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각본 바꾸기(2)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한 편견
마태복음16:24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 주에도 “인생 각본 바꾸기”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나름대로 인생 각본을 가지고 그 각본대로 살아갑니다. 그 각본을 만드는데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이 밑그림을 그려줍니다. 두 번째는 배우자일 것입니다. 배우자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 각본이 바꾸어집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인생 각본을 바꾸어 주신 분은 예수님일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 나름대로 인생각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인생 각본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인생 각본이 제 삶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만나지 않았다면 주일이면 쉬거나 여행한다는 인생각본을 가지고 살터인데 이제는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인생 각본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다양한 면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인생 각본을 바꾸어 줍니다. 지난 주에 살펴 보았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했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이라는 신앙 고백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인생 각본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어떻게 따라야 할 것이라는 가르쳐 줌으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한 인생각본을 바꾸어주는 장면입니다.
어부였는데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베드로의 인생 각본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라 다님으로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 차지하여 부와 권력과 명예를 얻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며 예수님께 인정받는 수제자가 되어 이런 혜택을 누리길 원한 것입니다. 뭐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인생 각본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 각본을 가질 수 있도록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21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길에 대하여 네 가지를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 고난을 받으실 것, 죽임을 당할 것, 제 3일에 부활하실 것 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고백한 진짜 그리스도(메시아)가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고난받고 버림바 되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정치적 왕으로 로마 권력을 무너뜨리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경제적 부요를 주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부정한 권력자를 몰라내고 경제적 평등을 이루고 모든 인간의 갈등을 해결해 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우리가 죄로 받아야 할 고난을 반드시 대신 받아야할 메시아, 죽음을 대신 짊어져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버림받아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반드시 죽어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구약 이사야 53절에 이미 예언한 그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왕권을 가지고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굴복시키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베드로 마음에는 3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은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는다는 말이 가슴 깊이 들어 왔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의 인생각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가 되고, 대접받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 각본과는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항변이라는 말은 '에피티마오'라는 말을 번역한 말로 '꾸짖다. 견책하다. 강력히 책망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예의 없는 말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을 듣자 예수님의 뜻을 막으려고 책망조로 훈육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자신이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들 것처럼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조종자가 되려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앞서 더 의롭고 더 지혜로운 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부 주제에 칭찬해 주니까 권위를 주니까 마치 자신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방지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로 전 칭찬을 받은 베드로는 졸지에 사단이라고 불림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도 반대하며 넘어뜨리려 했던 바리새인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도, 강도에게도, 가룟유다도 사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구원의 길을 가로 막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사단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원 사역을 결정적으로 방해하고 있게 때문에 베드로의 배후에 역사하고 있는 사단을 꾸짖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구원사역을 방해하고 있는 사단을 꾸짖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생각이 아니라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부터 끊임없이 구속사를 방해하는 사단의 전략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임당하여야 하는 메시아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려는 행위야말로 사단의 행동이었습니다. 고난받지 말고 배척받지 말고 죽지 말로 영광의 왕이 되라는 말은 사단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당할 때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즉 메시아라면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경제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는 메시아, 초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라면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의 갈채를 받는 정치적 메시아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경배하면 만국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초인적 왕으로 고난을 받지 말고 버림받지 말고 죽지 말고 등극하라는 것입니다. 이때도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할 때 어디로 물러가라고 합니까? 내 뒤입니다. 예수님 뒤로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제 신분을 알라는 말도 포함됩니다. 제자는 따르는 자이지 앞에서 이끄는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헛된 생각을 제거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기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위한 척 대단히 열성적으로 일하고 있지만 실상 하나님이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제자로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 각본을 고쳐 주십니다. 이런 각본의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떻게 고쳐 주십니까? 24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기 존재에 대한 각본을 바꾸어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존재라고 말씀합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존재입니다. 제자가 되려면 가장 기본이 자기 부인에 있습니다. 출발이 자기 부인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베드로의 인생각본은 자기 성을 쌓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 각본은 자기를 중심으로 쓰는 것이고 예수님도 자기 왕국을 만들고 자기 성을 쌓은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을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어 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버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아지경이 되는 것을 말할까요? 신비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 학대를 말하는 말씀일까요? 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의 도를 닦는 것을 말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자기 부인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의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재권이 주님께 있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코페루니쿠스적인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생명도, 명예도, 권력도, 재능도, 학식도, 건강도, 자녀도, 가정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팬인가 제자인가(카일 아이들먼 저)>라는 책에 여러 사람의 진정한 제자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는데 척추 지압 병원을 운영하는 리치 에드워즈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원은 날로 번창했고 두 아들과 헌신적인 아내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친구들을 만나 멧돼지 사냥을 하러 간 날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해버렸답니다. 극심한 가뭄이 있었던 해인데 운전해 가다 갑자기 차가 도로에서 벗어나 1.5미터 두께의 수풀에 바져 버렸답니다. 차를 빼려고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다 그만 마찰열로 수풀에 불이 붙었고 순식간에 차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답니다. 문을 열려고 했지만 전자 시스템이 타 버려서 꼼짝없이 안에 갇혔고 잠시 후 창문이 폭발했답니다. 그 뒤로는 아무 기억이 없었답니다. 응급 후송 헬리콥터에 의해 화상 전문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의사들은 얼굴을 회복시킬 수 없고 시력뿐 아니라 왼손의 기능마저도 잃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답니다. 그의 인생은 완전히 멈추어 버렸답니다. 그는 성공을 향해 바삐 달리고 있었고 너무 바빠서 하나님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답니다. 자신 마음의 보좌, 자신 우주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답니다. 자신이 바로 자신의 중심이었답니다. 부모님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앉히면서 말씀하는 것처럼 느껴졌답니다. “내 말을 좀 들으렴” 그때부터 그의 영적 각성이 시작되었답니다. 이후 년 만에 손가락 일곱 개를 절단해야 했고 남은 손가락도 가장 단순한 작업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답니다. 의사들은 더 이상 시도해 볼 방도가 없다고 말했답니다. 그때 아내는 손 이식 수술의 가능성을 이야기했고 기증자를 기다리며 기도했답니다. 자신도 아내와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했답니다. 마침내 손 이식을 하는 날이 왔답니다. 20 명의 외과의와 3명의 마취 전문의가 17시간 30분 동안 자신의 몸에 새로운 양손을 붙였답니다. 그날 화재 속에서 자신이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사실 그 화재 속에서 실제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날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살아났고 말합니다. 그날 자신의 삶의 통제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렸다고 합니다. 이제 자신의 삶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내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고 합니다. 요즘도 아내와 자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을 받게 해 달라고 날마다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을 모른 채로 건강하게 사는 것보다 고통과 장애를 통해서라도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얻는 편이 훨씬 낫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제 팬이 아니라 제자가 되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를 때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의 불행을 딛고 행복해 지고 싶은 욕망,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싶은 욕망,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여 역사의 중앙에 서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죄의 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사랑과 희락, 자비, 양성,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로 가득 찬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를 비우면 예수님이 충만해 지고 빈 내 마음에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채울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따르는 제자에게 자신은 무엇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각본을 바꾸어 줍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는 무엇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김동길 교수의 글을 보니까? 한 여학생에 금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하고 불러 놓고 "십자가는 앞에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지고 다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학생이 하는 말 "뛰어 가면 가끔 뒤에도 가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과시를 위한 것도 아니고 십자가를 앞세우고 장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종교 사업의 수단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재료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입니다. 고난과 희생, 헌신을 말합니다.
<팬인가 제자인가>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은 3만 명이 넘는 교인들에게 설교했던 자신도 팬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어느 목요일 오후 휑한 예배당에 덩그러니 앉아 부활 주일 무슨 설교를 해야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답니다. 멋진 설교를 해 부활절에 찾아 온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다음 주일에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배당에 나오게 하고 싶었답니다. 그들의 관심을 끄는 설교, 잠시도 딴 생각을 못할 만큼 흥미 진진한 설교를 해야할 텐데라고 고민하고 있을 때 문득 예수님은 많은 무리 앞에서 무엇을 가르치셨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답니다. 오병 이어의 기적을 묵상했는데 그 때 남자 장정만 5천 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치유와 기적과 기상천외한 가르침에 전국 방방 곡곡에 소문이 나고 예수님의 인기를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고 예수님을 계속 따라온 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라고 말씀했습니다. 떡을 먹으러고 찾아 온 사람들은 팬에 불과했지 진정한 제자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겨우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라고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6)”라고 기록된 것처럼 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앞에서는 다 떠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팬들은 안전한 관람석에 앉아 응원만 할 줄 알지 경기장에서 필요한 희생과 고통은 조금도 모른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제자가 아닌 팬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예수님을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합니다. 팬은 온갖 혜택을 다 바라며 예수님의 주위로 몰려들지만 자신을 희생할 만큼 그분과 가깝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팬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약간의 손질만 원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은 완전한 수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팬인가 제자인가를 진단해 보라고 여러 가지 진단 질문을 던지는데 그 중 3가지만 소개하면 먼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로만 고백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실제로 따르고 있는가?”를 진단해 보라고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에 ‘관해서’ 아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아는가?”라고 진단해 보라고 합니다. 셋째는 “예수님은 여러 애인 중 한 명인가? 아니면 하나뿐인 애인인가?”를 진단해 보라고 합니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 유익과 편리, 기쁨이라는 인생 각본을 가지고 삽니다. 그것에 맞으면 선택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회피합니다. 물론 유이과 편리, 기쁨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은 각자 예수님이 주신 사명의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것이 이익이 안 될 지라도 사명이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편함이 없을 지라도 사명이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을 주지 못할지라도 사명이면 지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섬겼던 교회 교인 중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제자의 길을 걸어가시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젊으신 분이었는데 아내는 구역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런데 80대 시할머니를 아들도 딸도 모시지 않는데 모시고 살았습니다. 제가 심방을 가면 항상 반복적으로 옛날 이야기를 고장난 레코드처럼 똑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밖에 나가 이웃집 초인종을 계속 누렀다고 합니다. 저녁이면 잠이 없으니 부부의 잠자리에 와서 가운데 누워 이야기를 하다가 주무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할머니를 천사같이 모셨습니다. 나중에 남편은 장로님이 되고, 아내는 권사님이 되어 신실하게 자신에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사시는 천사같은 부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눅9:23에서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각본으로 이것을 받아들인면 가능한 것입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5절에 보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주님 때문에 고생하는 것, 주님 때문에 욕 먹는 것, 주님 때문에 우는 것, 주님 때문에 화려하게 살지 못하는 것, 주님 때문에 먹고 싶은 것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 주님 때문에 고생하는 것 피하지 않았습니다. 본 회퍼는 미국에서 쉽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조국 독일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39살의 젊은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다미엔은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십자가를 지고 몰로이카 문둥이 섬을 향하였고, 슈바이처는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바울은 고전1:1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미련한 것 같으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포했습니다.
인생 각본에서 나에게 주신 십자가를 짐이 아니라 영광과 기회로 바라보고 지고 가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 십자가의 향기를 드러낼 것입니다. 썩어져 가는 세상에 소금이 되고, 어두워 길잃은 세상에 빛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부담으로 생각하고 회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겸손해지고, 정결해지며,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바꾸고,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의 십자가, 헌신의 십자가, 수치의 십자가 피하면 자신은 편할지는 모르지만, 인생은 더욱 초라해집니다.
셋째, 예수님은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각본을 바꾸어 줍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란 무엇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목적을 가변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 두는 사람이 있고 본질적인 것, 절대적인 것에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인생 각본은 목표가 명예를 얻고 돈을 벌고 권력을 쥐고, 잘 먹고 잘살고 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파생적으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영원하지도 않고 잠시 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주, 메시야,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좇는데 인생의 목표를 두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어느때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슬플 때도 괴로울 때도 가난할 때도 부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건강할 때도 잘될 때도 잘못될 때도 목표는 오직 하나 예수님을 좇겠다는 인생 각본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인생 각본을 어떤 경우든 주님만을 쫓아야 하겠다고 분명하게 바꾸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를 때 나를 따르라고 불렀습니다. 전신 전력하여 끊임없이 계속해서 좇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만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이것은 한 번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좇는 삶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라고 말씀합니다. 하늘 나라의 백성들을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계 14:4)" 하나님과 어린 양에서 속한자 즉 어린양이 어디고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에는 진정한 제자가 된 많은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그 책 맨 마지막 부분에 윌리엄 보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억만장자’였답니다. 그는 수십억 달러 가치에 달하는 낙농 회사의 상속자로 태어났답니다. 그는 예일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학위를 취득했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 팬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답니다. 수백만 달러를 뒤로 한 채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머나먼 이슬람교도의 땅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 여행을 권했는데 유럽과 아시아, 중동을 여행하던 중 그는 복음이 닿지 않은 곳으로 찾아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위한 선교에 삶을 바치겠다는 편지를 부모에게 보냈답니다. 주님을 만나 인생각본이 바뀐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려면 온전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답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예일 대학에 들어간 첫해에 그는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했고 한 친구와 함께 아침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답니다. 그때부터 아침에 눈만 뜨면 예일 대학 내에 성경 읽기와 기도 모임이 하나씩 생겨났답니다. 윌리엄이 4학년이 되자 그런 모임이 1,000 개에 달했답니다. 당시 그는 일기장에 “늘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리라”라고 썼답니다. 또한 대학 시절 윌리엄은 뉴헤이븐 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들을 돕기 시작했답니다. 알코올을 비롯한 중독자들의 갱생을 돕는 “예일 호프 미션”이란 단체를 세웠답니다. 그는 재학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답니다. 세계 선교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중국 간쑤성에 복음을 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답니다. 하지만 중국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아랍어를 배우고 이슬람 지역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이집트로 건너갔답니다. 그런데 그만 그곳에서 척수막염에 걸리게 되었고 한 달 뒤 스물다섯의 아까운 나이에 천국에 갔고 그의 몸은 카이로에 묻혔답니다. 윌리엄의 삶을 보며 어리석다고 말한 사람이 많았답니다. 예수님을 따른답시고 가족과 재산 미래까지 다 내팽개쳤건만 결국 선교지는 구경도 해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랍니다. 하지만 그는 예일 대학의 영적 부흥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또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 수천 명이 되었답니다. 그의 인생은 결코 실패작이 아니었답니다. 이 진정한 제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성경책 속에서 세 개의 문장이 발견되었답니다. “남김 없이 (No Reserves). 후퇴 없이((No Retreats). 후회 없이 (No Regrets).”
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인기 도서를 많이 써서 큰돈을 벌었답니다. 그의 삶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답니다. 지중해에 요트가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이 있었으며, 파리에도 호화로운 집이 있었답니다. 은행에는 그가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는 1892년 1월 1일 아침,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답니다. 목숨은 구했지만 이후 정신병자가 되어 고통으로 절규하다가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반복해서 했던 말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이 땅에서만 인생 각본을 쓰고 정처 없는 나그네로 살았던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는 41세의 나이로 약물중독으로 죽었습니다. '할리우드 섹스 심벌' 마를린 먼로도 37세 젊은 나이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약물 과다복용으로 5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이 곳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각본을 써라고 하면 어떤 각본을 쓰고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각본을 바꾸어 살면 불행할까요? 고통만 따르는 길일까요? 손해만 볼까요? 아닙니다. 돈을 따르고 명예를 따르고 권력을 따르는 길보다 더 큰 행복과 평강과 기쁨이 주어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 대가는 무엇인지 발로 예수님이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 가지 복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목숨을 잃으면 다시 찾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25).
영생의 축복을 받고 영원한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다. 온 천하를 얻는다고 해도 생명이 없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마지막 천국이 있는데 영생이 있는데 이 땅 모든 것을 누린들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 처한다면 인생은 얼마나 비극이 되겠습니까?
<나의 인생이 당신의 지혜가 된다면(스티브 레더 저)>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랍비 중 하나인 저자는 35년을 랍비로 천번이 넘는 장례를 주관했고 천번이 넘는 추도문을 낭독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배운 것은 사람은 옷이나 자동차 같은 물질적인 것을 위해 인생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지만 정작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돈의 힘을 강조하는 문화 속에서 세뇌되어 자신의 가치가 자산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고 살지만 죽으면 가져갈 수 없는 것이고 사자의 물건은 대부분 중고 물품 가게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죽음의 현장을 많이 경험한 그는 죽음을 생각하며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고 말합니다. 자녀 3명과 아내와 함께 뉴욕에서 리디머 교회를 시작하여 영향력있는 대형 교회로 만들고 세계 48개 도시에 250여개의 개척 교회를 세운 팀 켈러 목사가 72살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투병 중에서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아주 빨리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은 기본적으로 죽음을 지금까지 부정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갑자기 그런 일이 닥치면 내가 이 일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고 내가 예수님을 믿고 죽으면 그 부활도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가”라고 한 번쯤 반문해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부활에 대하여 책을 쓰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죽을 것이라고 반쯤 믿고 있었고 그에 따라 부활에 대하여서도 반쯤 믿었다고 합니다. 몇십 년 동안 믿음 생활하고, 웨스트민스 신학교 신학 교수를 하고, 몇 십 년 동안 대형교회를 이끌며 사람들에게 부활에 대한 이런 신앙을 설파했지만 절박하지는 않았는데 췌장암에 걸려 죽음 앞에 놓이자 죽음을 확실하게 믿고 죽음 후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설 때 땅에 있는 것들은 덜 중요하게 되었답니다. 그는 죽음 앞에 서니 기도의 내용이 바뀌게 되었고 그의 아내와 그는 암을 겪기 전의 기도 생활과 영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마지막을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진짜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간과 하나님, 그리고 배우자, 가족 그리고 모든 것을 보는 방식이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바쁘게 살았는데 암투병을 통해 아내와 자식들과도 더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팀켈러 목사는 2023년 5월 19일 오전에 마지막 순간을 아내와 함께 호스피스에 거하면서 “이 세상을 떠나는데 아쉬움이 없구나. 전혀 없어”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도 떠났다고 합니다.
둘째,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27)
우리가 주님과 함께 인생 각본을 쓰고 행한 것 하나도 헛된 것이 없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줄 날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도 다 상급이 됩니다. 너무나 죽음과 함께 끝나버릴 세상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후4:17-18 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예수님은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30)”라고 말씀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왕되심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게됩니다(28).
바로 뒤에 변화산 사건을 통해 체험하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권세를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에게 영적 권세를 주셨습니다. 기도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충만을 받고 질병을 고치며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에 의해 옥문에서 나오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 있는 삶을 경험했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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