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받은 가정(7) 치유와 회복의 산실
누가복음15:32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세미나에서 강의하시는 교수님께서 어느 여인을 칠판 앞으로 나와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20명을 써 보라고 했답니다. 여인이 부모님과 형제들, 자녀들과 정말 가까운 친구들까지 포함해서 20명의 이름을 쓰자 교수는 5명의 이름을 지우개로 지우라고 했답니다. 여인은 5명의 이름을 한 명씩 지워내려 갔답니다. 교수님은 다시 5명의 이름을 지우라고 했답니다. 여인은 다시 5명의 이름을 지웠답니다. 교수님은 이번에는 3명의 이름을 지우라고 했답니다. 여인은 남아 있는 양가 부모님과 자녀들, 남편 등등 10인 중에서 고민하면서 3인의 이름을 하나씩 지웠답니다. 이제 여인에게는 남편과 세 자녀와 친정 부모님만 남게 되었답니다. 교수님은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다시 2명의 이름을 지우라고 합니다. 여인은 고민하면서 친정 부모님의 이름을 지웠답니다. 이제 남편과 자녀들만 남게 되었답니다. 만약 우리 성도님께 오늘 제가 가장 중요한 사람 20명을 쓰고 이렇게 지우라고 하면 누가 남겠습니까? 아마 동일하게 부부와 자식들을 마지막까지 남길 것입니다. 가족은 그만큼 중요하고 가족이 함께 사는 가정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상처도 가장 많이 주고받게 됩니다.
심리학자나 상담자들이 상담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상처를 가장 많이 준 사람은 누구냐고 질문하면 의외로 가족일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압도적으로 부모와 배우자가 많고 그다음 친구, 애인, 형제자매, 직장 상사 등이 뒤따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당신 때문에 크게 상처를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어보면 잘 떠올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너무나 쉽게 상처를 받는 존재입니다. 누군가의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와 의미 없는 행동 하나에도 우리의 마음은 깊게 베이거나 구겨지곤 합니다. 눈길 한 번 부딪히는 것만으로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눈길 한 번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2007년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33명이 죽고 29명이 부상당한 최악의 총기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사건의 범인은 대한민국 국적의 미국 영주권자였던 당시 23세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8세 때 미시건으로 이민왔다가 9세 때 버지니아로 이사를 했답니다. 그런데 이사 간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가 강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 후 아버지는 재혼했답니다.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잘생기고 얌전한 성격의 그 청년은 스포츠도 잘했는데, 따돌림을 당하면서 폭력까지 당했답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불공평한 일을 당하며 마음의 고통에 시달리다 불공평한 것을 응징하겠다고 총을 들고 나섰답니다. 가정은 상처를 받는 곳도 되지만 그 상처를 치유받고 회복되는 곳도 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가정에서 치유도 회복도 받지 못하고 불행하게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남겨 주고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오스월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는데 어머니는 이 아버지를 증오하다 결국 이혼하게 되었답니다. 그 후 어머니는 다시 재혼을 했는데 새로 만난 아버지는 어머니를 이용해 먹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결국 또 다시 이혼했답니다. 이런 병든 가정 환경 때문에 오스월드는 결국 성격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매우 공격적인 사람이 되었답니다. 이런 그의 마음의 상처는 씻을 수 없는 증오감으로 불타올랐답니다. 그래서 그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퇴학되었고, 그 후 해병대에 지원했지만, 그곳에서도 부적응과 불화 때문에 결국 불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 후에 어렵게 결혼해서 잘 살려고 했지만 어릴 적 가정에서 받은 상처로 병든 마음을 치유받지 못해 마음속 깊은 곳에 증오의 쓴뿌리가 있었답니다. 자신이 그렇게 증오했던 아버지가 했던 학대를 자신도 아내에게 반복하며 이용한 것입니다. 그는 아내와 다투고 1963년 11월 2일 회사에 출근하여 아무나 총으로 쏴 죽인다고 옥상에 올라가 그곳을 지나가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쏘아 죽이고 말았답니다.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생긴 병든 마음을 치유받지 못한 결입니다.
아돌프 히틀러도 병든 마음을 가지고 산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이웃에 대한 적개심이 컸고 어머니를 폭행한 아버지 밑에서 살았답니다. 세무공무원으로 술꾼에 무례하고 권위적이며 어머니를 폭행할 정도로 흉폭했다고 합니다. 진학 문제로 아버지와 마찰이 잦았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으로 공부에 불성실했다고 합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할 것은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은 유대인 스승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어머니가 어머니 주치의인 유대인 의사와 불륜관계를 갖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며, 유대인들이 독일 경제를 장악하고 있어 증오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의 유대인 증오는 결국 가정에서 상처받은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병든 마음 때문이었고 그로 인해 유대인 6백만명이 살해 되었습니다. 히틀러의 치유받지 못한 병든 마음이 인류를 전쟁으로 몰아갔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했습니다.
사람은 산 만큼 상처를 안고 삽니다. 인생의 상처는 나무의 나이테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가물었을 때의 흔적, 영양이 충분했을 때의 흔적, 폭풍이 많았을 때의 흔적을 나이테는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상처, 어머니의 상처, 남편의 상처, 아내의 상처, 자녀의 상처 등 서로 상처 주려는 어떤 의도가 없었더라도 상처를 주고받는 게 가족입니다. 상처의 근원지가 가정이라는 것은 슬프지만 사실이지만 현실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보호막이 되어주어야 할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찢기게 됩니다. 고슴도치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서로를 찌르듯이 가까운 사람들이 서로 상처를 주기가 쉽습니다. 가까운 사람이란 만원 버스에서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불편을 끼치는 것과 유사합니다. 가족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상대방을 힘들게 하려는 의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힘들게 하는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어떤 상담자의 결혼 8년 차인 변호사 부부의 상담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부부가 변호사로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답니다. 그런데 이미 3년 전부터 각방을 쓰고 있다고 했답니다. 남편은 가정을 회복하려고 사법고시 공부를 할 때보다 더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는 좋은 가정을 만들고 싶었고 정말 좋은 부부가 되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남은 것은 상처밖에 없다고 이혼을 해야 하겠다고 말했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 서로 사랑하며 결혼했지만, 어느 날 깊은 상처를 안고 이혼하여 자신뿐 아니라 자녀에게 평생 고통스럽게 하는 깊은 상처를 안겨줍니다. 어릴 때 상처를 받게되면 상처받은 감정은 그 상태에서 성장이 멈추어 버립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 속에는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되어 성인 아이로 살아갑니다. 태아기 때도 가정에서 상처를 받는다고 합니다. 원치 않는 임신, 임신 중 엄마의 부정적인 생각, 임신 중 부부 싸움 등으로 아이는 상처를 받는다고 합니다. 태아도 4개월~5개월이 되면 감정을 느낀다고 합니다. 부부 싸움을 하든지, 원치않는 임신으로 인하여 낙태를 시도했다든지, 산모가 심한 스트레스를 받든지, 큰 소리에 심하게 놀란다든지 하면 태중에 있는 태아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도 깊은 상처를 받으면 항상 두려움을 심하게 느끼고, 불안하고, 소리에 예민하고, 거절감을 느끼고, 자존감이 낮아진다고 합니다. 태어나서 6세까지의 기간에 성격의 대부분이 형성되는데 이때 상처를 받으면 그대로 흡수되어 상처와 상한 감정이 무의식 가운데 머물러 삶에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특히 아버지의 폭력, 억압, 권위적인 아버지, 무능한 아버지, 성취 지향성 아버지, 알콜 중독, 아버지 부재 등과 같은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성인 아이로 살아가게 되기 쉽다고 합니다. 은혜받은 가정도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상처 없이 피는 꽃은 없습니다. 아픔이 없는 가정, 어려움과 눈물이 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은혜받은 가정은 치유와 회복의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어떤 것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산실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1. 가정은 영적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상처받고 병든 아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두 아들 중 작은아들은 10대에 가출하였습니다. 자신도 자기 인생이 있으니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껏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유산을 상속해 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부모의 유산은 항상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에만 분배가 되었고, 혹 부모가 살아계셨을 때 유산 분배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 재산의 소유권과 처분권과 관할권이 여전히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가 돌아가셔야 비로소 그 재산의 처분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의 예의와 지켜야 할 규범이 지금보다 훨씬 엄격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고 불순종하면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패역한 자식에 대한 처벌을 신명기 21장 18-21절에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그런데 이 아들은 얼마나 아버지에게 불효한 아들이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재산을 상속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을 보십시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첫째, 허랑방탕하게 된 것입니다(13). 둘째, 모든 재산을 낭비한 것입니다(14). 셋째, 궁핍하게 되었습니다(14). 넷째, 돼지 치는 노예처럼 살게 되었습니다(15). 다섯째, 아무도 그를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16). 이런 삶을 통해 아버지를 거역하고 불효하였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자유를 만끽하며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결국 짐승같은 인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자신도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자신을 사랑한 부모님에게 큰 상처를 안겨준 가정의 짐덩어리 같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둘째 아들은 무엇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겠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하나님을,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을 상징합니다. 둘째 아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자유를 방해하는 존재, 즉 간섭자, 독재자, 방해자로 생각하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인간은 돈의 노예, 쾌락의 노예, 성의 노예, 돼지나 먹는 쥐엄열매로 배우 채우는 비참한 노예로 전락되어 버립니다. 도스도예프스키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우리는 하나님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했습니다. 상처 중 가장 나쁜 상처는 하나님을 떠난 영적 상처입니다.
이 아들은 상처난 영혼을 어떻게 치유받고 회복됩니까?
17-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어떻게 돌아갑니까?
첫째 자신의 질 낮은 비참한 형편을 인정해야 합니다(17). 둘째, 자신의 삶을 회복시켜 주시는 풍성한 아버지를 향하는 것입니다. 셋째, 참회하는 것입니다(18-19). 넷째, 아버지 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20). 하나님 말씀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
아버지 품으로 돌아 오면 상처난 아들도 받아주시는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아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주신 분이었습니다(12). 소통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독재자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를 말살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둘째, 풍족하신 아버지입니다(17). 우리의 것을 빼앗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것으로 부자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언제나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20). 끝까지 기다리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넷째,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5)"
다섯째,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아버지입니다.(22-24)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고,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시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시고, 발에 신을 신기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 뿐 아니라 살진 송아지를 잡아 찬치를 베푸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고 완전히 삶의 질을 회복시키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리가 먼데도 보고 불쌍히 여깁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한 번도 잘못을 추궁하지 않습니다. 종들에게 좋은 옷을 가져다주고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며 즐거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가지 이유입니다.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죽은 아들 살아났기 때문입니다(24).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상처 투성이를 가지고 있어도 우리를 금은 보화를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편 16:3)"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은혜받은 가정은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을 만나 영적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 중에서는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처럼 세상에 참 자유와 행복이 있다고 하나님을 떠나버린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 자녀들이 하나님을 만나 영적 치유와 회복을 누리는 산실로 부모들이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상처가 보석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영혼이 잘 되어야 행복하고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3서 1장 2절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지옥같은 인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옥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가족이 지옥가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습니까? 한 아들이 죽어 지옥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만나지 말아야 될 부모를 만났습니다. 그 부모는 굉장히 부자였는데 아들을 지옥에서 만나니까 너무 안타까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따졌다고 합니다. “네 이놈아 내가 너 하나 호강시키고 잘 먹이고 잘 입혀 보려고 돈을 벌어서 너에게 다 투자를 했는데 그래 어디 올 데가 없어서 여기를 따라서 왔느냐?” 그랬더니 그 아들이 그 부모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차라리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물질을 많이 물려받지 않았다면 저는 여기 안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버지께 물질만 많이 물려받아서 세상을 허랑방탕하게 힘 안 들이고 살다가 지금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을 저는 몹시 후회합니다. 저는 아버님께 물질 많이 물려 받은 것 전혀 감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는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효도 중에 효도는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두 팔을 벌리고 돌아오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곪은 상처도 주님 앞에 나아가면 다 고침받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영적 치유>를 쓴 케이 아더(Kay Arthur)라는 분이 있습니다. 첫 남편은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리"라는 문구를 새겨 결혼반지를 해주었답니다. 결혼 생활 6년 만에 남편은 자신을 때렸다고 합니다. 축축한 코피가 입술로 흘러내릴 때 그는 남편에게 "이제 끝이에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은 자신이 맡기로 하고 별거했답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꿈은 결혼해서 자신의 부모님들처럼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답니다. 자신의 남편과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골프를 치며 행복하게 살 것으로 기대했답니다. 그러나 결혼 6년 만에 모든 꿈을 깨어지고 악몽으로 변해 버렸답니다. 별거할 때만 해도 그보다 더 큰 상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답니다. 남편은 전화를 걸어 정신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말하곤 했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녀가 남편에게 했던 그 끔찍한 말들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답니다. 가끔 전화해 남편은 자기가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그렇다면 가서 그렇게 하세요. 그래야 제가 당신 유산을 상속받지요!"라고 매몰차게 말했답니다. 남편의 상처는 전화를 걸 때마다, 편지를 보낼 때마다 더욱 깊어지는 것 같더니 결국 자살하고 말았답니다. 아내에게 받은 상처로 인생을 자살로 마감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상처를 주었고, 자신도 상처를 받았지만, 남편의 자살로 인한 상처, 남편과 별거로 인한 두 아들에게 준 상처, 그 후 계속 정결치 못한 삶으로 인해 아들들에게 주어진 상처를 주님 앞에서 치유받고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만나 쓰라린 상처를 깨끗이 치유받고 재혼한 남편과 함께 1970년에 프리셉트 국제본부를 창설했답니다. 케이는 삶을 위한 교훈들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명강사로 매일 라디오와 TV, 그리고 인터넷으로 8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처를 치유받은 그녀가 책에서 맨 처음 인용하는 구절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렘8:18,21-22)"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께 나오면 모든 상처를 치유해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족 식구들이 어떤 상처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 나오면 모두 상처를 깨끗하게 치유받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가정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하고 어떤 경우도 은혜받은 가정은 상처받은 자녀들이 돌아와 하나님을 만나 치유받고 회복받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른 나무처럼 시든 영적 상태입니까?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뭄으로 바닥 드러낸 논 같이 갈라진 영적 상태입니까?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마른 우물처럼 영적으로 메말라 바닥이 났습니까? 아픔이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쁨도 기쁨으로 느껴지지 않고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들어도 무감각한 상태에 있습니까?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 품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가정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아들은 집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 역시 탕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창기와 세리와 같이 식사한다고 비난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도 치유받아야 할 병이 들었습니다. 왜 병이 들었습니까? 29-30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서운한 감정으로 마음이 병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기대에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그러진 기대 때문에 마음이 병이 듭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자신에게 이렇게 대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지 못하고 마음이 병들면 첫째, 대인 관계의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상처가 치유받지 못하면 지나치게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태도와 또 지나치게 다른 사람을 의존하려는 태도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둘째,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결여된다고 합니다. 나는 별수 없어 실패한 인간이야라고 말하고, 매사 의욕이 상실된다고 합니다. 셋째, 삶에 대한 부정적인 말과 태도를 가진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다른 사람, 부모 혹은 세상의 모순 탓이라고 말하고 원망하고 분노한다고 합니다. 넷째, 우울증과 강박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한다고 합니다. 무기력, 신경쇠약,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상실한다고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과 진정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고 그 결과로 하나님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영적인 삶에 있어서 심한 굴곡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한때는 어떤 사람보다 신앙이 좋은 것같이 보이다 신앙이 곤두박질하면 교회를 등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도 서운한 감정을 집어 넣어 유혹했듯이 오늘날도 가정 식구들을 통해 이 무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유혹할 때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2,3)"라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동기는 작은 '서운함'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구절입니다. 선악과를 보면서 아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선악과를 주시지 않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게 맞나? 혹시 아까워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섭섭마귀에 걸리면 오늘날도 동산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그것 하나 안준다고 섭섭해 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축복에 서운함을 곱하게 하여 그때 그 작은 서운함을 사탄이 낚아 채어 문제를 키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내버립니다. 사단은 서운한 감정을 집어넣어 마음을 병들게 하고 관계를 망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해 버립니다.
서운한 감정은 첫째는 사랑과 관심을 받을 만한 상대에게서 그것들을 받기를 기대했는데, 충분히 받지 못했을 때 섭섭함을 느낍니다.
둘째는 서운한 감정은 어떤 노력과 수고, 희생과 헌신을 했는데, 충분한 칭찬과 보상을 받지 못했을 때, 섭섭함을 느낍니다. 셋째는 서운함은 서로 받아들이는 해석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서로의 진실한 마음과 상황을 이해 못해서 생길 경우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는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주신 분이시고(12). 아버지는 풍족하신 아버지이시며(17). 아버지는 언제나 기다리시는 아버지이며(20). 아버지는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인 것(22-24)을 모르니까 자신을 푸대접한다고 서운해하는 것입니다.
큰아들의 마음의 병, 마음의 상처를 아버지는 어떻게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십니까? 3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만 따돌려다고 서운해하는데,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소외시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을 위해 하루 잔치해 주는 것을 보며 너는 서운해하는데 너는 나와 항상 함께 하는 잔치에 있는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종으로 살았다고 하는데 너는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내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큰아들은 자신을 공평하게 취급해 주지 않았다고 서운해하는데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빼앗길까 봐 서운해하는 큰아들을 '얘(테크논)'라고 호칭하는 것은 아주 애정어린 호칭입니다. 아버지는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3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섭섭해하는 것보다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나나입니다. 큰아들이나 아버지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섭섭하기로 하면 큰아들보다 더 아버지가 서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재산 1/3을 나가서 탕진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나간 아들입니다. 가장 마음 아픈 사람은 큰아들보다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도 섭섭해하지 않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당위의 원리입니다. 형제관계, 부자 관계는 거래 관계가 아니라 한 몸이 된 사랑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손이 아프면 눈도 아픈 것이고 이가 시리면 위도 고달픈 것입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관계입니다.
왜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까? 죽었다고 생각한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잃었던 아들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고 서운한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모두가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은 동생을 어떻게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삼켜버린 아들입니다. 살진 송아지가 아니라 하인이 먹는 음식도 주기에 아까운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과분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충성스럽고 성실한 아들이지만 살진 송아지를 먹을만한 자격이 없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도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동생을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종도 당신의 동생이라고 말합니다(27). 아버지는 이 내 아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찾은 아들이라고 기뻐합니다(24). 그런데 3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나에게 손해를 주는 사람,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람,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불결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방인, 창기, 세리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방인과 창기와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고 기뻐하니까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이 큰아들은 29절에 아버지의 명을 어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랑의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서운해할 때는 자기는 완전한데 너는 왜 불완전하느냐라는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교만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하면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버립니다. 자기가 심판자가 되어 정죄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다말, 라합, 밧세바, 사마리아 여인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한 여인입니다. 라합은 기생이고 창녀입니다. 밧세바는 남편 몰래 왕과 잠자리를 한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다섯 번 갈아치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100%로 베푸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사랑하면 서운해할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받을 것을 상정해 놓고 베푸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사랑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돌려받기 위해 잘해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빌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빌려준 것을 돌려받아야 하므로 돌려주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식에게 해준 것은 그저 베픈 것입니다. 부모에게 해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아내에게, 남편에게 해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닙니다. 잘해 주지 않으면 손해를 볼 것같아 두려워서 한 것이 아닙니다. 잘해 주어도 못 해주어도 떠날 사람은 떠나는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나 부모 형제는 잘해주든 못 해주든 떠나는 관계가 아닙니다. 다 천국에 가서 살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로 한 가족된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가정은 바로 이렇게 상처난 마음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도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상처를 치유해주고 회복해 주는 데 쓰임 받아야 합니다.
성악가 서준호 씨에 대한 간증입니다. 2003년도,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목뼈가 부러져서 전신마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기적이 일어나면 휠체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니면 평생 침대에 누워있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정신은 맑은 데 목 아래 전신이 완전히 마비되었답니다. 자가호흡도 안 돼서 산소 호흡기를 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있는 부모님은 완전히 식물인간처럼 된 아들을 보며 절망하거나 왜 놀러 갔냐고 책망하기 보다는 위로하며 기도했답니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그를 보고 밝게 웃으면서 "중환자실은 영적 신학대학원이니 다 마치고 나와서 하나님 일을 더 열심히 하자."라고 격려했답니다. 그러나 상황은 변화되지 않았답니다. 몸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산소 호흡기를 너무 오래 끼고 있어서 부작용이 생겨서 폐가 까맣게 썩어가기 시작했답니다. 의사 선생님은 목에 구멍을 뚫어 기관 삽입술로 인공호흡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답니다. 문제는 그 수술을 하게 되면 성악가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답니다. 그래도 사는 것이 중요하니까 부모님은 눈물을 흘리며 그 수술에 동의하는 사인을 했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집에 와서 잠깐 잠에 들었는데 꿈을 꾸었답니다. 황무지에서 물이 샘솟듯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시겠구나."라고 기도 응답으로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다시 병원에 와서 선생님에게 말했답니다. "우리 아들, 이 수술 하지 않겠습니다." 그 후 썩어가던 폐가 깨끗해져 산소 호흡기를 빼고 후유증도 없이 자가호흡도 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일반 병실로 옮겨서 누워 믿음으로 선포의 기도를 했답니다. "나는 곧 일어날 것이다. 일어나서 내 다리는 움직이게 될 것이고 나는 활동하게 되어서 꿈에도 소원인 중앙 콩쿠르에 나가서 우승할 것이다. 1등 할 것이다." 부모님과 교회 성도님들은 열심히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에 잠이 깼는데 왼쪽 발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답니다. 바로 그때가 부모님이 특별 새벽 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하고 계실 때였답니다. 왼쪽 발가락 하나가 움직이는 것이 감사했답니다 그때로부터 몸이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며 날마다 기적이 일어났답니다. 잘해야 휠체어를 타고 아니면 평생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침대에서 살아야 할 것이라는 그가 100일 만에 걸어서 퇴원하는 기적이 일어났답니다. 13년 만에 중앙 콩쿠르에서 1등을 하였고, 카네기 홀에도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로 형제까지 정죄하며 상처 주는 가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운함으로 마음의 병을 가지고 유산 싸움하는 가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함께 즐거워할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타락했고 아무리 부족하고 아무리 볼품없고 아무리 가정에 망신시키는 아들이지만 그 아들 사랑해야 할 사람이고 함께 관계를 누려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서운하게 하는 남편도 하나밖에 없는 돕는 배필로서 남편이고, 아무리 서운하게 하는 자식도 내 몸같은 내 자식이며, 아무리 짐이 되는 부모가 있어도 나를 세상에 있게 해 주신 내 몸의 근원인 유일한 부모입니다. 서운한 대상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의 의무를 가져야 하는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를 찾아 치유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양 백마리 가운데 하나만 잃어도 그것을 찾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열 드라크마 중에 하나만 잃어도 찾으러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두 아들 중 하나만 잃어도 찾아 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고 우리 교회 설립 26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숙한 성도,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아름다운 세상”이란 모토를 실천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가정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치유와 회복의 산실이 되시길 바랍니다. 32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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