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기,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3)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3:24-26
8월에 암흑기에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성도님 가운데서는 암흑기라는 말을 들으면 무슨 지금 암흑기라고 그런 설교를 하느냐고 공감하지 못하고 의문을 가지는 성도님도 계실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해서만이 암흑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를 한국 근대화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하며 일제 강점기를 미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 시대 때 국민의 주권을 일제에게 빼앗겼고 신사 참배를 전 백성이 강요당한 정치적, 경제적,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해방이 되어 국민의 주권을 찾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돈과 성욕과 권력에 노예가 되어 있는 영적 암흑기라고 말해도 심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얼마전 신림동 등산로에서 30살 최아무개씨가 성폭행하다 여성을 살해한 일이 보도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적 타락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인터넷이 발달된 현대인들은 수많은 성적타락에 노출되어 있고 이제는 여성 사위 남성 며느리도 괜찮다고 사람들이 무수히 많아지고 있습니다. 분당에서 22살 최모씨가 흉기 난동을 부려 14명이 다친 사건도 벌어졌고, 부산에서는 23세 정모 여성이 과외앱을 통해 학부모를 사칭해 자신의 딸을 과외받게 하겠다고 속이고 자신이 중고 교복을 사서 입고 거짓말로 중학생으로 위장하고 과외 선생님을 만나 살해한 일도 벌어졌습니다. 생명을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경제는 발전하여 나라는 부강해졌는데 빈부 격차는 심화되고 정신 건강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4명 중 1명은 정신질환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2021년 우울증으로 병원을 방문한 사람의 숫자는 93만 3,481명으로 2017년과 비교해서 35.1%나 증가했답니다. 우울증으로 인한 1인 진료비 역시 56만 4,712원으로 2017년 대비 28.5%가량 증가했답니다. 인권을 말하며 상대의 인격을 파괴하고 인성교육은 눈감고 있습니다. 얼마 전 서울에 있는 한 초등학교 23살 새내기 교사가 학부모의 악성 민원과 도를 넘는 폭언과 학부모 갑질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현재 한국은 하루 43.6명, 33분에 1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통계 당국이 사망원인 ‘자살’을 집계하기 시작한 것은 1983년이라고 합니다. 이후 2021년까지 극단적 선택을 한 숫자는 무려 34만 9,544명이라고 합니다. 인구 3만 5,000명의 군 단위 도시 10개가 극단적 선택으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나라가 자살이 많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에도 잘 버티고 살았습니다. 1983년부터 92년까지 10년 동안 3,000명 대였는데 2018년부터 현재까지 1만 3,000명대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정신이 기준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고 사회적으로 권위가 서야 할 곳에서 권위가 무너지는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아노미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인은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유기적 관계 때문에 사회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은 힘을 발휘하여 규범, 관습, 예절, 법 등으로 개인의 본능과 욕구를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사회적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회는 개인의 밖에 존재하면서 개인의 사고와 행동에 강제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 혁명과 전쟁으로 큰 사회적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급격한 사회 변동으로 기존의 가치관이나 규범이 붕괴하고, 이를 대신할 만한 새로운 공통의 가치관이 도덕적 규범이 성립되지 않는 ‘무규범 상태’를 아노미라고 불었습니다.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규범이 사라지고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나타나는 사회적, 개인적 불안정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아노미 상태에 빠지면 삶의 가치와 목적의식을 잃고, 심한 무력감과 자포자기에 빠지며 심하면 자살까지 한다고 합니다. 사회의 해체에 의해서 인간의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의 가치나 도덕적 기준이 약해지든가 없어지든가 하여 무규제 상태가 생기고, 그것 때문에 인간 자체도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욕구불만이나 불안에 빠져서 인격의 분열을 일으키거나, 여러 가지 반사회적 또는 비사회적인 행동을 저지르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거대도시에서 범죄나 비행, 매춘이나 부랑, 신경증이나 자살, 유기나 이혼 같은 것들이 눈에 띄게 많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능률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거대도시에서 사람들은 규범이 없는 상태가 되어 마음의 의지할 곳을 빼앗고 불안과 실의, 고독감과 고립감, 무력감과 자기상실, 붕괴 감각, 방향과 목표의 상실감 등을 높이며 부적응행동과 퇴행현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영적 암흑기, 개인적 암흑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선택된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는 8월에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 번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암흑기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한 시대 쓰임 받은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는 이미 북쪽 이스라엘은 망하였고 남쪽 유다가 망해가는 시기였습니다. 요시야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유다의 마지막 비극의 왕 시드기야 5대에 걸쳐 40년 동안 선지자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애굽이 강대국이었고 신흥 강대국은 바벨론 나라였습니다. 요시야 왕은 비교적 하나님을 잘 믿는 왕이었는데 정치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여 싸울 필요 없는 이집트 왕과 싸우려고 나갔다 활에 맞아 죽어 버렸습니다(대하35:22-24).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 때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외교전에 실패하여 결국 일본의 속국이 된 것처럼 모세 때 출애굽하여 나라를 건설한 유대 나라가 요시야 왕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으로 애굽의 속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애굽이 유다 나라 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웠습니다. 요시야가 죽자 아들인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으나 애굽왕 느고가 3달만에 갈아 치워버리고 그의 형제 엘리아김을 왕으로 세워 여호야김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 가버린 것입니다. 일제가 한일 합방을 한 후 우리나라에 한 것과 비슷합니다. 어느 시대나 제국주의 자들은 늘 그렇게 합니다. 우리 나라도 제국주의 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왕과 대통령을 세워 자신들의 의도와 이익이 되도록 통치하였습니다. 여호야김이 11년간을 통치했는데 아버지 요시야 왕과는 달리 백성들에게 세금을 착취하여 바로에게 바치고, 필요 이상으로 거두어 자신을 위한 사치스런 궁전을 세웠습니다(렘 22:13-14). 모두가 권력 앞에 침묵하고 있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야김의 악행에 대하여 책망했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자신이 직접 말씀을 전할 수 없으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룩에게 기록하여 바룩에게 주어 성전에 가서 백성들에게 낭독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야김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오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 말씀을 칼로 잘라서 화로 불에 던져 온 두루마리를 태웠버렸습니다(렘 36:23-25).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권력을 가지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간신들의 소리를 듣기 좋아하고 충신들의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사람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기를 원하기 때문에 최고의 스피치는 제 1법칙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들러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하고 성장하려면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쓴 소리를 듣기 싫어하던 여호야김은 애굽을 섬기다 바벨론에 의해 포위당하여 죽었고 바벨론은 8살인 여호야긴 왕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도 선조들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받지 못하고 악행을 저지르다가 3개월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갔고(대하36:9-10), 바벨론 왕은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를 유다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왕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이방 모든 가증한 우상을 예루살렘과 성전에서 숭배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볼 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적 교훈을 통해 변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의 성벽을 무너트리자 시드기야와 그의 군대들이 아라바 광야로 도망하였으나 곧 붙잡혔습니다. 이때 느부갓네살왕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갔습니다(왕하25:7). 유다를 식민지화 시킨 바벨론 왕은 유능한 사람들은 3차에 걸쳐 바벨론 포로로 잡아가 버렸고 남아 있는 사람 중에 의식 있는 사람은 바벨론이 세운 그다랴 총독과 그를 추종하는 유다 사람들을 죽이고 예레미야를 끌고 애굽으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1. 이런 민족의 암흑기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할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예레미야서 1장 8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이 예레미야에 말씀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 자녀를 이르는 부모가 된 것이 내가 그 부모를 섬기는 자식이 된 것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려운 환경에 처한 국민이 된 것이나 회사의 직원이 된 것이나 교회의 교인이 된 것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이런 부담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프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이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때 나이 18-20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암흑기에 살아가는 예레미야게 반복적으로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끓는 가마의 환상을 보여주며 북쪽 바벨론이 하나님을 거역한 유다를 징계할 것을 말씀하라고 합니다. 이 말 하기 싫을 것입니다. 제가 어느 장로님에게 “그렇게 살면 사업 결국 망합니다.”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망설이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예레미야서 1장 19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서를 보면 똑같은 말씀을 다섯번이나 해 주시고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소명을 주시면서 강조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말을 못한다고 아직 어리다고 거절할 때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을 너를 대적하지만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5장 20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는 말씀은 전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고통만 따랐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다 나를 저주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너를 이기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0장 1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너를 흩었던 그 모든 이방을 내가 멸망시키리라 그럴지라도 너만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법에 따라 너를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는 아니하리라”하나님께서 범죄한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지만 심판이 끝이 아니라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회복시키는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42장 1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예레미야 46장 2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종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나라들은 다 멸할지라도 너는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다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애굽 나라도, 블레셋도, 모압도, 암몬도, 에돔도, 다메섹도, 게달과 하솔도, 엘람도, 바벨론도 다 심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암흑기에 선택한 예레미야에게 반복적으로 해 주시는 말씀을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40년의 선지자의 삶은 하나님이 함께해 주신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암흑같은 세월이었습니다. 우리 중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교회에 다니는데 왜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고난과 고통이 계속되느냐고 질문하는 성도님들이 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이 함께하여 구원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예레미야에게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만사 형통이 아니었습니다. 원하는 배우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큰 집도 마련하고, 출세하고 명예를 누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독신으로 살며 당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비주류의 삶이었습니다. 예레미야라는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시다. 여호와께서 깨드리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던져진 인생,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인생, 사명 때문에 혐오와 배척의 대상이 된 인생, 비주류의 삶을 평생 걸어갔던 인생, 평생 왕따 당하고 소외된 인생, 왜 그렇게 사느냐고, 왜 대세를 따르지 않느냐고 인정받지 못하는 인생, 설음받고, 억울하고 배척받는 인생,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자기 태어난 날을 한탄하는 인생처럼 보였습니다. 어쩌면 예레미야에 기록된 옹기장이 비유처럼 질그릇처럼 깨드려진 인생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예레미야는 애가를 통해 어떻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예레미야 애가 3장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를 보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힘이 끊어졌다. 내 힘으로는 안돼, 불가능해, 하나님께 대한 내 소망도 끊어졌다. 하나님도 소용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몰락한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믿고 살았는데 나라는 망해 버렸습니다. 매국노 취급을 받으며(렘 20:8), 하나님의 말씀을 불태워 져도(렘36:23), 옥에 가두어 버려도(렘37:15) 다시 채포되어 구타당하고 감옥에 갇혀도 눈물을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멍에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 결과는 고초와 재난 뿐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절망하게 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내 고초와 내 재난" 입니다. 고초와 재난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고초와 재난에 집중한 것입니다.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심각한 질병의 늪에 빠지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부도를 당하니까 함께 하시는 죄와 수치가 폭로되니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심각한 질병과, 부도와 죄와 수치에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그것을 계속 기억하면 낙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이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렁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움직이면 움직인 만큼 더 빠져들어 가는 것이 수렁입니다.
3.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절망하게 만드는 내 고초 내 재난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3장에 구체적으로 잘 나와 있습니다. 바벨론에게 나라가 망했습니다. 민족의 고난과 자신의 고난을 일체화시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심각한 고난에 처한 것입니다. ①어둠 가운데 처했습니다.(2) ②잠시가 아니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오랫동안 흑암에 거하게 하시고(6) ③흑암 속에 가만히 두신 것만 아니라 종일토록 자주 치시고(3) ④화살로 허리를 맞추시고(12,13)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⑤조약돌로 이를 꺾으시니(16) 먹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⑥그의 살과 가죽이 쇠하며 뼈가 꺾였다(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육신적 고난에 처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2)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①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시고(15), ②고통과 수고로 쌓아 그를 에우시되(5), ③그를 둘러 싸서 나가지 못하게 사슬을 무겁게 하시고(7), ④쌓되 다듬은 돌로 쌓기 때문에 무너뜨릴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9). 절망적 상황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3) 그런데 그렇게 의지했던 하나님마저도 기도의 응답마저 하지 않고 도리어 맹수같이 대하십니다. ①기도를 물리칩니다(8), ②도리어 하나님은 그에게 곰과 사자로 대해 주십니다(10,11).
(4) 백성들은 그를 조롱을 합니다(14).
(5) 평강과 복을 잊어버립니다(17).
(6) 절망에 빠집니다(18-20).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나라가 망했으니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런 때 고초와 재난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이런 고초와 재난, 쑥과 담즙에 갇히게 되면 절망하고 낙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생각을 여기에 맞추면 결국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집착하면 엘리야처럼 하나님 죽여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비멜렉처럼(삿9:52-54).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 처럼(삼하31:4) 자살해 버릴 수 있습니다. 압살롬을 도와 부왕 다윗을 배반하고 정권을 잡게 했지만 자신의 모략이 수포로 돌아가자 자살한 아히도벨처럼 자살할 수도 있습니다(삼하17:23).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7일만에 성이 포위되자 절망가운데 불을 지르고 자살한 시므리처럼 자살할 수 있습니다(왕상16:18). 은 30에 예수님을 인신매매한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한 유다처럼 자살할 수도 있습니다(마27:5). 이방 여인과 바람이 나서 결국 노예가 되어 마지막 자살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했던 삼손처럼 자살할 수도 있습니다.
4. 암흑기에 예레미야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경제적, 건강적, 관계적, 정신적, 영적 암흑기에 어떻게 쓰임받아야 하겠습니까? 빅터 프랭클린이 나치 치하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남았듯이 삶의 참된 의미를 탐구하여야 합니다.
1) 암흑의 현장,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이 기업임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21,24,19-20).
암흑기에 암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무엇을 마음에 두었습니까?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와 함께 하여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붙들고 믿는 것입니다. 암흑기, 절망의 끝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인자가 끝이 없으신 하나님, 긍휼이 끝이 없으신 하나님, 그래서 어떤 과정을 거치든 절대로 진멸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인생의 암흑기라고 생각하며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건강으로, 인간관계로 절망의 끝에 계시지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예레미야는 차라지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씀할 정도로 왕따를 당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암흑에 집중하지 마시고 암흑의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절망의 문제에 집중하지 마시고 절망의 끝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넓은 팔을 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입니다. 다 없어져도 하나님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우리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가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건강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땅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여호와 한 분으로 무인도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기업이란 부모 혹은 근친으로부터 상속받은 토지 등의 재산을 말합니다. 기업은 한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소유한 최고의 가치요 소망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하나님만으로 예레미야와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십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7-19)” 자꾸 내가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면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19). 하나님께서 고초와 재난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19). 예레미야는 자신이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자신이 붙들고 고민하며 좌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억해 달라고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께 의탁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 16:3)”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고초와 재난, 쑥과 담즙을 주님께 다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자꾸 내가 그것을 기억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맡긴다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길 원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 문제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더 잘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것을 기억하면 낙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땅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문제에 집착하면 벗어날 길이 없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2) 암흑의 현장, 절망의 끝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순종해야 합니다(1, 39, 40, 22)
가치 기준을 잃으면 혼돈의 세계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레미야가 그 엄청난 고난의 현장에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진노의 매로 인하여 고난을 겪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싫어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을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하듯 하나님이 징계하는 것입니다. 3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하나님께 돌아가면 됩니다. 그 암흑이 심각한 죄 때문에 온 것일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25)" 세상에 흠 없고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짓지 않고 의롭고 완벽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브라함도 자기 살기 위해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습니다. 오늘날 이런 아브라함으로 어떻게 다룰까요? 이삭도, 야곱도, 노아도, 모세도, 솔로몬도 다 흠이 있는 인간에 불과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부하 부인을 간음하고 아이까지 갔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살인 교사하여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 자살을 수없이 해야 했을 것입니다.
늘 죄를 짓고 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입니다. 자비는 '헤세드'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시는 무한하신 사랑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를 보고 사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계약에 의한 사랑입니다. 그 어떤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적이나 위험이나 칼 그 어떤 것도 십자가의 핏값으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계약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러진다해도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아버지는 끝없이 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태에서 조성하여 부른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우리를 아시고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긍휼은 끝이 없습니다. 결코 우리는 진멸되지 아니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인간처럼 변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이 지속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꾸 상황을 보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을 때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29).
티끌은 진흙이나 먼지를 말합니다. 입을 티끌에 댄다는 말은 티끌이 입에 닿을 정도로 하나님께 머리를 숙여 몸과 마음을 모두 완전하게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30절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른뺨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며 치욕으로 배불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순종할 때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주님이 영원히 그런 일 당하게 놓아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 성숙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을 때 순종해야 합니다. 그 때 고통은 열매를 맺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인물을 보십시오. 모세, 아브라함, 다윗, 욥, 요셉, 바울 이들이 이 고난의 간을 건너면서 배운 것들이 무엇이겠습니까? 순종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인격을 훈련시키고 결국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3) 암흑의 현장, 절망의 끝에서 고생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님을 깨닫고 주어진 고난을 감수하며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25,26,33).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3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여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으로밖에 교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밖에 교훈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 해서 안 듣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주었는데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비참한 길로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옥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옥의 형벌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비참한 인생살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자들을 철저히 징계하셔도 그들을 일시적으로 고통스럽게 하신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그들을 향한 품고 계신 하나님의 선하신 마음은 절대 불변하십니다. 징계를 통해 더욱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징계는 택한 백성을 향한 영적 각성을 위한 일시적인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일시적으로 멍에를 메우게 했다는 사실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27).
젊었을 때 멍에라는 말은 고난은 그것이 최종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 훈련으로 다가오는 고난을 좋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40년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징계로 다가오는 고난의 과정을 불평과 원망속에서 보낼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훈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주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련은 성장의 법칙이요, 우리의 인격은 이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서양 격언에 "냇물에서 잔잔한 돌들을 치워버린다면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시성 단테는 사랑하는 애인 베아뜨리체와 사랑의 파탄이 생기지 않았다면 저 유명한 단테의 "신곡"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짜르트는 가난과 굶주림과 죽음의 그림자가 위협하는 아래서 불멸의 작품 "진흥곡"이 나왔으며, 헬렌켈러의 눈, 귀, 입, 삼중고의 신체의 불구가 아니였다면 새 교육가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 라이스 여사는 '고난이야말로 변장된 축복'이러고 노래하였습니다. 고난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도록, 의지하도록 하는 축복의 기회입니다.
암흑기일수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다려야 합니다.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다윗은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였지만 충동을 참으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선군이 되었습니다. 요셉도 억울한 고통을 당하였지만 충동을 통제하며 인내함으로 참고 기다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국무총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조급증에 시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씨가 꽃이 되기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아이는 하루 아침에 세상에 나오지 않습니다. 곤충에 속하는 매미도 여름 한 철을 노래하기 위해 애벌레로 7년을 기다립니다.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려면 50년 100년 기다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모세는 40년을 기다렸습니다. 명작은 기다림의 산물입니다. 베토벤은 최소한 하나의 곡을 열두 번 이상 다시 썼다고 합니다. 하이든은 천지창조를 8백 번이나 작품을 써본 후에야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8년 동안 무려 2천 번이나 스케치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즐겨 먹는 꿀 한 숟가락은 꿀벌이 4천 2백 번이나 꽃을 왕복하며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영어사전 웹스터를 집필한 웹스터는 36년 동안 밤낮으로 이 일을 하여 이 사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며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기다리며 인내해야 합니다. 능력 밖의 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성급하게 포기하거나 억지를 부려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과정 속에서 다가오는 고난과의 관계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인내함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그러므로 하나님이 영원토록 함께 하심을 믿는 우리는 인생의 암흑기에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인생 암흑기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다 왕따 시키는 것같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록 바룩과같이 나를 붙들어 주는 사람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내가 돌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원치 않은 일이 계속되고 이해못할 일이 매일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선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생시키고 근심하게 하시려고 암흑기를 허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나와 쓰임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일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29). 기다려도 기다려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더 복잡해진다고 해도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암흑기에 고생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님을 깨닫고 주어진 고난을 감수하며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기다려야 합니다(25-33).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3.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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