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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미래(6) 오해의 담 넘기(행21:17-3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4656 추천수:8 112.168.96.71
2015-08-02 08:34:52

 

더 좋은 미래(6) 오해의 담 넘기

행21:17-39

 

더 좋은 미래는 대부분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소망입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더 좋은 미래를 소망하고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 땅에 살다 감으로 이 땅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졌으면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어릴 때는 매일 일기를 쓰며 하루에 한 가지씩 선행을 하며 사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무료로 공부를 시켜 주었습니다. 대학교 때는 구로 공단 아이들을 모아 놓고 무료로 저녁에 야학을 하였습니다. 목회하면서 열심히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며 도우려고 애를 쓰고 만만만 생명운동을 통해 최빈국 아이들을 품고 기독교 인재를 만들어 좀 더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 하면서도 때때로 많은 오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오해의 담 앞에 포기하고, 주저앉으면 더 좋은 미래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교인은 제가 만만만 생명운동을 하며 최빈국 아이들을 도우니까 그것으로 자기 자식 가르친다고 오해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말은 전해들은 사람이 그 말을 사실로 오해하고 우리 교회를 다니면서도 만원 내는 후원금을 한 번도 내지 않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증거를 보여주어도 여전히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설교를 오해하여 주일 저녁에 전화해서 누구 들어라고 그런 말씀을 하셨냐고 두 세 시간 집요하게 따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인 중에서는 부목사님에게 좋지 않은 말을 들으면 목사님이 시켜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갈 때 웃어주지 않았다고, 다른 사람과 다 악수하고 자신과 악수하지 않으면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고 오해하며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일어나면 모두 목사님이 자기를 미워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오해하며 목사를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오해의 담을 넘어가지 못하고 오해하는 사람과 싸우고, 증오하며, 포기해 버리면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오해로 사랑하는 사람과 해어질 수도 있고, 오해로 의처증과 의부증으로 가정이 황폐화될 수 있고, 오해로 범죄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오해로 가족을 죽일 수도 있고, 오해로 자살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오해로 시험들 수도 있고, 오해로 교인들과 원수가 될 수도 있고, 오해로 교회 다니는 것을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더 좋은 미래를 만들려면 대인관계에서 다가오는 크고 작은 오해의 담을 넘어가야 합니다. 오해를 잘 풀지 못하면 더 좋은 미래가 보장되지 못합니다. 더 좋은 미래를 만들려면 때로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오해의 담을 잘 넘어가야 합니다.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어떻게 오해를 풀어갈 수 있겠습니까?

 

1. 먼저 사소한 오해가 있을 때는 서로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대화로 오해를 푸는 단계

오늘 성경에 보면 바울이 오해를 받고 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였습니다. 3차에 걸쳐서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에 도착해 선교보고를 하였습니다. 이 때 바울을 만난 사람들은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바울을 만나 참으로 기뻐하며 선교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이 있었고 한 편으로는 바울의 사역을 아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슨 오해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세 가지입니다. 첫째 모세를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할례로 구원받지 못하고 복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전하니까 이렇게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한 바 없으며 오히려 그는 율법을 신령한 것으로 보았습니다(롬7:12) 다만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할례를 금하지 말라는 말도 터무니없는 허위입니다. 할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바울을 모세를 배반한 사람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더욱 분명하게 율법의 목적을 드러내어 보여준 사람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유대인을 사랑했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갈 지라도 자기 백성인 유대인들을 구원해 달라고 할 정도로 유대인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이렇게 오해했습니까? 2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들었다는 것입니다. 소문을 듣고 그 소문을 사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을 사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어떤 소문을 들었으면 그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면 될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친한 사람이 말하면 자신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 말하면 그대로 믿어 버립니다. 여기에서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실제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여 15년 동안 목회를 하였답니다. 교인이 한 백여 명이 되어 아주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교인들이 야유회를 갔답니다. 목사님 아들이 17살이었는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니까 라이터를 주어 주머니에 넣고 갔답니다. 예배가 끝난 후 불고기를 하는데 담당 집사님께서 깜박 잊고 성냥을 가지고 오지 않았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보니까 아무도 성냥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있다하여도 담배 피운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내어 좋지 않았겠지요. 당황해 있는데 목사님 아들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주었답니다. 아주 맛있게 불고기를 해서 먹고 은혜롭게 야유회를 마치고 왔는데 저녁에 잘 때 한 집사님 남편이 아내에게 목사님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 “라이터가 있는 것 보니 뻔하지 않아 담배 피우기 때문이라”고 했답니다. 이 집사님은 다음 날 다른 집사님에게 전화해서 "우리 목사님 아들이 담배를 못 끊어서 피고 있는데 집사님 기도해 주세요."라고 기도 부탁을 했답니다. 소문은 이렇게 퍼져가기 시작을 했는데 한 달 후에는 목사님 아들이 마리화나를 피운다는 것으로 변질이 되었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맞장구를 치면서 우리 목사님 아들 머리 염색하고 청바지 찢어 입고 다니는 것을 보니 역시 뭔가 이상했다고 말했답니다. 교인들에게 파다하게 소문이 퍼졌는데 목사님 가족만 이 사실을 몰랐답니다. 목사님이 여름휴가를 갔다 왔는데 당회가 열렸답니다. 당회원들이 모여 목사님 아들을 불러 놓고 심문을 했답니다. 목사님 아들은 사정 이야기를 다했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답니다. 장로님들은 이미 기정사실화해 버린 것입니다. 당회를 마치고 목사님의 아들은 홧김에 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나갔답니다. 그 날 차 사고로 그는 이 세상을 떠났고 너무나 상처받은 그 목사님은 교회를 그만두게 되었답니다. 결국 이 사실이 논란이 되면서 교회가 산산조각 나버렸답니다. 사소한 오해가 한 생명을 죽게 만들고, 한 가정과 한 한 교회를 무너지게 한 것입니다.

이런 방법의 오해는 어떻게든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려하는 사탄이 처음부터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 만들고 오해 없는 천국같은 생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어느 날 접근합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여자에게 선악과를 따먹도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 3:5)라고 오해하게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왜 동생을 죽이는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이 아벨만 사랑하고 자신은 미워하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까? 백성들이 다윗을 지지하고 다윗이 자기를 제거하고 자기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로 인한 불행이 수없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오해의 담을 어떻게 넘어가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 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20절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엇하는 것입니까? 바울과 만나 열심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들은 내용을 바울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들은 내용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단정하고 기정사실화하며 정죄하고 마음에서 상종하지 않기로 짤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실인지를 알기 위해 물어보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22)라고 물어 보는 것입니다. 바로 오해의 담을 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오해를 풀려면 먼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물어 보면 되는 문제입니다. 가인이 정말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가 자신을 미워하여 그런 것인지 물어 보면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정말 왕권을 차지하고 싶냐고 다윗에게 물어보면 오해는 끝이 납니다. 체면 따지고 자존심 따지고 권위를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대화하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실인지 상대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물어 보지도 않고 친한 사람의 말만 그대로 믿고 단정해 버리면 오해로 인하여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오해를 풀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오해가 있을 때 오해를 풀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사실 파악을 위해 바로 서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의사소통의 문제입니다. 오해할 만한 것이 생기면 자존심이나 체면을 내세우지 말고 빨리 대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문제가 복잡해지고 확산되기 전에 대화해야 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늘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불완전합니다. 자기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이중적입니다. 다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떤 것을 볼 때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다르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한계 때문입니다. 언어는 내포적 의미와 외연이 있습니다. 사랑은 외연에 속하지만 사랑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은 내포라고 합니다. 똑같은 사랑이라는 말이지만 그 사랑이라는 말속에는 이성적 사랑이 들어 있을 수 있고 친구의 사랑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신앙인의 형제애도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어떤 여 집사님에게 사랑하는 김집사님하고 편지를 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단지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평범한 언어를 담았습니다. 그런데 김 집사님은 그 말을 이성적 사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해가 있을 때는 바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으로 가슴앓이를 하면서 오해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결혼 한 번 잘 못하여 평생 동안 할아버지에게 심한 고통을 당하며 살았던 할머니가 있었답니다. 뒤늦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매우 열심으로 교회를 다녔답니다. 주일예배는 물론 새벽기도까지 빠지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은혜로운 부흥집회가 있었던 다음 날부터 할머니가 교회에 나오지 않았답니다. 걱정이 된 목사님이 할머니 댁을 심방했답니다. "할머니, 요즘 왜 교회 안 나오세요?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세요?" 그러자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답니다. "아이구, 목사님께서 내 속을 훤히 아시네요. 지난 번 부흥강사님이 다녀간 이후부터 내 속이 편하질 않아요." "아, 그러세요? 부흥강사님이 어쨌는데요?" 할머니가 대답했답니다. "그 때 부흥강사님이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영감을 두 배가 주신다고 했잖아요. 지금 영감 하나로도 골치가 아픈데, 영감이 둘이 되면 난 힘들어 죽는다구요."

오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잘 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해(誤解)라는 말의 사전적 뜻은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앎. 또는 그런 해석이나 이해.”입니다. 대분의 오해는 잘못된 추측에서 발생합니다. 어떤 사실을 보고 어떤 소문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 자기 편리한대로 추측하고 단정해 버립니다. 사실과는 다르게 알고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가 대화를 통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풀어야 합니다. 대부분 오해가 극단적으로 나아가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파괴적이게 되는 것은 대화를 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여 상대를 평가하고 대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아들이 라이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담배를 피운다고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라이타를 가지고 있으면 모든 사람들은 담배를 피운다"라고 과잉 일반화를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부분을 전체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고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니 나를 증오하는가 바" "목사님이 나를 보고 설교하니 나에게 말하는 가 봐"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나는 바라보지 않으니 나를 미워하는 가 봐” “ 장로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보니 어제 밤 권사님과 부부싸움 했는가 바" 이런 식으로 추측을 하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 데서 오해가 생깁니다.

목사님 아들이 담배를 피우는지 안 피우는지 사실을 확인해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해 줄만큼 관심이 있으면 목사님 아들에게 물어 보면 되는 것입니다. 물어볼 용기가 없으면 침묵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을 확신하고 남에게 퍼뜨리는 것보다 차라리 조금 궁금하지만 침묵하는 것이 훨씬 하나님 안에서 복스러운 삶입니다. 궁금하면 못 참는 것이 인간의 성품이긴 하지만 물어볼 용기가 없으면 참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 짓지 않는 길이고 서로를 위해 덕이 되는 것입니다.

 

2. 이미 기정사실화 된 오해는 사실을 증명해 줌으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사실로 오해를 증명해야 할 단계

문제는 오해 중에는 시간이 지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것은 쉽게 대화를 통해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해를 하고 있을 때 그 오해가 사실이 아니다 할지라도 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확신범들이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20절을 보십시오. 바울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수가 얼마나 됩니까? 수만 명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독교로 개종은 하였지만 율법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같은 신앙인이지만 태생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같은 편이었지만 요단 동쪽 지파와 서쪽 지파가 오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사고 구조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열정은 있지만 잘 못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분과 전체를 구분하는데 서툰 사람들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전직 중학교 체육교사였는데 자신의 딸을 죽여 암매장하고 자신은 자살에 실패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자신과 딸의 몸에 어느 날 반점이 생긴 것입니다. 결혼 전에 집창촌에 간 일이 있었는데 에이즈로 감염된 것으로 오해를 한 것입니다.

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현모양처였던 한 가정 주부가 아들과 딸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다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대학을 나오고 넉넉한 삶을 살았던 다복한 가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부의 혈액형은 둘 다 O형인데 아들의 혈액형이 A형으로 나온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남편이 아내를 의심한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아니라 아내가 바람을 피워 나은 아들로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이미 아내가 불륜으로 아들을 낳았다고 판단해 버리니까 아내의 모든 행동을 그 안경으로 재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처증이 안 생길 수가 없습니다. 아내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아내를 괴롭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자신의 결백을 아무리 주장해도 믿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믿어주지 않는 남편 때문에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결국 어린 아들 딸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해 버린 것입니다. 자살로 남편의 오해에 대하여 자기 진실을 입증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남편은 초등학교 때 실시한 혈액판정 결과를 그 때까지 믿고 있었는데 수사 과정에서 다시 조사해 보니 O형이 아니라 A형이었다고 합니다. 실제 내 자식인지 친자 확인만 했어도, 실제 내 혈액형이 무엇인지 확인만 했어도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오해의 담을 넘기 위한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럴 때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런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야고보 장로가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오해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습니까? 23-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당시 서원한 사람이 4명이 있었습니다. 서원한 4명을 데리고 성전에 올라가서 정결의식을 행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23절 이하를 보십시오. 서원한 나실인은 부정한 것을 먹지 말고 술도 먹지 못하고 머리도 깍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서원한 기간이 다 차면 머리를 깎았습니다.(민 6:13-18) 이 4명은 서원의 기약이 다 끝났는데 드릴 제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돈을 대어 그들의 결례를 이루어 드리라고 했습니다. 바로 모세를 배반하지 않고 할례와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 주라는 말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바울에 관한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사람들이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들은 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 오해가 풀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지키고 살고 있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26절을 보십시오. 그대로 행합니다. 오해를 풀기 위해 자존심도 상하고 자신의 성향과는 맡지도 않을 수 있지만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사람들이 친한 사람으로부터 무슨 말을 들으면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믿고 판단해 버립니다. 판단하고 단정하기 전에 그 말이 사실인가라는 관문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을 생략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으로 상대를 봅니다. 색안경을 쓰는 것입니다. 전문 용어로 '프레임(frame·해석의 틀)’을 가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입니다.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사안을 해석하는 방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검열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파란 색 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파랗게 보입니다. 노란 안경을 끼면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각이 문제입니다. 전제, 고정관념, 편견이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차를 운전하고 갈 때 시간을 맞추기 위해 과속으로 차를 모는 것을 본 사람은 아 목사님은 과속을 하는 분이구나라고 판단해 버립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말을 빨리하는 것을 보고 매사 목사님은 성격이 급하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경험한 한 사건을 과잉 일반화시켜 버립니다. 한 번의 경험으로 목사님은 난폭운전을 하는 사람이야라고 오해를 해 버립니다. 말을 빨리하는 것으로 성격이 급할 것이라고 과잉 일반화를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매사 성격이 급한 사람이니까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행동을 매사한다고 비약합니다. 더 나아가면 목사님은 신중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이것이 오해의 재생산입니다. 이런 것을 앵커링(Anchoring· 닻 내리기) 효과라고 합니다. 첫 정보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미래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더 좋은 미래를 만드는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예쁜 자신의 부인을 빼앗아 갈 것으로 오해합니다. 예쁜 아내 때문에 자신이 해을 당할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고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속입니다.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흉년이 들어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리브가를 보면서 누구냐고 물어 보니까 누이라고 속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리브가가 예쁜 여자이므로 그 곳 사람들이 리브가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권력자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실상 아비멜렉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 남자와 그 아내를 건드리는 사람은 사형을 받을 것이다." (창26:11)라고 경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소문만 듣고 기정 사실화 하는 오해에서 벗어나려면 그것이 사실인가를 확인하면 됩니다.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는 판단하고, 단정하고 정죄하고 그것으로 매사를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악의적인 오해는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해야 합니다. /섭리를 기다려야 할 단계/악의적 오해

어떤 오해는 아무리 설명해주고 아무리 사실을 보여 주어도 더 악화되고 골만 깊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악의적인 오해입니다. 상대를 적으로 생각하는 진영 논리를 가지고 아주 작정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격적으로 아주 이기적이고 고약한 사람들이 가지는 오해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오해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오해일 경우는 대화하여 설명해도 사실을 드러내어 알려 주어도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즈음 같은 교회 다니면서도 두 패로 나누어져 싸우는 교회들에서 나타나는 오해입니다. 눈앞에 장부를 보여 주어도 조작했다고 합니다. 재판에서 판결이 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친자 확인 결과가 나와도 국과수를 매수하여 조작된 것을 받아 왔다고 합니다. 어떤 증거를 들여대도 오해하기로 작심을 했으니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해를 해야 자신에게 이익이니까 오해의 늪에 자신을 가두워 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지해 주는 의견만 받아들이고 자신의 정당성만 입증해주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증거를 들려대도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더 정당화하는 쪽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울을 보고 무리를 충동하는 사람들입니다. 동조 세력을 모으는 주동자들입니다(28). 바울을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제거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님 때문에 사모님 때문에, 장로님 때문에, 권사님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름대로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부르짓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너는 제거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불의하고 부정하다고 단정하고 상대를 제거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지만 그 정의를 이용해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려고 상대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악의적 오해를 하는 사람들은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편이냐 네 편이냐가 중요합니다. 진영논리에 노예가 되어 내 편이 아니면 아무리 사실일지라도 악으로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악의적 오해를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이 여기는 유대교의 삼요소를 들어 고발합니다. 아주 예민한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이라는 것과 자신들만 율법을 받은 것,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 이것들은 그들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것들에 대항하여 이방인을 이스라엘 뜰으로 들어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성전은 제사장의 뜰, 이스라엘의 뜰, 여인의 뜰, 이방인의 뜰 등으로 구분되어져 있어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만약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악의적인 오해였습니다. 예민한 문제를 가지고 상대를 제거하려는 악의적 오해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목회자를 제거하기 위해 돈과 이성문제, 명예 등으로 악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오해를 일으키는 생산 공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를 만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악의적 오해를 만드는 사람들은 근거없이 오해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는 것을 보고 성전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악의적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모든 것을 오해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확대 재생산 하는 것입니다.

오해하고 동조세력을 규합하여 상대를 나쁜 사람 만들어 제거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해도 오히려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오해를 더욱 확대 재생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30절을 보십시오. 군중들이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냅니다. 심리적으로 말하면 이미 마음에서 죽인 것입니다. 같은 천국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같은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몰매를 가합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죽이려고 합니다. 악의적 오해는 상대를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바로 악의적인 오해는 과장(28)하게 되어 있습니다. 증명되어진 사실보다는 그릇된 가정을 내세우게 하고 이성보다는 변동이 심한 감정에 의존해서 우리의 상상력을 그릇된 방향으로 몰고가는 결과를 빚게 만듭니다. 그리고 바로 그릇된 판단(28-29)을 하게 합니다. 과장되어지고 거짓된 고소는 사람들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그릇된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자신의 왜곡된 상상력을 동원 엉뚱한 결론을 유출해 내고 맙니다. 그 후 지난친 행동(30)을 하게 됩니다. 그릇된 판단은 살인을 유발시키려 합니다. 온통 시내를 소란하게 만듭니다. 폭도들이 바울을 성전에서 끌어내서 은밀한 곳에 두고는 바울을 폭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런 악의적 오해를 받을 때 어떻게 오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인간으로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오해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 바울은 긴 자기 간증을 합니다.(21:27-22)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었는지를 간증합니다. 그렇다고 해결됩니까? 22장 22절을 보십시오. 더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오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설교 못한다는 오해를 받았고, 돈 좋아한다는 오해를 받았고, 이중 인격자라는 오해도 받았고, 여성 차별주의자로, 반유대주의자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많은 오해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과 이방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살아 있는 동안 모든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사명을 이루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꼭 정당성을 입증받을 필요도 없고, 꼭 해명할 필요도 없는 오해도 있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는 오해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의 백부장을 통해 오해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죽음에서 구출해서 결국 로마로 압송하여 바울이 이루고자 했던 사명을 이 오해로 이루어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악독한 오해를 받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끝까지 사명을 포기하지 말고 더 좋은 미래를 행해 나아가야 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이 꿈꾸는 자라고 악의적으로 오해하여 죽이려 합니다.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다고 중년 여인이 악의적 오해를 하고 감옥에 집어 넣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자신의 장인인 사울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악의적 오해를 가지고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그 때 이들이 어떻게 합니까? 사명을 일어 버립니까? 자기 자리를 떠나 버립니까? 자기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들과 대항하여 싸웠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오해가 있을지라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묵묵히 주어진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얼마나 오해를 받았겠습니까? 모세가 목동으로 40년 동안 있을 때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할 때 얼마나 오해를 받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해로 인해 더 좋은 미래에 대한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해를 많이 받으신 분은 예수님일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유대인들에게 7차례(2:19-12; 6:51-53; 7:33-36; 8:21-22, 31-35, 51-53, 56-58), 제자들에게 6차례(4:31-34; 11:11-15; 13:36-38; 14:4-6, 7-9; 16:16-19), 군중들에게 5차례(3:3-5; 4:10-15; 6:32-35; 11:23-25; 12:32-34) 오해 받는 내용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가족으로 부터도 미쳤다고 오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귀신들렸다고 오해를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한 자리 줄 정치인으로 예수님을 오해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라고 말씀합니다. 오해는 정확히 알지 못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오해를 misunderstanding이라고 합니다. '이해(understanding)'하지 못하니까 오해하는 것입니다. 아래에 서면 되는 데 자꾸 위로 올라가니까 오해하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아래 있으면 밝게 보는데 빛을 떠나 어둠 가운데로 가니까 코끼리 다리 만지고 기둥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사을 만에 짓는다고 하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말인 줄 알고 오해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고 오해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일 수가 없다고 오해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오해합니다. 예수님은 이 오해로 인류 구속 사역을 접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 사랑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오해의 담을 넘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완성하였습니다. 시간 지나면 오해도 다 살아지는 것입니다.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오해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있었답니다. “여러분들 중에 오해로 괴롭힌 사람이 하나도 없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답니다. 목사님이 “정말… 아무도 없습니까? 손들어 보세요.”라고 하자 맨 뒤에서 한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답니다. 목사님께서는 감격하여 “할아버님,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씀해주세요.”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나이가 들어서 힘없는 목소리로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응, 있었는데… 다아… 죽었어.” 어떤 오해도 때가 지나면 다 살아집니다.

오해받지 않고 살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위인들은 오해 앞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오해받지 않도록 충분한 설명도 필요하지만 오해하기로 작심하고 덤비는 사람 앞에서는 설명 그 자체가 오해가 될 것입니다. 그럴 때는 구차한 변명으로 오해의 늪을 더 파거나 파괴적으로 이해시키려 하지 말고 사명 붙들고 묵묵히 오해의 담을 넘어가야 합니다.

 

오해를 받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오해를 씨를 뿌리면 그 씨는 독한 열매를 열개하여 공동체를 파괴하고 신앙의 기쁨을 잃게 만들어 버립니다. 혹 오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해 받고 있지 않습니까? 오해는 필연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오해의 이유는 예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오해의 담을 넘어 사명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먼저 사소한 오해가 있을 때는 서로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대화로 오해를 푸는 단계

2. 이미 기정 사실화 된 오해는 사실을 증명해 줌으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사실로 오해를 증명해야 할 단계에서 사랑과 타협으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3. 악의적인 오해는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해야 합니다. /섭리를 기다려야 할 단계/악의적 오해 하나님의 경륜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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