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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1, 혼인잔치 기적(요한복음2:1-1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6063 추천수:14 112.168.96.71
2015-11-22 09:30:27

 

예수님의 기적1(혼인잔치 기적)

요한복음2:1-11

 

세상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한 중년사내가 병원으로 찾아와 발목의 통증을 호소했답니다. 그런데 정밀검사를 해 보니까 발목에는 이상이 없고 위 속에 철편과 열쇠 26개, 메달 16개, 팔찌 1개, 목걸이 1개, 족집게 3개, 손톱깎이와 손톱줄 43개, 동전 88개가 들어있는 것이 발견하고 위 절개수술을 하여 꺼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기네스북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시에 살았던 벨비(13)라는 소녀는 어느날 재채기를 시작하여 6분간에 6회씩 30일 동안 계속했다고 합니다. 어떤 소녀는 밤낮으로 하품을 5주 동안 계속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잘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식적이 아니고 과학적이 아니고 합리적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기네스 북이 아니라 복음서에 예수님의 사역이 소개되어 있는데 예수님 사역의 1/3이 자연 기적, 치유 기적, 축귀 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폭풍을 잠잠하게 하고(막 4: 35-41; 마 8: 23-27; 눅 8: 22-25) 오병이어의 기적(막 6: 34-44; 마 14: 15; 눅 8: 22-25)을 일으키고 물위를 걸으시고(막 6: 45-52; 마 14: 22-33; 요 6: 19)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물고기가 잡게 하시고(눅 5: 1-11; 요 21: 6) 백부장 종의 중풍 병을 고치시고(마 8: 5-13, 눅 7: 1-10),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막 2: 3-12; 마 9: 2-8; 눅 5: 18-26), 소경의 눈을 밝히시고(마 9: 27-31), 문둥병자 열 명을 고치셨고(눅 17: 11-19),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요 5: 1-9),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고치셨고(마12: 22; 눅 11: 14),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 들린 여자를 고치시고(눅 13: 10-17), 심지어는 죽은 야이로의 딸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 중 7개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첫 번째 베푼 기적입니다.

 

1. 왜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베풀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의 목적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기적을 일으킨 이류를 세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아려주기 위해, 둘째 그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셋째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능력(뒤나미스) 기사(테라스), '표적(세메이온)'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유독 이 기적을 '표적(세메이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테라스(4:48)를 한 번 사용하고 17번을 세메이온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기적’(miracle)이 아니라 ‘표적’(sign)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표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서울역을 찾아갈 때 거리에 서있는 서울역 표시판과 같은 말입니다. 표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표적이 가리키는 최종 목적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영적 메시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흘 되던 날”을 밝힘으로 이틀이 지난 다음 날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앞 장의 1:29, 35,43 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흘 째 되던 날의 시점은 1장의 마지막 사건인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43-51) 이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냐고 예수님을 믿지 않은 나다나엘에게 무엇이라고 예수님이 약속했습니까? 1:5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했던 나다나엘의 고향인 갈릴리 가나에서 의도적으로 더 큰 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빌립과 안드레, 나다나엘, 베드로(요1:40-45)를 제자로 부른 후 3일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자신의 직업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좇을 때 많은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인생을 걸고 따를 만한 분인가 의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 때 그들에게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을 부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는 분인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요즈음도 설교를 수없이 듣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으면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적은 신화적 기록이고 성경의 기적은 과학문명이 발달되지 못한 원시적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의한 기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왜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믿지 않습니까? 왜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믿지 못할까요?

대체 무엇을 근거로 이런 ‘신화적 이야기’ '환타지 소설'에 나올 법한 일들을 믿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비과학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적=논리적=합리적=현실적=가능”, “비과학적=비논리적=비합리적=비현실적=불가능”이라는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그러면 '비과학적' 혹은 '비상식적'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말은 옳을까요? 이와같은 생각을 논리학에서는 “순환 논증의 오류”라고 말합니다.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고 할 때 과학적이 아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데 그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참으로 믿고 기적을 믿지 않는 것은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참이 증명되지 않은 전제에서 결론을 도출하거나, 전제와 결론이 순환적으로 서로의 논거가 될 때 나타나는 오류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훌륭한 덕을 갖춘 사람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그러므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훌륭한 덕을 갖춘 사람이다.” 이것이 맞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왜 축구를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나는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과학적인 법칙이라는 것은 두 가지 전제를 기반으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첫째는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 라틴어)입니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라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고 있습니다. 진공 상태에 들어가면 만유인력의 법칙은 의미 없게 됩니다. 둘째는 자연 법칙대로 현상이 발생하는 데에는 다른 자연적, 혹은 초자연적 요인이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암묵적으로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학법칙도 논증되어 진리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역사에 개입하는 초자연적 하나님이 없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초자연적 하나님의 개입을 배제하기 때문에 기적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과학의 법칙을 만드신 초월자인 하나님을 믿으면 기적은 얼마든지 믿을 수 있습니다.

문제의 근거는 하나님의 존재여부에 있습니다. 핵심의 근원문제는 하나님이 존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면 기적(奇蹟)의 가능성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됩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창조주며 전능자로써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자연법칙을 비상간섭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통상섭리 비상섭리). 예수님은 바로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7가지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시기 위해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왕의 신하가 아들이 있었는데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그에게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신하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가보니 정말로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그 적을 보고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요한복음 4장 5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에 부스러기를 가득 거두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왜 그런 기적을 베풀었습니까? 그런 기적을 베푼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장 14절에 읽어 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먹이신 것처럼 예수님 바로 생명이 떡으로 언약한 바로 그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요20:30,3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0-31)”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기적을 베풀었겠습니까? 3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며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오늘날도 기적을 통해 우리를 구원시키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인 것을 믿으십니까?

 

“1.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기쁨 되시네 2.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생명 되시네 3.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평화 되시네”

이 가사를 작시자한 사람은 조셉 하트입니다. 젊은 시절 기독교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하면서 기독교 타도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1757년 어느 날, 설교를 듣고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 그 교회에 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격하고 회심하게 되었답니다. 그 후부터 2년 동안 그는 성경공부와 기도생활에 전념하였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많은 찬송시를 지어 표현했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은 예수님을 누구로 생각하고 믿고 있습니까?

 

2. 언제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결혼식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이 다 떨어져 있을 때입니다. 문제는 기적의 씨앗입니다. 한계를 기적의 씨앗입니다. 연약은 기적의 통로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임신한 그에게 천사가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0,31)”라고 이미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사실은 요셉에게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를 가진 마리아를 보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그 때 주의 사자가 알려 줍니다.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0,2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는 마리아는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임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무엇을 지시하든 그대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보다는 예수님께 집중하라고 합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자신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주인의 문제였습니다. 연회장의 문제였습니다. 마리아는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주님께 손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지금 이 가정에 포도주가 없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4) 4절을 보세요. ‘여자여’라는 말은 여인에 대한 극존칭입니다. '여자여' '귀나이'라는 단어는 사실 무례한 단어는 아닙니다. 이 말은 여인을 부를 때 존칭어로 마리아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 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공생애를 시작해야 할 시점에서 어머니이지만 메시아에 대해 지시할 권위가 업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어머니로 지시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사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사용하시는 말씀입니다. 뿐만아니라 메시야로서 능력을 보여줄 때가 지금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실 때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때' '호라 무'는 요한복음에 여러번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지정된 시간을 말합니다. 메시아 사역을 수행해 나가는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정된 모든 시기로 기적을 행함으로서 메시아되심을 드러낼 시기를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지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의 완성 즉 죽임당하고 부활하고 승천하실 때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이 다가오자 예수님께 유대로 올라가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라고 요구합니다(요7:2-10). 그 때 주님께서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오늘 본문의 내용과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요7:30)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인생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 여섯 개의 돌 항아리는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유대인들이 결례(缺禮)를 행할 때 쓰는 돌 항아리였습니다. 결례(缺禮)라는 것은 '청결하게 닦는 예식'을 말합니다. '형식주의에 빠져 버린 생명력 없는 유대교'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주는 주로 '기쁨, 잔치, 희락'을 상징합니다.(시104:15) 지금 형식뿐인 유대교를 '참 기쁨을 상실한 잔치 집'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잔치 집이 참 기쁨을 회복한 잔치 집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뿌려져야 비로소 그 잔치 집이 참 잔치 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포도주 기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한이 공생애를 소개한 지 6일 째 되는 날에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되심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 중 6일째 되는 날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세를 밝히 드러냈습니다. 비어있는 여섯 항아리가 완성을 의미하는 일곱 번째 항아리의 새언약의 피가 부어져야 기쁨의 잔치로 변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눅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 사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계시된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 '독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본질이 바뀐 것입니다. 망칠 잔치집이 기쁨의 잔치로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어 기쁨의 잔치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주님의 품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주님께 구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 받을 것은 이미 창세기 15장 12절 이하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이고 하나님이 다 아시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구하지 않고 저절로 되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하기를 하나님은 기다리고 있습니다.(출2:23-25 3:7,9 6:5 행7:34)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될 것도 70년 후면 해방될 것을 이미 예레미야(렘29:10-14) 선지자를 통하여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겔36:37) 예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들이 구함으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절망하고 포기하고 좌절하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좌절이 변하여 희망이 될 것입니다. 결핍은 기적의 씨앗입니다.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을 만나 결핍을 기적으로 만든 사람들은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지난 주 신문을 보니까 美 월스트리트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판미동)>을 펴낸 신순규 집사의 신앙 고백이 실려 있었습니다. 9세 때 시력을 잃은 후 15세 때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혈혈단신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하버드와 MIT 졸업하고 의사와 경영학자, 애널리스트로 살아가는 분입니다. 이런 일은 아무에게나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기적입니다. 그분은 말하기를 고난과 역경을 힘겹게 헤쳐 나갔지만 "하나님의 인도와 시기가 제 계획이나 소망보다 더 완벽하다는 것을 계속 경험하다 보니, 정말 삶에 대한 작은 것부터 아주 큰 일까지 주님께 맡기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렸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은 제게 '빼놓기 힘든 핵심적인 그것'이 아니라, 삶의 근본이자 목적이 '저와 하나님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도 그렇지만, 제 존재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고 그분의 목적에 따라 일어난 일이므로, 과연 (오늘, 이번 주, 올해, 평생)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그 목적을 향해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제가 살 수 있는 최고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3. 우리가 어떻게 기적을 체험 받을 수 있습니까?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기적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기서 알고 있다는 것은 직접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그 날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도 몰랐습니다. 그 잔치를 베푸는 주인도 몰랐습니다. 그 잔치를 주관하고 진행하는 연회장도 몰랐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한 하인들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하인들입니다.

어떻게 순종하였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종들에게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우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잔치의 손님입니다. 종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이 집의 주인과 연회를 책임진 연회장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종들이 물을 채우고 있다면 어떤 비난의 소리를 듣겠습니까? 야단을 맞을 뿐 아니라 이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종들은 이런 상황에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이성에 맞지 않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7)

포도주를 가져다 부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포도주를 새로 담근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단순히 물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에 순종합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고 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이 술을 찾고 있는데 종들이 술은 가져다주지 않고 물을 가져다줍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연회장을 조롱한다고 쫓겨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합니다.

아무리 수고스러운 일일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6)

두세 통 드는 물항아리 6개입니다. 이 집이 그렇게 썩 부자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풍성한 포도주를 준비하지 못한 것을 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들이 그렇게 많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번 물을 길러 부으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여러 차례 부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수고합니다.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센씨 병환자 제사장에게 갈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아무리 권력 있는 사람이라도 물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물속에 안들어 가면 아무리 머리 굴려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곱 번 해야 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라고 할 때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문둥이들이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할 때 그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위험 부담이 있다하여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개입하면 위기는 일순간에 반전되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더 좋은 잔치로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더 좋은 포도주가 나오게 됩니다. 잔치 분위기가 망가지고, 주인에게 치명적인 타격과 수치를 가져올 수 있었는데 일격에 반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자신의 생명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풍성히 얻고 누리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1:16, 10:10)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결국 그렇습니다. 주님의 때가 오면 일순간에 반전됩니다. 문제의 매듭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가로막힌 담이 허물어지지 시작합니다. 우리 이성에 맞지 않은 것 같지만 우리가 손해되는 것 같지만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같지만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로 볼 때 어쩌면 미친 짖 같지만 순종으로 주어지는 환희이며 축복입니다. 이 환희와 축복은 결국 종들의 순종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인생 잔치의 주인공이 되어 사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자신 스스로 잔치의 주인이 되어 사는 사람도 모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주관하면서 부리는 사람도 모릅니다. 오직 내 인생을 주님께 맡겨 놓고 주님의 명령을 내 이성에 맞지 않고 비록 손해가 올 것 같더라고 비록 무식하고 천박하게 보일지라고 묵묵히 순종하는 사람들이 이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은 잘 시작하지만 나중은 비극으로 끝마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그랬습니다. 아담의 가정이 그랬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순종입니다. 순종은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습니다.(삼상15:22) 솔로몬이 성전 봉헌할 때 드린 제물보다(왕상8:63) 순종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전5:1)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신28:1-14 사1:19) 비를 주시되 때에 맞게 주시겠다고 합니다.(레 26:4) 곡식을 여유 있게 주시겠다고 합니다.(5,10) 평화를 주시겠다고 합니다.(6) 수를 초월한 승리를 주시겠다고 합니다.(7,8) 순종하면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행5:32)

표적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표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표적은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나타낸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시고 이 세상사는 동안 이런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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