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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용서의 산실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435 추천수:1 220.120.123.244
2020-05-17 09:25:28

가정, 용서의 산실

부부가 한 팀이 돼 단어 맞추기를 하는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시골 한 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출연했습니다. 부부가 한 팀 되어 손짓과 몸짓으로 단어 알아맞히기를 하는 게임이었습니다. 두 번째 팀의 출제 단어는 "천생연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짓과 몸짓으로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할머니는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답답한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당신과 나 사이"라고 말하자 할머니 가까스로 알아차리고 "웬수"라고 말했습니다. 황당한 할아버지가 "그게 아니고, 네 글자, 네 마디로…"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크게 "평생 웬수"라고 했습니다.

가정은 부부로 시작하는 삶의 뿌리입니다. 서로 사랑해서 가정을 이루지만 어느 순간 배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지해 주는 내 편이 아니라 나에게 집안일로 육아로, 경제적 문제로, 정서적 문제로 모든 짐을 다 뒤집어 씌우는 평생 웬수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가족과 나 사이 20cm, 친구와 나 사이 46cm, 회사 사람과 나 사이 1.2m라고 합니다. 가족은 인생살이 중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이입니다. 가족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고슴도치처럼 서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서로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면 선인장처럼 평생 가시를 달고 누구도 가까이 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가정은 한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단위이고, 가족은 사람이 태어나 죽기까지 마음에 자리잡은 정신적 고향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이지만 가족끼리 갈등이 많고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축 처진 아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어야 할 부모는 자식에게 무거운 상처를 안겨주고, 지친 배우자에게 안식처가 되어야 할 부부는 서로에게 비수를 품게 해주기도 합니다. 부모에게 기쁨을 주어야 할 자식은 부모에게 무거운 짐만 안겨 평생 상처를 안겨줄 수 있습니다. 가정이 행복 발전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방전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오면 잔소리가 쏟아지고, 가족 식구들의 연약함을 감싸주고 덮어 주기 보다는 서로 허물과 잘못을 드러내어 비난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가족은 숨통이 막히는 집을 피해 가출하고 외도하기도 하고 가정은 아름다운 추억의 박물관이 아니라 상처의 온상이 되어 버립니다.

완벽한 가정은 세상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 바꾸어 가며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며 크고 작은 상처와 아픔을 남겨줍니다. 상처와 아픔을 품은 가족은 분노와 서운함, 억울함, 수치, 두려움, 피해의식 등이 무의식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게 됩니다. 오랜 기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무늬는 가족이지만 상처를 준 가족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가족 식구를 용서하지 못하면 마음의 평강과 안정은 외출을 하게 되고, 분노로 괴로워하거나, 복수를 위해 고민하며 한평생 원수처럼 지내게 됩니다. 가족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면 결국 쥐약은 자기가 먹고 가족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마음은 병들어 평안과 기쁨은 없어지고, 육신적으로도 분노가 지배하면 신경통과 위계양 등 심각한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를 통해 누리는 삶의 축복도 없어집니다.

프레드러스킨(Pred Ruskin) 박사는 <용서>라는 책에서 “사람은 용서할 때 스트레스와 분노가 감소하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여 건강하고 행복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탈무드는 “당신이 남에게 복수하면 그 기쁨은 잠깐이지만 당신이 남을 용서하면 그 기쁨은 영원하다”라고 말합니다. 용서는 불행한 삶의 올무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사람은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독한 화살을 맞고 신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은 용서의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이어령 교수는 "삭막한 세상에 가족적이란 말처럼 정다운 것은 다시 없다. 잘못이 있어도, 서운한 일이 있어도, 한 울타리 안에서 한 핏줄을 나눈 가족끼리는 모든 것이 애정의 이름으로 용서된다."라고 했습니다. 가정은 용서의 산실로 위로와 격려가 있는 곳, 치유와 회복이 있는 곳, 행복 발전도, 에너지 충전소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집 떠난 탕자를 용서하는 아버지를 통해 용서의 산실이 되어야 할 가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들로부터 인신매매를 당했지만 형들을 용서하는 요셉의 가정을 통해 용서의 산실이 되어야 할 가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가족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었습니다. 부부간의 정, 부자간의 정은 어떤 걸림돌로 녹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과오를 들추어 내며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상처로 인한 거리감을 없앰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하며 용서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의 자녀까지 양육하며 관계를 완전히 회복시킴으로 용서했습니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줄까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라고 했습니다.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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