을 당할 때도 우리 주님은 저와 늘 함께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마 11:28)"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모든 짐을 주님께 달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 약속하였지 않습니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인류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우는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희망이 없는자, 위로를 원하는 자, 고독한 자, 절망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 실패한자, 병든 자와 함께 하십니다. 죽음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고독할 때도 외로울 때도 실패했을 때도 배신당했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자식들 때가 되면 다 떠납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떠납니다. 의지했던 친구도 때가 되면 떠나지만 우리 예수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여 우리를 보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소망을 주십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고난을 받을 때(행18:9-10)도 우리 주님께서는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바울이 공회에서 잡혀 죽음의 위험에 처했을 때(행23:11) 우리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바울이 파선의 위험을 당했을 때(행27:23)도 우리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하였습니다. 바울이 노후 대책도 없이 감옥에 홀로 있을 때도 우리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다윗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102:1-7을 보십시오. 육체는 연기같이 사라지고 뼈가 숯불처럼 타고 있었습니다. 마음은 풀처럼 쇠잔하여 음식 먹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고달팠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하루 종일 모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저주의 대명사로 쓰고 있었습니다. 자식이 배반하고 신하가 배반하고 권력과 부와 명예를 하루아침에 다 잃어 버렸으니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겠습니까? 그 때 그는 “나는 광야의 탕아새처럼 되었고 황폐한곳의 부엉이처럼 되었습니다. 내가 뜬눈으로 밤을 세우니 지붕위의 외로운 새와 같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고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연말이 되어 고달프고 힘이 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어제 오 집사님의 문자를 받고 기뻐했습니다. 이 집사님이 어느 날 감자기 사경을 헤매다 천국 경험을 하고 의식을 찾았고 말도하고 신체 기능도 점점 정상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걷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제부터 런닝머신 1단계를 탄다는 것입니다. 평행봉을 손을 놓고 걷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덕분이라고 감사하다고 문자가 왔습니다. 할렐루야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입니다.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 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미친 곳 전혀 없네 오 신실 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 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다윗은 시32에서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받음을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고난의 인생이었습니다. 외로운 인생이었습니다. 억울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였습니다. 감옥에서도 노예 생활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환난에서 건지시되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고(행 7 : 10), 함께 하셔서 범사에 형통케(창 39 : 3,23)해 주시고 노예의 신분에서도(창 39 : 3, 시 105 : 17)에서도 형통케 해 주시고 감옥에서도 형통(창 39 : 23)케 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해하려고 꾸민 악한 계획까지 그에게는 선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창50:20).
다시 앞에서 한 한 여성의 이야기을 이어가겠습니다. 열심히 과외를 시켰답니다. 그러면서 늘 어머니는 어릴 때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보았답니다. 딸이 성적표를 가져왔는데 꼴찌에서 5등이었답니다. 그래서 딸을 혼내며 옆집의 영희는 1등을 하는데 너는 왜 이꼴이냐고 야단을 쳤답니다. 그러자 딸이 말했답니다. "엄마, 걔는 엄마, 아빠가 머리가 좋잖아요."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아직도 남이 변하지 않는다고 원망만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내가 죽으면 자식도 변하고 남편도 아내도 변합니다. 성도가 죽으면 목사가 변합니다. 목사가 죽으면 성도가 변합니다. 내가 안죽고 높아지고 교만해지니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쁜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지만 사업을 하면서 홀로 외롭게 싸워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외롭게 홀로 신앙 생활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억울하게 홀로 당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질병에 걸려 홀로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식들 다 쓸데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홀로되어 외롭게 인생의 겨울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항상 우리 곁에 주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애통하고 슬퍼하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의 방황이 아무리 어렵고 오늘의 좌절이 아무리 눈물겹다 하더라도 우리 예수님만 떠나지 않으신다면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홀로가 아니다 주님께서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8)" 오늘 성탄절을 앞에 놓고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이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는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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