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각본 바꾸기(3) 시대 정신인 자리 경쟁
마18:4
오늘은 인생 각본 바꾸기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의미 추구의 인생 각본을 어떻게 바꾸어 주는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인생은 누구나 의미 추구의 본능이 있습니다. 의미 추구 본능은 인간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 중 하나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중요성을 찾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의미 추구가 필요하느냐? 삶의 목적, 삶의 가치, 살의 이유를 알래야 할 수 없는 것인데 그저 되는 대로 살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본능적인 의미 추구 욕구는 인간이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나 가치를 탐구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인간의 기본 욕구입니다. 인간은 가족, 사랑, 친구, 직업, 예술, 신념, 자선 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의미를 찾고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자유 의지가 있는 것처럼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 때 인생은 활기차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한 대학에서 십입생 실태 조사를 하면서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나 자살충동을 최근에 느낀 적이 있느냐”라고 질문했답니다. 무려 40%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질문했을 때 진로나 경제적 문제보다 삶이 무의미해서라는 답변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유명인사가 인기 연예인이 목숨을 끊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 이유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말합니다. 노인은 큰 청새치를 잡지만 배가 그 고기를 끄는 것이 아니라 고기가 배를 끌어갑니다. 힘겹게 고기를 매달고 높은 가격에 팔릴 기대를 하고 항구로 돌아오지만 상어들이 다 먹어 버리고 뼈만 남습니다. 무엇인가 잡으려고 열심히 쫓아다니지만 인생의 마지막은 허망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끝에 마주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노벨문학상을 받고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헤밍웨이는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는 41세의 나이로 약물중독으로 죽었습니다. '할리우드 섹스 심벌' 마를린 먼로도 37세 젊은 나이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실존적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약물 과다복용으로 5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자의 일생> 등 많은 작품을 써서 유명해진 모파상은 큰 돈을 벌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았답니다. 지중해에 요트가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이 있었으며, 파리에도 호화로운 집이 있었답니다. 은행에는 그가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는 1892년 1월 1일 아침,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답니다. 목숨은 구했지만 이후 정신병자가 되어 고통으로 절규하다가 42세로 생을 마했답니다. 사람은 살아야 할 의미가 있을 때 힘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의 포로 수용소에서 무모와 아내, 형제를 잃었지만 자신은 살아 남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썼는데 그는 니체가 말한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살아갈 이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그 방법을 찾는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의 영어 제목은 “Man’s Search for Meaning”입니다. 삶의 의미가 있을 때 하루 하루를 힘있게 살아갈 수 있고 역경 속에서도 용기있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목적을 분명히 하면서 강인함과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사람은 재미(행복)과 의미를 추구하며 사는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오늘 본문을 통해 의미 추구의 인생 각본을 어떻게 바꾸어 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는 우리가 어떤 의미 추구의 각본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1. 예수님은 우리가 지배를 통한 인생 각본이 아니라 보다 큰 의미인 섬김으로 통한 인생 각본을 가지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인생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누가 크냐는 것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막9:33-50;눅9:46-50).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연인 모두에게는 다 권력욕이 있습니다. 니체는 일찍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권력에의 의지"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아들러 역시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원천을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말합니다.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남자든 여자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모든 인간의 삶의 모든 단계, 즉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인간의 본성은 바로 우월함에 대한 열망이다."라고 했습니다. <권력>이란 책을 쓴 러셀은 “인간의 욕망 가운데 가장 강력한 욕망은 권력과 영광에 대한 욕망이다.”라고 했습니다. 권력욕이야 말로 ‘욕망 중의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영국 사상가 토머스 홉스는 “권력을 쉬지 않고 영원히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이런 권력욕구는 오직 죽어서만 멈춘다.”라고 했습니다. 러셀은 권력욕이 나타나는 양태를 크게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적극적인 권력욕은 지도자가 돼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소극적인 권력욕은 지도자를 따르는 무리에 들어가 그 지도자와 집단의 승리를 개인의 승리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실현된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따라 다님으로 권력을 소유하고자하는 간절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로 자유를 잃어버리고 경제적 빈부격차가 심각한 세상에서 살면서 어부로 살았던 베드로는 아마 아버지도 어부였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너는 자라서 나처럼 가난하게 살지 말고 부자로 살아야 한다고 늘 말했을 것입니다. “인생 행복하게 살려면 출세해야 한다. 권력을 잡아야 해. 큰 권력이 아니어도 공무원이라도 되어야 해. 그래야 부자가 되고, 돈 걱정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어”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경쟁에서 이겨 출세하는 것이 행복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것이고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고 부모로부터 인생 각본이 쓰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경쟁 사회에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실존적 좌절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실존적 공허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허무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심히 많이 잡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고 그를 제자로 불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더 큰 의미를 그의 인생각본에 써주는 것입니다. 너는 이제 사람낚는 어부로 사는 것에 인생의 의미를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2년 넘게 따라다녔고,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도 했으며 주님을 따를 길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음에도 여전히 그의 인생의 의미 각본은 높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고지전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사람의 인생 각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정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대정신은 18세기 후반부터 독일을 중심으로 등장한 단어로 독일어로 차이트가이스트(Zeitgeist)라는 말로 한 시대에 지배적인 지적·정치적·사회적 동향을 나타내는 정신적 경향을 말합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식, 가치 체계의 핵심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그런 시대정신에 지배를 받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아가 되어 왕이 되면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부모들로 마찬가지입니다. 20장 20-2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할 것을 말씀하는데 요한의 어머니는 자기 자식들을 좌의정, 우의정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그 두 형제를 대하여 분히 여깁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의 인생 의미 각본을 바꾸어 줍니까? 26-28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은 인생 각본에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야 말로 의미 있는 삶이라는 각본을 써 놓고 평생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는 것이어야 말로 진정한 인생의 의미라고 인생 의미 각본을 바꾸라고 말씀합니다. 죽기까지 섬기는 각본을 가지고 사는 것이 진정 의미있는 삶이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섬기기 위해 돈도 벌고 섬기기 위해 건강도 하고, 섬기기 위해 사업도 하고 섬기기 위해 출세도 하고 섬기기 위해 원하는 학교와 직장도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자식에게도 남을 지배하여 행복한 삶을 살라고 말하지 말고 섬기는 삶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으라고 어릴 때부터 교훈해야 합니다. 천국은 무한 경쟁으로 지옥같이 사는 이런 나라가 아닙니다. 오늘 읽은 말씀 18장 4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땅 속에 뿌리의 섬김이 있기 때문에 꽃은 지상에서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1956년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있었답니다. 명문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와오다니(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간 뒤 실종된 사건입니다. 엘리엇과 친구들은 모두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살해되었답니다. 이 끔찍한 비극을 미국 언론은 '이 무슨 낭비인가(What a waist!)'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허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0대에 홀로된 아내들은 풀뿌리 캐먹는 법이나 도마뱀을 잡아먹는 법 등 정글 생존 훈련을 받았고, 짐 엘리어트의 부인인 엘리자벳 엘리어트는 2년 동안 간호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아우카 부족은 남자는 다 죽여도 여자는 죽이지 않았답니다. 남편을 잃은 아내들이 아우카족 마을로 들어가 정성껏 부족들을 섬겼답니다. 아기 날 때 아기 받아주고, 감염된 상처를 치료해주며 기생충 약을 주고, 그들에게 새로운 농사법도 가르쳐주었답니다. 추장을 비롯한 모든 아우카족들이 이들의 섬김에 감동되었고 부인들이 본국으로 떠날 때에 아우카족 추장이 물었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십니까?" 엘리어트의 부인 엘리자벳이 "남편들은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들이 그들을 죽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우리는 남편들이 그렇게도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엘리자벳은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쓴 기자에게 남편이 휘튼대학에서 썼던 일기장을 보여주었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지 마라.' '이 쓸모없는 나뭇개비에 불을 붙여 주옵소서. 제 삶을 주의 영광을 위해 태워 주옵소서. 저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풍성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선교사들을 창으로 찔렀던 아우카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가운데 4명은 목사가 되었으며, 한 명은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 <창끝>의 실제 주인공들의 이야기입니다. 섬김은 완악한 마음을 녹여줍니다.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는 아픔이 있지만, 수평선의 파도보다 더 화려한 아름다움을 세상에 던져주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성장하는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섬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든 그 공동체가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것은 뿌리처럼 섬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배하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 아니라 섬기는 것인 의미있는 삶이라는 인생각본을 가져 보시지 않겠습니까?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고로 의미 있는 인생 각본은 한 영혼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각본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 이미 사람낚는 어부로 불렀고 그들의 인생에 있어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고 그 일을 평생 가장 의미 있는 일로 삼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각본을 망각하고 누가 높냐고 경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해 주십니까? 12-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아흔 아홉 마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이 그렇게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의미를 가지는 인생 각본은 어떤 사람을 평생 만나든지 사람을 경쟁의 대상이나 이용물로 삼지 않고 구원시킬 대상으로 각본을 쓰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숫자로 다루어질 존재가 아닙니다. 신분과 종교, 성, 빈부 귀천과 상관 없이 어느 누구나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독자성과 유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대신할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신분이나 역할, 능력, 외모, 주어진 부의 정도에 따라 누구도 의미 없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 남아 심리학에서 의미 치료(로고 테라피)를 만든 빅토르 프랑클은 삶의 의미를 찾는 구체적인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창조 가치로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 육아, 교육, 예술 활동이나 학문, 사업이나 봉사 활동에 몰두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체험 가치로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 체험, 예술 체험, 사랑 체험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사랑함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태도 가치로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심각한 가난이 다가오면 그냥 인생 의미없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여 집안을 일으켜야 하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그 일을 하는데 의미를 찾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평생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은 생명 구원, 영혼 구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영혼 구원을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는 인생각본을 가지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린 아이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 인구 숫자에도 넣지 않았습니다. 열등한 자, 도구에 불과한 자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하십니까?
첫째는 예수님 대하듯 대하라는 것입니다.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두 번째는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셋째는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그렇게 대하여 주었고 오늘날 우리를 그렇게 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인간 취급하지 않는 나병 환자, 혈루증 앓은 여인, 간음한 자, 세리, 죄인들을 찾아아 그들을 치유해 주시고 구원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외면하지 않고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를 구원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이시형. 박상미 저)>라는 책에 소 신부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명 ‘소 신부님’으로 잘 알려진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그가 함께 일하는 수녀님들께 항상 “기도를 하다가도 아이들이 찾으면 기도를 멈추고 아이에게 가세요. 그 아이 안에 살아 있는 예수님을 보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1957년 6월, 사제 서품을 받은 27살 청년은 그해 12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전쟁의 잿더미에서 굶주린 아이들이 있는 부산 송도로 자원해서 왔답니다.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전하는 복음은 단 한 가지였답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한 명에게 해준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해준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장례를 치르기 위해 피를 파는 어린 여자 아이, 넝마주이가 된 고아들을 보며 미국 워싱턴에 ‘한국자선회’라는 모금 단체를 만들고 후원자들을 모았답니다. 매일 미국의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동네 주부들이 부업으로 만든 수놓은 손수건을 편지 봉투에 넣어 보내 어떤 사람에게는 1달러, 어떤 사람에게는 5달러 후원금을 받아 ‘마리아 수녀회’를 창립하여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기 시작했답니다. 가장 가난한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해야 한다며 ‘소년의 집’을 세웠는데 공사 현장의 인부들이 “왜 비싼 자재만 쓰냐.”고 물으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최상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답했답니다. 이렇게 아이들을 위한 기숙사와 학교가 세웠고 아이들과 함께 달리기와 축구를 하며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었다고 합니다. 구호병원과 도티 기념병원을 세웠지만 그는 사제복 한 벌로 평생 살았고, 구두는 수시로 꿰매서 고무바닥이 비닐처럼 닳을 때까지 신었답니다. 부산과 서울, 필리핀, 멕시코에도 ‘소년의 집’과 ‘무료병원’을 세웠고, 잘 먹이고, 정성껏 가르치고, 사랑으로 키우는 일을 평생 동안 지속했답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의대를 다니던 이태석이라는 의사가 사제가 되어 아프리카 수단에서 아이들을 내 아들처럼 양육했답니다. 이태석 신부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분은 어릴 때 ‘소년의 집’에서 가난한 고아들을 보살피고 몸과 마음을 씻겨주던 소 신부님과 그곳 수녀님들의 헌신적인 삶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소 신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태석 신부님은 의미 있는 인생 각본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가 신부가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그에게 생명 구원은 가장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인생 각본을 가지고 아프리카 수단으로 간 것입니다.
소년의 집에서 신부님과 함께 축구를 하던 소년 김병지는 국가대표 축구팀의 골키퍼가 되어서 2002년 월드컵에서 4강 진출 신화를 이루었고,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카네기홀 무대에 서서 공연을 하고 기립 박수를 받기도 했답니다. ‘소년의 집’ 졸업생은 2만 명이 넘었고, 8개국, 120여 명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이야기는 영화〈오! 마이 파파>로 세상에 알려 지게 되었답니다.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평생을 보낸 부산 송도 성당은 후에 아프리카 수단에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였고 어릴 때 이태석 신부님이 다녔던 성당이었고 어머니는 그 성당에 다니며 수를 놓아 후원자에게 보내었답니다. 이태석 신부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가르쳤던 제자 타마스 타반 아콧과 마옌 루벤은 인제대 의과대학에 입학해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했고, 자기 나라에 돌아가 의과대학도 세워 후배 의사들을 양성하는 의미를 갖는 사람으로 살아겠다고 합니다.
생명 구원 사역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의미 있는 사역입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여야하겠다는 의미 있는 인생 각본을 가지고 살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물과 재능으로 무엇가에 투자하면서 의미 추구를 하며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투자할 때 순식간에 없어질 것에 투자한다면 얼마나 의미 없는 삶이겠습니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침범했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 투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크라이나에 누구도 투자하지 않을 것입니다. 평판에 투자하고 권력에 투자하고 명예에 투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으로 다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에 투자하는 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살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초월절 의미가 있는 인생 각본을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제자들은 천국을 말하면서도 이 땅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누가 높냐는 경쟁에 인생의 의미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천국의 특징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절대 의지해야만 하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하며 그분만을 의지하려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사는 천국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천국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지를 말씀합니다. 8-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것은 진짜 손 발을 자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천국에는 다 손발이 없는 사람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삽니까? 쉐드 헴스테더는 사람은 하루에 5~6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산다고 하는데 그 생각 중 죄를 짓는 생각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이 땅도 중요하지만 천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천국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초월적 세계를 바라보아야 이 땅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아 실현 욕구도 있지만 초월적 욕구도 있습니다. 세상이 이 땅으로만 끝난다면 인생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소용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요즈음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절재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말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이전 시대엔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고 질문하면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잘 이행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려 했고, 상식적 도덕적 진리를 믿고, 죄와 수치심을 알며, 내세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 세계에서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라고 물으면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의무가 없으니 모든 것의 의미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내가 왜 효도를 해야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왜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이니다. 내 자유를 누리고 내 행복만 추가하면 되지 뭐 가정을 생각하고 국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 길은 내가 정하고 내 갈망과 내 욕구를 채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유튜브, 음악, 영화, SNS, 광고를 통해 끊임없이 “너만 행복하면 된다. 누구도 너의 삶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 초월적 세상은 없다. 지금에 행복하라. 원하는 대로 살라” 등 의미가 왜곡된 각본을 쓰라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니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못 산다’는 죄책감도 없어지고 ‘마땅이 해야 하는데 못한다’는 의무감도 날라가 버렸으며, ‘마땅히 인간으로 이런 것만은 이루어야 하는데’라는 영원한 삶의 의미도 없이 현실에게 충실하면 된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삶의 끝자락은 누구에게나 다가 옵니다.
20세기 최고의 정신의학자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그의 책 〈인생 수업〉에서 '죽음에 도달하는 순간 모두가 제로가 된다. 삶의 끝에서 아무도 당신에게 당신이 얼마나 많은 학위를 가졌으며, 얼마나 큰집을 가졌는지, 얼마나 좋은 고급 차를 굴리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의미 부여가 없는 삶은 결국 마지막 날 허탈감과 허무감에 빠져버리기 쉽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한 집착도, 남보다 앞서가려는 경쟁심도, 인간의 욕심과 허영심도, 자극을 극대화하는 말초적 쾌락도 공허함을 채우지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 결국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엡4:17)”
자녀 3명과 아내와 함께 뉴욕에서 리디머 교회를 시작하여 영향력있는 대형 교회로 만들고 세계 48개 도시에 250여개의 개척 교회를 세운 팀 켈러 목사님이 지난 5월 19일 72살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투병 중에서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아주 빨리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은 기본적으로 죽음을 지금까지 부정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갑자기 그런 일이 닥치면 내가 이 일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고 내가 예수님을 믿고 죽으면 그 부활도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가”라고 한 번쯤 반문해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부활에 대하여 책을 쓰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죽을 것이라고 반쯤 믿고 있었고 그에 따라 부활에 대하여서도 반쯤 믿었다고 합니다. 몇십 년 동안 믿음 생활하고, 웨스트민스 신학교 신학 교수를 하고, 몇 십 년 동안 대형교회를 이끌며 사람들에게 부활에 대한 이런 신앙을 설파했지만 절박하지는 않았는데 췌장암에 걸려 죽음 앞에 놓이자 죽음을 확실하게 믿고 죽음 후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설 때 땅에 있는 것들은 덜 중요하게 되었답니다. 그는 죽음 앞에 서니 기도의 내용이 바뀌게 되었고 그의 아내와 그는 암을 겪기 전의 기도 생활과 영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마지막을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진짜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간과 하나님, 그리고 배우자, 가족 그리고 모든 것을 보는 방식이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바쁘게 살았는데 암투병을 통해 아내와 자식들과도 더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팀켈러 목사는 2023년 5월 19일 오전에 마지막 순간을 아내와 함께 호스피스에 거하면서 “이 세상을 떠나는데 아쉬움이 없구나. 전혀 없어”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도 떠났다고 합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죽기 전에 존 파이프 목사님과 이메일을 나누었는데 죽음 앞에서 그에게 가장 위안이 되었던 성경 말씀은 누가복음 10장 20절에 나오는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책에 기록되었느냐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도 임종하기 바로 전에 끝까지 위안을 받은 말씀이 이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나 팀켈러 목사도 이 땅에서 많은 일을 이루고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더 중요했다는 말입니다. 대학 시험을 볼 때 합격자 명단이 게시판에 써 있을 때, 직장에 취업되었다는 통보를 받을 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마치고 천국 생명책에 자신이 이름이 기록된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인생을 마감하는 날 천국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다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했을지라도 마지막은 허무로 끝이 날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팀켈러 목사님이 예레미야 서를 통해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이제 죽음을 앞에 둔 팀켈러 목사님이 눈물을 글성이며 전하는 말씀을 유튜브를 통해 들어 보았습니다. 세가지를 간단하게 말씀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 참여하되 따르지는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소비하지 말고 투자하라였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 투자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 때 망하는 나라에 집을 사고 땅을 살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없어질 나라에 투자하는 것보다 영원한 나라 천국 교회에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투자하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자신의 이름을 만들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을 드높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이름, 자신의 평판을 남기려고 하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인생 각본은 의미 있는 인생 각본입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 각본으로 수정하시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으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사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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