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함께 살기(1) 핵심 가치 붙들고
마28:19-20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오셔서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12제자를 불러 그들의 인생 각본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특히 지난 한 달 동안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신앙 고백한 베드로의 인생 각본을 어떻게 바꾸어주었는가를 4번에 걸쳐 성경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꾸어 준 인생 각본을 가지고 인류 역사상 그 누구보다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초석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교회를 세우는 인생 각본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고기 잡아 잘 먹고 잘 다는 자신의 인생 각본대로 살았다면 갈릴리 어부로 살다 인생을 마감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역사상 대단한 업적을 남겼으며 그를 중심으로 한 초대 교회는 세상을 바꾸어 로마 1000년의 기독교 사회를 만들었으며 그가 전한 복음은 세상 곳곳에 전해져 지금은 약 26억(32%) 명 정도가(세계 인구 79억 5천만, 불교 5억 4천, 무슬림 20억, 힌두교 10억, 불가지론 7억 5천, 무신론 1억 5천) 기독교인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통해 교회라는 공동체를 인류 역사 속에 만들어냈는데, 어떻게 이렇게 한 인간이 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베드로가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핵심 가치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핵심 가치란 개인이나 조직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원칙, 신념, 철학 등을 말합니다. 가정에서 가훈, 학교에서는 교훈, 학급에서는 급훈이 있고, 회사는 사훈과 같이 핵심가치(core value)란, 조직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원칙과 기준이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사결정과 행동의 준거로 활용되는 고유 정신입니다. 공동체 구성원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의사결정을 하는 기준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핵심가치란 '개인 또는 전체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의사결정의 판단 기준'이며, '우리의 미션수행과 비전 달성을 위해 내재적으로 공유해야 할 공통분모로서의 가치'를 말합니다. 이때 미션이란 '기여하고자 하는 임무'이며, 비전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되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핵심 가치를 알고 있으면 자신이나 조직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조직에 있어 핵심 가치가 중요한 것은 첫째, 핵심 가치가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핵심 가치는 우리가 원하는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둘째는 결정의 기준을 제공해 줍니다. 핵심 가치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에도 우리에게 결정의 기준을 제공합니다. 셋째는 핵심가치는 우리의 일관성과 신뢰를 구축해 줍니다. 우리가 핵심 가치에 따라 행동하고 결정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예측 가능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인식할 것입니다. 일관성과 신뢰는 개인과 조직의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넷째는 핵심 가치는 우리에게 가치 지향적 삶을 살게 만들어 줍니다. 짐승처럼 단순히 먹고 사는 삶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삼을 살게 하고 성취와 만족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자신 때문에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게 합니다. 인류에게 공헌하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사람들은 핵심 가치를 붙들고 평생 산 사람들입니다. 평화와 비폭력이라는 핵심가치를 붙들고 인도 독립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는 이 땅을 떠났지만 그가 지향했던 핵심 가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인종 평등과 자유”라는 핵심 가치를 가지고 인권 운동을 하다 대동령까지 한 그는 떠났지만 그의 핵심가치는 세상 사람에게 지금도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인종 차별과 불평등에 대항하며 “평등과 자유, 정의”를 핵심 가치로 평화적인 시민 운동을 주도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암살당했지만 그의 핵심 가치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땅에 기독교 공동체를 만드는 기초를 이룬 사람인데 그가 평생 동안 교회를 세우기 위해 붙든 핵심 가치는 무엇이겠습니까?
19-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베드로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계속 강조하신 평생 붙들어야 할 핵심가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살고 있는 나라가 수천년 동안 유대교가 지배하였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들을 부를 때부터 계속 이 핵심 가치를 붙들고 살 것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장 3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장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2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3장 14-15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 부탁하신 유언의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행전1장 8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 사는 베드로가 평생 붙들어야 할 핵심 가치였습니다. 베드로는 평생 이 핵심 가치를 붙들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제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베드로의 첫 번 설교를 보십시오. 사도행전 2장 31-3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2장 3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 설교를 듣고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장 4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4장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사도행전 6장 7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 제자들이 수천 년 지배해 왔던 유대 사회를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 때 핵심 가치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다섯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 교육, 봉사(구제), 전도, 친교입니다. 그런데 교회 활동의 축은 바로 제자를 삼는 사역입니다. 사람을 구원시키는 구원의 방주로 사용되는 것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인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든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핵심 가치이고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생명 구원 사역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고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오늘 날도 이 일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코로나 이후 어느 시대보다 무신론이 폭발적으로 강력함 힘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보니까 교회에 다녔던 청년들 40% 이상이 지금을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증명할 수 있는 존재만 수용하여야 한다며 과학적으로 영적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니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피곤하게 뭐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왜 태어났을까?” “정말 신은 존재할까?” “고통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일까?” “정직하게 사는데 왜 이렇게 힘들까?” “왜 악인들이 더 잘되는 걸까?”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말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등과 같은 철학의 영역, 도덕의 영역, 종교의 영역의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처럼 종교는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켜는 마약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병리 현상을 고칠 것같은 느낌을 주는 허위의식이라는 것입니다. 프로이드처럼 종교는 심리적 요구인 소원과 성취를 위해 꾸며낸 환상이고 그 기능을 과학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체처럼 종교는 약자가 강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안해 낸 것에 불과해 힘으로 사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이런 것들은 인간이 종교적 필요에 따라 만든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니 그냥 보이는 세계를 즐기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핵심 가치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사는 신앙인도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데 핵심 가치를 두고 사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25-33)”
인생의 핵심 가치, 우선 순위를 제자 삼는 사역에 두라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사업 역심히 해야 합니다. 공부 열심히 해야하고, 취미생활, 운동, 예술 활동 등 각 분야에서 우리는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핵심 가치를 이루기 위해 그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1904년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는 구세군을 창설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복지 혜택을 준 윌리엄 부드를 왕실로 초청하여 격려했습니다. 왕은 격려 끝에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윌리엄 부드는 겸손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국왕 폐하,제가 바라는 것은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저의 희망이요. 야망입니다. 그리고 최대의 기쁨입니다"
2. 우리가 제자 삼은 핵심 가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첫째,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희생의 원리입니다. 헌신의 원리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것입니다. 희생없는 제자 사역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제자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의 거름을 통하여 피어나는 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원리를 보십시오. 만 왕의 왕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말 구유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삼기 위해 찾아가십니다. 물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갔습니다. 세리 마태에게 갔습니다. 예수님이 가서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만들겠다고 불렀습니다. 세상의 위대한 스승들의 제자가 되려면 돈을 싸들고 가야합니다. 그래도 받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원리는 다릅니다. 주님 스스로 우리를 찾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원리이고 은혜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였습니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생합니다. 우리가 제자를 삼기 위해서는 우리의 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가 희생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 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저들의 수준으로 내려가 이해해야 합니다. 물질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때로는 수모를 당해야만 합니다. 리빙스턴같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토마스 목사와 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이만큼 복음화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좋아진 것입니다. 1866년 토마스 목사는 우리 민족을 구원시키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희생을 감당하였습니다. 1866년 토마스 목사는 중국에서 선교사를 하다가 24살에 자기 부인이 열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토마스 목사는 계속 선교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영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지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그때 한국에서 온 천주교 신자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났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한국 땅에 수많은 사람이 복음이 없이 죽는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이 말을 들은 토마스 목사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한국 땅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드디어 미국의 셔먼호라는 배를 타고 한국 대동강에 들어옵니다. 그때 당시에 평양 감사였던 박규수는 셔먼호에 불을 지릅니다. 거기에 탔던 많은 사람들이 대동강에서 익사했고 토마스 목사도 가지고 갔던 한문 성경을 대동강에 던지면서 "이 성경이 녹아 흘러가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복음이 들어가게 하옵소서. 이 성경이 녹아 흘러가 땅을 적실 때마다 복음의 땅이 되게 하옵소서." 하고 대동강에 뛰어들었답니다. 하지만 그는 잡혀서 대동강 양각도 섬위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망나니 박춘권이라는 사람이 칼을 들고 그의 몸을 돌면서 망나니 춤을 출 때 토마스 목사는 성경을 들고 "형제여, 예수 예수"하고 외칩니다. 그때 망나니가 칼로 팔을 내려쳤답니다. 다른 손을 들고 "예수 예수" 할 때 또 다른 쪽 팔도 내려칩쳤답니다. 그래도 "오, 형제여 예수 믿으시오." 할 때 그의 목을 내리쳤답니다. 그때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 던졌던 성경을 주운 최초의 어린 아이가 최치량이라는 아이였답니다. 그 집이 여관이 되었는데 주운 성경을 가져다가 그 집 벽에 발랐답니다. 20년 후에 존 마팻이 선교사로 평양에 들어가서 어느 여관집에 들어갔는데 한문 성경이 벽에 붙어 있어 있었답니다. 그래서 최치량에게 물었답니다. 그때 최치량이가 "내가 어렸을 때 대동강에 갔다가 예수쟁이가 목이 잘릴 때 던진 그 성경을 주워다가 이 벽에 발랐습니다." 하고 말했답니다. 드디어 그는 존 마팻 선교사를 통해서 전도를 받고 장로가 되었답니다. 그 후에 토마스 목사의 목을 쳐 죽였던 박춘권은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자기 과거를 회개하면서 자기 집을 교회에 바치고 예수를 믿어서 장로가 되었답니다.
둘째는 세례를 주어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원리입니다. 영적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는 두 번째 원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 힘이 아닙니다.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는 성령의 힘으로 제자들 만듭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2:47; 4:4; 6:7; 8:12, 9:31,35; 11:21; 14:1; 21:20). 제자가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 마음대로 태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머니와 아버지에 의해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아무리 강퍅하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사람도 성령의 은혜로 변화가 됩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학살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율법주의자요 바리새인이요, 교만과 강퍅한 그를 주님은 산산히 부서뜨려버렸습니다. 그의 삶은 변하였습니다. 이제 주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말씀을 가르쳐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말씀의 원리입니다. 육신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음식이 필요합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입니다. 이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말씀이 성장시키고 말씀이 위로하고 말씀이 교훈하고 말씀이 가치관을 만들어 주고 말씀이 세계관을 만들어 줍니다. 말씀이 힘입니다. 시편 19:7-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우리의 사상이나 이론이나 경험이 아닙니다.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 놓고 방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영은 말씀으로 양육되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도, 성경 공부시간에도 구역 공과를 통해서도 우리는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고 외워 말씀으로 우리를 성장케 하고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말씀은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삶을 변화시킵니다. 방향을 전환하게 합니다.
넷째는 지키게 하여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실천의 원리입니다. 열매를 말합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입니다. 말씀은 감상용이 아닙니다. 지적 교양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삶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라고 했습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개혁했습니다. 말씀은 순종을 통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가지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제자란 "일정한 계획에 따라 배울 것을 약속하고 선생의 특별한 행동과 지식을 받아들여 점진적으로 선생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3. 이런 핵심 가치인 제자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님이 약속해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세상 끝날까지입니다. 그분은 누구이십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구주이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없다고, 시간이 없다고, 재능이 없다고, 힘이 없다고, 용기가 없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합니다. 전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겁이 난다고 합니다. 방법을 모른다고 합니다. 해야할 다른 일들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본 교회가 멀다고 합니다. 행실이 모범이 못된다고 합니다. 전도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려는 각오만 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성령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영혼 구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에 우리가 쓰임받는 것입니다. 제자화 사역은 우리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역입니다. 이 일에 우리가 쓰임받아야 합니다. 주님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120명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모여 기도합니다. 기도하다가 성령의 권능을 받습니다. 그러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들은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한 사람들, 도망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하여 세상이 변하였습니다. 1세기 세계 선교를 감당했던 안디옥 교회를 보십시오. 작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고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 지역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고 세계 선교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핵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핵심은 제자 삼는 사역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 초기 때 이야기입니다. 사업을 하다 어려워져 우리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한 구역장님이 열심히 이 가정을 말씀으로 양육하며 주님의 제자가 되게 만들기 위해 열심히 돌보왔습니다. 부부가 믿음이 성장하여 여집사님이 되었고 어느날 저에게 자신도 자신을 돌보와 주었던 구역장님처럼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0여년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제자화 사역에 핵심가치를 두고 살았던 그 권사님과 장로님처럼 그 부부도 가정적으로 해외에 교회를 세 개나 건축하고 지금은 권사님과 장로님이 되어 열심히 섬기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난 후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가치 추구를 한 사람들이 오래 남고 그 가치가 세상을 변화시켜 그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 가치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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