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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적 수치심 치유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193 추천수:3 220.120.123.244
2021-06-20 12:32:53

파괴적 수치심 치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하철 전동차의 경로석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할아버지가 타는 것을 보고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답니다. 깐깐하게 생긴 할아버지는 아가씨의 어깨를 흔들면서 말했답니다. '아가씨, 여기는 노약자와 장애인 지정석이라는 거 몰라?' 그러자 아가씨는 '돈 내고 탔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할아버지가 '여긴 돈 안 내고 타는 사람이 앉는 자리야!'라고 말했답니다. 갈수록 부끄러운 형태는 늘어나는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도덕 불감증은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 수치심의 유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의 결과로 생기는 수치심입니다. 둘째는 타인의 범죄의 대상 또는 희생물이 된 결과로 생기게 된 수치심입니다. 성폭행을 당한 수치심과 같은 것입니다. 잘못을 했을 때 감정으로써 건강한 수치심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건강한 인간 삶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도 복입니다.

사람은 잘못했을 때 자연스럽게 느끼는 수치심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집단의 요구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수치심은 도덕적 규범에 민감성을 갖게 하고 공유 가치를 존중하게 합니다. 수치심을 모르고 과도하게 무감각해지면 사이코패스가 됩니다. 죄책감, 양심이 결여되어지고, 감정이 무뎌져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런 인간들을 향해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병적인 수치심입니다. 정체성으로서의 해로운 수치심입니다. 어떤 수치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수치스런 존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수치심 경험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변하여 수치적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경우입니다. 더 이상 감정적인 수치심이 아니라 정체성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성폭행을 당하면 평생 성폭행당한 수치심으로 정상적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수치적 경험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것입니다. 개인의 기본적 본질로써 확장하여 수치심의 안경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가집니다. 이런 수치심의 노예가 되면 대인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희생하거나 상대방을 희생시킵니다. 

수치를 방어하고 숨기려고만 합니다. 자기 경멸을 합니다. 완벽주의자가 됩니다. 자기 소외와 고립을 만들어 세상으로 도피합니다. 우울증, 인격 장애, 감정 장애, 편집증에 사로잡힙니다. 수치와 오욕스런 경험들을 혼자만 간직하며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자신이 만들어낸 가면 뒤에 숨기도 하며 체면을 중시하며 역설적으로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로 치장을 합니다. 그러나 내면은 항상 공허하고 수치심의 노예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런 수치심의 예로부터 벗어나려면 첫째 어떤 수치스런 과거가 있다하여도 자신을 수치스런 존재가 아니라 가치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수치의 경험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치 경험을 곧 자신이라고 생각해 버려 자신의 수치가 자기의 정체감이 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수치스런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둘째는 수치스런 경험이 있으면 고립하고 숨기며 위장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다 털어 놓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수치심이 있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최대한 숨기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진실성과 진지성이 없어집니다. 자신을 과대 포장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올무가 되어 평생 수치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둔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수치스런 부분을 주님께 솔직히 털어 놓고 자유함을 누리는 것처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치의 경험은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수치의 경험이 거침돌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디딤돌로 만들어야 합니다. 수치스런 경험이 평생 수치의 늪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지만 평생 수치심의 종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나단 선지 앞에서 깨끗이 회개하고 성군으로 거듭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숭배하며 우상장사의 아들로 살았지만 수치스런 과거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과거 사기꾼이고 욕심 쟁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과거 살인자, 도망자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 자랑스러운 민족 지도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수치심을 삶의 유익을 위한 에너지로 활용했습니다. 수치심을 파괴적인 힘으로 발산할 것이냐 창조적인 힘으로 발산할 것이냐는 자신의 결정에 있습니다. 수치심은 도피하면 도피처를 찾게 되고 그 도피처가 중독의 온상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34:5)”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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