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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071 추천수:2 220.120.123.244
2019-05-19 04:28:27

사진 한 장

 

일곱 살 때 어머니는 사진 한 장을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아버지는 빈 어머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우리 남매를 최선을 다해 길렀다. 그때는 몰랐지만 외롭고 힘겨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가지 않던 교회에 가서 기도했다. 질병의 고통 가운데서 어머니는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정성이 부족했나 어머니는 하늘나라에 갔고, 사진 한 장만 내 품에 남아 있다. 어머니가 떠난 후 아버지는 어머니 일까지 다했다. 일요일이면 어머니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예배당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예배를 드렸다. 나는 어머니도 살려 주지 않은 하나님이 싫어 예배당에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교회에 갔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집에 와 보니 낯선 여인이 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었다. 이때부터 집은 지옥같이 변했다. 아버지는 새엄마라 소개하며 앞으로 엄마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우리 남매는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가짜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진짜 엄마는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버릴 것 같았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새엄마는 늘 웃으며 우리들에게 잘 해 주었다.

나는 더 잘해주는 것이 위선같아 더 가증스럽고 미워 말했다. “아줌마, 왜 우리 집에 왔어요. 아줌만 없어도 우리 행복해요. 아줌마 집에 가세요.” 새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 엄마라고 하지 않아도 돼. 너희 편한대로 불러. 너희 엄마의 부탁을 받고 너희 집에 온 거야.” “엄마가 하늘나라에 가셨는데, 무슨 부탁을 해요. 가세요. 우린 아줌마가 싫어요.” 아버지는 끝까지 엄마라고 부르지 않자 한 번도 하시지 않던 매타작을 시작했다. “엄마라고 불러. 왜 못 부르는 거야. 낳아주신 엄마도 엄마지만 길러주신 엄마도 엄만거야.” 동생은 아빠의 매타작을 견디지 못해 어색하게 ‘엄마’라고 쥐구멍찾은 목소리를 내었지만 나는 끝까지 새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종아리의 피자국처럼 새엄마에 대한 적개심은 선명해졌다. 아빠와 엄마 호칭 문제로 다툰 어느 날 학교에 갔다가 오니 내 책상에 있던 엄마의 사진이 없어졌다. “아줌마, 책상이 위에 있는 엄마 사진 누가 가져갔어요. 아줌마가 치웠어요.” 앙칼진 목소리로 새엄마에게 따졌다. 새엄마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저녁에 아버지에게 따졌다. “아빠, 아빠가 엄마 사진 가져갔지.” “그래, 내가 가져갔다. 너 엄마 세상 떠난 지 얼마 되었느냐? 이제 잊어. 너 그 사진 때문에 새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있지?” 사진을 달라고 애원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사진을 주지 않고 이제 잊으라고 했다. 이제 엄마는 이 땅에 없으니 나의 인생을 살라고 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새엄마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불탔다. 모든 것이 새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없을 때는 새엄마와 집에서 같이 밥을 먹지 않았다. 일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풍 가는 날이었다. 소풍 간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모두 점심을 먹는데 나는 혼자 계곡에서 서성이었다. 그런데 저만치 새엄마가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 반 친구 엄마들에게 소풍 갔다는 소식을 듣고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 “소풍 간다는 말을 해야지. 왜 도시락도 싸가지 않고 어쩌려고. 이것 먹어.”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시락을 풀어 땅에 엎어 버렸다. 새엄마에 대한 미움으로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원했다. 대학에 들어가려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새엄마를 떠나기 위해 산업체 학교를 택했다. 집을 떠나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새엄마와 하루라도 같이 있기 싫었고 집을 떠나면 다시는 집에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네 엄마가 나에게 부탁했다. 너 대학에 진학시키고 훌륭한 사람 만들어 달라고” 새엄마는 애원했지만 나는 그 말이 들여오지 않았다. “뭐, 우리 엄마가 부탁해요. 거짓말 말아요. 내 일에 참견 말아요. 아줌마가 뭔데 내 일에 참견해요.”

결국 내 고집대로 짐을 챙겨 산업체 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다시는 새엄마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교 생활에 적응할 무렵 옷 가방을 정리하였다. 트렁크 가방 아래에 내가 넣어 놓지 않은 포장된 비닐봉지가 있었다. 봉지에는 속옷과 편지, 어머니 사진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가져간 어머니의 사진의 사진을 새엄마가 넣어놓았다. 편지를 잃어 보았다. “... 너의 엄마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너희 엄마와 함께 해수욕장에 갔을 때 나를 죽음에서 살려준 사람이 너희 엄마다... 엄마 유언으로 나에게 너희 아빠와 너희들을 부탁했다. 나는 너희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 아이도 낳지 않고 너희 아버지를 너희 어머니처럼 사랑해주고 너희들만 잘 기르려고 너희 집에 들어온거다...” 새엄마의 편지를 보고 엉엉 울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처음 울고 또 울었다. 집을 떠난 후 처음으로 집을 찾아갔다. 그 날 밤새 눈이 내려는데 집 앞까지 눈이 쓸려 있었다. 쓸린 눈 길 맨 끝에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그동안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엄마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놓고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따뜻한 두 팔로 나를 감싸 안아 주었다.

섬기는 언어(하늘바구니 콩트 중에서)/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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